이승만 포럼 - 휴전회담과 이승만
주제; 휴전회담과 이승만
발표자; 정 일 화 (한미안보연구회 이사)
1. 세계역사상 전쟁강도가 가장 높은 전쟁
전쟁은 마무리가 중요하다.
한국전쟁은 세계최대군사국가인 소련 중국 그리고 미국을 비롯한 유엔16개국이 벌인 거대한 전쟁이었고 낙동강에서 압록강까지 전선이 오르락 내리락하면서 엄청난 무력이 맞부딪쳐 세계전쟁사상 전쟁강도(war intensity)가 가장 높은 전쟁이 되었지만, 휴전회담 마무리를 통해 적어도 지난 60년간 그런 대규모전쟁을 방지했고 대한민국은 자유민주국가로서 세계 10대국에 들어가는 경제대국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휴전회담에서 이승만 정부는 이런 방향을 설정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미미한 신생국으로 출발하여 곧장 거대한 전쟁에 휘말린 대한민국이
소련 중국 미국을 비롯한 유엔군이 무대를 장악한 한반도에서
주권자로서 국제정치 행위주체가 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이승만 정부는 온 세계가 쳐다보는 휴전회담 무대에서 당당한 국제정치의 행위자로서 대한민국이 바라는 휴전회담 장치를 충분히 끌어내는데 성공했다.
대한민국 주권의 적극적 역할이 세계적으로 인정되었다.
전쟁의 시작과 경과는 참으로 비참했다.
한국전쟁은 3년1개월 동안 소련 중국 미국 북한 남한, 그리고 유엔참전국 16개국을 비롯해 세계 30여 개국이 2차대전 때 쓰던 강력한 최신무기와 연 병력 1천2백만 명이 동원되어 싸운 거대한 국제 전쟁이었다.
너무 어마어마한 전쟁이어서 싸움터에 있던 대부분의 군인들조차도 도대체 이 전쟁이 어디서 시작되어 어떻게 진행되고 있으며 어떻게 마무리가 되어가는 지를 가늠하지 못했다.
하늘 위를 날아가는 B29 하늘의 요새, F86 세이버 제트기, 소련 최신전투기 Mig15, F51 머스탱 전투기들의 날카로운 폭음과, 동서해 해상에 떠있는 어마어마한 항공모함의 위용을 그저 바라볼 뿐이었다.
전쟁 3년1개월 동안 한반도상에는 하루 평균 1천4백대의 전폭기들이 출격 대기상태를 유지하면서 1천회 이상의 근접항공지원(close air support), 후방차단(interdiction), 공중정찰(air reconnaissance)을 위해 쉴 새 없이 폭탄을 퍼부었다.
전쟁 초기 공군기들은 일본 이타스케 공군기지나 오키나와 같은 먼 곳에서 날아와 주로 전술폭격을 하고 돌아 갔고 동서해에 떠있는 해군 항공모함 함재기들은 후방차단과 함께 전선이 보이는 대로 근접지원전에 뛰어들어 인민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전선이 안정되면서부터는 공군은 대구, 수원, 김포, 강릉의 전선 가까운 비행장에서 떴다. 함재기들은 여전히 동해의 원산, 성진
앞 바다나 서해의 진남포, 안주 가까이 까지 깊숙이 들어가 후방차단을 위한 엄청난 공격을 퍼부었다.
해군의 역할은 눈부셨다. 전쟁 3년 동안 한반도해안 3면을 완전장악하고 있으면서 함재기와 함포들은 북한 깊숙이까지 폭탄과 포탄을 퍼부었다.
2. 거대한 미 해군의 역할
이 전쟁의 승패는 중국, 소련 국경을 얼마나 잘 봉쇄하느냐에 달려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전선이 남쪽으로 죽 내려와 있을 때도 항공모함은 북한영해 깊숙이 들어가 국경을 통해 넘어오는 보급차량과 기차, 그리고보급 노선에 대한 무자비한 공격을 계속했다.
해군 함재기들은 1950년 7월 첫 주부터 일찌감치 원산의 대규모 정유공장을 폭격하여 남침하는 탱크나 트럭에 쓸 휘발유 저장고를 불바다로 만들었다. 불길이 3일이나 시꺼먼 연기를 내면서 타올랐다.
한국전에 미군기들이 북한군에게 퍼부은 폭탄의 양은 2차대전 때 연합군이 유럽전선에 투입한 양에 맞먹는 1백10만톤이었다.
북한은 유엔군 전폭기를 맞아 싸울만한 공군력은 없었기 때문에 이렇다할 공중전을 벌일 수 없었으나 대공포망을 늘리고 뒤에는 소련제 최신전투기 Mig15를 띠워 악착같이 대항했기 때문에 피해도 컸다.
한국전에서 떨어진 유엔군 전폭기는 2천여 대(미군기만 1986대)에 이른다.
초기 전황이 너무 급했다. 북한인민군은 최신 소련제탱크 T34-81 2백50대를 동원해 소총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민병대 수준의 대한민국 국군을 사정없이 밀어 제쳤다.
세계전사에 유례없는 수도서울이 3일 만에 적의 손에 넘어갔다.
유엔결의에 의해, 유엔 선거감시단에 의해 나라가 섰고 또 유엔이 한반도 유일의 합법정부로 인정한 대한민국의 운명이 시간을 다투면서 깜박거리기 시작하자 유엔은 긴급이사회를 두 번이나 연거푸 열고 미국을 중심으로 유엔군사령부를 구성하여 이 침략자를 물리칠 것을 결의했다.
미국은 2차 대전의 승자였고 세계최대의 군사강국이었지만 워싱턴에서 6천마일이나 떨어져 있는 한국에서 전쟁을 벌인다는 것이 여간 까다롭지가 않았다.
동경의 맥아더사령부에 명령을 내렸다. 맥아더는 동원할 수 있는 공군 지상군을 서둘러 한반도 싸움터로 내보냈다. 해군의 거대한 태평양사령부도 7함대를 동원해 급히 한반도로 파견했다.
한국에 급파된 미 지상군은 7월 5일 북한 침략군과의 오산 죽미령고개에서 첫 전투를 벌였으나 형편없이 깨졌다.
5백 명 전투력이 몰사했다는 보도가 AP통신을 타고 온 세계에 전파되었다.
사실은 절반이 희생되었지만 통신망를 상실한 채 뿔뿔이 헤어지는 바람에 전부대가 전사했다고 보도되었다.
워싱턴은 놀랐고 전세계에 비상벨이 울렸다.
미군은 이어 평택에서도 터지고 금강전투에서도 지고 대전에서도 사단장이 포로가 되고 무참하게 패배하는 고배를 마셨다.
공군기가 윙윙 날아갔으나 도무지 어디를 어떻게 때려야 할지를 몰랐다.
미7함대도 마찬가지였다. 거대한 함포를 쏘고 항공모함의 함재기를 새까맣게 띄웠으나 표적을 쉽게 찾을 수가 없었다.
한국군은 미군기를 유도할 정찰기도 없었으며 요즘 같은 전투요격관제체제나 전방항공 통제 장교(FAC)가 없었다.
공군기와 해군기의 상호연락도 되지 않아 처음 얼마간은 여간 어렵지 않았다.
8군사령관 워커 중장은 낙동강전선에 방어선을 치고 이곳에서 “버티든지 죽든지 하라”(Stand or Die)는 모진 작전명령을 내렸다.
낙동강 6백리가 피로 물들었다.
한국군은 낙동강전선쯤에 와서야 겨우 대오를 수습하고 질서 있는 전투를 하게 되었지만, 미군의 강력한 공중지원과 화력지원으로 겨우 버틸 뿐이었다.
낙동강 전선이 안정되자 맥아더는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후방을 성공적으로 차단함으로써 인민군은 독안에 든 쥐가 되었다.
인민군의 패주가 계속되었다.
38선을 넘어 평양을 뺏기고 평안도, 함경도의 대부분이 유엔군의 손안에 들어왔다.
통일이 눈앞에 들어오고 있었다.
3. 중공군은 한국군 지역을 골라 뚫었다
중공군 1백만이 들어오면서 다시 전쟁은 새로운 전쟁이 되었다.(1일 평균전력, 최고일 때는 1백40만 운용) 팽더화이(팽덕회)는 비행기도 없고대포 숫자도 신통찮은 게릴라부대 같은 대군을 끌고 왔다.
지원군을 기다리던 김일성도 이것 갖고 거대한 미군을 맞아 승리할 수 있겠습니까 하는 의문을 나타냈다.
수류탄과 소총으로 무장한 중공군이 하늘과 바다, 그리고 전투 현장에서 비행기, 함포, 대포가 퍼붓는 엄청난 화력을 어떻게 감당하겠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막상 전투가 붙었을 때 유엔군은 참패했다.
한밤중에 피리를 불고 꽹과리를 치며 달려드는 중공군 인해전술 앞에 거대한 화력은 맥을 못 쓰고 무너져 내려갔다.
서울을 다시 뺏기고 오산, 평택까지 유엔군은 후퇴했다.
낮에는 나무숲이나 동굴 안에서 자고 밤중에 일어나 6대 1의 월등한 인원으로 달려드는 자살 특공대 공격을 미군은 한 번도 당해 본 일이 없었다.
맥아더는 중공군의 후방기지인 만주를 폭격해야 한다면서 강력하게
만주 폭격권을 줄 것을 워싱턴에 요청했으나 트루먼 정부는 만주
폭격권 대신 수류탄을 양어깨에 걸머지고 다니는 전선지휘관 스타일의 리지웨이를 8군사령관으로 보냈다.
중공군이 유엔군을 평택선-속초선까지 밀어붙였다.
중공군 개입 이후 전선이 무너지는 형편은 늘 한국군 지역이 먼저였다. 초기 탱크로 무장한 인민군이 38선을 넘어올 때처럼 중공군은 한국군 지역을 행해 무자비하게 밀어붙였고, 한국군은 그때마다 전선에 커다란 구멍을 내게 했다.
중공군은 한국군이 내어준 이 구멍을 통해 대거 후방으로 침투하여 미군부대를 후방과 측방에서 동시 공격하여 낭패케 했다.
한국군은 중공군의 밥이었고 미군의 짐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