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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옷을 숭상한 우리 조상들

대한인 2013. 4. 21. 11:27

색옷과 흰옷

우리 민족은 먼 옛날부터 흰옷을 즐겨 입었기에 백의민족(白衣民族)이라고 불렸다.

하지만 고구려 고분벽화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대개 화려한 색옷을 입었다.

우리 조상들은 어떤 색옷을 입었고, 왜 백의민족이 된 것일까?

흰옷을 숭상한 우리 조상들

백성들이 즐겨입었던 모시(왼쪽)와 삼베(오른쪽).

식물에서 추출한 섬유로 여름철 옷감으로 널리 쓰였다.

[국립과천과학관 전시품].

19세기 말 조선을 방문한 다수의 서양 사람들은

조선 사람들이 흰옷을 주로 입고 있는 것에 놀라워했다.

여인들이 냇가에 모여앉아 무명으로 만든 옷을 눈부시도록

희게 빨고 있는 모습을 본 [아리랑: song of arirang]의

저자 님 웨일스(1907〜1997)는 이상주의와 순교자의 민족이 아니라면

이처럼 깨끗한 청결을 위해 그토록 힘든 운동을 감내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일본 사람들은 조선 사람들이 흰옷을 입는 것을 가리켜 상복(喪服)을 입는

것이라는 등 좋지 않은 쪽으로 해석하고, 1906년 흰옷 입는 것을 법으로 금지시켰다.

이후 일본인들을 계속해서 조선 사람들이 흰옷을 입는 것을 금지시키려고

법과 언론을 동원하기도 했으나, 큰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

우리 민족의 흰옷에 대한 선호는 일시적인 유행이 아니었다.

진(晉)나라의 진수(陳壽, 233∼297)가 편찬한 [삼국지(三國志)] 〈부여(夫餘)〉조에는 “부여 사람들은 국내에 있을 때의 의복은 흰색을 숭상하며, 흰 포목으로 만든 소매가 넓은 도포와 바지를 입는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수서(隋書)] 〈신라(新羅)〉조에는 “신라 사람들은 의복의 흰 빛을 숭상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송사(宋史)] 〈고려(高麗)>전에는 1014년 고려 사신 곽원(郭元)이

“고려에서는 남자와 여자(士女)의 옷으로 백색을 숭상한다.”고 말한 기록이 등장한다. 1123년 고려를 방문한 서긍은 [고려도경(高麗圖經)] 에서

“고려왕은 평상시 쉴 때에 검은 모자에 흰 모시(白紵) 도포를 입으므로

백성과 다를 바 없다 한다.”고 기록하고 있어, 고려시대에도 임금부터

백성들까지 모두 흰옷을 선호했음을 알 수 있다.

백성의 옷, 흰옷을 입지 마라

누에고치에서 실을 뽑아 만든 명주는

가장 대표적인 견직물이었다.

목화솜에서 뽑은 무명은 본디 하얗다.

[삼국유사] 〈탈해왕〉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해진다.

탈해가 동악(東岳)에 올랐다가 내려오는 길에 백의(白衣)를 시켜

물을 떠오게 하였는데, 백의는 물을 떠서 가지고 오다가 중도에서

자기가 먼저 마시고 탈해에게 올리려고 하였다.

그런데 물그릇 한쪽에 입이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탈해가 이를 꾸짖자 백의가 잘못을 뉘우친다는 이야기이다.

여기서 백의는 신분이 낮은 자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볼 수 있다.

흰옷은 평민들의 옷이기에, [삼국유사]에서는 흰옷으로 평민을 표현한 것이다.

흰옷은 색옷에 비해 염색할 필요가 없다는 장점이 있다.

그런데 1275년 고려에서는 사람들이 흰 모시로 등거리를 많이 해 입으니,

이를 금하자는 상소가 올라오고 충렬왕(忠烈王, 재위: 1236~1308)이 이를

허락하는 일이 생긴다. 동양인의 우주관에 절대적인 영향을 준 음양오행(陰陽五行)

설에 따르면, 동쪽은 푸른색, 남쪽은 붉은색, 서쪽은 흰색, 북쪽은 검은색,

중앙은 황색이 각 방위의 색이 된다. 고려는 동방에 위치하므로 푸른색을 숭상해야

하는데, 서쪽을 지칭하는 색인 흰색을 숭상하는 것은 서쪽 나라에게 구속받을 것을

의미하니, 흰색을 금하자는 것이었다.

이후 고려에서는 1357년과 1382년에 같은 이유로 흰옷을 금지하는 조치가 나왔다.

조선에서는 1398년 이후 1792년까지 23회에 걸쳐 흰옷을 금지하는 조치가 내려진다. 방위색에 어긋날 뿐 아니라, 흰옷이 상복(喪服)이기 때문에 금지하자는 주장이었다.

흰옷 금지에 대한 반대

하지만 무조건 흰옷을 금지하는 것은 문제가 많았다.

눌재(訥齋) 양성지(梁誠之)는 1471년 왕에게 상소를 올리면서

의복의 빛깔을 정하는 문제를 거론했다.

“단군조선 이후로 우리가 흰옷을 입었음에도 천년, 오백 년의 긴 역사를

가진 나라들이 많았는데, 흰옷이나 회색옷을 입는다고 나라가 망한다는

것은 요망한 말입니다. 오행의 논리로 말한다면 중국 사람들도 푸른 옷을

입지 않은 것이 오래되었으니, 우리도 회색이나 백색을 금지하지 말고

임의로 입게 하소서. 요즈음 회색과 백색 옷을 금지시킨 후, 공경대부에서

군인, 장사치, 천인, 노예에 이르기까지 모두 황토색 옷을 입게 되어 상하의

구별이 없으니, 이제부터 옷의 빛깔을 정해 높고 낮음을 구별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는 오행론에 따라 맹목적으로 흰옷을 금지하는 것은 잘못임을 지적하였다.

가난 때문에 흰옷을 입은 것은 아니다

성현(成俔, 1439〜1504)의 [용재총화(慵齋叢話)]에 따르면,

그가 살았던 15세기 말에는 물가가 크게 올랐는데,

특히 염색하는 집에서 값을 크게 올려서 일반 사람들은 그 가격을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가 되었지만, 도리어 부자들은 사치를 일삼아 값을 다투지 않아

염색하는 값만 더 올랐다고 하였다.

이익(李瀷, 1681〜1763)이 [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

“옷 한 벌을 염색하려면 그 남(藍)을 심는 밭이 네 식구가 한 달 먹을 곡식이

나는 땅을 버리는 것이 되니, 국내 전체를 계산한다면 손실이 매우 많다.”고

했을 정도로 염색은 비용이 든다. 때문에 너무 가난하다면,

염색 옷을 입기가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던 조선의 사대부들도 흰옷을 즐겨 입었고,

고려시대의 임금들도 평상복으로 흰옷을 즐겨 입었다.

[고려사]의 1253년 기록에는 백은(白銀) 1근을 갖고도

20승(升- 피륙의 날을 세는 단위) 백저포(白紵袍) 1필을

바꾸기가 쉽지 않았다고 하였다. 비록 이 기록이 특별한 상황을

전한 것이기는 하지만, 흰옷 가운데 값비싼 옷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흰옷이라고 해서 저렴한 것만은 아니었다.

가난한 천민이나 노비들도 황색, 청색 등 염색한 옷을 입었다.

가난했기 때문에 우리 조상들이 흰옷을 즐겨 입게 된 것이 아니라,

흰옷 자체를 좋아했기 때문에 입은 것이었다.

다양한 색옷을 입은 조상들

그렇다고 염색 기술이 부족했기 때문에 흰옷만을 입은 것도 아니었다.

[삼국지] 〈부여〉조에는 부여 사람들이 외국에 나갈 때에 실크, 모직,

가죽으로 만든 옷과 금은으로 장식한 모자 등을 입고 화려한 복장을 했다고 하였다. 고구려도 마찬가지여서, 왕의 복식에는 오색찬란한 색상의 견직물(silk)을 사용했다. 자줏빛 바탕에 무늬가 있는 직물은 가장 귀한 자들이 사용했으며, 귀족들의 경우에도 자주색, 적색, 청색, 황색 등 다양한 색옷을 입었다.

고구려의 수출품이기도 한 금수(錦繡)는 수가 새겨진 실크로, 중국인들이 그린

고구려 사신 그림에서도 화려하게 수가 새겨진 실크 옷을 입은 모습을 볼 수가 있다.

7세기 당나라를 방문한 사신의 그림을 그 린 왕희도에 그려진 고구려 사신의 모습

(왼쪽에서 두번째). 다채로운 실크옷에 화려한 문양이 새겨져 있어, 주변국에 비해 고구려의 염색 문화가 발전했음을 알게 해준다.

안악 3호분 부인의 의복. 복잡한 문양이 세밀하게 표현되어 있다. 이는 얇은 견직물에 선명한 색실을 이용해 자수를 놓은 것으로, 당시의 염색 기술을 엿볼 수 있게 한다.

고구려 고분벽화에는 귀족들뿐만 아니라, 신선, 도사, 군인,

예술가, 기술자, 일반 서민과 노비까지 다양한 신분과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등장한다. 그런데 평민이나

노비의 경우에도 무늬가 들어간 색옷을 입었다.

흰옷을 입었다고 볼 수 있는 사람은 안악 3호분 벽화에

등장하는 음식을 만드는 여자 노비 정도에 불과하다.

염색기법과 염료

특히 신분이 낮은 문지기나 노비의 의복에도 점무늬 등

문양이 들어간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문양은 인화판을

사용해 도장 찍듯이 문양을 찍어내는 방법으로 염색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는 염색이 매우 대중화되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오색찬란한 실크나, 오색금(五色錦), 운포금(雲布錦), 자지힐문금(紫地纈紋錦)등

삼국시대에 사용되고 수출된 고급 견직물 옷감에는 먼저 실을 염액에 담가 염색한

후 직물을 짜는 방법, 밀납을 이용해 염색하는 납힐염(蠟纈染) 등

다양한 염색 방법이 사용되었다.

삼국시대 의복에 사용된 붉은색, 보라색, 갈색, 노랑색 등

다채로운 색을 내는 염료로는 단사(丹沙), 황토(黃土), 갈토(褐土) 등의

광물과 녹청(綠靑), 호분(胡粉) 등의 화합물, 홍화(紅花), 자초(紫草),

소방목(蘇方木), 옻(漆) 등의 식물성 염료가 사용되었다.

노란색을 내는 치자염색.

붉은 빛을 내는 홍화염색.

푸른 빛을 내는 쪽염색.

신라에서는 염궁(染宮), 홍전(紅典), 소방전(蘇芳典), 찬염전(攢染典) 등의

염색을 전담하는 전문 수공업 공장에, 모(母)라 불리는 전문기술을 가진

여성들(염궁 11인, 기타 각 6인)이 일을 할 만큼, 염색이 전문화 되었다.

1103년 고려를 방문한 송나라 사람 손목(孫穆)이 쓴 [계림지(鷄林志)]에서

“고려에서는 염색을 잘하는데, 홍색과 자색이 더욱 묘하고,

자초의 굵은 뿌리로 즙을 짜서 비단을 물들이면 매우 아름답다”고 한 것을 볼 때,

고려시대에는 염색기술이 더욱 발전했음을 알 수 있다.

신분의 상징 색옷

인간은 직물을 만들기 이전부터 주술(呪術)적 목적, 사물의 구분, 미적인 표현 등을

위해 색을 칠하기 시작했다. 옷은 입게 된 후에도 신분이나 직업을 구별하거나,

멋을 내기 위해, 세균 방지 등의 이유로 염료를 이용한 염색을 하게 되었다.

염료 가운데는 세균을 방지하거나 약효를 갖는 것도 많다.

삼국시대에는 관등과 신분에 따라 옷색을 다르게 했다.

고구려의 경우는 왕은 흰 실크로 만든 모자(白羅冠),

그 다음은 푸른 실크로 만든 모자(靑羅冠), 그 다음은 붉은 실크로 만든

모자(緋羅冠)를 썼다. 신라의 경우 진골이 차지하는 5위 이상 관등의

옷 색깔은 자주색(紫), 9위 이상은 붉은색(緋), 11위 이상은 청색(靑),

17위 이상은 황색(黃)을 사용했다. 백제도 자주색, 붉은색, 청색을, 발해는

자주색, 붉은색, 녹색으로 관등에 따라 옷 색깔에 차별을 두었다.

옷 색깔을 통해 신분의 높낮이를 구분함으로써, 질서를 확립하고자 했던 것이다.

가장 고귀한 색은 자주색인데, 자주색은 안료를 구하기가 어려운 탓에 귀하고

값이 비쌌다. 반면 황색은 삼국시대에는 귀한 색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런데 황색(특히 자황색)이 7세기 당나라 이후 중국 황제의 일상복의 색으로

채택되었다. 648년 신라에서 당나라 관리의 복식 제도를 받아들이면서,

황색에 대한 관념이 변하기 시작했다.

834년 흥덕왕(興德王)은 복식금제령(服飾禁制令)을 발표하면서

진골 여성부터 일반인에 이르기까지 모두 자황색(赭黃色- 붉은 빛이 나는 노란색)을 금하게 했다. 이는 신라 왕실에서 자황색 옷을 입었기 때문일 것이다.

옷색의 규제

[고려사]에는 1078년 고려 문종(文宗, 재위: 1046~1083) 32년 10월에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에서 송나라 제도에 의하여 관리나 백성들이

치황(梔黃- 치자나무 열매로 만든 염료로 만든 약간 붉은빛이 나는 황색),

담황(淡黃)색 옷을 입지 못하게 하자고 청하자, 왕이 이를 따랐다.” 고 하였다.

황색을 관리들이 입지 않은 것은 송나라의 요청 또는 압력 탓이라고 볼 수 있겠다.

하지만 고려에서는 여전히 황색을 사용했다.

조선 건국 이후 1396년과 1401년에도 황색 사용 금지령이 내려졌다.

그럼에도 황색 사용이 문제가 되어 1444년 신하들이 다시금 세종(世宗)에게

이 문제를 거론했다. 그 해 10월 사헌부에서 중국에서도 모든 신하들이

아황색(鵝黃色)을 제외한 황색을 입거나 신을 수 있다고 하니,

우리도 정황색(正黃色) 외에 황색에 가깝게 염색한 것은 모두 다 입거나

신거나 하는 것을 금지하지 말자고 청하였다.

세종도 이를 허락했다. 따라서 이후로는 황색에 가까운 색이 금지되지는 않았다.

그런데 1427년에는 사간원(司諫院)에서 붉은 색을 금하자는 상소를 올렸다.

“검소를 숭상하고 사치를 버리는 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좋은 규범이므로,

사치의 습관을 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초(芝草)와 홍화(紅花)는 비록

본국에서 생산되는 것이지만 극히 희귀한 것이고, 단목(丹木)은 전적으로

일본상인에게 구입해 나라에서 사용합니다.

지금 위로는 경대부(卿大夫)로 부터 아래로는 천민과 노비에 이르기까지

붉은색을 입기를 좋아합니다. 이로 인하여 붉은 색으로 한 필 염색하는 값이,

또 한 필이나 듭니다. 게다가 옷의 안쪽까지 모두 염색을 하니 비용이 많이 듭니다.

품계(品階)를 가진 관리들과 사대부의 자식들 외에는 향리나 상인, 천민과 노비 등이 붉은 색으로 염색한 옷을 입는 것을 금해야 합니다.”

규제에도 불구하고 입은 색옷

18세기 김홍도가 그린 월야선유도(月夜船遊圖).

대동강변에서 횃불을 들고있는 상민들이 다양한 색의 옷을 입고 있다.

<출처: 네이버 미술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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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야선유도 부분 확대


이렇듯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흰색과 회색, 황색과 홍색에 대해서 수십 차례의 규제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옷 색깔을 제대로 통제할 수는 없었다. 18세기말 단원 김홍도(金弘道)가 그린 ‘월야선유도(月夜船遊圖)’를 분석한 연구에 따르면, 평양감사가 탄 배를 구경나온 상민 95명 중 76명이 저고리를 입고 있는데, 이 가운데 흰색이 26명, 청색 20명, 황색 19명, 갈색 4명, 홍색 4명, 흑색 3명으로, 다양한 색옷을 입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흰옷을 입지 말고 청색 옷을 입으라고 했다고, 청색 옷을 다 입은 것이 아니며, 백의민족이라고 해서 흰옷을 다 입은 것은 아니었다.

일반 백성들은 일상에서는 흰옷을 많이 입었지만, 민간신앙 담당자들은 빨강색, 민속놀이에서는 노란색, 민속연희에서는 무채색에 가까운 의상을 많이 입었다. 특히 비일상적인 상황에서는 화려한 색옷을 많이 입었다.

19세기에 널리 입게 된 흰옷

우리 조상들은 고대로부터 흰색을 숭상했다.

광명(光明- 태양) 숭배와 샤머니즘의 영향 탓에 흰색을 숭배하게 되었다는

견해가 있는데, 물론 옳은 지적이다. 또 고대로부터 깨끗함을 선호하고,

맑은 자연환경에서 살다보니 흰색을 숭상하게 되었다는 견해도 옳다.

아울러 조선시대에는 사치를 배격하고 검박함을 지향하는 유교적 인생철학에

청결ㆍ청절ㆍ숭고함 등을 상징하는 흰색이 가장 어울렸기 때문에 선비들의

의복에서도 선호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우리민족은 백의민족(白衣民族)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19세기 이전까지 우리 조상들이 입었던 여러 색옷 가운데

흰옷이 백성들의 옷으로써 선호된 것은 사실이지만,

절대적으로 많이 입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흰옷을 입은 사람들은 19세기 들어 크게 증가한다.

여기에는 두가지 원인을 찾아볼 수 있다.

첫째 조선후기에 늘어난 면직물(綿織物- 면화)은 마직물(麻織物- 삼베, 모시)과

달리 염색이 짙게 들지 않아, 많은 염료를 필요로 한다.

따라서 선비들도 옥색 등 옅은 색의 옷을 입거나 흰옷을 입게 되었다.

무엇보다 19세기에는 잦은 가뭄, 전염병, 관리들의 심한 수탈 등으로

생활이 어려워진 농민들이 식량생산을 우선시 하고 직물과 염료 생산을 적극적으로 하지 못했다. 이와 같은 경제 상황 때문에 흰옷 착용이 늘어났던 것이다.

백의민족의 다채로운 변신

우리 조상들은 흰옷을 숭상했고, 일반 백성들도 흰옷을 즐겨 입었다.

하지만 여러 차례의 규제에도 불구하고, 시대에 따라 일반 백성들도

다양한 색옷을 입었다. 신분이 높거나 재산이 많았던 이들은 화려한

문양이 들어간 색옷을 많이 입기도 했다.

오늘날 우리는 너무도 다양한 색옷을 입고 있다.

19세기 조선을 방문했던 사람들이 다시 이곳에 온다면,

우리를 백의민족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r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