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마지막 황제 순종의 장례식 - 순종의 인산일 일어난
6·10만세 운동
고종과 순종은 여러 차례 독살설에 휘말린다. 고종과 명성황후사이에 태어난 순종은
1875년 왕세자로 책봉된다. 고종이 숨을 거둔 1919년, 일제에 의해 독살 당했다는 소문에 민심이 흉흉해지고 3·1운동을 촉발시킨 원인이
됐다.
그 이전인 1898년 커피를 즐기던 고종과 황태자 순종의 커피에 독을 넣었다는
일제 독살설도 있다. 커피 맛을 잘 아는 고종은 한 모금 마시다가 뱉어버렸지만 순종은 다 마셔버려 두뇌에 이상이 왔다는 독살 미수사건의 일설도
전해진다.
1926년 4월25일 승하한 순종은 27일 소렴을 하고 29일 대렴을 마친 뒤, 빈전(殯殿·발인 전까지 관을 두는 곳)을
창덕궁 선정전에 설치한다.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 고종의 홍릉 경역 왼쪽 줄기에 능을 정하고 5월7일부터 산역을
시작했다.
순종의
능호 역시 고종과 마찬가지로 일제가 승인할 리 없었고 황실은 고종과 마찬가지로 편법을 동원한다. 순명효황후 민씨(1872~1904)는 순종이
즉위하기 전 광무8년(1904) 33세로 황태자비로 승하해 경기 용마산 내동에 안장됐었다. 순종은 즉위하자 순명효황후로 추상하고 민씨의
유강원(裕康園)을 유릉(裕陵)으로 추봉했다.
일제로서도 이미 능호를 받은 유릉을 격하시킬 수도 없앨 수도 없는 일. 더욱이 황실에서 무덤을 천장하고 부부를 합장시키겠다는
데야 제 아무리 일제라도 간섭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보다 일제가 신경을 곤두세운 것은 조선의 황제가 죽은 분노를 터트릴 민중들의
움직임이었다.
순명효황후가 죽은 지 21년 후인 1926년 6월4일 오전 6시, 황후의 유해는 구릉(舊陵)에서 발인해 금곡으로 향한다.
6월5일 오전 6시 황후는 오른쪽 황제의 자리를 비워두고 왼쪽에 자리 잡는다.
닷새
후인 6월10일 장례식을 마친 융희황제 순종의 인산행렬이 창덕궁 돈화문을 나서 단성사 앞을 지날 때였다. 황제의 마지막 가는 길을 보러 나온
수많은 군중 속에서 수천 장의 격문이 날아오르며 "대한독립만세!" 함성이 터져나왔다.
중앙고등보통학교, 중동학교의 대표자 박용규, 곽대형, 이광호, 이선호 등이 주도해 사립고보생 2만4000명을 동원했고,
연희전문의 이병립, 경성대학의 이천진, 조선학생과학연구회의 박하균, 박두종, 이병호 등이 격문과 태극기를 제작하여 배포했다. 이는 학생들이
주도해 전국으로 퍼져나간 6·10 만세운동의 시작이었다.
일제가
창덕궁 이왕으로 격하시켰지만 순종은 조선 민중에게 여전히 황제였고 정신적인 지주였다. 조선총독부는 미리 경찰과 군인 7천명을 동원해 삼엄하게
경계하고 있었지만 독립의 염원을 외치는 조선의 함성을 막을 수 없었다.
뒤이어
을지로, 종로3가, 동대문, 청량리에서 학생들은 토지제도의 개혁, 일본제국주의 타도 등을 외쳤고 시민 수만 명이 이에 호응해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목 터지게 불렀다. 순종의 인산일 하루 동안 체포된 학생이 1천명에 달했다.
STRONG>"지금 한 병이 침중하니 일언을 하지 않고 죽으면 짐은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하리라. 이 조칙을 중외에
선포하여 내가 최애최경하는 백성으로 하여금 병합이 내가 한 것이 아닌 것을 효연히 알게 하면 이전의 소위 병합 인준과 양국의 조칙은 스스로
과거에 돌아가고 말 것이리라. 여러분들이여 노력하여 광복하라. 짐의 혼백이 명명한 가운데 여러분을
도우리라."
죽는 순간까지 순종의 가슴에 한 맺혔던 마지막 유언을 백성들이 알 리 없었지만
순종의 혼백은 6·10 만세운동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는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 길로 떠났다. 떠나는 순간, 아직 순종의
염원이 이뤄지기는 요원하다는 것을 그도 알고
있었으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