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세 노모가 목숨 걸고 먼 길 나선 사연♡
96세 노모, 딸 만나러 목숨 건 금강산 방북길에 오르다
"살아있대? 만날 수 있대?"
북쪽에서 우리 큰누님인 정혜누님이 우리가족을 찾는다는
소식을 적십자를 통해 듣고 어머니가 처음 한 말씀이다.
북한에서 남쪽의 가족을 찾는 200명 명단에 정혜누님이 포함되어 있었다.
우리가족이 너무나 오랜 기간 찾고 싶었던 정혜누님이 우리를 찾는다니…
생사조차 모르던 그 애절함…
6·25의 혼란기 때 6명의 자식을 모두 거느리기 어려워 그중 첫째아들과
위의 두 딸을 아버지의 고향인 황해도 연백으로 보내게 되었다.
'엄마, 아버지로부터 떨어지기 싫어 가지 않겠다며 발버둥치는 정혜, 덕혜에게
사탕까지 사주며 달래서 억지로 큰아들 영식이 편에 보낸 것이
마지막이 될 줄은 정말 몰랐다. 정말 미안하고 미안하다.'
그런데 이렇게 살아서 우리를 찾아주니 너무 너무 고맙다는 우리어머니.
그렇게 북쪽의 신청자 200명 중 남쪽 가족이 확인된 수가 162가족이라는
보도가 있었고, 그중 100가족을 선정하는 절차를 거쳤다.
언론에서 선정기준이 고령자 우선, 부모 자식 간 우선의 원칙이 있다고 하니
우리가족이 선정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워낙 고령의(96세) 연세여서 바깥출입을 삼가 하신지 거의 5년이 되었기 때문에
북한의 금강산까지 가는 일이 어머니에게는 매우 무모할 수도 있는
무리한 일이었고 그래서 이번 여행은 몹시 걱정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어린 딸들을 고향으로 억지로 보낸 미안함,
우리를 찾아준 고마움을 어찌 져버릴 수 있냐며,
'가다 죽더라도 간다'고 목숨을 건 여행을 하기로 마음을 먹으셨다.
96세 노모, 딸 만나러 목숨 건 금강산 방북길에 오르다
10월 29일 드디어 금강산으로 출발이다.
아침 일찍부터 서둘러 일산의 어머니를 모시고 출발하였다.
춘천, 인제, 미시령을 거쳐 약 200km를 가면서 어머니께서는
어지럽고 가슴이 답답하시다며 가끔 차에서 내리셔서
길거리에 가만히 앉아 계시다가 또 다시 출발하곤 했다.
차에 오래 앉아 가시는 것이 힘드시는가 보다. 부쩍 걱정이 된다.
오후 2시까지 도착하도록 되어있었으나 생각보다 늦게 되어 가는 도중에
여러 차례 기자들로부터 언제 오시느냐는 문의 전화가 오곤 했다.
오후 3시 30분경 설악산 하나콘도에 도착하니 기자들이 몰려온다.
사진기자에 카메라 기자 등등…. 많은 기자들이
한꺼번에 몰려들어 보통 시끄러운게 아니다.
이유를 들어보니 우리어머니가 이번 상봉단의 최고령이시면서,
부모 자식 간에 상봉하는 유일한 경우란다.
그래서 자연 기자들의 관심이 되고 있었다.
이미 상봉을 위해 모여든 많은 이들에게도 어머니는
그 고령 때문에 단연 관심을 받고 계셨다.
'저 어른은 딸을 만나시려고 저리 오래 살으셨구나!!'
차츰 어머니를 애절하게 찾던 어렸을 때의 모습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어머니는 정혜누님의 손을 붙잡고 한손으로 누님의 손등을 두드려 가며
"너를 만나니 너무 너무 좋다" 하시고는 두 분이 다시 끌어안고
볼을 비비고 뽀뽀하기를 몇 차례 반복하고 있었다.
정혜누님은 절을 드려야 한다며 번쩍 일어나 큰절을 올린다.
60년만의 어머니에게 큰절을 올리는 정혜누님의 눈이 다시 충혈 되었다.
6·25 이후에 태어나 얼굴도 모르는 난혜누이, 천식형 그리고 나에게도
안부를 묻고 하는 일을 차근차근 물어가며 혈육을 확인해 갔다.
나도 처음 보는 누님이지만 서로 많이 닮아서인지 전혀 낯설지가 않다.
분명 다른 체제에서 살았고 생각이 많이 다름에도
우리 누나는 역시 누나다. 이내 누나로, 동생으로 정을 나누고
손잡고 있는 우리는 누가 뭐래도 형제라는 것을 확인하고 있었다.
누나의 손이 몹시 거칠다,
세월의 흔적이 그대로 묻어나는 정혜누나의 손이 그래도 참 고맙다.
이렇게 거친 손이지만 건강하게 생존해 있고 자식들 낳아
훌륭하게 가정을 꾸렸으며 황해도에 남아 있던 늙으신 친척들의 뒷바라지를 다하며
가장으로서 역할을 다한 누님이 너무도 자랑스럽다.
정말 그 거친 손이 그렇게 예쁘고 사랑스러울 수가 없다.
어느덧 약속된 시간이 모두 지났다.
오후 5시경 사회자가 상봉을 중단해 줄 것을 알렸고
첫 번째 상봉은 그렇게 마무리 되고 있었다.
오후 6시부터는 저녁을 함께 먹는 상봉만찬이 진행 된단다.
북측 상봉단이 나가면서 정혜누님도 함께 우리의 곁을 떠났다.
긴장을 많이 했는가 보다 첫 번째 상봉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그렇게 힘이 없을 수 없다. 팔, 다리가 모두 쑤시고 몸살기까지 갑자기 온다.
나도 이런데 어머니는 오죽할까!! 이렇게 첫 상봉이 끝났다.
아! 저녁에는 식사도 함께 할 수 있단다.
주량, 귓불, 무좀발... 닮은 게 많은 우리 형제들
아무리 오래 헤어져 있어도 형제는 형제인가 보다.
단 한번 얼굴을 보지 못했어도,
다른 형제와 이념 속에 살았어도 혈육은 역시 혈육이었다.
차츰 차츰 만남을 거듭할수록 우리 형제 간의 공통점을
우리는 하나씩 하나씩 발견해가고 있었고 그런 발견은 큰 기쁨이었다.
함께 둘러앉은 어머니와 5형제는 우선 귓불이 모두 도톰한 형상이었다.
어머니는 이를 발견하고 "어쩜 너희들의 귀 모양이 그리 똑같냐"며 감탄을 연발한다.
우리 다섯 형제는 일제히 서로 귀를 바라보고 도톰한 귓불과
동그란 귀의 생김을 확 하면서 역시 우리는 형제인 것을 기분 좋게 확인했다.
두 번째로 정혜누님의 간단치 않은 주량이 우리 형제임을 확인해 주고 있었다.
첫날 저녁 식사를 하며 정혜누님이 맥주, 소주를 여러 잔 하시길래
혹시 헤어지고 나서 무슨 실수라도 없을까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그 다음날 점심 때에 물어보니 '일없다'고 하신다.
'일없다'는 말의 뜻은 '걱정 없다' '괜찮다' 는 뜻이다.
그러시면서 30도의 술을 포도주잔으로 10잔 정도를
마셔도 끄떡없다고 취하지 않는다고 하신다.
우리 3형제는 명절날 둘러앉으면, 큰 정종병 4병 정도는 거뜬히 해치우곤 하는데
우리들의 대단한 주량과 정혜누님의 대단한 주량이 꼭 닮아 있었다.
우리는 서로 이 대단한 주량을 자랑하며 둘째 날 점심공동식사에서
왁자지껄 시원하게 술 한 잔 했다.
실로 생애 최초의 정혜누님과의 통쾌한 술자리였다.
더 결정적인 공통점이 있었다.
우리 형제의 얼굴 생김과 신체구조는 아버지형과 어머니형으로 나뉜다.
아버지를 닮은 형제는 관혜누님, 천식형이고,
어머니를 닮은 형제는 영식형,인식형, 난혜누나와 나다.
이번에 상봉을 통해 정혜누님은 어머니형, 덕혜누님은 아버지형이었다.
그런데 어머니측의 신체구조를 결정적인 약점이 한 가지 있다.
손과 발이 도톰한 게 예쁜 형인데 발가락이 모두 다닥다닥 붙어있어
발가락 사이에 습기가 많아 무좀에 무척 취약한 형세다.
그래서 나도 군복무 시절부터 악성무좀에 무척 고생을 해왔다.
그래서 어머니형의 신체구조가 갖는 무좀 발에 관한 이야기를 정혜누님께 들려드리고
정혜누님의 사정을 물어보니 '나도 꼭 그렇다' 며 화들짝 반가워하신다.
그렇다 정혜누님은 어머니측의 얼굴생김과 신체구조를 갖고 있는 형상이며
무좀발의 공통점을 갖고 있는 나의 누님이 분명히 확인 되고 있었다.
아~ 사랑하는 우리 정혜누님.
귓불도, 주량도, 발가락도 모두 닮은 우리는 형제다!!
당신 관속에 넣어갈 반지, 딸에게 건네신 우리 어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