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론성지 ...
배론성지는 1801년 황사영 순교자가 머물며 백서를 썼고, 1855년에는 사제양성을 위한 성 요셉신학교가 세워져 1866까지 신학교육이이루어졌습니다.
1861년에 선종하신 우리나라 두 번째 사제인 최양업 신부님의 무덤이 있는 곳이며, 또한 장주기 성인을 비롯한 여러 명의 순교자들이 살던 거룩한 땅입니다.
황사영토굴
1929년 경 배론을 답사한 원주본당 정규량 신부는 ‘황사영이 지금으로부터 130년 전에 배론 점촌 지굴(地窟)속에서 백서를 쓰다가 체포되었다’ 고 하여 그의 은신처가 땅굴 이었음을 지적한다.
조선 총독부 시대에 일본인 야마구치(山口正之)씨가 1936년 8월 25일 배론을 찾아온다. 그는 황사영이 1801년에 8개월간 은거했고, 또 백서를 쓴 토굴을 찾아 그의 저서 조선서교사(朝鮮西敎史)에 ‘문제의 토굴은 봉양면 구학리 646번지 최재현 집의 북쪽 부엌 뒤에 있으며 남쪽을 향하고 있다. 이 집은 1866년 박해때 처형된 프랑스인 푸르티에 신부가 신학교를 설립했던 유적지이기도 하다. 토굴의 구경은 약 1m 반 양쪽을 돌로 쌓아올리고 다시 큰 돌로 천정을 꾸몄다. 당일은 매몰되어있는 까닭에 굴속에 들어갈 수 없었다’ 고 기록하고 있다.
구학리 646번지가 바로 신학교가 있었던 자리로 1976년 10월 18일자 제천군에서 발행한 지적도 등본으로 확인되었다. 야마구치씨가 답사했을 때 1935년에 이사 온 집주인인 최재현이 신학교 교사(校舍)였음을 확증하였고, 이 집 뒤뜰 안에 옹기가마와 토굴이 있다고 했다. 또한 배론 공소 안창현 회장의 손자인 안태화(1926년 생)는 ‘어린시절 10대 안팎일 때 신학교 건물인 최재현 집 위에 위치한 굴에 드나들며 놀았고, 그로인해 어른들로부터 꾸지람을 듣기도 하였는데, 그 굴은 토굴이었지 옹기 굴은 아니었다’고 주장하였다. (1987년 8월 10일, 24일)
야마구치 등의 기록과 증언 현지의 지세를 종합하여 볼 때 즉 1801년 김귀동의 옹기점 뒤 산비탈을 이용하여 1m 반 정도의 입구를 가진 토굴을 김귀동과 김한빈이 팠을 것이다.
토굴 앞에는 출입구를 은폐하기 위하여 옹기를 겹겹이 쌓아 옹기저장고를 가장하고 있었으며 그 넓이는 어른 두 사람이 누워 잘 수 있는 넓이라고 생각된다. 입구는 1m 반 정도 돌로 쌓아 올렸고, 굴의 천정은 큰 돌로 덮은 것으로 보이며, 입구와 달리 안쪽은 토벽으로 된 토굴 이었고, 천정 위는 흙을 덮어 비탈진 언덕 모습으로 만들은 것으로 추정된다. 황사영이 1801년 체포되고 옹기점 주인 김귀동 역시 체포되어 순교한 후 이 옹기점은 없어진 것으로 봐야한다.
황사영백서
● 백서의 발견과 입수
황사영과 함께 압수된 백서는 흉악한 글이라 하여 의금부 창고에 보관한다.
1894년 정부가 고문서를 정리 소각할 때 담당하는 관리가 천주교와 관련된 것이라 판단하고 천주교인 이건영(李健榮) 요셉에게 넘겨주고 이건영은 교구장 뮈텔 주교께 전한다.
1925년 7월 5일 한국순교자 79위 시복식에 교구장 뮈텔 주교는 이 백서를 교황 비오 11세께 봉정한다. 교구장 뮈텔주교는 교황청으로 보내기에 앞서 실물크기의 동판 사본을 제작한다.
제작된 동판사본 백서는 현재 절두산 순교자 기념관 전시실에 있다.
● 백서의 내용
백서는 가로 62cm 세로는 일정치 않으나 39.1~40cm 되는 명주천 위에 122행, 13,384자로 된 것이다.
황사영은 백서에 박해의 진행과정과 주문모 신부를 비롯하여 30여명의 주요 인물들에 대한 순교사적을 자세히 기록하였다. 이어서 순교자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고 교회가 재건되고 신앙의 자유를 얻을 수 있도록 북경교구장 구베아 주교에게 5가지 방안을 제시하였다.
첫째, 박해로 인해 피폐된 조선교회를 위한 재정적 도움을 요청하였다.
둘째, 북경교회와 조선교회가 쉽게 연락할 수 있는 방안으로서 조선교우가 북경에 가서 중국 젊은이들에게 조선어를 가르치거나 책문(柵門) 안에 연락처(가게)를 설립하자는 것이다.
셋째, 교황이 청나라 황제에게 서한을 보내 조선으로 하여금 서양 선교사를 받아들이도록 하라는 것이다.
넷째, 청나라 황제에게 말하여 조선을 영고탑(寧古塔)에 소속 시킨 뒤 친왕으로 하여금 조선을 보호 감독하게 하고 조선 왕을 부마(駙馬)로 삼자는 것이다.
다섯째, 서양의 선박과 군사, 무기를 얻어 와서 조선에 출정한 뒤 국왕에게 글을 보내 선교사를 받아들이도록 하자는 방안이다.
▶ 한국 최초의 신학교
1831년에 설정된 조선 교구는 파리 외방 전교회에서 담당하게 되었다.
파리 외방 전교회 소속 선교사들의 가장 큰 목표는 조선인 사제를 양성하여 이들에 의해 교회가 운영될 수 있도록 하는데 있었다.
그리하여 1836년 먼저 3명의 신학생을 선발하여 마카오로 유학을 보냈다. (김대건, 최양업, 최방제)
▶ 배론 신학교(1855-1866년, 주보성인 성요셉) 설립자
당시 조선교구 교구장 직무대행 메스트로 신부는 1855년에 배론에 신학교를 설립하였다.
메스트로 신부는 1808년 프랑스 앙트르몽에서 태어나 1832년 사제로 서품되었고 1839년 파리외방전교회에 입회했다. 이듬해 마카오에 가서 김대건과 최양업을 가르치기도 했다.
조선에 입국하기 위하여 10년간의 모험 끝에 1852년 8월17일 중국 배를 타고 서해안 고군산도에 상륙하여 서울로 올라왔다.
1853년 3대 교구장 페레올 주교가 병사하자 1856년 3월27일 4대 교구장 베르뇌 주교가 도착 할 때까지 교구장 직무를 대행하였다.
메스트로 신부는 1857년 12월30일 과로로 쓰러져 선종 할때까지 배론 신학교 설립 외에도 조선에서 처음으로 고아원 사업을 시작하기도 하는 등 착하고 순한 성격으로 최양업 신부와 많은 조선의 신자들로부터 각별한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1861년 10월 교구장 베르뇌 주교님은 신학교를 성요셉 신학교라고 하였다.
▶ 현재 복원된 배론 신학교
배론 신학교 복원(2003년)
정확히 고증하기 어려우나 1930년 정규하 신부를 비롯한 배론 교우들이 함께 찍은 사진과 1948년 9월 27일 주재용 신부가 작성한 도면 등을 참고로 현 위치에 건축된 성 요셉 배론 신학교는 현재 충북 지방문화제 제 118호로 지정되어있다.
방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