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성곽의 꽃’이라 불리는 수원성(화성)은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됐다.
현재의 성은 1776년 정조 때 완성한 모습 그대로가 아니다.
일제 강점기와 6·25전쟁을 거치면서 상당한 부분이 훼손돼
1975년부터 4년에 걸쳐 복원됐다.
그렇다면 복원한 성곽이 어떻게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될 수 있었을까.
기록을 중시한 우리 민족의 우수성
때문이다.
조선시대에는 나라의 큰 행사가 있으면 그 내용을 자세히
기록해서
책자로 간행했다. 이것을 의궤(儀軌)라고 한다.
이런 의궤 제작의 전통에 따라 화성의 축성 공사 역시 전 과정이
‘화성성역의궤’에 자세히 기록되었다.
그 결과 수원성을 본래의 모습대로 완벽하게 재현할 수 있었고,
문화재적 가치까지 인정받았다.
한옥 또한 수장 공간이 많은 장점이 있다.
처마 밑을 이용하여 방 면적을 축소시키지 않으면서 집안의 유물이나 고서적들을 후손에게 고스란히 물려주었다.
하지만 현대의 아파트에는 한옥의 다락과 같은 수장 공간이 없다.
훗날 분명히 유품이 되고 추억이 될 만한 물건도 보관상의 문제로
내다버리기 십상이다.
이런 세태라면 우리의 손때 묻은 역사성 있는 물건들을 후손들이
한 점도 물려받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것은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 역사의 단절을 의미한다.
따라서 발코니를 확장할 때면 벽장이나 다락 같은 수납공간을
별도로 만들 것을 권한다.
예전에 살던 집의 사진, 자식들의 손때가 묻은 MP3와 노트북,
아빠의 헌 구두, 엄마의 가계부, 아이들의 일기장, 키우던 개의 사진
등을 아무렇게나 넣어 두는 역사 창고로 삼으라는
얘기다.
서울 현대 계동사옥 본관과 별관(현대건설 본사) 사이
빈터에는
현대건설의 로고를 상징하는 피라미드 모양의 ‘현대건설 타임캡슐’이 있다. 현대건설은 1999년 5월25일 임직원 4500여명의 목표와 미래상을 적은 ‘꿈의 실현 계획서’를 타임캡슐에 담아 묻는 이벤트를 개최했다.
묻은 지 꼭 10년이 되는 2009년 5월25일 개봉키로 했다.
이 타임캡슐에는 개인의 10년 후 목표와 소망을 적은 글, 회사
직제표와 임직원 이름이 담긴 디스켓, 부서별 단체사진, 직원들의 가족사진 등
1999년 당시 회사 상황을 속속들이 보여주는 것들을 다양하게 넣었다고
한다.
특히 이 타임캡슐에는 2003년 8월 작고한 정몽헌
현대건설 회장의
10년 후 목표와 소망도 담겨 있다.
2009년 5월 타임캡슐을 개봉하는 행사는 10년 뒤로
미뤄졌다고 한다. 회사가 처한 환경 등을 고려해 지금보다는
10년은 더 있다가 여는 것이 낫다고 최고경영진이 판단한 결과로
보도되었다.
차라리 타임캡슐의 개봉 시한을 10년이 아니라
100년 혹은 500년 뒤로 잡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꿈의 실현 계획서들은 현대건설이 아니라
훗날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양되어 역사적 사료로 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혹시 타임캡슐을 여는 행사가 끝나면 기록들이 곧바로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진 않을까 염려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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