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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최치원의 전설 담긴 전나무와 푸조나무

대한인 2013. 5. 20. 05:22
                     

신라 최치원의 전설 담긴 전나무와 푸조나무
옛 선비의 위대한 가르침이 나무의 전설로 살아남아

 

 

우리의 정신문화를 이끌었던 옛 선비들은 자신과 나무의 생명을 일치시키는 경우가 많다.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나무를 심은 건 물론이고, 길라잡이를 해 온 지팡이를 의미있는 장소에 꽂았다는 이야기도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다.
고운 최치원(孤雲 崔致遠, 857~?)도 그런 선비 가운데 한 사람이다. 통일신라 시대 말기인 857년(헌안왕 1년)에 태어난 최치원은 어린 시절부터 당나라에서 갖가지 벼슬을 두루 거치며, 명문장가로 이름을 떨친 시라의 대표 학자다.
특히 반란을 일으킨 황소(黃巢)를 토벌하기 위해 집필한 ‘토황소격문’은 대표적인 명문으로 당시 당나라에서는 “황소를 격퇴한 것은 칼이 아니라 최치원의 붓이다”라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독특하게 줄기가 둘로 나뉜 채 솟아오른 학사대 전나무.

 

해인사 은둔 시절에 자주 찾던 학사대의 나무
스물여덟 살 때 고국에 돌아왔으나 골품제도에 얽매어있던 신라 사회는 육두품 출신의 최치원을 포용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지방 호족들의 반란이 들불처럼 일어나 무척 어지러웠다. 최치원은 개혁안을 제안했으나, 귀족들의 반발로 허사가 됐다.
그는 은둔을 결심하고 경남 가야산 해인사에 들어간 것으로 알려졌지만, 이후의 행적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천하를 방랑하다가 객사했다고도 하고, 하늘로 올라가 신선이 됐다고도 할 뿐, 정확한 족적은 알 수 없다.
사람은 그렇게 자취를 남기지 않고 사라졌지만, 그가 은둔 생활 중에 손수 심었다고 알려진 나무는 천년의 세월을 지나오고도 여전히 생생히 살아있다. 경상남도 기념물 제215호인 합천 학사대 전나무가 바로 그 나무다.
학사대는 합천 가야산 해인사 서쪽 가장자리의 전각 청화당 뒤편의 낮은 둔덕을 가리키는 이름으로 최치원이 비운에 빠진 고국의 운명을 설워 하며 거문고를 뜯으며 시간을 보내던 곳이라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최치원은 우울한 마음을 거문고 가락으로 다스린 뒤, 자신을 이끌어준 지팡이를 둔덕의 중심이 되는 자리에 꽂았다. 지팡이는 세월이 흐르면서 싹이 텄다. 그리고 그로부터 천년의 세월이 더 지난 지금까지 쑥쑥 자라나 하늘을 찌를 듯 높지거니 자라는 한 그루의 전나무로 자라났다.

 

 

비스듬하게 자라난 학사대 전나무의 우람찬 줄기.


세월의 깊이를 보여주듯 듬성듬성 푸른 이끼가 피어난 줄기 표면.

 

두 줄기로 나누어 자라난 독특한 생김새
학사대 전나무는 전형적인 전나무와 사뭇 다르다. 나무 줄기의 껍질이나, 잎으로 봐서는 분명한 전나무이지만, 대개의 전나무가 곧은 줄기 하나로 우뚝 솟아오르는 것과 달리 줄기가 둘로 나누어졌다.
사람 키보다 조금 높은 3m쯤 높이에서 나뉜 두 줄기는 모두 중심에서 약간씩 벗어나면서 비슷한 굵기로 자랐다. 그나마 둘 중 한 줄기는 곧게 솟아올랐지만, 다른 한 줄기는 비스듬히 자라다가 다시 하늘로 곧게 솟구쳤다. 아래 쪽을 가리운 채 멀리서 바라본다면 영락없이 두 그루의 전나무로 보인다. 어쩌면 긴 세월을 살아오는 동안 중심이 됐던 줄기는 오래 전에 부러지고 부러진 줄기 위에서 두 개의 새로운 줄기가 나온 것으로 볼 수도 있겠다.
둘로 나뉘기 전인 사람 가슴높이 쯤에서 잰 줄기의 둘레는 5.5m에 이른다. 이 정도의 굵기는 우리나라의 전나무 가운데 최대 규모에 속한다. 줄기의 굵기에 비하면 키는 작은 편으로 현재 측정값에 따르면 19m밖에 안 된다. 작지만 옹골차게 느껴지는 건 어쩌면 키에 비해 다부진 근육질로 굵어진 줄기 때문이지 싶다.
신라 때의 최치원의 지팡이가 자라났다는 전설대로라면 1천 살을 훨씬 넘긴 나무로 봐야 한다. 우리나라에 살아있는 전나무 가운데에는 물론이고, 다른 종류의 나무를 통틀어서도 가장 오래 된 나무라 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다른 곳에서 자라는 전나무의 자람을 바탕으로 돌아보면 나무의 나이를 믿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의문을 잠시 접고 최치원과 관계 있는 또 한 그루의 나무를 먼저 찾아보자.

 

 

최치원이 속세에서 더러워진 귀를 씻은 세이암 앞의 푸조나무.

 

남부 해안가에서 잘 자라는 푸조나무 한 그루
해인사에 은거하는 동안 최치원은 하동 쌍계사를 자주 찾았다고 한다. 이 쌍계사 근처의 화개천변에서도 최치원이 심었다는 전설의 나무가 있다. 쌍계사의 유명한 벚꽃길을 지나면 칠불사(七佛寺) 와 대성골 쪽으로 가는 갈래길이 나온다. 이 개울가 삼거리에 매우 아름다운 자태로 서있는 푸조나무가 그 나무다.
최치원은 해인사를 떠나면서 이 개울을 따라 지리산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그는 세속의 번거로움을 버리고 다시 또 하나의 지팡이를 꽂고, ‘이 지팡이가 나무로 살아 자라나면 자신도 어디엔가 살아있을 것이고, 나무가 죽으면, 자신도 죽은 것’이라는 이야기를 남겼다고 한다.
이어서 그는 개울 건너편의 너럭바위로 내려가 속세에서 더러워진 귀를 씻고 산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범왕리 푸조나무에서부터 약 100m 쯤 떨어진 곳에 놓인 너럭바위가 바로 그가 귀를 씻은 세이암(洗耳岩)이다.
이름이 다소 이국적으로 느껴지는 푸조나무는 남부 지방에서 잘 자라는 우리 토종나무로, 가지가 넓게 퍼져서 느티나무처럼 정자나무로 많이 심어 키운다. 주로 따뜻한 바닷가에서 자라는 까닭에, 중부 내륙 지방에서는 보기 어렵다. 이곳 범왕리와 같은 내륙의 산중에서 이처럼 크게 자라난 푸조나무를 보는 건 흔치 않은 일이다.

 

 

더러 부러진 가지가 있지만 여전히 싱그럽고 건강한 범왕리 푸조나무.

 

전설 속 은유에 담긴 옛 사람들의 지혜
범왕리 푸조나무의 중심 줄기는 튼실하게 버티고 있지만, 세월의 풍진을 이겨내지 못하고 여러 개의 굵은 줄기가 부러져 나갔다. 그러나 키 25m, 가슴높이 줄기둘레 6.25m나 되는 크기의 범왕리 푸조나무는 여전히 전체적으로 늠름한 생김새를 갖췄을 뿐 아니라, 싱그러운 푸른 잎을 무성하게 돋아낼 만큼 건강한 편이다. 높이로는 우리나라의 모든 푸조나무 가운데 으뜸이다.
학사대 전나무와 마찬가지로 범왕리 푸조나무도 최치원의 지팡이에서 싹이 터 자랐다는 전설을 갖고 있으니, 두 나무 모두 역시 1천 살을 넘긴 나무여야 한다. 그러나 학사대 전나무가 그랬듯이 범왕리 푸조나무도 아무리 높게 봐야 4백 살 이상으로 보기는 어렵다.
지팡이가 자라났다는 전설을 곧이곧대로 믿기 어려운 것처럼 전설 속의 나이 역시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는 이야기다. 세상의 모든 전설은 합리적 근거를 바탕으로 하지 않는다. 은유일 뿐이다. 사람들은 나무의 용맹한 자람을 보고, 선조의 위대함을 떠올렸고, 그의 위대한 가르침을 오래 기억하기 위해 나무에 기대어 은유를 만들어낸 것이이다. 나무와 그의 전설에는 사람살이의 중요한 가르침이 담긴 것이다. 과학의 시대에 터무니 없어 보이는 나무의 전설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