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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한국 전쟁사 인물지 [1] 대한민국 편

대한인 2013. 5. 26. 04:57

다시 쓰는 한국 전쟁사 (61)

-인물지 [1] :대한민국 편-

 


 

[난중일기]는 싸움터에서 백성의 신분으로 전사한 수많은 군졸들의 실명을 기록하고 있다.

또 심부름하는 종들과 수발들던 여자들, 그리고 여러 말썽꾸러기들, 탈영자, 범법자들의 이름을

모두 다 실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 수많은 사람들의 삶의 궤적을 지금에 와서 추적할 수는 없다.

그들은 다들 당대 현실에 맞서서 싸웠고, 싸우다 죽었고, 절망했고, 또 다른 세상을 꿈꾸었고, 꿈을 위해 싸우다 또 죽었다.

그 수많은 이름들이 고귀해 보인다. 이름만 전하고 이야기는 전하지 않는 그 많은 넋들이 이제 편안하기를 바란다.

                                                                                                                  -김 훈 [칼의 노래] 인물지 中에서-



*이 인물지는 난중일기가 보여준 치열하고도 사실적인 역사기록 정신과 그 것을 새롭게 예술로 형상화해낸

소설가 김 훈의 [칼의 노래] 인물지에 대한 오마주(hommage)다.  

                                                                                                                     오마주: 경의의 표현


  한국 전쟁사 인물지는 한국전쟁에 직간접으로 관여했던 해당국가의 여러 인물들의 생애 중 특히 한국전쟁

관련 행적을 위주로 기술하였다. 당연히 이 인물지에는 한국전쟁사에 등장했던 군인과 정치인들이 포함된다.

그러나 한국전쟁은 그들만의 전쟁은 결코 아니었다.

한국전쟁은 도리어 그 전쟁의 참혹함과 비참함을 온몸으로 겪어내며

지금의 풍요와 번영을 이끌어낸 이 땅의 주인공들인 평범한 장삼이사(張三李四)들의 전쟁이었다.

그들의 짧은 기록들은 그래서 더 절절하고 소중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우리는 이제 한국전쟁사에서 저들의 연대기에 더 주목해야 할지도 모른다.

김 훈의 말대로 이들 역시도 꿈꾸고 싸우고 버티다가 고통스러워하고 죽어갔다.

이제 그들이 기억됨으로써 다만 그 이름과 넋이라도 편안해질 권리가 있지 않을까? 

민중 편 작업에 시인 고은 선생의  [만인보]를 참고하였음을 미리 밝혀둔다.

단, 이미 인물평전에서 소개가 된 이 종찬, 한 신, 김 창룡, 이 현상, 차 일혁  이들 다섯 사람은 제외하였다.



[대한민국 편]


김 종오(1921-1966):충북 청원 생, 일본 주오 대학 재학 중 학도병으로 일본군 소위의 경력을 거쳐 해방 후

 46년 군번 31번으로 군사영어학교를 졸업 후 직업군인이 되었다. 그는 당시 국군내의 일본학도병계열

(김 익렬, 최 영희, 한신 등) 장교그룹에 속했다. 50년 6월 한국전쟁 당시 6사단장으로 인민군 2군단

2,7(12)사단의 진격을 저지하여 인민군의 개전초기 작전구도에 차질을 주며 한국전쟁의 명운을 가르는데 일조했다.

당시 국군은 6사단의 선전과 인민군의 서울지체가 아니었다면 전멸 될 가능성이 매우 컸다.

이후 50년 10월 9사단장을 역임했고 51년 5월에는 현리에서 3사단장으로 참패를 경험 했으나 1년 뒤,

역시 현리패전을 겪었던 9사단을 이끌고 철의 삼각 지대 핵심인 백마고지에서 격전 끝에 고지를

사수하여 현리참패의 치욕을 씻었다. 54년 1군단장과 육사 교장 등 육군의 주요 보직을 거쳤고

61년 제 15대 육군 참모 총장(62년 대장 진급)이 되었으나, 45세의 이른 나이에 생을 마쳤다.

조용하고 유순한 성품으로 유능한 야전지휘관이 부족했던 초창기 국군에서 드물게 작전에 능했던 야전군인.


김 홍일(1898-1980):평북 용천 생, 오산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민족현실에 눈을 떠 독립운동에

투신키 위해 중국으로 망명한다. 1919년 중국귀주 무관학교졸업 후 중국군에서 활약하며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한다.

윤 봉길 의사의 상해 홍구공원 의거 시 도시락 폭탄을 제공했던 장본인이기도 하다. 이후 중국군에서 계속 복무하며

중국국부군의 소장에까지 올랐고, 항일투쟁에 헌신하며 임정의 군무부 차장과 광복군 참모장을 역임했다.

해방 후, 독립군인맥이 거의 없는 우리 국군에서 매우 희귀한 독립군 계열에 속했으며 사단 급 대규모 부대를

지휘해본 사실상 유일했던 국군장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의 일본군 출신자 편애와 군내 친일부역세력의

득세로 개전 초까지 육군사관학교 교장과 참모학교교장 등 주로 야전과 관련 없는 업무를 역임했다.

한국전쟁 개전 초 속수무책이었던 무능한 일본군 출신 장성들을 대신하여, 궤멸된 전방사단의 패잔병들을

재 규합하여 급조된 시흥지구 전투사 사령관으로 성공적인 지연작전을 펼쳤고, 이들이 모체가 되어 창설된

국군 제1군단의 초대 군단장이 되었으나, 이후 한국전쟁에서 더 이상의 활약을 펼치지 못한 채 다시 육군종합학교

교장이라는 한직에 머물다 51년 중장으로 예편했다.

 실전경험이 풍부한 야전 지휘관이 극도로 부족했던 한국전쟁 상황에서도 중국에서의 풍부한 경험과

한국전쟁 최대의 위기상황에서 보여준 지휘수완에도 불구하고 그가 설 자리가 없었다는 것은 독립군의

전통이 우리 국군의 정신적 뿌리가 되지 못했으며 한국전쟁시기 국군의 패배가 무기나 훈련의 부족 때문만이

아닌 인재의 활용에 더 큰 문제가 있었음을 시사한다. 예편 후 주중대사와 외무부장관, 국회의원을 역임했으며

독립운동에 헌신한 공으로 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한국전쟁에서의 전공으로 태극무공 훈장을 받았다.

중국군과 국군에서 달았던 별들을 모두 합쳐 일명 ‘오성장군’으로 불렸던 김 홍일은 국군의 사성장군이나

육군참모총장이 되지는 못했다. (임시정부와 광복군의 법통을 이었다(?)는 대한민국의 육군은 끝내 단 한명의

독립군 출신 육군참모총장이나 사성장군도 배출하지 못한 채 일본육사와 만주군관학교 출신들이 그 자리를 독차지했다)


김 익렬(1921-1988):경남 하동 생, 일본 고베 상업학교 졸업, 일본군 학병 소위 출신으로 46년 1월 군사 영어학교를

졸업하면서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군번 47번) 47년 9월 국군 9연대 부연대장(소령)으로 제주에 부임하여 그해 12월

중령으로 진급, 제 3대 9연대장이 되었다. 이듬해 제주도 4.3항쟁 시 경찰과 서청, 미군정의 무리한 진압과 초토화

작전에 반대하며 사태수습을 위해 빨치산 대장 김 달삼과 직접 대화를 통해서 상호간의 무력충돌중지와 원만한 사태

수습의 길을 열었으나, 경찰의 고의적인 오라리 방화를 계기로 제주는 다시 폭력사태가 재연된다.

제주의 유혈충돌이 엄청난 민간인 희생을 부를 것을 예감했던 김 익렬은 평화로운 해결을 위해 진력했지만, 끝내

미 군정장관 딘에 의해서 해임되었고 결국 제주도는 초강경진압이 이뤄져 해방이후 최악의 학살이 자행되었다.

이후 김 익렬은 14연대장을 거쳐서 한국전 개전당시에는 1사단 13연대장으로 분전했으며, 52년 6월에는 8사단장을

역임했고 54-55년 미국유학 후 돌아와 7사단장과 1관구사령관, 1,2군단장과 국방대학원장을 거쳐 69년 중장으로 예편했다.

평생 4.3의 비극을 막지 못해 죄책감을 느꼈던 김 익렬은 88년 작고하면서 남긴 유고를 통해 4.3의 발생경위와

제주도민들의 희생에 대해서 상세한 기록을 남겼고 이 것은 후일 4.3의 진실규명과 명예회복에 큰 역할을 했다.

유고에서 그는 민족의 양심에 의거, 당시 봉기했던 제주도민들이 용공 좌익분자가 아니었다고 증언했고,

무고한 제주도민들에 대한 부당한 학살을 지시한 최고책임자들을 분명하게 거명, 고발하였다.

하지만 창군원로이자 예비역 중장이었던 김 익렬 조차도 살아생전에는 4.3의 진실을 공개적으로 말하기 힘들만큼

수십 년 동안 대한민국의 냉전반공편향과 과거사에 대한 진실은폐는 무섭고도 강고했다.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의 참상은 제주 4.3의 양상을 고스란히 확대재생산 했다는 측면에서 민간인을 어떻게든

보호하려고 했던 진정한 군인 김 익렬의 해임과 좌절은 우리 군과 경찰이 이후 현대사에서 4.19와 60년대 베트남,

80년 5월 광주에서 민간인 학살을 반복할 수밖에 없었던 악순환 구조의 확대재생산을 예고한 것이다.


김 석원(1893-1978): 서울 출생, 일본육사 27기로 해방당시 일본육군대좌였으며 일본 명 가네야마로 주로 중국에서

독립군 토벌과 중국군과의 전투에서 야전경험을 쌓았다. 일제강점시기 여러 차례의 학병 권유 강연회에서 노골적인

부역행위를 한 바 있다. 해방 이후 좌우갈등의 심화를 틈타 다시 회생의 기회를 잡았고 일본육사 출신자 친목회가

조직한 조선 임시군사위원회 대표가 되어 이후 육사특별반을 거쳐 대령으로 임관했다. 49년 준장으로 승진하였으나,

참모총장 채 병덕과 남북 무역 거래에 관한 견해차로 극심한 갈등 끝에 예편했다.

50년 6월 한국전쟁 발발 후 다시 현역에 복귀하여 수도사단장과 3사단장으로 몇몇 지연작전에서 전공을 세웠으나,

크게 중용되지는 못하고 특명검열단장 등의 한직을 전전하다 56년 소장으로 예편한다. 그 후 원석학원 이사장과

5대 민의원을 지냈다. 현역들도 군복을 벗고 도망치던 한국전쟁 초기 상황에서 현역으로 복귀하여 혼성

수도사단과 3사단을 지휘한 전공은 있으나, 일부 진위논란의 여지도 있었으며 그의 전술이 전형적인 구일본군의

전투방식 이었다는 점에서 현대전에서는 분명한 한계가 있었다. 유 원식 대령의 기록에는 그가 작전지시만 내리고

혼자 도주했던 일도 있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당시 미 군사고문단은 그와 같이 전투 경험은 있으나 고분고분 하지

않는 야전지휘관의 선임을 배제하고 비교적 다루기 용이한 20,30대 일군출신 장교들을 중용했다.

창군 이래 실세였던 친일부역자 출신이었지만, 거기서도 시대에 뒤졌던 김 석원은 그 대열에서 조기탈락 했다.

 

그는 85년 평생 동안 반성이 전무했던 전형적인 이 땅의 친일부역자의 삶을 살았다.


이 형근(1920-2001):충남 공주 생, 일본육사56기로 해방 시 일본군 대위로 복무.  군사영어학교 1기이자

군번 1번으로 임관하여 46년 국방경비대 사관학교장과 49년 8월 8사단장을 거쳐 한국전쟁 개전 시에는

2사단장으로 재직했다. 그는 누구보다 한국전쟁 개전 가능성을 일찍부터 직감하고 군 수뇌부에 자주

경고해왔으나, 당시 채병덕 육군 지휘부는 이를 묵살했다. 개전 후에도 무의미한 희생만을 자초하는 예비 병력의

축차 투입대신 잔존병력을 모두 한강방어선에 집중하여 체계적이고도 효과적인 방어 작전 을 주장하였으나

이 역시도 묵살 당했다. 훗날 그가 제기한 한국전쟁 10대 의혹은 당시 국군수뇌부의 오판과 실책 그로 인한

불필요한 희생을 통렬하게 비판한 것이었다.

50년 10월 3군단장, 51년 9월 정전협상 한국군 대표, 52년 1월에는 야전으로 복귀 1군단장으로 복무했으며

54년 육군의 세 번째 대장으로 진급하며 초대 합참의장이 되었고 56년에는 육군 제 9대 참모총장을 역임했다.

59년 예편 후에는 총무처 행정개혁위원장과 주영대사 등을 지냈다. 한국전쟁과 군부 쿠데타 이후 일본육사와

만주군관학교 출신자들이 더더욱 득세한 대한민국에서 적지 않은 출세와 관운을 누렸다는 점에서 전형적인

일본군 인맥에 속했지만, 한국전쟁이라는 전면전 예측과 개전 초 우리군 작전에 대한 그의 진언은 분명 기억될

가치가 있다. 상황 판단을 잘했던 야전군인이었다.


백 선엽(1920- ):평남 강서 생,41년 만주군관학교 9기로 간도특설대에서 독립군정보수집업무에 종사, 해방 이후

월남하여 46년 2월 군사영어학교 졸업 후 임관(군번54번). 49년 5사단장으로 빨치산 토벌에 참가하였고 정보국장

시절 숙군작업을 총괄했다. 50년 4월, 1사단장에 부임하여 한국전쟁 초부터 선전하였으며 이후 낙동강 전선

다부동 전투에서 인민군 주력의 파상공세를 저지하여 태극무공훈장을 받았다.

실전에는 무능했던 상당수 일본군출신 국군장성들과는 달리 빠른 상황 판단력으로 한국전쟁 초기부터 야전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영어에도 능통하여 미군과의 협동작전에서도 수완을 보였다. 그의 휘하 1사단은 한국전 내내

미 1군단 예하부대가 되었다. 이후 1군단장과 정전회담 대표, 지리산토벌 ‘백’야전사 사령관과 재창설된 2군단장을

역임했고 이 종찬 장군의 후임으로 7대 육군참모총장(당시중장)이 된 후 탁월한 관운으로 국군 최초의 4성 장군이

되었고 1군 사령관과 4대 합참의장은 물론 7,10대 두 번이나 육군참모총장을 역임하며 창군원로이자 또 군인으로서

최대의 영예를 누렸지만, 친일부역경력자 백 선엽의 한계도 뚜렷했다. 친일 핸디캡 때문에 인사권자인 이 승만

에게 늘 순종했고 다분히 정치지향적인 만군 인맥을 군내에 이식한 후견인이었다.

우리 군의 정신적 바탕을 극우 편향의 일본 군국주의라는 매우 기형적인 요소로 채운 당사자 중 한명이었다.

후일 그가 형성했던 인맥 중 하나인 박 정희의 쿠데타이후 오랜  외교관 생활과 교통장관, 주요기업체 사장

등을 역임하며 전후 계속 양지의 삶을 누렸다. 분명 한국전쟁은 백 선엽에게 출세와 명예를 안겨주었다.

친일부역이 반공으로 화려하게 채색되어 변질되어버린 한국현대사 질곡의 그림자와 함께.


유 재흥(1921-):일본 나고야 생, 일본육사 55기 출신으로 대표적인 일본군 출신 인사. 아버지 유승열 역시 일본육사

출신(27기)이다. 46년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하고 임관(군번3번)후 순탄히 진급했고, 제주도 4.3시기 중 초토화 작전을

수행하였다. 이후 6사단장과 2사단장을 역임했고 한국전쟁 개전 시에는 전방 사단장 중 유일한 장성(준장)급 지휘관

이었으나 그의 7사단은 전방 사단 중 의정부에서 가장 먼저 궤멸되었고 7사단의 참패는 3일만의 서울점령으로 직결

되었다. 이후 50년 겨울 2군단장으로 북진 중 중국군에게 참패하여 군단이 해체되었고 51년 5월 국군 사 최대의 참패인

현리전투에서도 자신의 3군단이 포위되자 부하들을 버려두고 탈출하여 3군단붕괴와 함께 전 국군의 지휘권 박탈

이라는 수모를 자초했다. 하지만 든든한 군내 일본군인맥과 이승만의 비호로 현리참패 이후에도 요직인 육군참모

차장과 재창설된 2군단장, 정전협상 대표를 지냈고 전후에는 3대 합참의장과 1군사령관을 역임했으며 박 정희 정권

시절에는 국방장관이 되었다. 국군의 주요 패전마다 지휘 실패의 장본인이었고 부하들을 버리고 적전도주까지 저지른

 지휘관이 군법회의나 예편조처를 당하지 않고 이토록 출세 길을 내달렸다는 사실은 독립군 출신 국군 인사들의 행보와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원 용덕(1908-1968): 서울 생,  31년 세브란스 의전을 졸업한 뒤 병원을 개업했으나, 출세를 위해서 친일부역에

적극 투신하여 32년에 만주국의 군의(軍醫) 장교로 입대. 해방 당시 계급은 중교(中校, 중좌에 해당).

이후 만군출신 최 연장자이자 상급자로 군사 영어학교에 부교장이자 학생으로서 군번 41번 임관.

46년 2월 국방 경비대의 초대 총사령관이 되었으며, 9월에는 육사의 전신인 조선경비사관학교의 교장.

46년 12월 제8연대장(춘천)이 되었고 47년 12월부터 제2여단장. 제2여단장으로 근무 시 여수, 순천 사건 진압참여.

49년 8월 육본 행정참모부장을 지냈고, 한국전 개전 시 호국군 참모부장과  국방부장관의 특별보좌관으로 있다가

영남지구 계엄 사령관으로 임명되면서 정치군인의 길로 들어선다. 부산정치파동에 적극 개입, 이승만의 독재권력

형성에 기여한 공으로 53년 3월 헌병 총사령관이 되었고 김 창룡이 지휘하는 특무대와 함께 이승만의 권력을

유지하는 최고의 버팀목이 된다.  이승만의 지시로 반공포로를 석방했고 이후 50년대 내내 김 창룡과 함께 각종

정치공작과 용공조작의 주역으로 활동 하면서 50년대 한국현대사를 암울하게 만든 장본인이다.  60년 이승만 정권

몰락 후 전 평북지사 김 성주 살해 및 시체 유기를 지시한 죄로 기소되었으나 죄질에 비해 관대한 15년 형을 선고

받았고 그나마 곧 석방되어 68년 자연사했다. 적극적인 친일부역 행각과 이 승만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으로

권력을 탐했던 인물.

  

정 일권(1917-1994):함북 경원 생, 봉천 군관학교 5기 및  일본육사55기 졸업. 관동군 헌병대위로 복무 중 해방을 맞음.

친일분자로 소련군에 체포되었으나 탈출하여 월남, 군사영어학교를 거쳐 임관. 이승만의 총애를 받아 50년 한국전 개전

직후 채병덕의 후임으로 32세의 젊은 나이에 5대 육군참모총장 겸 육해공군 총사령관이 되었으나, 그 역시 야전 지휘경험은

전무했다. 이후 국민방위군 사건과 거창양민 학살사건의 책임을 지고 해임되어 미 유학 후 2사단장과 군단장을 거쳐 국군의

두 번째 대장이 되었다. 54년 다시 육참 총장이 되었고 56년 합참의장이 된다. 57년 대장으로 예편과 동시에 터키대사,

프랑스 대사, 미국대사를 역임하고 외무부장관(63년)과 국무총리(64-70), 국회의장(73-79) 등 대한민국의 주요 요직을 두루

거쳤다. 80년 정계에서 은퇴하여 자유총연맹 총재로 활동했다. 무색무취의 예스맨기질과 특유의 기민한 처세술로 정치력을

발휘, 한국전쟁에서 이렇다 할 야전지휘 성과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백 선엽 못지않게 군의 주요 요직을 거쳤으며 예편 후

에도 대한민국 정계의 중심의 자리에서 가장 오랫동안 머물렀다.  만군인맥의 친일부역자 출신 중 가장 화려한 출세와

영화를 누렸던 기회주의적 처세의 달인이었고 한국전쟁 당시부터 문란한 사생활로 자주 구설수에 올랐다.


채 병덕(1915-1950):평양 생, 평양중학 4학년 때 일본육사에 진학. 포병과로 49기 졸업, 포병장교로 활동하면서

44년에는 인천조병창에서 소좌로 근무 중 해방을 맞음. 해방 후 군 창설에 참여하여 정위(대위)로 임관했고 1연대

중대장이 되었다가 국군최초의 영관 진급자가 되었다.1연대 하극상사건의 책임을 지고 통위부 후방사령관으로 전보되었으나,

곧 신설 4여단장을 역임하였고 불과 34살의 나이에 국방경비대 총참모장에 발탁된다.  실전경험부족에도 불구하고

특유의 붙임성과 친화력으로 인사권자인 이승만의 총애를 받았던 때문으로 추정된다. 이후 군내로 피신하는 친일

부역자들을 적극 보호했으며 군내 일본군 출신 인맥형성에 주역이 되었다. 49년 남북 물자교역을 둘러싸고 김석원 1사단장

과 극심한 갈등과 불화로 동시 전역조처 되었고 50년 4월에 다시 육군참모총장에 임명,현역으로 복귀한다.

그러나 포병 출신으로 실전부대 지휘경험이 전무했던 채병덕은 한국 전쟁 개전 당시 잘못된 상황판단과 작전 지휘로

국군 주력을 소모적인 축차투입작전으로 소진하고 개전 3일 만에 수도를 상실하였다. 패전의 책임을 물어 참모총장에서

해임된 후 경남지구 편성군 사령관으로 좌천. 50년 7월 하동에서 부주의하게 전진하다 인민군의 매복공격에 걸려 전사.

‘Fat 채’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그는 독립군출신들에게까지도 호감을 샀던 친화력과 정치력으로 고위직에 발탁되었으나,

야전에서는 철저히 무능했다. 한국전쟁은 채 병덕에게 정치적 몰락과 죽음을 불렀다.

 

이 승만(1875-1965):황해 평산 생, 호는 우남. 부모에게 한문을 배우다가 1894년 배재학당에 입학, 신학문을 배웠고

독립협회와 협성회 간부로 활동했다. 1898년 정부전복 혐의로 구속 수감되었다가 1904년 특사로 석방된 후 미국으로

건너가 하버드 대등에서 수학하고 1910년 프린스턴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국권 상실 후 독립운동에 투신

하여 외교를 통한 독립론을 주창했으며 상해임시정부의 국무총리가 되었으나 독단적인 행동과 처신으로 21년 탄핵

불신임을 받았다. 이후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했으나 도산 안창호 등과 극심한 대립으로 독립운동노선의 분열을

초래했으며 이러한 양상은 권력독점욕이 강했던 그의 성격적 특성에서 비롯되었다. 해방 후 귀국하여 우익의 대표적

지도자로 활동했고 예민한 정치적 감각과 수읽기로 미군정하에서 헤게모니 장악에 성공, 단정수립을 주도하고 이후

제헌의회 선거와 정부수립을 통해서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에 취임한다. 극단적인 반공 노선과 친일부역세력에 기반

했던 초기 이승만 정권은 극도로 취약했으나 미국의 지원과 강압적인 탄압정책으로 생존에 성공했고 한국전쟁을 통해서

결정적인 안정기반을 닦았다. 전쟁이 나자 서울시민을 버려두고 도망을 쳤으며 보도연맹학살과 국민방위군 사건 등

여러 치명적 과오와 무능한 경제정책으로 국민경제를 파탄지경으로 몰아가 50년대를 더욱 암울하게 했던 실책에도

불구하고 부산 정치파동을 통한 발췌개헌으로 직선제를 쟁취하여 독재권력의 기반을 굳혔고 이후 사사오입 개헌

등으로 영구집권 을 꾀하다 3.15부정선거에 항의하는 4.19혁명으로 권력을 상실하고 다시 하와이로 쫓겨나 거기서

생을 마쳤다. 건국의 아버지 혹은 국부라는 생전의 찬사와는 달리 친일부역세력 들을 자신의 권력기반으로 삼아

대한민국의 정통성에 심각한 하자와 후유증을 남겼고 한국전쟁 전후 한 무수한 민간인 학살의 정치적 책임 또한 분명하다.

미국식 교육을 받았고 미국식 민주주의의 영향을 깊게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실제의 그는 전제 군주적 성격이 농후했던

노회한 독재자였다. 불행했던 대한민국 현대사의 질곡을 제공한 중심축을 이룬 사람 중 하나.

   

신 성모(1891-1960):경남 의령 생, 보성전문학교 졸업, 중국 상하이로 가 13년 우쑹 상선학교와 난징항해대학을 거쳐

런던에 유학, 1등 항해사 자격을 얻었다. 영국 상선의 선장을 지낸 후 인도 상선회사 고문으로 있다가, 광복 후 귀국하여

대한 청년단장 교통부 자문위원장 등을 역임하고, 이승만의 극진한 신임을 얻어 48년 제2대 내무부장관, 49년 국방부장관

이 되었다. 오직 이 승만에 대한 충성심으로 일관했던 국방장관 신 성모는 채병덕과 함께 한국군의 무능과 무소신을 대표하는 상징이 되었고, 과장된 북진 통일발언에는 능했으나 실질적인 군의 전력증강과 실전에서 승리할 수 있는 지휘관 발탁에는

무능했다. 거창 양민학살사건을 은폐, 축소하는 와중에 발생한 국민방위 군 사건의 책임을 지고 해임되었으나 이후에도

외국대사 등의 요직에 중용되었다. 이승만의 연설을 들으면 곧잘 눈물을 흘려 낙루장관이라는 조롱까지 들었던 신 성모는

오직 출세와 영달에만 급급했던 건국 초의 대표적인 인사로 평가된다.


최 능진(1899-1951):평남 강서 생, 호는 일석. 독립운동가 집안출신으로 자신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2년간 옥고를

 치뤘다. 해방 후 건준 평남지부 치안부장으로 조만식을 보좌했으나 소련군정의 민족주의 세력 탄압으로 월남하여

초대 경무부 수사국장이 되었다. 일본경찰출신이 대부분인 초기 대한민국경찰에서 보기 드문 민족주의계열로

친일 부역배 청산에 헌신했으나, 일본경찰출신들에 의해 밀려났고 친일파를 옹호하는 이승만에 대항하기 위해

5.10선거에 출마하려 했지만 경찰의 집요한 방해공작으로 좌절된다. 이후에도 반 이승만전선의 주도적 역할을

수행하였으나, 48년 정부수립 한 달 만에 조작된 인민혁명군 사건으로 내란음모죄로 5년형을 선고받았다.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서울에 진주한 인민군에 의해 출옥한 최능진은  김규식 계열의 중도인사 들과 접촉하며

전쟁중단과 유엔을 통한 평화통일을 추진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평소 최능진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이승만 정권은

이러한 그의 행위에 대해 '이적죄'를 적용, 사형을 선고했고 51년 처형되었다. 순수 민족주의자 최 능진은 진정한 우익

답게 친일 청산을 시도했지만 공작정치의 올가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오히려 친일부역 배 출신들에 의한 용공조작에

 의해 희생되었다.

 

 

오 동기: 백범 김 구를 추종했던 임정 계열로 중국군출신. 독립운동에 헌신했고 해방 후 군에 투신. 군사영어학교

2기로 졸업하여 임관. 국방경비대 감찰총감 등을 역임했다. 소령시절 김 익렬 중령의 후임으로 여수 14연대장으로

부임하여 군납비리 등을 척결하고 공정한 부대관리로 부하들의 신임을 받았으나, 최 능진과 일면식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인민혁명군 사건으로 연대장에서 해임되고 체포, 이후 여수 14연대의 반란에 대한 지휘책임까지 물어

징역 15년의 중형을 선고받고 결국 감옥에서 죽었다. 전쟁발발 후 인민군이 진주하여 여러 차례 고위직을 권유했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지조를 지켰던 올곧은 군인이었으나, 진정한 우파이자 민족주의계열 군인이 설 자리는 많지 않았다.

14연대의 반란동기에는 오 동기 연대장의 부당한 체포도 포함된다.  한국전쟁에서 국군은 오동기와 같은 경험 있고

부하들의 신망을 받았던 야전지휘관이 절실했지만, 개전당시 그는 일본군출신들의 모함으로 감옥에 있었다.

최 능진과 함께 친일군,경찰 인맥의 악의적 용공조작에 의한 대표적인 민족주의계열의 희생자.



조 병옥(1891-1960):충남 천안 생, 평양숭실학교와 연희전문을 졸업하고 미국컬럼비아 대학에 유학하여 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25년 귀국하여 연희전문 강사로 활동하면서 독립운동에 나섰고 광주학생운동과 수양동호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뤘다. 광복 후 송진우 장덕수 등과 한국 민주당을 창당했고 미 군정청 경부부장이 되어 치안

유지와 좌익색출에 진력. 48년 제주 4.3항쟁 시 초강경진압을 지시하여 3만 명이 넘는 민간인희생을 초래한 장본인.

이후 대통령특사와 유엔 한국대표 등을 역임하고, 50년 한국전쟁 때 내무장관으로 대구 사수의 진두지휘를 담당하였다.

그 후 대통령 이승만과의 의견 충돌 로 사직하고, 반독재투쟁의 선봉에 나섰다. 54년 제3대 민의원에 당선되고, 이듬해

민주당 최고위원이 되었으며, 56년 대표최고위원에 선출되어 야당을 지도하였다. 58년 제4대 민의원에 당선되고,

60년 민주당의 공천을 받아 대통령선거에 출마하였으나 선거를 1개월 앞두고 미국의 월터리드 육군병원에서 병사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 독립운동의 공은 있으나 해방 이후 친일부역세력이 잔존한 경찰을 그대로

용인하였고 이들로 하여금 제주 등 여러 곳에서 민간인학살과 용공조작과 고문 등을 지시한 과오 역시 뚜렷하다.


이 시영(1869-1953):서울 생, 호는 성재. 1885년 사마시에 급제 형조좌랑이 되었고, 1891년 부승지와 우승지를 거쳐

1905년에는 외부교섭국장과 평남관찰사를 역임했다. 1910년 국권을 빼앗기자 만주로 망명, 류허현에서 신흥강습소를 설립,

독립군양성에 힘쓰다가 1919년 4월 상하이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법무총장 재무총장을 역임,

1929년 한국독립당 창당에 참가, 초대 감찰위원장에 피선되고, 1933년 임시정부 직제 개정 때 국무위원 겸 법무위원이

되어 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1945년 광복과 더불어 귀국하였다. 그 후 대한독립촉성회 위원장으로 활약하다가 1948년

정부가 수립되자 초대 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부산정치 파동 시, 대통령 이승만의 비민주적 통치에 반대하고

1951년 부통령을 사임, 1952년 제2대 대통령선거에 민주국민당 후보로 입후보 하였으나 낙선하였다. 1953년 피난지인

부산에서 노환으로 죽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


김 성수(1891-1955):전북 고창 생, 호는 인촌. 호남의 명문 지주가문의 아들로 송진우, 백관수 등과 교유하였고,

14년 일본 와세다대학 정경학부 졸업. 귀국 뒤에는 중앙학교를 인수하고, 17년 교장에 취임. 19년 경성방직회사를

창설하였고 20년 동아일보를 창간했다. 32년에는 보성전문을 인수하고 교장에 취임하였다. 38년에는 친일단체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 발기인이사 및 동 연맹 산하 비상시생활개선위원회 위원을 지냈다. 이후에도 국민총력

조선연맹이사(40) 총무위원(43), 흥아보국단 결성준비위원(41), 조선임전 보국단 감사(1941)등으로 활동하면서

학병제와 징병제를 찬양하는 글을 쓰거나 강연을 하면서 친일부역활동에 참여하였다.

45년 광복 뒤에는 미 군정청 수석고문관을 거쳐, 46년에만 한국 민주당 수석총무총재, 동아일보 9대 사장,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부회장 등을 지냈다. 47년 신탁통치반대투쟁위원회 부위원장이 되었고, 49년 민주국민당 최고

위원이 되어 51년 사임한 이시영의 뒤를 이어  부통령에 취임하였으나 그 역시 이승만의 계속되는 독재에 반대하여

이듬해 5월 사임하였다. 같은 해 12월 민주국민당 고문이 되었으며 그 후 야당에서 활약하였다. 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정치 전면에 나서지 않는 정치스타일로 한민당의 대부이자 후견인이었으나 친일부역

경력이 뚜렷하며 해방 후에도 지주계층과 친일세력의 이해를 대변했다.


박 진목(1918-):  한국전쟁사에서 가장 독특한 위치에 있는 반전 평화운동가.

유서 깊은 독립운동가 집안 출신으로 형제들과 부친이 모두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해방 후 몽양의 건준에 참여하였고

건준와해 후 남로당에 가입했으나 곧 결별했다. 한국전쟁으로 동족상잔의 비극을 몸소 체험 후 51년 서울에 남아

스승 최익환과 함께 서울시 인민위원장 이승엽을 만나 무의미한 전쟁의 종전을 제의하여 협상을 시작하였고

이 승엽의 긍정적인 대답을 이끌어낸 후 4월 이번에는 미군과 접촉 하여 종전협상의 필요성을 설득하여

미군의 특사격으로 종전협상을 위해서 평양에 파견되었으나, 김일성을 만나지 못한 채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돌아온다. 이후 미군 수사대와 이승만정권의 집요한 조사를 받았으나 1년 만에 석방되었다.

그의 시도는 다소 무모했으나 비극의 한국 전쟁사를 통해서 남과 북을 오가며 무의미한 살육을 멈추고

평화의 소중함을 양 정권에 호소했던 사실자체만으로도 역사적 의미가 매우 크며, 이러한 움직임은

미국과 북한을 본격적인 정전협상의 테이블로 이끄는데 일조했다. 박 진목은 독립운동의 공이 컸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서훈신청을 하지 않은 채 통일운동과 반전운동에 헌신하고 있다.


김 규식(1881-1950): 경기 양주 생, 호는 우사. 대표적인 독립운동로 미국에 유학, 철학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하였다가 13년 중국으로 망명.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외무총장이 되었고 파리 강화회의에 한국대표로 참석

 ‘한국의 독립국가로의 복귀에 관한 청원서'와 '한민족의 주장'을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하여 일제침략의 악랄함과

한국독립의 필연성을 호소하였다. 22년 1월 소련의 페트로그라드에서 열린 동방피압박민족대회에 한국인 대표 52명중

1인으로 참석하여 몽양과 함께 의장단에 선발되어 활동했고,20여년 간 중국의 대학에서 교수생활과 독립운동을 병행했다.

독립달성을 위한 최대의 역량을 끌어내기 위한 그의 좌우 합작염원은 좌우 해외 9개 단체가 하나가 된 조선 민족혁명당

으로 결실을 맺는다. 그러나 그의 열망과 달리 좌우합작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김 규식은 백범을 도와 임정에서

주도적인 활동을 했고 광복 후에도 분단을 막고 통일된 조국을 위한 좌우합작과 남북협상에도 헌신했지만,

정치가이기보다는 학자에 가까웠던 그의 한계와 쇠약한 건강으로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했다. 한국전쟁 발발 시

서울에 잔류 했던 김 규식은 북한정권에 납치되었고 그해 겨울 급속한 건강악화로 별세하였다.

건국과 독립운동에 공이 뚜렷했음에도 불구하고 납북되었다는 이유로 우사의 업적을 인정

하지 않았던 대한민국 정부는 1989년에 가서야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조 소앙 (1887-1958):경기 양주 생, 호 소앙. 본명 용은. 일본 메이지[明治]대학 법과졸업. 조선법학전수학교에서

교편생활을 하였다. 1919년 3.1운동 후 중국으로 망명, 임시정부 수립에 참가하여 국무위원 겸 외무부장 등을 지내고,

제네바에서 열린 만국 사회당대회에 한국대표로 참석하여 임시정부의 승인을 얻었다. 1922년 임시정부의 내분

을 수습하려고 김구, 안창호등과 시사책진회를 결성하고, 1928년 한국독립당을 창당하였고 1937년 한국광복전선

결성에 한국독립당 대표로 참가하였다.  1945년 광복으로 귀국하여 국민의회를 조직하고, 상무위원회 의장을 거쳐

1946년 한국독립당 부위원장이 되었다. 1948년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고 김 구 등과 남북협상에 참가하였다.

정부 수립에 불참하였다가 1950년 제2대 국회의원에 출마하여 전국 최고득표로 당선되었으나,  한국전쟁 때

납북되어 북에서 활동하다 58년 북한에서 사망했다. 독립운동가 출신중 탁월한 정치사상가였던 조소앙은

개인과 민족 그리고 국가가 균형을 이루어 독립과 신국가를 달성하자는 근대적 정치사상인 삼균주의를 제창하였으나,

해방이후의 현대사는 그에게 정치적 이상과 경륜을 펼칠 기회를 허락하지 않았다. 저서에 한국문원, 소앙집, 유방집

등이 있으며, 1970년 삼균 학회에서 소앙문집 상하권을 간행하였다. 납북후의 활동으로 뒤늦게야 1988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독립기념관 경내에 그의 사상인 삼균주의 어록비가 세워져 있다.


송 진우 (1889-1945):전남 담양 생. 호는 고하. 어려서 한학을 배우고, 1907년 창평의 영학숙에 들어가 고광준, 김성수

 등과 영어 등 신학문을 배우다가 김성수와 함께 일본으로 유학. 세이소쿠 영어학교와 긴조중학을 거쳐 1910년 와세다대학에

입학하였으나, 곧 귀국하였다. 이듬해 다시 도일, 메이지대학 법과에 입학한 후 유학생 친목회 총무, 호남유학생 회장

등으로 항일운동을 벌인 한편, 김병로 등과 유학생회의 기관지 학지광을 펴냈다. 1915년 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이듬해 김 성수가 중앙 학교를 인수하자 교장에 취임,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불어넣는 데 주력하였다. 3.1운동 때는

민족대표 48인의 한 사람으로 피체되어  1년 반의 옥고를 치르고 출감 하여 같은 해 동아일보사가 주식회사로 개편되자

사장에 취임하였으나, 1936년 일장기 말살사건으로 사임하였다. 1940년 동아일보가 폐간되자 일제에 대한 협력을 거부,

은둔 회피하여 오던 중 1945년 8월 10일 총독부로부터 정권인수의 교섭을 받았으나 이를 거부하였다. 광복 후 여운형 등이

주동이 된 조선건국준비위원회와 맞서 우익세력을 규합, 한국 민주당을 결성하고 수석총무가 되었다. 미군정에 적극

협력하면서 뒤이어 환국한 이승만 및 임시정부 지도자들과 함께 정부수립에 힘쓰는 한편 속간된 동아일보 사장에 취임하였다. 그해 12월 28일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한국의 신탁 통치안이 전해지자, 반탁을 강력히 주장하는 우익전체의 견해와 달리

차분하고 사려 깊은 대응을 주장하다가 극우파 한현우에게 암살당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해방 후 국내파 공산주의의 거물 현준혁과 함께 암살테러의 희생양이 된 송진우의 죽음으로 이후 한국현대사는

중용과 화합보다는 극단과 분열이 앞서가는 급속한 분단과 동족상잔 내전의 길로 치닫게 된다.


여 운형(1886-1947):경기 양평 생. 호는 몽양. 우무학당 등에서 한학을 공부한 후 1907년 고향에 광동학교를 세우고,

1908년 그리스도교에 입교하였다. 강릉에 초당 의숙을 세워 민족의식을 고취하던 중 국권이 피탈되고 학교가 폐쇄되자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였다. 선교사 클라크를 따라 서간도의 신흥무관학교를 견학하며 국외에서의 독립운동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학교를 중퇴, 1913년 중국으로 건너갔다. 난징 진링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다가 상하이로 가 1918년 신한

청년당을 발기하여 김규식파리평화회의에 대표로 파견하였다. 1919년 4월 상하이에서 임시정부가 조직 되자

임시의정원 의원이 되었는데, 일본정부는 이를 자치운동으로 회유하고자 그 해 11월 그를 도쿄로 초청하였으나 오히려

장덕수를 통역관으로 삼아 일본의 조야인사들에게 한국독립의정당성을 역설하였다. 1920년 고려공산당에 가입,

1921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원동피압박민족대회에 참석, 한국의 사정을 세계에 호소하였다. 1929년 제령위반 죄로

3년간 복역하고, 1933년 출옥, 조선중앙일보사 사장에 취임하였는데 1936년 신문 이 일제에 의하여 정간되자 사임한 후

1944년 비밀결사인 조선건국동맹을 조직하였다. 8.15광복을 맞아 안재홍 등과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 9월 조선 인민

공화국을 선포하였으나 우익진영의 반대와 미군정의 불인정으로 실패하였다. 12월 조선인민당을 창당, 1946년 29개의

좌익단체를 규합하여 민주주의민족전선을 결성하였으나 분열되었다. 이후 근로인민당을 조직하였으나 극좌극우

양측으로부터 소외당한 채 좌우합작운동을 매진하던 중 극우파 한지근에 의하여 1947년 암살되었다.

분단이 곧 내전을 부를 것을 예측했고 이를 막기 위해서 좌우합작에 의한 통일 정부구성을 시도했지만 시대의 흐름은

그를 외면 했다. 좌도 우도 아닌 중간의 길을 추구했던 몽양은 오랫동안 금기와 외면의 대상이었으나 2005년 너무나

늦게 건국과 독립의 공이 인정되어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김   구(1876-1949): 황해 해주 생, 호는 백범, 본명은 창수. 1893년 동학에 입교하여 동학운동에 나섰고 이후

 일제의 국권침탈에 맞서 지속적인 독립운동과 농민운동을 벌였으나, 1919년 3.1운동이후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에

참여한다. 애국단을 조직하여 이봉창, 윤봉길의 의거를 주도했으며 이후 난징에 무관학교를 설립했고 1935년 한국국민당

을 조직했고 1940년 광복군을 창설한다. 1944년에는 임시정부 주석이 되었고 반세기가 넘는 세월동안 항일독립투쟁에

헌신하였다.  해방 후 귀국하여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에 반발 이승만과 함께 전국적인 반탁운동에 나서면서 우익노선을

지향했으나, 미소공위의 결렬 후 분단과 내전이 가시화되자, 이승만과 결별하고 좌우합작노선으로 선회하여 뒤늦게 남북

정치협상에 나섰지만 분단체제성립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이후 이승만과 건국주도세력의 가장 큰 정치적 방해물이 되었고

결국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일 년전 인  49년 6월 26일 장은산의 사주를 받은 안두희에 의해서 암살되었다. 평생을 암살과

테러를 주도했던 그가 테러를 포기하고 후일 대한민국의 건국이념이 된 문화주의를 표방한 순간 테러의 제물이 되었다.

백범은 우직하고 강건한 민족주의 지사였으나 시대의 흐름을 읽어내는 정치감각과 조직력이 부족했고 그의 실패와 죽음은

곧바로 한국전쟁의 비극으로 직결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