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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한국 전쟁사 인물지 [2]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편

대한인 2013. 5. 26. 05:00

다시 쓰는 한국 전쟁사 (62)

-인물지 [2]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편-



[조선민주주의 인민 공화국 편]


최 용건(1900-1976):평북 태천 생, 오산학교를 중퇴하고 중국으로 건너가 윈난 군관 학교를 졸업하고

황포군관학교 교관을 지냈다.26년~36년까지 만주에서 항일 빨치산 운동에 헌신했고 36년~39년에는

동북항일연군 7군단장과 제2로군 참모장을 역임했다. 동북항일연군 시절 김일성을 만나 평생 동안

김일성의 최측근이 되었고 40년 김일성과 함께 소련으로 피신하여 88여단에서 항일투쟁을 계속하다가

해방 후 귀국하여 인민 공화국의 핵심인물이 되었다. 46년 인민위원회 보안국장, 47년 인민위 상임 부위원장,

48년 인민군 총사령관이 되었다. 50년 6월 김일성의 전면전 시도에 반대하여 한국전쟁 초기과정에서 소외되어

후방방위를 맡았다. 이후 중조연합사령부 부사령관으로 복귀한 후 53년 2월에는 차수로 승진했다.

전후에도 1-5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과 로동당 중앙위 부위원장, 최고 인민회의 상임위원장, 로동당 중앙위

비서국 비서와 72년에는 국가 부주석 겸 중앙인민위위원이 되는 등 군과 정계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김 책과 함께 김일성계파의 핵심 인물로 12세나 연하인 김일성을 리더로 인정하고 평생 지지했던 인물로 평가된다.

그러나 김일성은 최 용건의 전면전 반대를 무시했고 한국전쟁 결과는 참담했다. 이후 최용건의 이력에서 보듯

김일성은 그를 극진히 예우했다.

 

 

강   건(1918-1950): 경북 상주 생, 10세 때 중국동북 닝안현으로 이주하여 33년부터 닝안유격대에 입대하면서

항일운동에 투신한다. 34년에는 길동유격대로 35년에는 동북 항일 연합군 제 5군 소속으로 활동했다.

이후 동북항일연군 제3사 9단 정치위원이 되었고 42년에는 제2교도영 정치위원으로 활약했다.

해방 직후 귀국하지 않고 잠시 연변에서 활동 후 46년 귀국하여 인민군 창설에 깊이 관여했고

47년 4월 최초로 창설된 인민군 2사단 초대 사단장이 되었다. 47년 4월 민족보위국장, 48년 3월 북로당 중앙위원,

동년 8월 최고인민회의 1기 대의원을 맡았고 한국전쟁 당시 조선인민군 총참모장으로 인민군을 지휘하다가

9월 낙동강 전선에서 미군의 폭격으로 전사했다. 50년 9월9일 공화국 영웅칭호를 받았고 68년 조선로동당

창건 20주년에는 사리원에 강건 거리가 생겼으며 75년 10월 남한의 사관학교격인 군관학교에 강건의 이름을

추서하여 강건 종합군관학교가 되었다.


김   책(1903-1951): 함북 학성(현 김책 시)생, 중국 옌지로 이주하여 유년시절을 보냄.  지린성 동흥중 재학시

 반일지하단체 활동을 하다 27년 체포되어 복역했으며, 이후 평텐 지린등지에서 수차례 옥고를 치뤘다.

출감 후 북만주 일대에서 항일 무장투쟁에 적극 가담하였고 36년 이후 조국광복회 조직에도 참여했다.

이후 동북항일연군에서 핵심 정치 요원으로 활동했고 수많은 유격전에서 전공을 세웠다. 연군시절 김일성과

최용건을 만나 평생의 연을 맺고 함께 귀국하여 인민공화국의 핵심 인물이 되었다. 46년 평양정치군사 학원 원장을

거쳐 48년 북조선 로동당 중앙위 위원을 역임했고 48년 인민공화국창건과 더불어 부수상 겸 산업상에 취임했다.

한국전쟁 당시 군사위 위원이었고 최 용건을 대신 하여 전선사령부 총사령관이 되었으나 결국 패전했다.

이후 51년 1월 전선사령관으로 재직 중 전사했다. 사후 공화국 영웅칭호 및 국기 훈장 1급이 추서되고

고향 학성 시는 김 책시가 되었으며 김 책 공업대학 등으로 기념되고 있다.   


김 일성(1912-1994): 평남 대동 생, 본명 김 성주. 김일성이라는 이름은 항일투쟁시절 동료들이 지어준 이름이다.

19년 만주로 이주하여 유년시절을 보냈다. 학창시절부터 항일 투쟁에 관심이 많았으며 27년 조선공산주의자 청년

동맹을 결성 항일투쟁에 나선다. 30년대 부터 본격적인 항일무장투쟁에 헌신. 32년 안도현에서 반일유격대를 조직했고

34년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 제3단 정치위원이 되었으며 36년 개편된 동북항일연군 제2군 정치위원, 그해 7월에는

제 1로군 6사장으로 활동했다. 37년 6월 휘하 6사 병력으로 보천보를 기습 공격하면서부터 유명해졌고 일제의 가혹한

토벌에도 불구하고 개편된 항일연군 제2방면군 군장으로 40년 초까지 수차례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41년 일본군의 추격을 피해 소만국경을 넘어 소련영내로 피신하여 동북항일연군 교도려 제1영장이 되었다.

해방이후 원산을 통해 김책, 최용건등과 귀국, 소련 군정의 적극적인 후원 하에  45년 평양 시 군중대회에서 처음

북한대중에게 모습을 드러내며 북한 정치계에서 부각되기 시작했고 이후 조선 공산당 북조선 분국의 창설을 주도하고

분국 책임비서가 되었다. 46년 2월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 위원장에 취임하여 토지개혁 등 일련의 민주개혁을 주도했다.

그가 공산개혁에 성공할 수 있었던 주요원인은 소련 군정의 지원과 분단체제로 인한 반대세력의 대거 월남이라는 특수성에

기인했으나 이후 북한사회는 이견이 발생하기 어려운 균질화 된 사회로 정착되었다.  47년 2월 북조선인민위 위원장에

피선되었고 이후 사실상 분단정부수립의 길을 걸었다. 그 역시 분단의 책임이 명백하다.

 48년 9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되면서 내각 수상에 선임되었고 49년 남북로동당 합당으로 조선로동당 중앙위

위원장이 된다. 공화국 수립이후 국토완정 론에 입각한 전면전을 준비, 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을 시작했고 군사위

위원장과 인민군 총사령관으로 전쟁을 주도했으나 많은 희생과 피해만 낸 채 전쟁은 성과 없이 끝을 맺었다.

전후 폐허가 된 북한사회의 복구에 진력하는 동시에 권력 강화에 착수하여 53년 남로당계 숙청으로 한국전쟁의 책임을

전가했고 56년 8월 종파사건 등 수차례의 거듭된 숙청으로 유일지도체계 확립의 기반을 닦았다. 65년부터 주체사상을

제창하기 시작 70년대 들어 더욱 더 권력기반을 강화했고 72년 제정된 헌법에 따라 국가주석에 취임했다.

 80년대 접어들어 공식적으로 아들 김정일을 후계로 키웠고 80년대 말 권력승계준비를 마쳤다. 92년 대원수에 추대되었고

94년 김 영삼 대통령과의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독립운동에 헌신했지만 동족상잔의 내전인

한국전쟁을 시작한 원죄에서 결코 자유롭지 않으며 전후 완전히 파괴된 북한사회를 성공적으로 복구해낸 지도력을

발휘했으나 이후 계속된 독재와 경직된 체제유지로 점차로 침체되기만 하는 북한사회의 원인을 제공하기도 한 20세기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논쟁적인 인물의 한명으로 기억된다. 극단적인 찬양과 그에 못지않은 증오로 점철된 그의 생애에

 대한 평가는 분단과 한국전쟁사 한가운데에서 여전히 해결해야 할 숙제로 남아있다.


무 정 (1905-1952): 본명 김 무정. 14세 때 3.1운동에 참가했고 중앙고보에 입학했으나 18세에 항일운동으로 퇴학.

이후 중국으로 건너가 24년 북방군관학교에 입학 포병과를 졸업하고 25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여 34년 중국공산당의

대장정에 참가했던 유일한 조선 인 생존자로 중국공산당 내에서도 명성이 높았다. 37년 팔로군 총사령부 작전과장이 되었고

팔로군 최초의 포병단 단장이 될 정도로 유능한 포병지휘관이었다. 41년 화북조선청년연합회 결성을 주도해 항일투쟁에

헌신했고 이후 조선의용군을 결성 사령관이 되었다. 해방 후 연안계의 대표인물로 귀국하여 조선인민군의 전신인

보안대의 포병 담당 부사령관. 48년 인민군이 창설되면서 인민군 부사령관과 한국전쟁 개전 직후 김 광협을 대신하여

2군단장이 되었다. 50년 9월 인민군이 패주하면서 평양방위사령관이 되었으나 동년 12월 패전과 명령 불이행, 부하들에

대한 불법총살 등의 이유로 극심한 비판을 받고 직위를 박탈당한 후 52년 10월 위장병으로 사망했다.

그러나 무 정은 항일투쟁과 군 경력 등에서 김일성, 박헌영에 버금가는 거물이었고 이러한 위상 때문에 신생공화국

수상 김일성으로부터 해방 직후부터 심한 견제를 받아 당과 정부, 군, 의회 그 어디에서도  걸 맞는 대우를 받지 못했다.

무정이 패전을 이유로 숙청된 것도 유력한 경쟁자를 제거하려는 의도가 더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에 대한 평가는

중국에서 더 높다. 중국인민군 총사령 펑더화이는 처지가 불우해진 무정을 다시 중국으로 데려가려 했으나 무정은

남기를 희망했고 그렇게 조선에서 죽었다. 무정이 후일 공화국 혁명열사 묘지에 안장된 것으로 보아 사후복권된

것으로 추정된다. 

 

김   웅(1914- ):경북 김천 생,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하고 항일독립투쟁에 헌신. 8로군 연대장과 조선의용군

제1 지대장을 역임했고 팔로군 166사단장으로 국공내전에 참가 전공을 세웠다. 48년 귀국후 민족보위성 전투훈련국장과

인민군 1사단장을 역임했고 한국전쟁 개전시 제1군단장으로 개전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했다. 이후 낙동강 서측 전선을

맡았고 전사한 강건의 후임으로 전선 총사령부 참모장을 역임했으며 이후 동부전선의 2,3,5군단을 지휘하며 전선 총사령관

직을 맡았다. 51년 민족보위성 부상이 되었고 전사한 김 책의 후임으로 전선사령관(상장)이 되었고 58년 대장으로 예편.

연안파 숙청 때 실각하였다가 68년 다시 복당 복권되었다. 한국 전쟁 내내 인민군 야전부대를 지휘했던 야전군인.

 

 

김 광협(1913-):함북 출신. 소련 육사 졸업. 제2차대전 중 길림 시 보안군부대장을 역임. 해방 후 민족보위성

작전국장과 48년 인민군 2사단, 3사단장을 역임했고 50년 6월 인민군 2군단장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했으나

국군 6사단의 저지선을 돌파하지 못하고 패전하여 2군단 참모장으로 좌천되고 이후 인민군 1사단장이 되었다.

그 해 9월 패전시기에  2군단장으로 복직했고 51년 2월 인민군 총참모장이 되었으며 52년 대장으로 승진했다.

57년 민족보위상이 되었고 60년 부수상을 역임했다.


방 호산(?-1959?):초기 행적 미상. 연안계의 대표인사로 37년 모스크바 동방노동대학에서 군사교육을 받았고

한국전쟁시 4사단장 리권무, 김일 등과 동기생이다. 45년 중국으로 돌아와 중국인민해방군 동북의용군 166사단의

정치위원과 사단장을 역임했고 국공내전에서 많은 전공을 쌓았다. 49년 7월 166사단을 이끌고 북한에 들어와 개편된

인민군 6사단의 초대 사단장이 된다. 50년 6월 한국전쟁 시 국군 1사단의 저지선을 돌파, 서울에 입성했고 빠른 행군으로

호남지역을 휩쓸고 7월 기습적으로 경남진주지역에 출몰 미 8군을 경악케 했다. 서울 점령과 낙동강 전선에서의 전공으로

공화국 영웅칭호를 받았으며 마산공략 실패 후 전선이 붕괴되자 지리산과 태백산맥을 이용해 38선 이북으로 탈출에

성공해 공화국 이중영웅이 되었다. 이후 인민군 5군단장으로 재직하면서 펀치볼 전투 등에 참전했으나 53년 말 숙청되어

탄광지배인으로 좌천되었고 59년 그마저도 다시 숙청되었다고 전한다.  그 역시 무정처럼 연안계 군 유력인사에 대한

김일성의 견제가 원인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리 권무(?-?):방호산과 같은 연안계로 팔로군으로 항일투쟁전선과 국공내전에서 많은 전공과 경험을 쌓았던 야전군인.

49년 동북의용군 3개 사단이 조선인민군에 편입되던 시기에 북한에 들어와 한국전쟁 개전 초 4사단 사단장으로 재직했다.

국군 7사단을 하루 만에 궤멸시키고 동두천과 의정부축선을 돌파 가장 먼저 서울에 입성했다. 낙동강 패전 후 태백산맥을

넘어 탈출했고 이후 재편된 인민군 1군단장을 역임했다.


남  일(1913-1976): 39년 소련 타슈켄트 사범대 졸업. 소련군에 입대하여 2차대전 중 소련군 대위로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참전했다. 이후 사단 참모장으로 뱌르샤바 해방에 참여했고 해방 후 소련군과 함께 평양에서 활동했다.

46년 북조선 임시인민위 교육국 부국장과 48년 조선로동당 중앙위 후보위원 동년 8월 최고인민회의 1기 대의원이 되었다.

48년 1차 내각에서 교육성 부상, 한국전쟁 당시 조선인민군 총참모장과 정전회담 북한대표 등을 역임했다.

53년~67년까지 외무상, 국가건설위원회 위원장, 철도상으로 재직했다. 72년 헌법제정에 따라 5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중앙인민위 위원, 정무원 부총리 겸 경공업위원장을 맡았고 54년 외무상 재직 시 정전협정에서 제시한  한반도 평화를

위한 정치협상대표로 제너바 회담에 참석하기도 했다. 북한 최고 훈장인 김일성 훈장, 국기훈장 1급, 자유독립 훈장

제 1급을 받았다.


최   현: 동북 항일 연군 출신으로 만주에서 김일성과 항일 투쟁을 같이 했고 이후 소련으로 건너가 소련군으로 복무했다.

해방 후 귀국하여 인민군 창설에 참여, 서해 3경비여단장을 지냈고 한국전쟁 개전 시 인민군 2사단장으로 참전했으나

국군 6사단의 저지선을 돌파하는 데 실패하여 김일성의 문책을 받았다. 50년 9월 낙동강 패전이후 태백산과 원산일대에

제2 전선을 형성하여 미군과 국군의 전투력을 분산시키는데 성공했고 이 공로로 인민군 2군단장이 되었고 중국군의

겨울공세를 선도했다. 56년 대장이 되었고 65년에는 민족보위상을 역임했다. 실전에서 잔인하다는 평을 들을 정도로

부하들을 몰아세웠던 야전지휘관.

 

 

김   일(1910-1984):함북 어랑 생. 32년부터 지하당 투쟁 등을 통해 항일운동을 했고 35년부터 항일무장투쟁에 가담

동만주 일대에서 김일성과 인연을 맺었고 동북항일연군에서 군정치 간부로 활약했다. 해방 후 귀국 45년 북조선 공산당

평북 당비서, 46년 북로당 중앙위 상무위원 겸 정치위원 동년 9월 인민군 1사단 문화부사단장, 인민군 사령부 문화부사령관,

내무성 정치국장, 전선사령부 군사위원, 평남도 위원장등을 역임하며 후방의 전시업무를 주로 관장했다. 김일성 만주파

직계로 53년 조선로동당 중앙위 비서와 중앙위 부위원장, 상무위원 정치위원 군사위원등 요직을 맡았다. 54년 내각 부수상

겸 농업상으로 전후 복구와 사회주의 기초 건설을 위한 정책수립을 맡았고 59년 내각 제1부수상으로 승진했으며 66년에는

조선로동당 정치위 상무위원 겸 비서가 되었다. 79년 조평통 위원장이 되어 대남관계에도 참여.

김일성의 충실한 안방살림꾼 역할을 했다. 노력영웅칭호와 함께  김일성 훈장과 국기훈장1급등 많은 포장을 받았다.


리 학구(?-?):인민군 2군단 작전참모로 총공격명령을 휘하 사단에 지시했던 인물. 낙동강 전선에서 13사단 참모장으로

근무 중 무모한 공격을 지시하는 조(최)용진 소장에게 반발하여 그를 쏘고 미군에게 투항하였으나, 미군은 그를 포로

취급하여 친공포로 들과 함께 수용했고 이를 계기로 그는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다시 친공포로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그가 위협에 굴복해서 이러한 행동을 했는지 명확하지는 않으나 그의 행동은 후일 그의 투항이 위장된

것이었다는 해석을 낳기도 했다. 투항했음에도 남한 잔류를 거부하고 다시 북으로 돌아갔으나 북에서도 반동으로 몰려

처형되었다고한다. 한국 전쟁 기간에 투항한 인민군 고위장교 중 행적에 대해 논란이 많은 인물.

 

 

김 달삼(1925-1950?):제주 대정 생, 본명은 이 승진. 일본 교토 세이호 중학과 주오대학 법과를 졸업했다.

그의 가명 김달삼은 독립운동을 했던 장인 강문석의 이름이기도 했다. 해방 후 귀국하여 대구에 머물다 46년 제주로

돌아와 대정 중학교에서 역사와 공민을 가르치다, 47년 3월 이후 남로당 도당간부로 활동 중 제주 4.3항쟁이 발생하면서

자연스럽게 투쟁의 주역이 되었지만 의도적인 폭동을 선동했던 것은 아니었다. 일본 학병 시절 안면이 있던(이 역시 확실

치 않음) 9연대장 김 익렬과 담판하여 평화적 해결을 모색했지만 여의치 않았고 4월20일 경 이덕구에게 지휘권을 넘기고

제주를 떠나 월북 48년 8월 인민대표자 회의에서 제주 4.3의 경과를 보고했다. 이후 태백산 등지에서 유격대 투쟁을 주도

했고 군과 경찰이 수차례 그의 사살을 발표했지만 확인되지 않았다. 김 익렬의 증언에 의하면 김달삼은 처음부터 조직적인

봉기를 의도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대한민국에 의해 4.3폭동을 주도한 원흉으로서 지목되어 집중 토벌대상이

되었으나 시신이 확인된 적은 없다. 북한의 기록에 따르면  50년 9월 한국전쟁 중에 전사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이 역시도

정확하지는 않다. 김 달삼은 자신의 존재가 어렵게 찾은 제주의 평화를 깰 것을 우려하여 제주를 빠져나왔지만 그의 희망

과는 달리 제주 4.3은 비극이 되고 말았고 그 역시 빨치산이 되는 길 외엔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남 도부(1920-1955):본명 하준수로 이 현상과 함께 남조선 빨치산 부대장의 쌍벽을 이뤘던 인물이다.  부유한 지주 집안

출신으로 일본 주오 대학 법학과 유학중 학병소집에 저항하여 보광당을 결성하고 지리산으로 숨어들어 유격대 활동을

시작하면서 항일투쟁활동을 했다. 해방 후에도 지리산을 거점으로 야산대 활동을 했고 일시 월북하여 강동 정치학원

교관을 역임했으며 한국 전쟁 개전과 동시에 빨치산 부대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다시 남하했다.

일설에 의하면 남부군을 실질적으로 지휘한 사람은 이현상이 아니라 남도부였다는 주장도 있다.

지리산 빨치산 세력이 약화되면서 대구로 잠입했으나 54년 1월 대구 도심에서 특무대에 의해서 체포되었고

 다음해인 55년 여름 서울 수색에서 총살형에 처해졌다.


박 영발 (1913-1954):경북 봉화 생, 대지주의 집안에서 태어나 한학을 공부. 32년 적색농민 조합사건에 연루 수배되었고

40년대 만주에서 항일운동을 하다가 체포, 일제의 고문으로 다리를 절게 되었다. 광복 후 출감하여 조선 공산당 외곽단체인

전평 집행위원이 되었고 46년 남로당 간부가 되었으며 47년 가족을 이끌고 월북했다. 한국전쟁 중 조선로동당 전남도 위원장

이 되어 지리산을 중심으로 빨치산 유격대 활동을 전개했다. 51년 7월 남부군 사령관 이 현상이 제시한 빨치산 부대

개편안을 원칙과 중앙당의 명령을 이유로 반대했고 이후 대대적인 토벌로 빨치산 세력이 거의 와해되자 인민속으로

들어가 지하당 투쟁을 할 것을 주장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53년 전남도위원장을 사임했고 점점 전세가 불리해지자

 54년 1월 지리산에서 자살했다.


방 준표 (1906-1954):경남 거제 생. 대구사범졸업. 하동에서 보통학교 교사생활을 하던 중 신간회활동으로 검거되었고

이후 항일운동을 벌였다. 해방 후 조선공산당 외곽 단체인 전평 결성때 철도노조 대표가 되었다. 47년 박 헌영의 추천으로

모스크바 단기 유학을 다녀왔고 50년 전쟁과 동시에 전북유격대 사령관이 되었다. 빨치산 투쟁 당시 남부군 사령관

이현상의 활동에 부정적이었고 51년 7월 남한 6개 도당 위원장 회의에서 이 현상의 부대 개편안을 박 영발과 함께 반대했다.

 54년 1월 덕유산에서 토벌대의 습격을 받고 생포되기 직전 수류탄으로 자폭했다.


허 가이 (1890-1953):함북 출생. 어려서 부모를 따라 소련으로 이주했고 모스크바 로모노소프대학을 졸업.

우즈벡 공화국 타슈켄드 주당 비서를 지낸 공산당이론 전문가. 광복 후 소련군정과 함께 귀국하여 소련파의 지분으로

인민공화국 정권에 참여. 46년 북로당 중앙위 조직부장과 상무위원 겸 정치위원이 되었고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에

피선되기도 했다. 49년 박헌영과 함께 조선 로동당 중앙위 부위원장을 맡았고 51년에는 부수상이 되었으나,

50년 가을 패전당시 와해된 로동당 조직에 대한 무리한 강경정책으로 당내 비판을 받았고 한국전쟁 기간 중 점차로

감소되는 소련의 영향력으로 세력을 잃고 53년 3월 남로당계와 종파를 조성한다는 이유로 숙청의 위기에 몰리자 자살했다.

그의 몰락은 해방이후 막강한 배후영향력을 가졌던 소련 세력의 퇴장과 궤를 같이 했다.


리 승엽(1905-1953):경기 부천 생, 뱃사공의 아들로 태어나 인천에서 성장. 19년 인천 상업학교 재학 중 3.1운동에

참가하여 퇴학당했고 일본유학을 갔으나 곧 귀국했다. 23년 공산청년동맹에 가입했고 25년 제1차 조선공산당에 입당

했으며 조선노총동맹중앙집행위원이 되었다. 26년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일제에 체포 이듬해 석방되었고 경상도지역

에서 활동했다. 36년 조선공산당 청년동맹 재건을 꾀하다 37년 체포되어 39년까지 복역했고 40년 다시 체포되었으나

전향서를 쓰고 출옥하여 식량배급조합 이사로 공산주의 운동에서 일시 이탈 친일 부역활동을 했다.

해방 이후 박헌영계에 합류하여 45년 9월 재건된 조선공산당 정치국원에 선임되고 인공 중앙인민위 사법부장

대리로 활약했다. 46년 민주주의 민족전선 상임위원에 피선되고 박헌영이 월북하자 대리임무를 수행하면서 남로당

경기도당위원장과 해방신문 주필을 역임하다가 48년 월북. 이후 조선 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대의원과 사법상을

역임하면서 남로당계의 2인자로 인민공화국 권력의 핵심이 되었다. 그러나 무모한 무력투쟁으로 남로당 조직력을 노출

약화시켰고 과장된 남한 내 상황보고와 판단으로 한국전쟁 시 인민군이 서울만 점령하면 수십만 남로당원이 봉기할 것

이라는 오판의 결정적 근거를 제공했다. 한국전쟁 발발 후 서울시 임시인민위원장이 되었고 51년 로동당 비서 52년 인민

검열위원장을 역임했으나 53년 8월 미제간첩혐의로 재판을 받고 사형을 선고받아 형이 집행되었다. 리승엽은 김삼룡

이주하가 없는 북한 내 남로당계에서 사실상 2인자로 군림했으나 일제 시 부역의 경력과 해방 후 은밀히 미군정에

지속적으로 협력한 점으로 미루어 볼 때 기회주의자로 분류되며 전체 남로당계가 간첩은 아니었으나 그에 대한 간첩

혐의는 상당한 신빙성을 지니고 있다고 평가된다.


임   화(1908-1953):서울 생, 시인. 본명은 임인식. 임화는 필명이다. 보성중학에서 수학했고 26년 카프에 가입하면서

좌파문학의 대표적인 인물이 되었다. 문학활동과 함께 영화 연극등 다양한 문화활동을 주도했고 32년 카프 서기장이

되었으며 학예사 대리로 사해공론등을 발행했으나 43년 변절하여 문인보국회 등에서 친일부역행위를 하였다.

해방후 조선문학가 동맹에 참여했고 중앙집행위원이 된다. 47년 월북하였으나 53년 남로당 숙청 때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되었다. 시집으로 현해탄, 찬가. 다시 네거리에서, 회상시집 등 걸출한 작품을 남겼지만 남에서는 월북했다는

이유로 북에서는 미제의 간첩으로 낙인찍혀버린 분단의 희생양이 되었다. 정치적 입장을 떠난 시인으로서의 임화의 복원은

분단 극복의 과제 중 하나다.

 

 

김 원봉(1898-1958?):경남 밀양 생, 호는 약산.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13년 서울로 올라와 중앙학교를 다녔고 중국으로

건너가 텐진 덕화학당에서 독일어를 배웠다. 18년 난징 진링대학에 입학했고 이듬해 3.1운동이후 만주에서 무장 독립

투쟁을 시작했다. 무력독립투쟁론의 대표적 인물로 19년 의열단을 조직했고 단장이 되었다. 이후 활발한 의열단 활동을

펼쳐 조선 내 경찰서와 관공서를 습격하고 요인암살을 주도했다. 25년 황포 군관학교에 입교. 30년 조선공산당 재건동맹을

결성하고 베이징에서 레닌주의 정치학교를 열었다. 33년 조선민족혁명당을 창당했고 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조선민족

혁명당을 중심으로 민족통일전선연맹을 결성 항일무장투쟁에 헌신했다. 38년 조선의용군을 편성, 대장이 되었고 김원봉을

중심으로 한 범좌파계 무장독립단체는 김구의 임정계 우파(한국독립당)와 함께 중국내 무장투쟁의 중심축을 이뤘다.

이후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면서 41년 좌우합작형태로 임정에 참여했고 조선의용군을 광복군에 편입시켜 광복군 부사령이 되었다. 44년 임정 군무부장과 광복군 부사령관으로 활약했다. 해방 후 임정요인으로 귀국했으나 임정의 좌우합작은 이후

결렬되었다. 46년 6월 조선인민공화당을 창당해 독자노선을 걸었고 이후에도 좌우연합전선을 구축하려 진력했으나 48년

남한만의 단정수립이 본격화되자 북에서 열린 남북협상에 참가했다가 이극로, 홍명희 등과 함께 북에 잔류했다.

이후 인민공화국 내각 초대 국가 검열상과 노동상 최고인민회의 상임위 부위원장을 역임했으나 점차로 강화되는 김일성

독재체제의 희생양이 되어 수십 년의 독립투쟁을 뒤로 한 채 58년 숙청되어 자살한 것으로 추정된다.

약산 김 원봉과 방호산, 무정 등 무장독립투쟁가들의 몰락과 좌절은 남한에서 중간파의 몰락, 좌절과 함께 한국현대사

에서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극좌파와 이승만의 극우파로 양분화 되는 분단과정에서 발생했다는 점에서 복원되어야 할

우리 민족의 독립투쟁사다. 


박 헌영(1900-1955):충남 예산 생, 호는 이정. 19년 경성고보 졸업. 이후 상해로 건너가 고려공산당에 입당,

그해 고려공산청년동맹 책임비서가 되었다. 22년 김단야, 임원근과 모스크바 코민테른 극동인민대표대회에 참가했고

4월 귀국중 일제에 체포되어 1년반 동안 복역했다. 24년 출옥 후 조선, 동아일보의 기자로 활동했고 25년 조선공산당

창립에 참가했다. 25년 11월 제1차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체포되었고 27년 병보석으로 출감 28년 국외로 탈출하여

모스크바 공산대학에서 2년간 수학했고 32년 상해로 건너와 항일투쟁을 하다가 33년 상해에서 체포되어 경기도로 압송

6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39년 만기출소 후 경성 콤그룹을 결성하였으나 42년 일제의 탄압이 극심해지자 광주로 피신

기와공장 인부로 은신하기도 했다. 45년 해방이 되자 서울로 돌아와 공산당 재건에 주력했고 8월 테제를 통해 혁명전선을

결성할 것을 주장했으나 실질적으로는 모험주의적 노선에 편향되었다. 이후 조선공산당을 이끌며 독립촉성중앙협의회에

참여하고 미군정에 협력하였으나 모스크바 3상회의 이후 우익과 대립하기 시작했고 46년 7월 조선정판사 위폐사건을

계기로 좌익에 대한 탄압국면에 접어들면서 그해 9월 월북한다. 46년 11월 남조선 로동당을 결성 부위원장이 되었고

북에 머물면서 지속적으로 남로당의 활동을 지도했다.  48년 북조선 인민공화국이 수립되자 부수상 겸 외상에 취임했고

김일성의 전면전 시도에 찬성 이후 주도적으로 한국전쟁을 준비하였다. 개전 후 인민군 총정치국장 겸 인민군 중장으로

 참전했으나 남로당원 봉기는 완전한 오판이었고 이로 인해 인민군의 모든 전략전술은 시작부터 착오를 유발했고

결국 한국전쟁의 실패로 귀결되었다. 한국전쟁 중 전쟁 실패의 책임을 둘러싸고 김일성과 점차 갈등이 고조되었고

권력투쟁 끝에 패배하여 53년 초 남로당계 숙청 때 체포되었고 이후 반당 종파분자 행위와 정부 전복, 미제의 간첩혐의

등으로 55년 12월 사형을 선고 받고 처형되었다. 김일성과 더불어 사실상 인민공화국의 권력을 공유했고 한국전쟁을

함께 준비했던 국내파 공산당의 거물이었으나, 지나친 모험주의 노선과 극단적인 계급투쟁론으로 혁명역량을 분산시켰고

이후 여러 가지 상황오판으로 몰락의 길을 걸었다. 남에서는 골수빨갱이로 북에서는 미제의 간첩이 되어버린 한국현대사의

대표적인 패배자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