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한국 전쟁사 (63)
-인물지 [3] :민중 편(상)-
[민중 편(상)]
[난중일기]는 싸움터에서 백성의 신분으로 전사한 수많은 군졸들의 실명을 기록하고 있다.
또 심부름하는 종들과 수발들던 여자들, 그리고 여러 말썽꾸러기들, 탈영자, 범법자들의 이름을
모두 다 실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 수많은 사람들의 삶의 궤적을 지금에 와서 추적할 수는 없다.
그들은 다들 당대 현실에 맞서서 싸웠고, 싸우다 죽었고, 절망했고, 또 다른 세상을 꿈꾸었고,
꿈을 위해 싸우다 또 죽었다. 그 수많은 이름들이 고귀해 보인다.
이름만 전하고 이야기는 전하지 않는 그 많은 넋들이 이제 편안하기를 바란다.
-김 훈 [칼의 노래] 인물지 中에서-
순애보 신 건호: 충북 청주 출신의 대학 중퇴생. 전쟁이 나자 사랑하던 인숙씨를 찾아 점령된 서울로 한달음에 달려가 애타게 연인을 찾았으나 찾지 못하였다.
월남민 변 주섭: 황해 평산 출신의 소년. 어머니를 두고 임진강을 건너 월남. 늘 어머니를 그리워했지만 인쇄기에 손가락을 잃고도 울지 않았다. 거지와 좀도둑질을 거쳐 식당 배달 일을 했다. 후일 딸 하나와 아들 열하나를 두었다.
농사꾼 심 유섭: 충남 조치원 출신의 예순 다섯 살의 농사꾼. 큰 아들은 국군으로 작은 아들은 의용군이 되었다. 돌아오지 않은 자식들을 기다리며 줄담배만 태웠다.
무기수 이 말수: 전남 구례 토평 출신으로 일자무식의 농군. 두어 번 산사람들에게 짐을 날라 주다가 토벌대에게 걸려 대전형무소 무기수가 되었다. 감옥에서 늘 고향과 부모를 그리워했다.
최장기수 김 선명: 인민군 포로였으나 폭도로 몰려 사형수가 되었다. 무기로 감형되어 27세부터 징역살이를 시작 72세에 출감했다. 그의 45년 징역생활은 20세기 사상 최장기록이다. 출감 후 노모를 뵈었으나 말을 나누지 못했다. 비전향 장기수 송환으로 북으로 갔다.
전쟁고아 양 형모: 1.4 후퇴당시 8세. 평남 진남포 출신. 가족과 동네사람들과 월남하던 도중, 경기도 평택에서 폭격으로 부모와 동생 둘을 모두 잃고 전쟁고아가 되었다.
월남민 신 현구: 황해도 평산 온정리 출신. 50년 겨울 옛 동학 접주 출신이던 어머니의 권유로 열 다섯 살 나이로 얼어붙어 가는 예성강을 헤엄쳐 월남. 이후 남쪽에서 아들 둘과 딸 셋, 손주 일곱을 보았으나 늘 어머니가 주신 가락지를 들고 고향을 그리워했다.
전쟁의 피해자 이 정순: 미인이었으나, 아버지가 수리조합 이사장 반동이라는 이유로 인공 말기 인민위원회에 끌려가 윤간당한 채 살해. 1주기에 나 돌아왔다며 친구 고옥희의 꿈에 나타났다.
과부 문씨: 남평 문씨로 이름이 없다. 정 많던 남편을 일제 때 징용으로 잃고 큰아들은 국군으로 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유복자 작은 아들마저 적령기가 아닌데도 국민방위군으로 끌려갔다. 혼자서 그 많은 농사일을 해야만 했다.
자수성가 오 종철: 함남 원산 출신으로 해방직후 월남하여 갖은 고생끝에 야간대학을 졸업하고 섬유공장과 피혁공장을 차려 자수성가했다. 고향타령을 하기보다는 경기도 여주에 산과 논을 사고 거기에 3대 조상의 빈 무덤을 만들고 명절마다 그곳을 고향으로 삼았다.
오르테가 킴/김 영만: 평북 운천 출신. 16세에 인민군에 입대. 마산 전투에서 포로가 되었다. 남도 북도 아닌 중립국을 선택. 인도에서 멕시코 다시 쿠바로 갔다. 쿠바 아바나 빈민굴에서 오르테가 킴으로 살며 우리말조차 잊었다.
어이없이 죽어간 김 청랑: 인공 시절 서울시 인민위 궐기대회에 딱 한번 참가했었던 일로 그에게 빚을 진 유민우의 무고로 악질선동자로 기소되어 서대문 형무소 무기수가 되었다. 고문의 후유증과 영양실조 우울증으로 2년 만에 뇌졸중으로 죽었다. 경기도 검산 무연고자 묘지에 묻혔다.
빨갱이가 된 윤철이네: 경기도 원당리의 인심 좋던 농사꾼 집. 논물 대는 일로 3년 전 윗마을 재복이네와 다툰 적이 있었다. 수복 후 재복이가 앙심을 품고 반 이승만 벽보를 윤철이네 담에 붙여버려 신세조진 빨갱이가 되고 말았다. 마누라 아들까지 모두.
교장 신 진섭: 화단 가꾸기를 좋아했던 교장선생님이었으나, 산사람들이 학교로 들이닥쳐 위협하는 바람에 등사기를 내준 것이 화근이 되어 경찰에게 죽도로 맞고 10년 징역형을 선고 받았다. 형무소 화훼반 기결수들이 부러웠다.
면장 변 영재: 거창군 신원면 면장. 원만한 성품으로 면민들의 존경을 받았다. 대한민국시절엔 면장을 인공시절엔 면 인민위원장을 지내면서 난세를 무사히 넘기는 듯 했으나 거창 학살사건 때 살해되었다.
서청단원 한 흥철: 5척 단구의 서북청년단 출신 월남자. 4.3때 제주에서 도민들을 학살했고 육지로 돌아와 건준과 한독당 등에게 무차별 폭력을 휘둘렀다.
임 채화: 세살 때 아버지를 잃고 다섯 살 때 친어머니를 잃고 고모와 이모 밑에서 자라다 양어머니 밑에서 자랐으나 그 어머니마저 열한 살 때인 51년 1월 박산골로 끌려가 마을사람들과 함께 살해되었다. 이유는 빨갱이 공비내통자.
면장 박 영보: 거창 민간인 학살 당시 면장으로 신원 국민학교에 모였던 사람들 중 군경가족이 아닌 사람들을 군인들에게 알려주면서 목숨을 부지했으나 60년 4월 혁명 직후 그 때의 일로 피살자 유족들에게 맞아죽었다.
구두닦이 김 우남: 일자무식 무산자였으나 피난 가서 부산 국제시장에서 군밤장수를 시작했고 이후 구두닦이를 하면서 힘차게 자신의 삶을 살았다.
좌익 김 선기: 수백석 지기 유복한 집안 출신이었으나 대학시절 독립운동에 뛰어들어 감옥살이 세 번으로 가산을 탕진하고 해방 후에도 좌익 활동으로 다시 수배자 신세가 된다. 조모마저 정신을 놓아버린 채 그를 기다리다 세상을 떠났다.
인간 추 교명: 제일운수 남대문 지점 수송계로 근무했던 성실한 직원. 수송계장 안재길이 의용군으로 가자 상사의 가족들을 돌봤고 1.4 후퇴시 돌아온 상사 안재길을 만나 추위에 떨고있던 상사에게 코트를 벗어주었던 다정다감한 사람이었고 반전평화운동가 박진목의 절친한 친구이기도 했다. 그는 비싼 이태리제 모자마저도 서울에 남을 박진목에게 벗어주고 피난길에 올랐다.
반전 통일 운동가 최 익환: 1.4후퇴시 서울에 남아 제자 박진목과 함께 반전 평화운동에 나섰던 독립운동지사. 동학에 가담했고 의친왕과 상해에서 대동단을 이끌었다. 해방 뒤 민주위원을 지냈다. 북의 고위층을 만나기 위해 늑막염을 앓으면서도 서울을 떠나지 않았다.
장사꾼 오 세도: 5척 단구의 철원 제일의 알부자. 한국 전쟁 내내 전선 양쪽을 오가며 장사를 하여 막대한 부를 쌓았다. 군수물자는 물론 때로는 남북 양군과 미군에게 군사정보까지 팔았다. 지뢰폭발로 중상을 입고 병원에 실려가 허리춤에서 나온 돈만 12만 불일 정도로 한국전쟁은 그에게 엄청난 장사기회였다.
사람냄새 났던 인민위원장 나 윤출: 51년 다시 점령한 서울의 용산구 인민위원장. 씨름선수 출신으로 체포된 반동분자들을 엄정하게 조사하여 그 대부분을 석방했다. 그 해 3월 국군이 다시 오자 소집한 의용군 80명을 이끌고 다시 북으로 갔다. 부모와 아내를 남겨둔 채.
독립투사 이 승태: 17세부터 독립운동에 가담 지서를 폭파하고 도피 중 체포, 미성년으로 석방되었으나 반성문 쓰기를 거부했다. 해방 후 건국준비위원회 청년부 차장이 되었으나 몽양 여운형이 암살되자 일주일 단식으로 애도한 후 잠적.
임 재열: 새끼를 잘 꼬고 술 한잔 마실 줄 몰랐던 순진한 총각. 전쟁으로 징집영장이 나오자 돌변하여 날마다 술을 마시며 행패를 부렸다.
여장부 김 금덕: 대전 성남장 여관 주인. 전쟁 초 대전으로 피난 온 대한민국 주요 인사들을 손님으로 받았으나 해외로 도망갈 궁리를 하는 인사들에게 ‘대한민국을 망치는 자들은 빨갱이가 아니라 너희들’이라며 크게 꾸짖고 몰아낸 배포 큰 아낙이자 여장부.
희생자 권 평근: 조선 노조 인천중앙위 위원장으로 해방 당시 47세. 미군을 환영하러 나갔다가 일본 경찰의 총에 맞고 사망.
희생자 이 석우: 민간 보안대 대원으로 해방 당시 27세. 권평근과 같은 장소에서 사망. 이 둘의 사망은 미군이 이 땅에 해방군이 아니라 점령군으로 왔음을 상징하는 사건이 되었다.
영문학자 이 인수: 해방 전후 조선반도에서 가장 영어를 잘했던 사람. 영국 옥스퍼드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했고 해방 후 고려대 영문과 교수가 되었다. 인공 기간 피난을 가지 못하고 월북했던 친구 김 동석의 강권으로 대 미군 영어방송에 동원되었다가 수복 후 검거. 여러 사람들의 구명활동에도 불구하고 그를 시기 했던 신 성모에 의해서 부역죄로 처형되었다. 한국 영문학계의 크나큰 손실.
부자 이 종두: 경기 퇴촌과 이천 일대의 만석꾼 부자. 일제 때도 꾸준히 재산을 늘려갔고 해방 후 잠시 잠적했다가 이번엔 미군정에 선을 대고 적산가옥과 적산공장 인수로 돈을 벌었다. 이승만에게 금거북을 진상하고 전쟁 내내 승승장구 전후 10대 재벌 중 한명이 된다. 첩을 셋이나 두었으나 아들을 얻지 못했고 임신한 여대생을 들여 아들로 삼았다.
명창 김 소희: 일세를 풍미한 명창이었고 51년 1월 서울에 남았던 평화운동가 박진목이 배가 고파 찾아오자, 피난 짐을 싸던 중에도 가야금산조를 들려주며 술과 밥을 대접했다.
초등학생 김 학수: 순창 국민학교 4학년 때 고모 집으로 놀러왔다가 공비로 오인되어 경찰토벌대에게 사살되었다. 작문과 습자를 잘했던 아들의 죽음으로 김 학수의 아버지는 공비가족으로 조사를 받던 중 미쳐버렸다고 한다.
윤 도준: 전쟁에서 살아남았으나 전쟁의 충격으로 머리가 돌아버려 동네아이들에게조차 머저리 취급을 당했다.
무정부주의자 정 화암: 평생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 집을 떠난지 29년 만에 부모의 무덤을 찾았다. 그러나 사회주의와 자본주의가 지배했던 남과 북 어디에서도 아나키스트는 환영받지 못했다.
육군소위 이 갑수: 대한민국 육군 소위. 50년 여름 추풍령전투에 처음 참전한 이래 ‘빽’이 없어 최전선으로만 돌았지만 무수한 전투를 치르고도 끝내 살아남았다. 하지만 모처럼 얻은 휴가는 따분하고 지루했고 전선이 그리웠던 사내.
전쟁고아 이 요한: 52년 부산역전에 버려진 전쟁 고아. 대구 예배당 목사에게서 이요한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후일 이요한은 60년 4월 혁명 때 경무대 앞에서 학생들에게 발포하는 경찰이 되고 말았다.
상이군인 신 영도: 오산 출신으로 한국전쟁에 참전 부상으로 상이군인이 되었다. 전쟁의 상처를 행패와 시비로 달래며 보냈던 여느 상이군인들과는 달리 자신이 죽인 인민군의 환영에 시달리며 두문불출.
좌익 행동대원 김 기섭: 일자무식 무산대중으로 인공시절 민주청년 행동대가 되어 반동을 처단하는데 앞장서면서 머슴시절 자신의 주인이었던 김진홍 영감을 쇠스랑으로 살해.
전투경찰 김 재선: 식도 치루지 못한 채 결혼 1주 만에 의용경찰로 전투경찰대에 배치되었으나 인월 지역 첫 전투에서 어이없이 전사. 군복 주머니엔 약혼 기념사진만 들어있었다.
독립군 허 형식: 구미 허씨의 일가로 한말 의병장 허위의 조카. 일가가 모두 만주로 이주하여 독립운동에 헌신했고 최용건 김책, 김일성등과 더불어 동북항일연군에서 항일무장투쟁의 선봉에 섰다. 동북항일연군 제3중군 총참모장을 역임했으나, 김책 등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소련으로 가지 않고 끝까지 만주에 남았다. 42년 8월 일본군과 전투 중 부상한 몸으로 끝까지 부하들을 엄호사격하다 33세의 나이로 전사했다. 그의 시체에는 40여발의 총탄구멍이 나있었다고 한다.
창녀 권 숙희: 한국전쟁 시절 청량리 588 역전에서 몸을 팔았다. 권숙희는 가명이다. 하룻밤 20만환에 팔려 파로호 근처까지 지프차를 타고 가서 육군중장 정일권의 밤 시중을 들었다.
육군상사 이 윤: 대한민국 육군 일등상사. 50년 6월 28일 서울이 점령되자 후퇴를 거부하고 권총으로 자결했다. 쓰러지면서 ‘대한민국 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첩보원 김 기희: 경험 많은 전문 첩보원. 초대 상공장관 임영신의 밀명으로 50년 5월 38선을 넘어 첩보활동을 하다 돌아왔다. 전면전 징후를 완벽히 포착해서 보고했으나 신성모와 이승만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51년 신 성모는 죄목도 없이 김 기희를 총살했다. 한국전쟁 발발 징후를 알아냈던 보답은 훈장이 아니었다.
육군중령 이 태랑: 대한민국 육군 중령. 춤에 능해 무희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50년 6월 24일 육본 장교클럽 낙성식에서도 화려한 춤 솜씨를 자랑했고 반도호텔 객실주임과 뜨거운 밤을 보내던 중 한국전쟁을 맞았다.
육군대위 이 원섭: 대한민국 육군 대위. 육사 교도대 소속으로 6월 25일 오전 수도극장에서 영화를 보다가 한국전쟁 발발 사실을 알았고 즉시 뛰어서 원대로 복귀하여 포천지구 전선에 배치되었다.
육군중위 정 영삼: 국군 6사단 7연대 2대대 6중대장. 대한민국 육군 중위. 중대 CP에서 한국전쟁을 맞았다. 첫 교전에서 중대 병력 3분의 1을 잃었다. 자신도 다리를 잃고 상이군인이 되었다.
육군소위 장 원종: 대한민국 육군소위. 충북 보은 속리산 전투에서 소백산맥 빨치산에게 생포되어 전향을 권고 받았으나 끝내 거부하고 죽음을 맞았다. 55년 사라호 태풍 때 유골이 발견되었다.
소설가 선우 휘: ‘불꽃’의 작가로 잘 알려진 언론인이자 소설가. 한국전쟁 당시 국방부 정훈장교로 참전. 50년 겨울 후퇴시, 후퇴하면 사살한다는 포고문을 지시한 김종원 헌병사령관에게 정면으로 반발하여 파괴된 대동강 다리에 임시 가교를 설치하고 수많은 피난민의 남하를 도왔다.
김 종호: 어머니와 누이동생 둘을 인민위원장에게 잃었다. 간신히 도망쳤다 돌아와 인민위원장 딸을 강간한 뒤 죽여 버렸다. 이후 수차례 보복살해를 되풀이 했지만 상처를 달래지 못했다. 결국 집을 팔고 잠적.
막걸리 보안법 석 낙구: 술 한잔 마시고 전쟁 중 국민을 저버리고 도망간 이승만을 욕했다가 방첩대로 끌려가 호된 고문을 당하고 징역 2년 6개월을 언도 받았다. 딸의 취직과 약혼마저 취소당했다.
가두방송원 최 독견: 승방비곡의 작가이자 기자. 서울 점령 후 북의 대남 선전방송에 맞서 가두 방송원으로 전국을 누비면서 선전활동을 했다. 부산까지 밀려온 후 가두방송을 그만두고 다시 풍류객 작가 겸 기자생활을 했다.
육군대령 김 현수: 국방부 정훈국 보도 과장. 대한민국 육군 대령. 인민군의 서울 점령 후에도 서울에 남았다가 정동 방송국 앞에서 전사했다.
빨치산 대장 이 덕구: 일본 리쯔메이깐대 재학 중 학병으로 끌려가 관동군 장교가 되었고 해방 후 귀국. 제주 4.3 항쟁 당시 제주 조천중 교사로 재직했다. 서청과 경찰에 끌려가 지독한 고문을 당한 후 장기 휴가원을 내고 잠적후 한라산으로 가 김 달삼의 후임으로 빨치산 대장이 되었다. 후일 토벌대에 의해 사살.
노 형중 옹: 경기도 의정부 출신의 노인. 1.4 후퇴 때 아비규환의 지옥같은 피난 열차를 타고 가던 중 삼랑진에서 생을 마쳤다.
육군중위 김 춘식: 대한민국 육군 중위. 수많은 전투에서 전공을 세웠으나 언제나 훈장은 상관들의 몫이 되었다. 동부전선에서 안 가본 곳이 없을 만큼 전투의 베테랑이었지만 휴전 후 배치된 후방은 썩을 대로 썩었고 진급에서도 번번히 미끄러지기만 했다.
육군대령 안 병범: 대한민국 육군 대령으로 개전 당시 수도 방위대소속. 서울이 점령되자 군인이 적에게 등을 보이는 것은 치욕이라 생각하고 자결했다. 후일 다섯 아들 중 넷이 국군이 되었다.
육군중사 임 종명: 대한민국 육군 중사. 겨울 백마고지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참호속에서 지원 병력을 기다리던 중 미군 병사 제이슨 포그니와 국경을 초월한 우정을 나누었다. 제이슨은 다음 전투에서 전사했다.
무정부주의자 권 철: 1920년대 허무당 선언의 윤우열을 추종했던 아나키스트. 중국으로 건너가 무정부주의 활동을 했으나 실패했고 해방 후 귀국. 충남 서천 고향에서 은둔했다. 인공 3개월 동안 정신병자 행세를 하며 살아남았다.
제주도민 고 병린: 48년 제주도 4.3당시 김익렬 연대장과 김달삼 빨치산 대장의 전투중지 회담 후 경찰이 조작한 오라리 방화사건으로 어머니와 아내, 네 아들을 잃었고 말도 잃은 채 벙어리가 되었다.
미군통역 고 예환: 고려대 영문과 학생. 전쟁으로 스승 이인수를 잃고 미 육군 항만사령부 운송과의 통역이 되었다. 스승의 죽음을 혼자서 곰삭이며 자신의 말을 잃은 채 미군들의 말만 전달하며 살아갔다.
김 신옥: 둘째 오빠 신정을 낙동강 전투에서 잃고 난 후 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박우환과 약혼했다. 2년 후 약혼자를 꿈에서 본 후 박우환 일병의 전사통지서를 받았다.
산업역군 정 인욱: 상공부 석탄과장으로 한강을 건너지 못해 인민군에 부역했다. 수복 후 도강파에게 곤욕을 치렀지만 석탄전문가가 필요했던 덕분에 50년 11월 대한석탄공사 창립 이사가 되었다. 이후 태백산 개발과 산업철도 건설을 주장, 51년부터 맨주먹으로 강원도 산골에서 탄광을 개척했고 무수한 고난과 역경을 딛고 52년 풍부한 탄맥을 발견해내 대한민국의 산업발전과 서민들의 겨울 난방에 기여했다.
기업가 조 중훈:45년 해방 직후 25세의 나이로 인천에서 한진상사를 설립, 운수업을 시작했다. 전쟁이 나자 트럭을 징발 당했고 예금을 모두 찾아 종업원들에게 공개 분배한 후 트럭 한대에 가족을 싣고 부산으로 갔다. 전쟁 후 돌아와 인천에서 다시 빈손으로 시작했다. 후일 대한항공의 모회사 한진 그룹의 시작이었다.
좌도 우도 아닌 김 충달: 대동청년단 인천시 부지부장으로 좌익을 죽였으나 인공이 되자 민청 군산시 연락부 부부장이 되어 우익을 죽였다. 이후 도망쳐 강원도 횡계에 숨어 살다 황달에 걸렸고 악화되어 간암으로 죽었다. 유언으로 ‘좌익도 우익도 모두 못써’ 라는 말을 남겼다.
제주도민 이 도빈: 제주 성산포의 농민. 47년 11월 서북청년 행동대원들이 제주에 와 태극기와 이승만 사진을 도민들에게 강매할 때 조를 베던 중 사진을 사지 않는다고 서청단원들에게 머리를 얻어맞아 죽었다. 사망 당시 29세.
송 호식 모자: 전남 완도에서 아들 송호식이 인공이 끝난 후 도주했다 붙잡혀 죽은 뒤, 송호식의 어머니는 죽은 아들의 간을 입에 물고 동네를 돌아다니며 조리 돌림을 당한 뒤 부역죄로 5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실성하여 감방에서 벌거벗고 발작을 일으켰고 끝내 아들 뒤를 따랐다.
전 평북지사 김 성주: 서북청년단 출신으로 한때 이승만의 신임을 독차지 했으나 평양 수복 후 미군에 의해 평북지사가 되었고 이로 인해 이승만의 미움을 사 결국 원용덕의 헌병대에 체포되어 살해 암매장되었다.
제주도민 임 차순 옹/임 경표: 제주 오라리 주민으로 토벌대에 사로잡혔다가 토벌대의 심심풀이 놀잇감이 되어 할아버지 임차순 옹과 손자 임경표가 서로 따귀를 때리는 수모를 당한 끝에 살해되었다.
성폭력 희생자 하 인애: 경기도 용인 출신으로 동네에서 소문났던 미인. 인공의 여름 민청 간부 정덕이에게 강간당한 뒤 목을 매어 자살했다.
친일부역 김 지웅: 일본 헌병 보조원 및 정보원 출신. 해방 후 육군지휘관의 보조원이 되었고 여운형 암살과 김 구 암살의 배후인물 중 하나. 특무대장 개인 고문과 헌병사령부 특수정보 고문을 지냈고 평생 항일독립운동가 및 좌익체포. 야당체포질만 했던 왜놈보다 더 왜놈다웠던 자. 일장기를 걸어놨던 대문 밖에는 해방 이후 매일 태극기를 걸어놨다.
간첩이 된 구 본호: 경북 영천의 노총각 농민. 형 구본영이 부모를 모시고 피난을 갈 때 빈몸으로 살아보겠다면서 고향에 남았으나 후일 인민군 퇴각 때 따라가 간첩이 되어 고향에 다시 나타났다.
김 진열: 서울 을지로 3가 지물상의 아들로 전쟁 전 도둑질은커녕 여자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는 위인이었으나 피난 열차를 탈 무렵에는 대놓고 도둑질과 약탈을 감행하여 부자가 되었다.
육군일병 남 병환: 전남 곡성 사람.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거리에서 헌병들에게 영문도 모르고 끌려가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육군 일병이 되어 전선에 투입되었다. 최전선에서 싸우는 법을 직접 몸으로 배워가며 치열한 낙동강 전투에서 살아남았으나 시찰 나온 부대장의 몰골을 보고 살의를 느꼈다.
소매치기 이 만종: 요정 청운각의 심부름꾼으로 막 채용되어 막 육군대장이 된 정일권의 축하연에서 정일권의 안주머니를 터는 대담한 짓을 저질렀다. 정일권의 안주머니에는 미 군표 5백 불짜리 다섯 장과 파카 만년필이 들어 있었다고 한다.
육군하사 양 진봉: 대한민국 육군하사. 제주도출신으로 4.3을 피해 군에 입대하여 명사수가 되었다. 수많은 전투를 치렀고 늘 고향을 그리워했다. 그러나 제주도 이야기는 입 밖에도 내지 않았다.
육군일병 심 창우: 대한민국 육군 일병. 동해 영덕 전선에서 처음 바다를 본 내륙산골 출신. 전우 권오철이 생일이라고 구해다준 북어 한 마리를 나눠먹고 얼마 되지 않아 자신의 생일날 전사했다.
사업가 유 상국: 일제시대 총독부에 줄을 대며 부자가 되었고 해방 후에는 미 군정청에 줄을 대며 각종 적산가옥과 회사들을 인수했다. 전쟁 중에는 신성모에게 뇌물을 바치고 부를 쌓았다. 휴전 후 해외투자로 눈을 돌려 홍콩에서 마닐라로 가던 중 비행기에서 뇌일혈로 갑자기 사망했다.
진보계 인사 이 영근: 특무대의 온갖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진보당 선언문을 기초했고 죽산 조봉암을 따랐던 진보계 인사. 박진목과도 교분이 두터웠다. 조봉암의 망명을 권했으나 조봉암은 결국 체포되어 사형 당했다. 죽산의 죽음 후 일본으로 밀항했다.
미국이 좋았던 한 현숙: 부산 주둔 미군 하얄리아 부대 타이피스트라고 했으나 실제로는 PX담당 장교 제이슨 소위의 정부. 미국이름 브랜다 한. 제이슨 말고도 여러 미군 장교들을 사귀며 신분상승을 꿈꿨다.
수필가 김 소운: ‘목근통신’으로 유명한 작가. 전쟁 중 종군작가단 소속이었고 윤효중 김중업등과 베니스 유네스코 국제 예술제에 갔다가 일본신문과 인터뷰를 했다는 이유로 여권을 압수당하고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이후 일본에서 ‘목근통신’을 쓰면서 만인에게 감동을 주며 세월을 보냈다.
희생자 조 은선: 서울 신촌 사람으로 미인이자 재원으로 사법 학교 4학년 때 한국전쟁이 났고 오빠 조상연이 인민위 부위원장 노릇을 했다. 수복 후 치안대, 경찰에 끌려 다니며 강간을 당했고 결국 생매장되었다.
나무꾼 오 진걸: 덕유산 산판의 나무꾼. 산판에서 내려오다 비를 피해 불을 피우다 토벌대 정찰병에게 공비로 오인되어 재판에 회부되어 사형선고를 받았다. 빨갱이가 아니라고 항변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1년 뒤 사형이 집행되었다.
애국지사 박 영덕: 유능한 실업가로 일제 때 내내 가산을 팔아 만주에 독립운동자금을 보냈다. 평양의 유리공장까지 팔아서 독립운동을 후원했지만 해방 정국의 혼란상에 실망하여 낙향하여 충남 유성 근처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상거지가 된 옛 동지 박진목이 오자 집 앞의 밭마저 팔아 박진목에게 내줬다.
부자 임 환섭: 평남 맹산 산골 출신으로 자수성가한 부자. 그러나 북은 그를 반동으로 몰았고 모든 재산을 몰수당했다. 인민군이 밀리면서 중소상인과 민족주의자들을 학살할 때 순안에서 총에 맞았으나 죽지 않자. 산채로 묻어버렸다.
독특한 이력의 한 재덕: 일본 와세다 대 불문과 졸업. 사회주의에 경도되어 해방 후 김일성을 최초로 김일성 장군이라고 부르자고 제안했다. 김일성을 김일성장군으로 만든 장본인은 전쟁 후 남으로 와 이번에는 ‘김일성을 고발한다’ 등을 쓰며 반공운동이론가가 되었다. 한국전쟁 전후 김일성의 행적에 대해서 많은 증언을 남겼다.
중학생 고아원장 김 정길: 전남해남 남동리 출신. 어려서부터 불우한 사람들 돌보기를 좋아했고 전쟁으로 무수한 고아들이 생기자 이들을 챙기기 시작. 중학생시절부터 고아원 원장이 된다. 서울대에 합격하고도 아이들을 돌보기 위해 자신의 학업을 포기했다. 자원봉사를 하러왔던 임숙재와 결혼하여 희망원을 만들어 전쟁고아들을 가르치고 키웠다.
경찰 배 순호: 서남 지구 전투경찰 사령부 경사. 모범적인 경찰이었으나 고향의 아내가 춤바람이 나자 절망하여 권총으로 자살.
억울했던 임 지훈: 서울 숭인동 문간방에 세들어 살던 떡가게 종업원. 경찰에게 갑자기 체포되어 고문을 당하고 시키는 대로 삼각산 빨치산이 되어 삼각산에서 하산하다 잡힌 것으로 조서를 썼다. 1심에서 사형을 언도받고 2심에서 간신히 무기로 감형. 이후 20년간 철창 살이를 했다. 그사이 아내는 죽고 출감 후에도 갈 곳이 없었다.
빽 좋은 육군소위 김 춘길: 대한민국 육군 소위. 국방부 차관의 조카이자 육본 인사처장이 외삼촌이었다. 든든한 뒷배경 덕에 잠시 눈가림으로 일선연대에 배치되었다가 바로 다시 서울로 전출. 서울에서 희희낙락대며 세월을 보냈다.
김 한식, 여 운희 부부: 국민학교 교사 김한식이 의용군에 끌려갔다가 인민군이 퇴각하면서 탈출 철원과 금화를 지나 돌아왔으나 서울 집에 아내 여 운희는 보이지 않았다. 내내 아내를 찾다가 첫눈 오는 날 남대문 시장 입구에서 다시 아내 여 운희를 만났다.
구사일생 이 달수: 한국 전쟁 기간 중 여러 번 구사일생의 위기를 넘겼던 운 좋은 사나이. 삼선교에서 붙들려 원주로 끌려가 인민군 철도보수에 투입되었다. 공습으로 수차례 죽을 고비를 넘겼고 보수반이 해체되자 떠돌다가 인민군과 국군의 검문에 걸렸지만 즉결직전 운 좋게 살아남았다. 이후 전국을 떠도는 방문판매업을 했는데 그 후에도 부산 국제시장 화재, 제주 목포간 여객선 침몰, 묵호 여인숙 강도살인사건 등등에서 모두 아슬아슬하게 살아남았다.
스파이 앨리스 현: 임정 수립공로자 현순 목사의 딸로 하와이에서 태어났다. 동생 피터 현도 유명한 문필가. 아버지의 뜻에 따라 컬럼비아 대 졸업 후 미 CIA요원이 되었다. 미인이자 재원으로 몽양,이정과 교유했으며 해방 이후 극동사령관 맥아더의 비서가 된다. 끝내 사랑하는 이정 박헌영을 따라 49년 체코를 경유하여 평양으로 갔으나, 결국 평양에서 간첩죄로 처형되었다.
정체성이 헷갈리는 백 형복: 일제 때 순사시험에 합격해 일본인 경부보 밑에서 형사로 활동. 해방 후 전북도경 사찰과 부과장. 강원경찰청 사찰과장. 내무부 치안국 사찰과 중앙분실장을 역임하며 독립운동가와 좌익 체포고문의 장본인으로 살았으나, 전쟁이 나자 뜻밖에도 북조선 인민공화국 내무성 공안간부가 되었다가 남로당계 숙청 때 연루되어 53년 8월 처형되었다.
고리사채업자 서 상훈: 전쟁 전 이자 없이도 돈을 잘 빌려주던 사람이었으나 전쟁으로 세상이 각박해지자 중국대사관 골목에서 급전 고리채를 빌려주는 사채업자로 변신했다. 그러나 명동 뱁새파 두목의 눈 밖에 나 칼을 맞고 절명.
시인 김 규동: 한국문단의 대표적인 모더니즘 시인. 함북 경성 출신으로 김일성 대 조선문학부 학생으로 재학 중 모더니즘을 배우기 위해 서울의 스승 김기림을 찾아 부모님을 두고 월남한다. 그러나 정작 스승 김 기림은 전쟁 때 납북되어 북으로 갔고 제자인 그가 남아 서울에서 모더니스트 시인으로 살았다. 어린 시절의 고향과 두고 온 어머니 그리고 통일을 노래하는 시인이 되었다.
강천, 형천, 묵천 삼형제: 50년 12월 고향 평양을 버리고 월남한 삼형제. 고향에 아버지 산소와 함께 남은 어머니를 뒤로 한 채 길을 떠났으나 몸이 약한 폐병 환자 큰형이 예성강을 건넌 뒤 죽었고 15세 차남과 13세 막내만이 남하했다.
이 장돈씨 안사람: 신당동에 살던 이 땅의 억척스러운 여인. 대한민국시절에도 떡장수를 했고 인공이 들어서도 떡장수를 했다. 서울이 다시 점령되었어도 열심히 떡과 국수를 팔았다. 53년 낙원동으로 진출 오복떡집을 차렸다. 어떤 공습에서도 눈 하나 까딱하지 않았던 여장부.
시류에 편승했던 박 근상: 해방 직후 열성 남로당원으로 박헌영의 칭찬을 들었으나 박헌영이 월북하자 바로 전향, 수도경찰청 사찰과 보조원이 되어 남로당 지하당원 색출에 맹활약했다. 전쟁이 나자 유정복으로 이름을 바꾸고 인민군 정치장교 보조원이 되어 우익인사 색출에 나섰다.
진규 아비: 늘 동네에서 눈총 받고 손가락질 받던 인물. 인공시절이 되자 떨쳐 일어나 dua여물 써는 작두일로 사이가 불편했던 김 옥철을 모함하여 고발. 내무분서에 반동분자로 잡혀가게 했다.
사람이길 포기했던 강 기환: 아내가 좌익에게 죽은 뒤 치안대장이 되어 복수에 나선 인물. 잡혀온 김 백철과 그의 장모를 끌어내 옷을 벗겨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성교를 강요한 후 짐승만도 못하다면서 죽여버렸다. 이 후에는 빨갱이 아들과 어머니를 불러다가 같은 짓을 시키고 또 죽였다. 누가 짐승만도 못했던 걸까?
빨갱이 수감자 김 인종: 50년 9월 퇴각 중 생포된 인민군 포로. 그러나 포로수용소가 아니라 형무소로 가 형무소 좌익빨갱이가 되었다. 항의 무효의 세월을 보내며 14년간 복역 후 가석방 되었으나 얻은 것은 복역노동임금 970원과 폐결핵과 위염과 이명 협소공포증 밖에 없었다.
작부 옥선이: 부모가 학살된 후 도망친 곳이 하필 술집이었고 거기서 술집 작부가 되었으나 전쟁의 상처로 인한 트라우마로 끝내 미쳐버렸다.
허 인애: 부산 거부 제일목재 사장 허경순의 외동딸. 전쟁에도 불구하고 부친의 번창하는 사업덕분에 대궐 같은 집에서 호화판 생활을 누리며 살았다. 몰래 아편 주사를 맞았고 전쟁이 계속되어 아버지가 더욱 많은 돈을 벌기를 바랬다.
잘 나가는 육군중령 이 형도: 후방 원주 보급기지에서 근무했던 육군 중령. 사령관에게 늘 푸짐한 뇌물을 바쳤고 수송부의 기름을 곧잘 내다 팔아 현찰이 두둑했다. 전방에서는 죽음이 넘쳐났지만 이 형도중령에게는 흥청망청 여자들에게 돈을 뿌리던 호시절이었다.
비서 신 상봉: 우사 김 규식의 충실한 비서. 김 규식이 납북될 때 부인이 차남을 따라가게 하려 했으나 처자가 있는 몸이었음에도 그가 따라 나섰다. 개성과 사리원을 거쳐 평양, 안주를 지나 압록강까지 김 규식을 모셨고 거기서 우사가 병이 깊어 죽자 시신을 수습했고 곧 우사의 뒤를 따랐다. 그는 김 규식이라면 지옥에도 따라간다는 신념을 끝내 지켰다.
구사일생 천우신조 이 정송: 국군 헌병 소령 장우주의 아내. 50년 6월 임신 5개월의 신혼이었다. 이후 인민군 간호원, 도라지부대원등으로 변장하여 은신했으나, 효자동 인민위에 결국 체포되었다. 총살현장으로 가던 중 미군의 공습으로 도망쳤고 한강을 건너 구사일생으로 낙동강까지 내려가 국군1사단 수색대에게 구조되어 부산 역에서 남편을 다시 만났다.
검사 채 호석: 서산 경찰서 운산지서에서 심부름 하던 고아. 대전형무소 우익 인사 처형 때 유일하게 살아남았던 생존자. 이후 학살당한 어느 검사의 미망인에게 입양되어 사법고시에 합격, 검사가 되어 양어머니를 기쁘게 했다.
인민의용군 이 일웅: 전북 익산 왕궁면 부자집 머슴출신으로 2차 의용군으로 끌려가 군당에서 한글을 배웠고 이후 도망병 감시와 병자처리를 맡았다. 이후 단 3일간의 훈련만 받고 대구 팔공산 전투에 투입되어 총알받이로 전사했다.
임 후남 여사 : 양치목씨의 부인으로 반동으로 몰려 죽은 아들의 시체를 찾아 일제때 만든 방공호를 뒤져야했다. 남편 양치목은 납북되었고 아들은 학살되었으며 손자는 병사했다. 며느리 마저 먼저 보내고 혼자서 살다가 실성해버렸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지아비와 아들 손자의 기일만은 제정신으로 돌아와 제사를 모셨다.
임자도 주민 장 명구: 다도해 끝 임자도 마을 주민. 21호에 불과한 자그만 마을이었지만 그 작은 동네에서도 반동으로 몰려버렸다. 투전으로 살림을 망친 인민위원장 황창길이 그를 반동으로 몰았던 것. 50년 9월 10일 황창길에 의해 벼랑에서 떠밀려 생을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