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한국 전쟁사 (64)
-인물지 [3] :민중 편(하)-
[민중 편(하)]
양공주 마리아: 본명 김 진숙. 24세. 옥산면 인민위 부위원장이던 아버지가 맞아죽은 뒤 어머니마저 잃었다. 오빠마저 감옥에 갇혀 버려 이 마리아가 되어 백인상사 윌슨의 정부가 되었다. 몸으로 배운 영어가 유창했으나 공산당도 우익도 모두 싫어 미국으로 가 대한민국도 고향도 잊고 싶었다.
진 달호 영감님: 기와집에 살던 유복한 사람이었으나 전쟁으로 집을 잃었고 큰아들네와 둘째아들네 역시 몰살당했다. 막내아들네는 행방불명. 열 있던 손자 모두 잃고 손녀 하나 살아남아 아흔 셋으로 돌아가신 진 달호 영감님을 뒤늦게 장사지냈다.
감상주의자 안 동환 군: 김해 자작농의 3대독자. 전쟁당시 29세. 부모의 성화에도 장가가지 않았다. 전쟁의 와중에도 소월시집을 펴들고 혼자 눈물만 글썽였다.
광주부자 현 준호 : 호남 만석꾼 대지주였으나 인민군이 들어오면서 체포되어 광주형무소에 수감되었다. 물이 없어 오줌까지 받아먹으며 버티던 중 석방되었다 하여 밖으로 나갔으나 등 뒤에서 쏘는 총에 쓰러졌다. 이후 집안이 기울어 자손들도 죽거나 흩어져버렸다.
할머니 덕에 살아난 김 상돈: 인공 기간 3달 동안 북 아현동 친지의 집 천장에서 숨어살았다. 8번이나 수색을 당했지만 그때마다 위기를 넘겼다. 수색대가 올 때마다 그 집 할머니가 호통을 쳐 내몰았다. 햇볕을 못 봐 백지장처럼 얼굴이 하얘졌지만 할머니를 생각하며 힘을 냈다.
김 달삼의 장인 강 문석: 제주 모슬포 출신. 20년 경성콤그룹 참가. 해방 후 남로당 중앙위원. 딸 강 영애를 전도유망한 청년 이 승진과 혼인시켰다. 사위부부가 48년 제주 3.1사건 때 부산처가로 도망오자 오자 사내답지 못하다며 내 쫓았다. 그 후 이 승진은 장인의 이름 김 달삼을 쓰면서 제주도의 4.3 항쟁을 이끌었다.
부역했던 시인 노 천명: 시 ‘사슴’으로 유명한 여류시인. 한국전쟁 때 절친했던 선배 시인 모 윤숙을 내무서에 고발하여 하마터면 죽게 할 뻔 했다. 수복 이후 부역 죄로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감형되었고 문인들의 청원으로 석방되었다. 전쟁은 소박한 정서를 노래했던 시인마저도 이렇게 변화시켰다.
숨어 지낸 윤 달수: 인공 3개월 동안 남한산을 헤매며 물과 나무열매로 연명했다. 사랑했던 연인 명순 씨를 그리면서 끝내 버텨냈다.
수색의 귀재 배 성섭 상사: 12연대 수색대 소속의 대한민국 육군 상사. 여순 진압시절부터 계속 수색대에 근무했고 한국전쟁 기간 중에도 적진 후방을 내 집 드나들 듯이 드나들며 수많은 전공을 세웠다.
평화 운동가 김 낙중: 서울대출신의 진보적 평화운동가. 임시수도 부산에서 대낮에 유리등에 불을 켜고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통일을 하자고 주장했으나 광인취급을 받았다. 김 낙중은 평생 통일운동에 전념했던 재야인사가 된다.
싸움터에서 만난 두 형제, 정 해봉, 정 해선: 팔공산 지역에서 12연대 수색 대원이던 형 정해봉은 작전 중 인민군 수색대원이 된 동생 정 해선을 만났다. 당시 형의 나이 20세. 동생의 나이 18세. 이후 인민군 수색대원 정 해선은 국군 수색대원이 되었다.
종로 여맹 조직부장 연 숙자: 전전 단성사 매표원이었으나 인공이 들어서자 종로여맹 조직부장으로 맹활약. 근무했던 단성사 사장 가족까지 고발해버리고 서울시 여맹에서 모범맹원 격려품도 받았다. 순했던 그녀는 전쟁이 나자 맹렬한 여맹원이 되어 김일성장군의 노래를 불러댔다.
인민군에서 국군이 된 강 노식: 인민군 복장을 한 국군 수색대원들이 자기편인줄 알고 따라온 순박한 인민군 13사단 수색대원. 이후 국군 1사단 수색대원이 되었다.
구 빨치 남 두만: 월북하여 강동 정치학원에서 유격대 교육을 받고 태백산지구에서 활약하다 지리산지구로 이동. 전쟁이 나자 왜관과 다부동 전투에 투입되었으나 역부족이었다. 산에서 5년을 싸웠지만 그 대가는 총알받이였다. 어머니와 징용 가서 돌아오지 않은 아버지가 그리웠지만 독전대의 총구가 무서워 항복할 수 도 없었다.
‘신라의 달밤’을 부른 가수 현인: 동경 우에노 음악학교에서 성악을 전공했고 징용을 피해 상해로 탈출 거기서 대중가요를 부르기 시작했다. 해방 뒤 돌아와 ‘신라의 달밤’‘비 내리는 고모령’을 부르며 인기절정을 구가했던 멋쟁이. 전쟁이 나자 ‘굳세어라 금순아’를 불러 서민들의 시름을 달래줬고 전후에는 ‘서울야곡’과 ‘추억의 꽃다발’등을 자작해서 불렀다. 특유의 구성진 바이브레이션으로 일세를 풍미했다.
목포의 눈물, 이 난영: 당대 최고의 여가수 중 한명. 그러나 남편 김 해송은 전쟁으로 납북되었고 납북되었다는 이유로 남편의 쇼단도 해체 당했다. 어린 다섯 남매를 홀로 키웠고 이들이 후일 미8군을 열광시킨 ‘김시스터스’와 ‘김보이즈’가 되었다. 그녀의 절창 ‘목포의 눈물’은 전쟁의 시름을 달래주던 온 겨레의 노래였다.
‘가거라 삼팔선’으로 모두를 울렸던 남 인수: 식민지 시절 일제 찬양의 노래를 부르기도 했으나 ‘애수의 소야곡’ ‘가거라 삼팔선’ ‘이별의 부산 정거장’등 민족의 애환을 노래하며 그 시대를 누볐던 명가수. 본명 최 문수. 해맑은 색깔의 간드러진 창법으로 인기를 누렸으나 폐결핵으로 요절.
국민 가수 김 정구: 일찍이 신문팔이와 달걀장수, 목장의 양치기, 책방점원 등을 전전했다. ‘두만강 푸른 물에 노 젓는 뱃사공’이라는 노래 하나로 세상이 그의 노래를 따라 불렀다. 망국의 설움을 노래했던 이 노래는 후일 분단과 망향을 상징하는 노래가 되었으나 훈장까지 받았던 국민가수 김 정구는 끝내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상이 군인 하 인호: 동부전선에서 청각을 상실하고 제대했지만 고향 부산의 썩어버린 현실에 절망했고 다시 전선으로 돌아가고만 싶어졌다.
빨치산이 되어 사람대접을 받은 안 설녀: 아홉 살에 시집을 가 구박을 받으며 일곱 살 신랑과 그 동생을 키웠다. 해방 뒤 신랑이 죽자 시어른들의 온갖 학대를 받았으나 인공 때 머슴출신 인민위 부위원장 김 길동을 따라 그의 여인이 되었고 지리산 뱀사골 여전사가 되어 버렸다. 죽어도 여한이 없었다.
얼떨결에 월남했던 평양사람 이 종기: 농업성 축산계장 아버지와 여맹 위원장 아내와 자식들을 둔 채 피난행렬에 휩쓸려 괜히 대동강철교를 넘어버린 사나이. 사리원을 지나 서울, 부산까지 흘러들었고 거기서 염색공장을 차렸다. 재혼도 하고 아이도 낳았지만 고향과 가족이 늘 그리웠다.
극우 테러리스트 염 동진: 백의사의 우두머리로 해방 이후 극우테러와 암살을 주도했다. 어디서 어떤 활동을 했는지 아무도 몰랐던 그는 해방 이후 정국에서 극우테러를 전염병처럼 퍼트린 장본인이 되었고 48년 단독정부가 수립되자 홀연히 사라졌다.
임 화의 아내 지 하련: 본명 이 현욱. 40년 단편을 발표하며 문단에 등장한 촉망받는 여류작가였으며 시인 임 화의 아내이자 동지였다. 월북한 남편을 따라갔으나 남로당계의 몰락으로 임화는 처형되고 그녀 역시 수용소에 감금되어 절망의 나날을 보내다 죽어갔다.
돌아온 국군포로 박 백 중위: 국군 8사단 수색중대 소속으로 압록강까지 진격했으나 이후 전투에서 중대원 대부분과 함께 중국군의 포로가 되었다. 화풍 관산 포로수용소에서 지옥과도 같은 포로생활을 했으나 운 좋게 포로교환 때 돌아올 수 있었다.
남대문 시장상인 표 종선: 황해도해주출신으로 미군 피엑스 물건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던 장사꾼. 후한 인심으로 거래자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면서 알부자가 되었지만 미군헌병들에게 불법거래로 끌려가고 말았다.
진짜의사 윤 성주: 논산 강경일대에서 소문난 명의. 일제시대엔 일본인 치료도 마다하지 않았고 해방 이후 귀환 동포들에겐 무료로 진료했다. 인공 3개월 동안 인민군을 치료했고 수복 후엔 경찰들을 무료로 치료해줬다. 1.4 후퇴가 시작되자 더 이상 버틸 수 없어서 이리를 거쳐 남쪽 끝 목포에 가서 다시 병원을 차렸다. 하지만 자신의 처지가 회의스러웠다.
자살하고 만 시인 정 운삼: 애인이 일본으로 떠나고 실연의 고통을 삭이던 중 전황이 불리해지고 있던 51년 1월 8일 유서를 남기고 문우들 앞에서 약을 먹고 세상을 떠났다. 문우들은 그저 그의 유서가 또 하나의 시를 쓴 줄로만 알았다.
화가 이 중섭: 함경도 지주의 아들이었으나 공산정권의 탄압으로 형을 잃고 가족과 월남 했으나 남쪽에선 빨갱이로 의심을 받았다. 아내와 아이들을 일본으로 보내고 혼자 남아 그림을 그렸으나 생활고로 요절했다. 평생 가난하게 살았던 화가의 그림은 후일 대한민국 그림 중 가장 비싼 값에 팔리게 된다.
종군 시인 구 상: 전쟁 3년간 종군 작가단 소속으로 최전선을 두루 돌아다녔고 그 사이사이 불우했던 당시 문인들을 돌봤다. 인천상륙 상륙당시 승리일보를 제작하여 대공포화를 무릅쓰고 서울상공에서 승리일보를 뿌려서 승전소식을 알렸고 국군 선발대와 함께 서울에 가장 먼저 입성했다.
못다 핀 천재 홍 사준: 단편 사슴으로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전형이라는 극찬을 받았던 청년 문학가였으나 50년 8월 평양에 다녀온 후 공산주의에 환멸을 느끼고 전향했다. 그러나 수복이후 부역자로 검거되었고 공포와 불안을 견디지 못해 탈출하다 사살되었다. 노천명도 살아난 시대에 그의 죽음은 문학사의 커다란 손실이었다.
하느님만 찾게 된 양 채문: 전남함평의 농민. 국군 11사단의 토벌과정에서 세 번이나 거듭된 일제사격에서도 천우신조로 살아남았으나 이후 정신을 놓고 하느님만 찾게 되었다. 당시 국군은 쓰러진 농민들 사이에 살아남았던 사람들을 하느님이 돌봐주신 것이니 일어나면 살려주겠다고 하여 세 번이나 거듭 확인사살을 계속했다.
14연대 반란의 시작. 지 창수 상사: 국방경비대 14연대 인사계로 근무 중 48년 10월 제주도민을 학살해야 하는 출동을 거부하고 연대내 세포들을 동원하여 반란을 시작, 여순 사태로 발전되었다. 그러나 14연대의 반란은 무모한 모험이었고 이 때문에 주동자 김 지회 중위 와 지 창수는 이 현상으로부터 혹독한 질책을 들어야 했다. 후일 추격대에게 사살되었다.
함께 죽은 빨치산 강 순옥 장 관호: 사랑하던 사이였던 남쪽 여자 강 순옥과 인민군 패잔병 출신 장 관호는 끝내 비트에 도달하지 못하고 53년 겨울 눈보라 속에서 얼어 죽었다.
박 헌영의 친구 한산선사: 박 헌영의 아들을 맡아서 키워준 스님. 남에 살아있는 유일한 박 헌영의 혈육을 키운 후 잠적해버렸다. 박 헌영의 아들도 스님이 되었다.
‘군상’을 그린 화가 이 쾌대: 47년 걸작 군상을 그린 채 월북. 한국전쟁 때 포로가 되었다가 탈출했고 다시 북으로 돌아갔다. 자주 모델로 그렸던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을 남겨둔 채.
의용군 출신 통역 정 찬형: 청주 중에서 선배 천관우의 성적기록을 깬 천재. 50년 여름 의용군에 강제 징집되었으나 탈출. 그러나 수복 후 의용군출신자로 낙인찍혀 아무도 몰라보는 동부전선으로 가 미군 사설통역으로 살았다. 영어 원서를 보며 실존주의에 경도되었으나 신원조회에서 의용군출신이었다는 것이 들통 나 통역에서 해고. 어딜 가나 의용군의 낙인이 따라 다녔다.
월남 이 정이 가족: 진남포에서 충남 홍성까지 걸어서 피난을 내려왔다. 미군이 무서워 똥을 옷에 바르고 부엌 검댕이를 얼굴에 발랐다. 그렇게 천리를 걸어 홍성에 정착. 거기서도 집안을 일으켜 큰 병원까지 살 정도가 되었다. 이 정이는 나중에 시인 김 영무와 결혼했다.
위안부 담당서기 김 달봉: 전선에 보낼 위안부를 담당했던 접수처 서기. 전선의 주요 고위지휘관들로부터 각종 특별(?)주문을 받았고 그 대가로 돈과 지프차까지 받았다. 특별주문품을 언제나 먼저 시험운행하고서 보냈다.
공비토벌 분대장 공 창렬: 20사단 1대대 2중대 분대장으로 함평에서 공비를 토벌했다. 대대장의 토벌공비에 대한 일일할당 지시가 내려오자, 3일 동안 공비 3명 민간인 119명을 사살하고 공비 122명을 사살한 것으로 보고하고 무공훈장을 받았다.
남편을 잃은 방 순경 아내: 여순 사건 직후 처절한 상호간 보복 학살이 지나간 후 아기를 업은 채 남편 방 일수 순경을 찾았지만 끝내 시신마저 찾지 못했다.
미대 중퇴생 윤 영준: 서울 미대를 중퇴하고 중부전선에서 미군들의 초상화를 그리며 연명했다. 임신한 김희자를 만나 함께 살았으나, 그녀는 자살했고 다시 전선으로 돌아가 미군초상화를 그렸다. 이후 신철원에서 극장간판쟁이로 살다가 알콜 중독자가 되었다.
첼리스트 전 봉건: 형 봉래와 월남해서 전쟁 전 서울의 음악실 돌체와 오아시스를 드나들었다. 군에 갔다 제대했지만 형 봉래는 자살했고 부산으로 이사 온 돌체에서 형이 마지막으로 들었던 곡 바흐의 조곡을 들으며 울어야 했다. 형의 유고를 정리했고 첼리스트가 되었다.
천재적인 무용가 최 승희: 이미 30년대부터 세상을 놀라게 했던 세계적인 무용가였다. 조선 춤의 특성을 가장 먼저 온 세상에 알렸고 당대 최고의 춤꾼이었다. 남편 안 막과 함께 월북했고 남로당계의 숙청과 더불어 그녀의 인생도 내리막을 걸었다. 북조선 인민공화국은 너무도 많은 문화예술계의 인재들을 이런 식으로 소모해버렸다.
6.25의 노래를 작사한 박 두진: 잘 알려진 청록파 시인. 한국전쟁 시절 끼니를 거르는 궁핍한 생활을 했고 아아 잊으랴~ 로 시작되는 6.25의 노래를 작사하여 돈 몇 푼을 받았다. 무찌르자 오랑캐 노래로도 돈을 받았다. 그렇게 어려운 시절을 넘겼다.
우국 독립지사 엄 항섭: 임정출신의 독립지사. 서울에 잔류했다 납북되었다. 항일 독립운동의 길을 걸었지만 분단과 전쟁의 현실 앞에선 막막할 수밖에 없었다. 뒤늦게 독립운동의 공이 인정되어 건국훈장을 받았다.
변 수자를 찾아 헤맨 하 종수: 평소 연모했지만 말 한마디 건네지 못했다. 전쟁이 나고 인민군이 왔다 가고 국군이 다시 오는 동안 변 수자는 행방불명되었고 자전거를 팔아서 그 돈으로 그녀의 연고지를 물어물어 찾아다녔다.
건축가 김 중업: 서울대 건축과 교수로 재직 중 52년 유네스코 주최 세계예술인대회에 김소운, 윤효중 등과 함께 참석. 이후 교수직을 던져버리고 세계적인 건축조각가 르 꼬르뷔지에를 만나서 사사했고 새로운 건축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 돌아왔지만, 60년대 군사정권을 비판했다고 해서 8년이나 해외로 추방되고 말았다.
치욕의 끝. 홍 문봉: 부모와 아내가 치욕적인 수모를 겪는 것을 보다 못해 숨었던 대숲에서 나와 버렸다. 결국 마을 삼거리 고구마 밭으로 끌려가 총 소리 두 번으로 인생을 마쳤다.
47년 제주도 지사 유 해진: 전북 완주 출신으로 만석꾼 지주의 아들이었다. 일본유학을 다녀왔고 승마를 잘했다. 47년 4월 제주지사로 임명되었으나 제주도민을 경멸했고 제주도에 관심이 별로 없었다. 서청과 대동단의 폭력을 외면했고 그 결과 제주도의 봉기를 자초했다.
기품이 있었던 이 해명씨 부인: 51년 3월 남편 이 해명이 의용군으로 끌려갔으나 막된 시절에도 사람다운 기품을 잃지 않고 굳세게 살아갔다. 사흘을 굶어도 여전히 사람다웠다.
부산 국제시장 또순이 설 옥순: 53년 부산 국제시장의 큰불에도 불구하고 32세의 설 옥순은 다시 천막을 치고 장사를 시작했다. 용두산 공원에 숨겨둔 금붙이를 밑천으로 힘차게 폐허가 된 국제시장을 일으켰다.
선원 이 청일: 제주 4.3 항쟁에서 김 달삼을 따랐던 선원출신의 야산대원. 산 생활이 점점 싫어졌고 바다가 그리웠으나 내려갈 수 없었다.
늙은 기생 홍매: 동래권번 출신의 잘 나갔던 기생. 노기가 되어 방 두개짜리 술집을 냈다. 행패를 부리던 국민방위군 장교들을 향해서 술집주모 쏴 죽이려고 군대갔냐고 호통을 치며 내쫓았다. 욕 한마디 하지 않았던 내가 돌았나봐 했다.
어머니의 날 조 신성: 의주에서 태어난 여걸. 일찍 과부가 되어 이화학당 교사 겸 학감. 평양진명여고 교장을 역임했고 독립운동에도 헌신, 안 창호와 김 구의 연락책 노릇을 하다가 투옥되었다. 해방 후 북조선 여맹위원장을 하다가 탈출 서울에서 대한부인회 부총재로 재직하다 향년 80세로 사망. 52년 5월 8일 그녀의 장사지낸 날을 어머니의 날로 제정했다.
제주 읍내상인 좌 달육: 육지 사람들에 대한 거부감이 극심했던 제주에서 9연대장 김익렬의 삼고초려로 모슬포 9연대의 막사건설과 부대필수품공급을 도와주었으나, 이 때문에 제주도민들에게는 군인앞잡이가 되었다는 소릴 듣고 따돌림을 당해야 했다. 유격대는 그의 트럭을 습격했고 딸마저 대들었다.
사랑에 빠진 이 봉희 전 경민: 세 들어 사는 피난민 가족 이 봉희가 주인집 학생 전 경민과 사랑에 빠졌다. 미래의 남편에게 고향 청천강을 보여주고 싶었다. 첫사랑 전 경민과 결혼하여 딸 셋을 낳았다.
남조선을 얕봤던 이 재긍 중좌: 인민군 38 경비대 제 3여단 제 7대대장. 남침 직전 38선 이남 국방경비대의 실정을 정탐했고 그 실정을 알고 난 후 남조선을 비웃었지만 그는 남쪽으로 넘어올 운명이 되고 말았다.
개성 경찰대장 감 복룡 경감: 6월 25일 9시에 이미 인민공화국의 땅이 되어버린 개성의 철도경찰대장. 감 대장은 본부대원 50명과 함께 인민군 탱크에 소총사격을 가하다가 전원이 전사했다.
국군 1사단 13연대의 청년 장교, 김 호 소위. 고 동수 중위. 김 홍계 소위: 그나마 버티던 1사단도 행주까지 밀리던 중 서울 함락 소식을 들었다. 이북 출신이었던 세 장교는 행주산성에 올라 나란히 자결했다. 북진해 고향을 찾겠다는 꿈이 좌절되자 한날한시에 목숨을 바쳤다.
빨갱이전문 유 해진 경위: 충남 아산 신창 지서 주임. 빨갱이는 물론 그 가족과 회색분자와 인공의 여름 마을 회의에 단순 참석자까지 잡아들였다. 반반한 마을 아낙과 처녀들 조사한다는 구실로 밤마다 불러다가 숙직실로 데려갔다.
혁명 여걸 권애라: 의열단 활동을 한 독립투사 유시태의 아내로 자신도 독립투쟁에 헌신했다. 그 남편에 그 아내소리를 들으며 평생 남편과 함께 투쟁했다. 여사소리 대신 동지소리를 듣기를 좋아했다.
영창신세가 된 주 명철 대위: 간부 후보생 출신. 육군대위. 전방에서 후방으로 영전한 후 암거래로 구입한 권총으로 외갓집을 들어먹은 원수를 쐈다가 대구헌병 사령부로 연행되었다.
가짜 이 강석 노릇 강 성병: 이 승만의 양자 이 강석으로 행세하며 전국의 고관대작들에게 온갖 향응과 뇌물을 받았던 사기꾼. 꼬리가 길어 체포되었으나 욕을 먹기는커녕 전국의 술집은 그의 이야기로 웃음꽃을 피웠다. 난놈이야 하면서.
혈혈단신 전 태욱: 6월 한강철교 폭파 때 다리를 다쳤다. 피난 가서 아버지를 잃었고 11월에서야 서울 집으로 돌아왔지만 어머니와 동생 소식 들을 수 없었다.
불길한 꿈을 꾼 고 명곤 대위: 꿈에 대대장이 죽었으나 누구에게도 꿈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정말로 대대장 김 철규 중령이 순찰도중 지뢰를 밟아 죽었다.
치마폭에서 살아난 소년 부 청하: 제주 4.3 학살 당시 할머니의 치마폭에 숨겨져 있다 살아난 소년. 부모와 할머니가 보고 싶을 때에는 헤엄을 쳤다. 후일 중학교를 중퇴하고 밀항했다.
양동 건달 장 덕운: 1.4 후퇴당시 사흘을 줄서서 피난 열차를 타고 김천까지 흘러들어 넝마주이 생활을 하다가 타이어 장사, 고무신 장사로 부자가 되었지만 김천 서라벌 다방 마담에게 야금야금 뜯겼다.
미장이 편 종수: 전쟁이 끝나면 자신이 할 일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사람. 1.4후퇴 때도 피난 가지 않고 폐허에 남아 그 곳에 세워질 집들과 미장이로서의 바쁜 내일을 꿈꾸었다.
노여움을 버린 이 용문: 무역국 조사 계장으로 51년 3월 재 수복 당시 서울에 다시 와 교문동 집에 들렀으나 폐허뿐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화내지 않았고 절망하지도 않았다. 살아 있는 한 집은 다시 지을 수 있다고 믿었다.
열 세살 만성이: 오산 숯고개에서 아버지 어머니 두 동생을 폭격으로 모두 잃었다. 외로웠지만 굳세게 부모와 동생 몫까지 살기로 결심했다.
영덕 포구 어민 창수 아버지: 영덕전투가 끝난 후 박살 난 포구에서 매어둔 배가 무사해서 기뻤던 어부. 바다에 미 군함이 떠있었지만 고등어를 잡기 위해서 용감하게 저녁 바다를 나섰다.
천애 고아 안 인석: 미 군함의 함포 사격으로 일곱 살 때 젖먹이 동생을 잃었고 어머니 역시 한 팔을 잃었다. 여덟 살에 엄마마저 다시 군용트럭에 치여 죽었다.
해인사 인민위원 효봉선사: 50년 8월 극구 사양했지만 인민군에 의해 해인사 인민위원이 되었다. 9월 퇴각하는 인민군이 해인사 대장경각에 불을 지르자고 했지만 결사적으로 반대해 세계적인 문화유산을 지켜냈다. 이후 해인사는 효봉선사와 같은 생각을 했던 공군비행사의 명령 불복종으로 또 한번 지켜졌고 고려의 위대한 문화유산은 그렇게 우리 곁에 남을 수 있었다.
역사 앞에서 선 사학자 김 성칠: 50년 당시 서울대 사학과 교수. 서울에 잔류하면서 좌도 우도 아닌 민족의 시각에서 한국전쟁을 찬찬히 바라봤고 그러한 시선이 담긴 그의 유고 ‘역사 앞에서’는 한국전쟁의 본질을 탐구하는 데 매우 귀중한 사료가 되었으나 장장 40년 가까이나 세상에 공개되지 않았다. 51년 이른 나이에 세상을 버렸다.
해군 소령 주 철규: 서울에서 야반도주 끝에 전국으로 도피하던 이승만을 목포에서 부산까지 19시간동안 험한 바다를 뚫고 태워다 준 해군 514함의 함장. 다시 잔잔해진 바다로 돌아가 맡은 바 임무를 다했다.
빨치산 임 상래의 처: 피아골로 올라간 남편 남로당 전사 임 상래가 몰래 찾아와 자고가면서 널어논 빨래의 색깔로 안전유무를 표시하기로 약속했다. 그렇게 남편이 드나들면서 아이를 가지게 되었으나 아무리 안전하다는 신호를 보내도 어느 날부터 남편은 오지 않았다.
아방궁 밀주를 마셨던 윤 용하: 화가 이 중섭 만큼이나 불우하게 살았던 작곡가. 성가대 지휘자 생활로 번 돈으로 밥은 먹지 않고 밀주제작소 아방궁의 밀주로 하루를 버텼다. 영양실조로 요절했으나 걸작 가곡 ‘보리밭’은 지금도 애창되고 있다.
고향이 그리웠던 신 노인: 월남한 피난민. 평북 구장군 자성면 산정리 고향이 늘 그리웠고 결국 실성해버려 늘 ‘가자우’를 외쳐댔다.
영친왕 이 은: 조선의 마지막 왕자. 오랜 세월동안 일본의 인질로 살았고 일본 황실의 여자와 결혼했다. 해방이 되었지만 그를 경계했던 이 승만에 의해서 개인자격으로조차 귀국하지 못했다. 한국전쟁이 나자 판소리 심청가와 춘향가를 들으며 시름을 달랬다. 사망직전에서야 뒤늦게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홀로 월남한 이 오준: 어머니도 아내도 누나도 모두 남겠다 하여 유엔군이 곧 다시 올 줄로 알고 쌀 한 자루 지고 50년 12월 월남했다. 피난 수도 부산에 가다가 도중 삼량진 들판에 내려 피난열차에서 사귄 성 완종과 함께 움막을 짓고 새 삶을 시작했다.
전쟁으로 재벌 된 정 재호 사장: 전쟁으로 대목을 만나 재벌이 되었다. 늘 취침 전 위스키 한잔을 즐기며 오늘 일과 내일 벌어질 일들을 반추했다. 전투가 치열할수록 그는 돈을 더 벌수 있었다.
인민위 보초 강 병환: 50년 여름 부안 인민위원회 소속으로 정문에서 보초를 서다가 수복후 인공 부역자들과 함께 변산 앞바다에 수장되었다. 후일 아들 동수가 아버지의 넋을 건지러 바다에 배를 띄웠다.
개성 사람 계 철규 옹: 7천 평 땅을 가진 자영농이었지만 전쟁이 나자 해주 간 큰 아들과 국군 1사단 신병이었던 작은 아들 때문에 고향 개성을 떠날 수 없었다.
아버지가 전사한 채 영진: 육참총장 채 병덕과 백 경화 여사의 아들. 전쟁이 시작되고 용산 갈월동 참모총장관사에서 피난 가 임시수도 부산 송도에서 태어났다. 영웅의 영, 38선 진격의 진을 따 아버지가 붙여준 이름 영진. 그러나 좌천된 아버지는 하동에서 괜히 전사했다.
켈로 부대원 최 규봉: 가장 위험한 임무를 했던 정예첩보부대원. 인천 상륙작전 때 팔미도 등대의 불을 밝혀 작전을 성공시킨 일등공신이 된다. 계급도 군번도 없이 청춘을 전쟁에 바쳤다. 그에겐 켈로 부대가 전부였다.
유 일한의 아버지 유 기연: 개화에 일찍 눈을 떠 기독교 신자가 되었고 실업가가 되었다. 늘 절약하며 살았지만 독립운동자금은 절약하지 않았다. 서전의숙과 명동학교 등에 자금을 댔고 아침마다 애국가를 불렀다. 장남 유 일한을 미국으로 조기 유학 보냈다. 후일 그가 민족기업 유한양행의 사장이 되었다.
체포된 전 우익: 남선전기 용산지점 배선과장으로 근무하다 전쟁이 나자 피난도중 한강다리에서 가족을 모두 잃고 혼자 숨어 지냈다. 이웃집 천정을 뚫고 숨어 지내다 같은 동네 이완진의 신고로 체포.
서북 청년단 김 재복: 서북청년단원이 되면서 평범한 청년에서 과격한 극우행동대원이 되었다. 서청 특별중대 소대장으로 대전에서 맹활약했고 이후 제주에 상륙해서 보급에 비협조적이라고 제주도청 총무국장 김두현 살해를 시작으로 제주도민을 닥치는 대로 학살했고 제주도 비바리들을 강간했다. 서울로 돌아갔으나 외톨이가 되었다.
다리가 없어진 박 영만: 어려서 천자문을 잘 읽었고 새끼도 잘 꼬는 이쁜 아이였다. 전쟁에서 한쪽 다리를 잃고 의족을 달고 제대, 고향으로 돌아왔다.
육군하사 신 주식: 53년 대성산 전투에서 전사해 동작 동 국립묘지에 안장된 대한민국 육군하사. 그러나 그의 유골이 정말 그의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조선 최초의 양의사 김 필순: 어려서부터 수재소리를 들었고 1908년 최초의 면허 의사가 되었다. 포부가 커 만주로 망명 독립군 근거지에서 독립운동을 돕다가 일본인에게 독살되었으나 그의 누이들은 임정의 주요 인사들의 부인이 되었고 그의 형제들은 남과 북 중국과 미국에 골고루 뿌리내렸다. 중국영화배우 김 염도 그의 동생이다.
제대 후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손 달수: 한국전쟁 무수한 전투 끝에 살아남은 화염방사기 병. 만기로 제대했으나 전투 시 쾌감을 잊지 못해 사회에 적응하지 못했다. 친구 집에 불을 지르고 결국 잡혀갔다.
멋쟁이 강 신재: 아직 전쟁의 흔적이 역력한 서울 명동에 바바리 코트와 불란서 향수 냄새를 풍기며 나타난 당대의 여류 문인. 음악다방 돌체에서 음악을 듣고 차를 마셨다. 뭇남성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포매리 이장 이 만석: 양양 포매리는 전쟁이 나면서 사람 발길이 없어졌으나 흥남 길주에서 피난민들이 밀려오면서 타관 붙이들이 원주민을 밀어냈다. 이 만석은 피난민 2세로 이장이 되었지만 한푼 부정을 몰랐고 경찰이나 순경도 그를 슬슬 피했다.
좌우 악연의 시작 민 재우: 야학당에서 민족사를 가르치고 신채호 글을 읽었다고 옥고를 치렀고 일본이 망한다고 말했다가 서대문 감옥에 수감 중 해방을 맞았다. 해방 후 감옥에서 함께 고생한 좌익 안 치달에게 총을 맞고 암살. 한국전쟁이 나자 민재우의 아들이 이번에는 안치달의 어린 두 아들을 죽여 버렸다.
좌익 장기수 김 철해: 본명 신 기숙. 50년 5월 동해 초승달빛을 받으며 모래 위를 걷던 감상적인 소녀였으나 인공이 들어서면서 여맹간부가 되었다가 태백산 빨치산 여전사로 끝내 좌익 장기수 김 철해가 되고 말았다.
우익 테러의 상징 선우 기성: 북의 친일숙청을 피해 월남했으나 남의 현실에도 환멸을 느꼈고 46년 서북청년회를 결성해 이승만을 적극 지지했다. 내세운 강령은 이상적이었으나 실질은 철저한 반공과 무자비한 테러. 그는 점점 더 살벌해져만 갔다.
만세 한번밖에 안 부른 이 종형: 3.1 운동 때 만세를 불렀으나 이후 변절하여 일제의 밀정으로 독립군 체포와 독립활동 파괴로 살았다. 해방 후 대동신문사 사장이 되어 만주에서 독립운동 한 것처럼 날조하고 다녔으나 반민특위에 체포되어 유죄판결을 받았다. 반민특위의 와해로 이 승만에게 충성을 다하며 애국자 행세를 했다. 2대 민의원에 당선.
제주 관음사 주지 이 일선 스님: 절에서는 천수경을 독송하는 근엄한 스님이었지만 한라산을 내려와서는 조국의 운명을 걱정하는 지사요 전사가 되었다. 47년 민족주의 민주전선 제주지부 공동의장을 역임했다.
신임 9연대장 박 진경: 해임된 김 익렬의 후임 연대장으로 제주에 왔으나 잦은 실언과 야전부대를 지휘해본 경험이 없어 부하들의 신망을 잃었다. 군정장관 딘과 조병옥의 초토화 작전을 지지하여 제주 초토화 작전을 강행했으나 반감을 품고 있던 부관 문 상길 중위에 의해 사살되었다. 첫 부임 인사에서 부친이 대정 익찬회에서 친일부역을 한 것을 자랑했고 전 제주도민을 희생시켜도 무방하다는 소리를 했었다.
북으로 가버린 송 호성 장군: 국군 창설의 주역이었고 국방경비대 총사령관을 역임했으나 한국전쟁이 나자 인민군에 투항해버렸다. 그의 투항은 군에서 독립군 인맥을 거세해간 이승만과 채 병덕에 대한 반감 때문이었다고는 하나 연안에서의 독립투쟁 말고는 근대적인 군대의 전술에는 무지했다.
수학을 정치화한 교수 최 윤식: 54년 이승만의 종신 대통령제 개헌안이 한 표차로 부결되자 사사오입이라는 궤변의 논리를 적용시켜 개헌안을 가결시키는데 일조했다. 순수학문 수학이 어용 정치화 되면서 이후 한국사회는 무수한 곡학아세가 시작된다.
이름만은 기억했던 전쟁고아 이 천수: 폭격으로 부모와 형 모두를 잃고 집도 없어졌다. 미군 깡통을 밥통 삼았고 시체의 옷을 벗겨 추위를 피했다. 그러면서도 부모와 형 자신의 이름만은 결코 잊어먹지 않았다.
아들을 잃은 김 중헌 옹: 낙동강 전선 최대의 혈전 다부동 전투에서 아들 김 만수를 잃었다. 해마다 8월 7일이 되면 대전-대구 완행열차를 타고 왜관철교에서 격전장을 바라보았지만 끝내 아들의 이름을 입 밖에 내지 않고 가슴속 깊이 묻었다.
관악산 연주대 빨치산 심 득구: 인공이 시작되면서 그냥 풀려난 절간털이 전문. 별명만 빨치산이었다. 이후 좌익에 가담했으나 김 상돈을 못 잡아 내무서장의 경고를 들었다. 혼자 관악산 연주대 빨치산 시절이 좋았다고 투덜댔다.
영섭이 엄마: 전쟁으로 남편을 잃었다. 삼년상을 앞두고 황 영모와 재혼 아기를 낳았다. 전실자식 민구 상구를 돌보면서 영섭이를 낳아 영섭이 엄마가 되었다.
4.3 학살의 가해자 김 정호: 제주도 토벌사령부 공안국장. 김 달삼과 김 익렬 연대장의 평화안을 깬 오라리 방화를 지시했다. 김 익렬을 미워해 암살할 궁리도 했다. 겉으로는 강경책을 입에 담았지만 늘 불안하고 두려웠다. 육지로 도망갈 계획을 세워두고서도 언제나 제주도 초토화를 외쳤다.
만신 차복이: 47년 공창이 폐지되면서 유곽을 나서자마자 신 내림을 받았다. 너무 영험하여 몸 팔다가 넋 파는 만신이 되었다. 전쟁이 나자 차복이 왈 ‘둘 다 못 이기는 싸움이여. 둘 다 반쪽짜리여’
박 헌영의 아내 주 세죽: 그 자신 당대의 혁명가였고 이정 박 헌영의 부인이었다. 29년 모스크바 유학시절 박 헌영과 짧은 행복을 누렸고 거기서 딸을 낳았다.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러시아에서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