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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한국 전쟁사 인물지 [4] : 외국인 편(상)

대한인 2013. 5. 26. 05:08

다시 쓰는 한국 전쟁사 (65)

-인물지 [4] : 외국인 편(상)-


[외국인 편(상)]

*편의상 외국인들은 한국 상황과 관련되었을 당시의 직위와 계급을 사용했습니다.


<미국>

존 하지 중장(John R. Hodge 1893-1963): 일리노이 출신. 일리노이 주립대학을 졸업하고 예비군 장교가 되었다가 1차 대전에 참전 대위가 되었다. 이후 참모학교와 포트 베닝 보병학교를 거쳐서 경력을 쌓았다. 42년 25사단 부사단장으로 남태평양 정글 전에 참전하면서 혁혁한 전공을 쌓았고 45년 중장으로 승진하여 미 24군단장이 되었다. 부하들과 전투를 잘 알았던 전형적인 야전군인이었으나 24군단이 38선 이남의 군정을 책임지면서 본인과 남한 모두가 곤혹스러운 시간을 보내야 했다. 정치적 경륜이나 감각이 부족했던 하지는 복잡다단한 해방이후 한반도 정국을 풀어가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하지의 정책은 의도와는 달리 매번 심각한 갈등과 충돌을 야기했고 참모들 중 그를 제대로 보좌해줄 전문 인력마저 부족했다. 그는 한반도에 악의를 가지고 있지 않았으나 세련된 정치장교들을 포진시킨 소련군정의 노회함에 비해서 우직한 스타일의 하지와 미군정 정책은 분명 적절한 대응방식이 아니었다. 이임하면서 한반도의 분단이 내전으로 이어질 것을 예견했던 하지는 본국으로 돌아가 대장으로 승진하여 미 본토군 3군사령관을 역임했고 53년 전역했다.


제임스 하우스만 대위(James H. Hausman:1918-1999): 보충역 대위에 불과했으나 해방 이후 한국군의 형성과 이후 국군 정책에 가장 많은 영향력을 끼친 군인. 2차대전 당시 형의 신분을 도용해 입대했다가 제대. 다시 입대한 특이한 인물로 처음 한국에 왔을 때 한국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으나 이후 국군의 전신인 국방경비대의 간부들을 훈련시키고 한국 정치지도자들의 영향력에서 군을 지키고 공산주의자들의 침투를 막는 역할을 담당했다. 그러나 하우스만은 제주 4.3 학살과 여순사건당시 민간인 학살의 배후지시자였고 이러한 활약으로 공로훈장을 받았다. 하우스만은 신생 대한민국 국군의 틀을 사실상 좌우했던 배후인물이었다.


윌리엄 딘 소장(William F. Dean:1899-1981): 일리노이 출신으로 UC 버클리 대를 졸업했다. 주 방위군으로 군 생활을 시작하여 42년 장군이 되었고 43년 소장이 되어 유럽에서 44보병사단을 지휘하여 전공을 세웠다. 47년 군정장관이 되어 한국과 인연을 맺었으나 48년 제주도 4.3 사건 당시 9연대장 김 익렬을 해임하여 제주도 민간인 학살의 배후지시자 중 한명이기도 하다. 이후 7사단장과 미 8군 참모장을 역임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큐슈에 주둔하고 있던 미 24사단장으로 가장 먼저 한국전에 투입되었으나 대전전투에서 참패했고 자신도 길을 잃고 헤매다가 포로가 되어 53년 9월 석방될 때까지 억류되었다. 귀환하여 영웅적인 환영을 받았고 그가 전사한 줄 알고 이미 수여된 의회명예훈장도 받았다. 본국으로 돌아와 6군의 부사령관을 역임했고 55년 퇴역했다.   


매튜 리지웨이 대장(Matthew B. Ridgway:1895-1993): 버지니아 출신.17년 미 육사를 졸업하면서 군 생활을 시작했고 2차대전 중 82공수사단과 18공수군단을 지휘하며 노르망디와 벌지 전투 등에서 전공을 세웠던 보병전의 전문가. 50년 겨울, 순직한 워커중장의 후임으로 패주하고 있던 미 8군사령관에 부임하여 흐트러진 전열을 다잡고 중국군의 파상공세를 성공적으로 저지했다. 한국전쟁에서 미군의 가장 큰 위기를 극복했던 이 공로로 후일 한국전쟁 중 최고의 미군 지휘관이라는 평을 듣게 된다. 이후 대장으로 진급하여 해임된 맥아더의 뒤를 이어 미 극동군과 제 2대 유엔군 사령관이 되었고 제한전이이기는 했으나 중국군과 인민군에게 치명타를 가하는 작전들을 지휘했다. 52년 5월에는 NATO군 사령관으로 유럽에 부임했다. 53년 워싱턴으로 돌아와 육군참모총장이 되었고 55년 전역했다. 맥아더의 명성에 가려 한국전 당시보다 이후 시간이 흐를수록 한국전에서의 전공이 인정되어 91년 의회 금성훈장 등 많은 훈장을 받았고 ‘진정한 야전군인’으로 평가되었다. 그러나 리지웨이는 미국의 베트남 전 개입에 대해 초기부터 매우 비판적인 자세를 취했다. 한국전쟁이 끝난 지 40주년이 되는 바로 전날 98세를 일기로 사망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제임스 밴 플리트 대장 (James A. Van Fleet:1892-1992):뉴저지 출신. 15년 미 육사를 졸업했고 멕시코 국경근무를 거쳐 1차 대전에는 아라곤 전투에 참가했다. 이후 캔자스 대학에서의 교관생활과 파나마 해외 근무 등을 거쳐 41년 8연대 연대장이 되었으나 마셜참모총장이 그를 알콜 중독자의 이름과 혼동하여 44년까지도 장군이 되지 못했다. 44년 4사단 8연대장으로 노르망디전투부터 탁월한 지휘 솜씨를 발휘, 빠르게 진급하여 4사단장을 거쳐 45년 3월에는 3군단장이 되었고 아이젠하워 휘하의 가장 우수한 야전지휘관으로 인정받았다.  대전후 그리스 군사고문을 거쳐 본토 2군사령관으로 재직 중 리지웨이의 후임으로 51년 4월 미 8군사령관에 부임하여 한국전쟁에 참전. 중부전선에서 적극적인 공세를 가해 중국군에게 치명타를 가했으나 정전협상이 진행되면서 더 이상 군사적 재능을 발휘할 기회를 얻지는 못했다. 그는 여러 차례 능동적인 공세를 제안했으나 상관 리지웨이와 클라크는 정치적인 이유로 이를 허락하지 않았고 53년 2월 8군사령관에서 물러나 4월 대장으로 전역했다. 그러나 밴 플리트는 뛰어난 야전군인이었다. 그가 부임한 이래 미 8군은 전쟁의 주도권을 상실하지 않았고 훈련이 부실했던 한국군의 체계적인 훈련과 육사의 양성을 도왔고 전역 후에도 전쟁으로 피폐해진 한국을 돕는 일을 했다. 한국전에서 외아들을 잃었던 밴 플리트는 54년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특사로 극동을 방문했고  60-61년에는 게릴라전에 대한 육군의 자문역으로도 활약했다. 92년 100세의 나이로 영면했다. 조용하고 자기 절제력이 강했던 밴 플리트의 이름은 한미 우호에 기여한 사람에게 수여되는 밴 플리트 상으로 기념되고 있다.  


마크 클라크 대장(Mark W. Clark:1896-1984): 뉴욕태생이나 시카고에서 자랐다. 웨스트포인트에 입학했으나 허약한 몸 때문에 17년 동기생 139명중 110등의 저조한 성적으로 졸업했으나 곧 대위로 진급했다. 1차 대전에 참전하여 부상을 입었으나 전공을 인정받아 훈장을 받았다. 이후 육군의 요직에 두루 발탁되었다. 41년 8월 미 육군 참모부의 작전참모가 되었고 미국이 2차대전에 참전하면서 미지상군 참모장이 되었다. 이후 42년 10월 북아프리카 연합군 부사령관으로 북아프리카 상륙작전(작전명 토치)을 기획했고 아이젠하워 사령관의 밀사로 알제리의 프랑스군과 협상하여 토치작전의 성공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43년 5군 사령관으로 이탈리아전선에서 싸웠고 나폴리와 로마를 점령했으며 45년 5월 미영 연합 15 집단군 사령관으로 이탈리아, 오스트리아에서 독일군의 항복을 받았다. 전후 오스트리아 주둔군 사령관을 역임했고 47년 귀국하여 본토 미 6군 사령관이 되었다. 51년 미 지상군 참모장으로 처음 한국전을 시찰했고 이듬해 5월 제 3대 유엔군 사령관 겸 미 극동군 사령관에 취임했다. 그러나 클라크가 부임했을 당시 전선은 치열한 국지전과 난항을 거듭했던 정전협상이 진행 중이었고 후방에서는 거제도 포로수용소 폭동 등으로 혼란스러웠던 상황이었다. 클라크의 임무 역시 전투보다 정치적인 업무에 더욱더 치중될 수밖에 없었다. 반공주의자 였던 클라크는 적극적인 공세를 주장했지만 워싱턴의 허락을 얻지 못했고 대신 철저한 공중폭격과 함포사격으로 전 북한지역을 사실상 초토화 시켰다. 53년 7월 정전협정에 서명하여 3년여의 한국전쟁을 끝냈으나 개인적으로 이를 불명예스럽게 생각했고 곧 전역했다. 전역 후 시타델 군사학교 교장으로 재직했으며 2차대전과 한국전쟁에서의 경험을 쓴 회고록 ‘다뉴브강에서 압록강까지’를 펴냈다.


월튼 워커 중장(Walton H. Walker:1889-1950):텍사스출신. 12년 미 육사를 졸업했고 1차대전의 전공으로 은성무공훈장을 받았다. 이후 유능한 훈련교관으로 재능을 발휘했고 패튼의 휘하에서 42년 3기갑사단장으로 재직하였으며 강인하고 투지 넘치는 지휘관으로 인정받았다. 49년 아이켈버거 장군의 후임으로 일본주둔 미 8군 사령관이 되었으나 미8군은 장비와 훈련이 부족했다. 50년 6월 한국전쟁이 발발하였고 전투경험이 없었던 그의 8군은 한국전쟁 초기 고전을 면치 못했다. 50년 여름 낙동강에 최후 방어선 워커라인을 설정하고 한국군과 함께 두 달여 동안 인민군의 파상공세를 끝내 저지하여 성공적인 반격의 기회를 만드는데 크게 공헌했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후퇴하는 인민군을 추격하여 빠르게 북진하였으나 50년 겨울 너무 넓게 형성된 전선의 틈을 파고든 중국군의 공세로 다시 후퇴하였다. 작전지휘권이 이분되고 중국군의 참전징후를 무시당하는 등 자신의 과오에 의한 패배가 아니었음에도 맥아더의 신임을 잃어 교체가 검토 되던 중 서울 부근에서 교통사고로 순직했고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올리버 스미스 해병 소장(Oliver T. Smith:1893-1977):텍사스태생이나 캘리포니아에서 성장. 16년 UC 버클리 대 졸업. 17년 해병예비군으로 장교생활 시작 18년 정규해병대로 편입. 2차대전 직전까지 다양한 해병대 보직을 거쳤고 파리 에콜 슈페리어 등 다년간의 해외 유학과정을 거친 지적인 인물. 미국의 2차대전 참전 후 2년간 해병사령부에서 부대편성 업무를 했고 44년 5해병연대장으로 남태평양 뉴브리튼 작전에 참가 전공을 세우고 준장으로 진급했다. 이후 해병 1사단 부사단장과 오키나와 작전에서 미 10군 부참모장을 역임했고 귀국 후 해병사령부 참모 직을 맡았다. 50년 한국전쟁에는 해병 1사단장이 되어 인천 상륙의 선봉으로 전세를 뒤집었다. 이후 원산에 상륙하여 북진하던 중 장진호에서 중국군에게 포위되었으나 중국군 12개 사단의 포위를 뚫고 흥남으로 철수하면서 중국군 9병단에게 치명타를 가했다. 50년 미군의 겨울패전기간 중 유일하게 미 해병대만이 장비를 버리지 않고 대열을 유지하며 철수했을 뿐 아니라 미 해병대가 중국군에게 준 타격은 이후 중국군의 38선 이남으로의 진격을 현저하게 약화시켰다는 점에서 전술사적 의의가 매우 크다. 스미스는 51년 본국으로 돌아가 중장으로 승진하여 대서양 미 해병대 사령관이 되었고 55년 대장으로 전역했다.


아더 스트러블 제독 (Arthur D. Struble:1894-1983):오래곤 출신. 11년 아나폴리스 해군사관학교 졸업. 15년-20년까지 여러 순양함과 구축함에서 근무. 21-23년 해사교관. 25년 전함 함대 참모가 되었다. 27-40년까지 전함 뉴욕과 애리조나, 순양함 포틀랜드와 트렌트에서 근무했다. 42-43년까지 해군작전부에서 근무하며 해군 참모장이 되었다. 44년 7함대 상륙함대 사령관으로 레이테 작전과 필리핀 상륙작전을 지휘했고 전후 태평양 소해함대를 이끌고 기뢰제거 작업을 했다. 46-48년 태평양 상륙함대를 지휘했고 48년 중장으로 승진하며 참모차장이 되었다. 50년 5월 미 태평양 7함대 사령관으로 부임, 한국전쟁에서 신속한 작전배치로 인민군의 진격을 저지했고 지형 상 매우 어려웠던 인천상륙작전을 총지휘하며 전세를 역전시키는데 공헌했다. 미 7함대는 한국전쟁 기간 내내 한반도의 제해권을 장악하며 중국군과 인민군에게 많은 타격을 주었다. 이후 1함대 사령관을 역임했고 56년 대장으로 전역했다.

 

찰스 터너 조이 제독(Charles Turner Joy:1895-1956):미주리 출신. 16년 해사를 졸업하고 포술장교로 근무했다. 33년 처음 구축함 함장이 되었고 37년 해사 포술총괄 교관이 되었다. 2차대전 중 7차례나 주요 태평양 해전에 참전했고 49년 일본 주둔 극동함대 사령관으로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했다. 51년 7월 정전회담 유엔군 측 수석대표가 되어 전정협상을 시작하였으나 회담은 난항을 거듭했고 52년 4월 회담에 진전이 없자 사임하고 해사교장이 되었다. 부임 한 달 만에 백혈병진단을 받았지만 54년 해사교장 임기를 다 마치고 중장으로 전역했다. 56년 병사.


알레이 버크 제독 (Aleigh  A. Burke:1901-1996):콜로라도 출신. 23년 해사를 6등으로 졸업. 전함 애리조나 등에서 포술장교로 근무. 빠르게 승진하며 구축함 함장이 되었고 2차대전 중에는 주로 남태평양에서 23구축함 전단을 이끌며 일본함대와의 전투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워 ‘31노트 버크’라는 별명을 얻었다. 44년 58기동함대 참모가 되고 제독으로 승진했으며 오키나와에서 항모 벙커힐과 엔터프라이스를 지휘. 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극동함대 부참모장으로 순양함대를 이끌며 동부전선에서 국군 1군단의 지원사격을 전담했고 정전협상에도 참여했다. 54년 해군참모부에서 근무 중 니미츠처럼 2계급을 특진하여 일약 미 해군 참모총장에 발탁, 세 번이나 연임하며 최장수 참모총장으로 전후 미 해군의 기초를 닦았다. 탁월한 리더십과 업적으로 많은 존경과 훈장을 받았고 미 해군의 최신예 구축함 알레이 버크급의 네임 십으로 아직도 기념되고 있다. 


호이트 반덴버그 공군대장 (Hoyt S. Vandenberg:1899-1954):위스콘신 출신. 23년 웨스트포인트 졸업. 20년-30년대에 걸쳐 비행학교 교관과 항공대 지휘관으로 일했고 2차대전시 우수한 작전기획력과 조직운영능력을 발휘 12공군을 창설하고 43년 미 전략공군 참모장을 역임했고 유럽에서 미 전략공군을 지휘했다. 46년 CIA 국장. 48년 전후 창설된 공군 참모총장이 되어 베를린 공수작전을 총지휘. 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맥아더를 도와 한국전을 지원하기는 했으나 그를 포함한 미 합참의 주된 관심사는 소련의 동태와 한국전쟁이 유럽으로 확전되지 않도록 방지하는데 있었다. 한국전쟁 내내 육군의 압력을 받아 북한지역을 초토화하였으나 맥아더의 전술에는 회의적이었고 51년 초 패전 시에는 미군의 완전철수를 주장하기도 했었다. 그는 트루먼의 맥아더의 해임에 찬성했다. 그러나 한국전쟁 내내 대규모 폭격으로 북한지역 내 주요 산업인프라를 파괴시켰고 원폭투하의 필요성이 제기될 때 이 점을 들어 원폭투하에는 반대했다. 53년 6월 전역했고 이듬해 암으로 사망했다.


조셉 로튼 콜린스 대장(Joseph Lawton Collins:1896-1987): 루이지애나 출신. 17년 미육사 졸업. 19년 독일에서 근무. 21년 육사교관생활을 시작 십 수 년 간 교관생활. 36년 육군대학에서 수학. 2차대전 중 42년 25 사단장으로 과달카날과 뉴기니에서 전공을 세웠고 43년 12월 7군단장이 되어 44년 노르망디 작전에 참가 엘베 강까지 진격했다. 귀국해 48년 참모차장이 되었고 49년 대장으로 진급하면서 육군참모총장이 되었다. 한국전쟁 전 그는 한반도 개입에 반대했었으나 맥아더의 설득으로 입장을 바꿨다. 한국전쟁 내내 미군의 재편성과 유엔군 구성지원 업무를 했고 전쟁 전 59만이던 미 육군을 53년 무렵엔 160만으로 증강시켰지만 이로 인해 주 방위군과 예비군출신자들의 저항도 받았다. 인천 상륙을 전술적인 이유로 반대했으나 역시 맥아더에게 설득 당했다. 53년 8월 참모총장에서 물러나 NATO 군사위원회 미국 대표가 되었고 56년 전역했다. 이후 콜린스는 한국전쟁에서 공산주의의 침투를 막았기 때문에 승리한 전쟁이라고 주장했다.


오마 브래들리 원수 (Omar N. Bradley: 1893-1981):미주리 출신. 15년 미 육사를 졸업. 포트 베닝 보병학교장을 역임했다. 2차대전 중 북아프리카 전에서 패튼의 휘하로 참전 튀니지를 함락시켰고 43년 영국으로 돌아와 유럽침공을 준비했다. 44년 12집단군 사령관으로 노르망디 연합군을 총지휘했고 프랑스를 해방시켰으며 독일로 진격하며 2차대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귀국 후 재향군인회 업무를 맡았다가 48-49년 육군참모총장이 되었고 49년 초대 미 합참의장(Chairman of JCS)에 올랐다. 브래들리는 49년 중국혁명이후 극동의 전략정책을 관장했으며 한반도에는 큰 관심이 없었으나 한국을 지속적으로 미국의 방어선 안에 두려는 정책을 취했다. 현실적이고 온건한 사고성향의 브래들리는 맥아더와는 거리를 두었는데 맥아더의 지나친 자신감과 오만함 자아도취가 자주 전략전술 적 판단을 그르치고 있다고 평가했고 이것은 후일 한국전쟁에서 그대로 실증되었다. 후일 브래들리는 중국군의 겨울 공세에 미군이 후퇴했던 두 달간이 그의 군 경력기간 중 가장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다고 고백했다. 이후 브래들리는 군사행동과 정전협상을 병행함과 동시에 맥아더의 해임을 지지하여 트루먼의 정책에 동조했다. 그는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 현재까지는 미 육군의 마지막 원수로 전역하여 시계회사의 사장 등을 역임했고 그의 업적에 대한 많은 훈장과 저서가 발간되었다. 패튼이나 몽고메리, 맥아더처럼 강렬한 카리스마는 없었지만 온화한 인품과 따스한 리더십으로 병사들의 존경을 받았고 균형감 있는 판단력을 갖춘 군인으로 평가되었다.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 (Douglas Macarthur:1880-1964):아칸소 출신. 군인집안의 아들로 06년 미 육사를 수석으로 졸업했고 장교시절부터 육군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1차대전에 참전하여 여단장과 사단장을 역임했고 참전 11개월 동안 12개의 무공훈장을 받았다. 전후 귀국 최연소 육사교장이 되었고 3군단장을 거쳐 평생 인연을 맺었던 필리핀 주둔군 사령관을 역임했다. 30년 필리핀에서 돌아와 미 육군 참모총장이 되었으나 대공황기 중 국방비 감축을 시도하는 의회, 행정부와 첨예하게 대립했다. 36년 필리핀 정부 군사고문이 되었고 37년 예편하여 곧 독립을 준비하는 필리핀군의 원수로 초빙되어 필리핀군을 훈련시켰지만 일본군이 공격해오자 훈련과 방어준비는 부족했음이 판명되었다. 41년 필리핀군이 미군에 편입되면서 현역에 다시 복귀하여 미 극동군 사령관이 되었으나 진주만 피습 8시간 후 필리핀 클라크 공군기지 역시 기습당하여 제2의 진주만이 되면서 대부분의 공군력을 상실했다. 이후 맥아더는 잔존 병력으로 바탄에서 농성했지만 충분한 식량과 군수품을 준비하지 않아 고전 중 호주에서의 반격을 준비하라는 대통령의 지시를 받고 탈출하여 남서태평양지구 연합군 총사령관으로 취임했다. 그러나 항공기와 함선의 전투였던 태평양전선에서 육군 맥아더의 역할은 해군과 해병에 비해 뉴기니 전선 외에는 두드러짐이 없는 보조적인 성격이 강했다. 이후 44년 말 루손에 상륙하면서 약속대로 필리핀에 다시 돌아왔지만 태평양전선의 승패와는 거리가 먼 전투였고 45년 일본본토 침공 총사령관이 되었지만 원폭투하로 일본이 항복, 일본점령군 총사령관으로 항복조인식을 주관 2차대전을 끝냈다. 전후 일본을 사실상 지배하면서 여러 개혁 작업을 주도했고 아시아에서의 명성과 업적을 토대로 대통령의 야심을 키웠다. 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유엔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었고 다수가 반대했던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극적으로 전세를 뒤집었으나 38선 이북으로 진격하면서 중국군의 기습을 받고 참패하여 미육군사상 최장거리 후퇴를 해야만 했다. 전세를 만회하기 위해 만주폭격과 원폭투하를 건의, 사실상의 3차대전을 주장하여 트루먼 대통령과 정면대립, 51년 4월 해임되었다. 해임 즉시 전역, 15년 만에 귀국하여 영웅적인 환영을 받았으나 이후 상원청문회에서 전술전략 적 실책이 드러나면서 인기를 상실, 대통령의 꿈도 접어야 했다. 맥아더는 20세기 미군인 중 가장 논쟁적인 인물이지만 그의 화려했던 언변과 선전기술에 비하면 전략 전술적 재능은 평범한 수준이었고 특히 한국전쟁에서의 판단착오는 치명적이었다. 실제 군사적 재능과 업적에 비하면 과대평가되었다는 의견이 최근의 추세.


해리 트루먼 대통령 (Harry S. Truman:1884-1972):미주리 출신. 대위로 1차대전에 참가했고 지방판사생활을 거쳐 정치에 입문했다. 34년 연방 상원의원에 당선되었고 40년 재선되었다. 44년 부통령에 지명되었고 루스벨트의 급서로 대통령이 되어 2차대전을 종전시켰다. 외교적 경험이 부족했음에도 불구하고 전후 냉전이 격화되는 시대에 강력한 반공주의를 표방, 마셜플랜과 트루먼독트린을 통해서 적극적인 소련봉쇄와 서유럽부흥을 꾀했고 성과를 거두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즉각적인 개입을 통해서 공산주의의 확산을 저지했으나 맥아더로 대변되는 강경 군사노선이 소련, 중국과의 전면전으로 비화되는 것은 허락하지 않았고 결국 맥아더를 해임한다. 맥아더의 해임은 그에게 인기하락과 공화당 강경파들의 맹비난을 초래했고 52년 재출마를 포기시켰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트루먼의 정책은 현명했던 것으로 평가되었다. 한국에서는 그가 절호의 북진통일 기회를 무산시킨 장본인으로 인식되고 있으나 처칠을 비롯한 역사가들의 평가는 트루먼이 루스벨트 이후 서구세계의 공산세력 확산을 막고 서구 세계의 가치관을 잘 지켜낸 정치지도자로 기록하고 있다. 중국이 개입된 상황에서의 한국전쟁은 자칫 전 세계적인 재앙을 부를 것임을 트루먼은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대통령 임기를 마치고 시민으로 돌아가 고향에서 회고록을 썼으며 72년 88세의 나이로 영면했다.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원수 & 대통령(Dwight D. Eisenhower:1890-1969):텍사스 출신. 15년 미 육사를 졸업하고 1차대전기간 중 기갑부대 교관을 역임했다. 30년대에는 필리핀에서 맥아더의 참모로 일했으나 진급이 늦어 16년간 소령생활을 했다. 2차대전이 발발하자 탁월한 의사조정능력과 조직운영, 친화력 넘치는 리더십을 발휘 북아프리카와 노르망디에서 성공을 거두며 유럽전선을 승리로 이끌었고 빠르게 진급하여 육군 장성 중 최단기간에 원수로 승진했다. 45년 귀국 마셜의 후임으로 육군참모총장이 되었고 48년 예편하여 대학총장이 되었다가 다시 현역으로 복귀하여 NATO군 총사령관을 역임했다. 52년 대선에 공화당 후보로 출마하여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공약대로 한국을 방문하고 정전협상을 강력하게 추진, 한국전쟁을 끝냈다. 아이크 라는 애칭으로 20세기 미 대통령 중 가장 많은 인기와 사랑을 받았던 아이젠하워는 8년을 재임하며 냉전이 격화되는 와중에도 군의 지나친 예산사용을 억제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퇴임하면서 미군산복합체의 문제에 대해서 경고를 보내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보수적인 정책기조에서도 흑인인권을 옹호하기도 했던 아이젠하워는 퇴임 후 자신의 농장으로 돌아가 회고록을 썼고 69년 심장마비로 별세했다.  


딘 애치슨 국무장관 (Dean Acheson:1893-1971):코네티컷 출신. 예일 대를 졸업하고 하버드로스쿨을 거쳐 변호사 생활을 했다. 루스벨트 대통령을 보좌하면서 정치생활을 시작하여 2차대전 중에는 국무부 차관을 역임했고 트루먼에 의해서 전후 국무부 장관이 되었다. 트루먼 독트린과 유럽부흥계획을 기초했으며 공산주의를 봉쇄하려면 유럽을 부강하게 하고 의회민주주의를 성장시키는 것이라고 믿었으나 그와 마셜의 정책기조와 태도는 매카시를 비롯한 강경론자들에 의해서 자주 유약하다는 비난을 들어야 했다. 특히 매카시에 의해 그의 국무부는 소련간첩의 소굴인 것처럼 매도당했다. 한국전쟁 발발 전 미국의 극동방어라인에서 한국과 대만을 제외하여 북한의 전쟁도발을 유도 혹은 방치했다는 비난과 오해를 샀으나 미 행정부의 정책기조와 애치슨의 발언은 다분히 오해에 가까웠다. 애치슨은 맥아더의 해임을 지지하여 역시 강경우파에게 비난을 샀으나 그는 한국전쟁이 전면전이 되는 것을 적극적으로 막고자 했다. 52년 대선전에서 민주당의 스티븐슨의 선거캠프에서 참가했지만 패배했고 이후 법률가 생활로 돌아가 한국전쟁과 자신이 관여했던 50년대 냉전 상황에 대한 저서를 남겼다.


조지 케넌 (George Kennan:1904-2005): 위스콘신 출생. 25년 프린스턴 대 졸업. 이후 국무부에 들어가 유럽에서 외교관 생활을 했다. 29-31년 국무부 장학생으로 베를린 대에서 러시아어와 러시아 사를 공부했고 이후 소련 주재 미 대사관 참사관과 국무부 정책기획국장을 역임했으며 국무부 고문을 거쳐 주 소련 대사 주 유고 대사 등을 역임했다. 47년 “포린 어페어스”지에 X라는 필명으로 [소련 행동의 원천]이라는 논문을 통해 소련외교의 구조와 성격을 정밀하게 분석해냈고 그의 이러한 분석에 기초하여 2차대전 후 미국의 대소 외교안보정책이 수립되었다. 케넌은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기 위해서 서유럽의 부흥과 민주주의의 정착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무력충돌을 지양하고자 했다. 케넌의 정책기조는 니츠의 정책과 함께 냉전시대 미국의 외교안보정책의 원천이 되었고 전후 미국의 한반도 정책 역시 이를 기초로 하고 있다. 50년 이후 프린스턴 대 연구소에서 미소관계 연구에 주력했고 많은 저서를 남겼으며 2005년 101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폴 니츠 (Paul Nitsze:1907-2004):매사추세츠 출신. 하버드대 졸업. 경제계에 투신하여 월가에서 많은 돈을 벌었고 2차대전 기간 중 공직에 들어가 경제부서에서 근무했다. 이후 미국 대외 안보정책의 핵심적인 전략가로 부각되어 케넌과 함께 2차대전 후 미국의 안보전략수립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인물이 되었고 루스벨트 이후 레이건 까지 9명의 대통령과 함께 일했다. 48년 베를린 공수사건 이후 소련에 대한 대응전략을 수립 유명한 NSC 68문서를 작성하여 적극적인 봉쇄정책을 입안했다. 60년대 해군장관과 국방장관을 역임했고 민주당성향이었으나 닉슨과 레이건 시절에도 대외안보정책에 깊이 관여했다. 그러나 니츠는 한국전쟁 당시 맥아더의 강경 정책과 핵사용에 강력히 반발했고 자신의 NSC 68문서가 소련 및 공산권과의 무력대립의 근거로 사용되는 것을 극력 경계했다. 그는 소련내부의 변화를 유도하고 자유진영의 문화와 경제를 발전시키는 길이 최선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이후 그의 정책은 냉전구도의 해체에 크게 기여했고 냉전구도 해체 후 러시아와의 핵무기 감축협상에도 참여하여 공헌했다. 케넌 처럼 장수했던 니츠는 97세로 사망했다.



존 덜레스 국무장관(John F. Dulles:1888-1959):워싱턴 출신. 프린스턴 대를 졸업했고 파리 소르본느 대에서 유학했다. 조지워싱턴 로스쿨을 거쳐 뉴욕에서 국제법 변호사로 활약했다. 이후 파리 평화회의 등 각종 국제회의에 미국대표로 참석했고 44년 공화당 대선후보 듀이의 외교고문이 되었고 45년 유엔 창립총회에 참석했고 50년 국무부 고문이 되어 한국전쟁 전 38선을 시찰하기도 했다. 한국전쟁 중이던 51년 대통령 특사로 일본과 강화조약을 체결했고 53년 아이젠하워에 의해 국무장관이 되어 강력한 반공정책인 롤백정책을 시행하였으나 한국전쟁은 종결시켰다. 이후 집단안전보장체제 강화에 주력했으나 59년 암으로 국무장관에서 사임하고 곧 사망했다.  


존 무초 주한 미국대사(John J. Mucho:1900-1991): 이태리 출신으로 21년 미국으로 귀화하여 브라운 대에서 철학을 전공했다. 26년 홍콩 부영사로 외교관 생활을 시작한 후 오랜 기간 중국에서 근무하여 극동문제 전문가로 인정받았고 49년 주한 미국 초대 대사로 부임했다. 이후 52년 이임할 때까지 대통령 이승만을 상대로 건국 이래 한국전쟁의 주요 기간 중 미국의 외교안보정책을 전달하고 조정하며 협의하는 통로 역할을 했다.

 

 

 

*예상외로 많아서 일단 미국편만 올립니다.

다음 하편에 중국과 소련 그리고 기타 편을 모두 올리겠습니다.

연재가 부득이하게 한편 더 늘어나겠네요. 너그러운 이해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