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대통령의 중국어 연설을
기대한다
[중앙일보] 입력 2013.05.22 00:22 / 수정 2013.05.
22 09:52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지난
8일 밤 늦게 박근혜 대통령의 미국 의회 영어 연설을 보면서다. 박 대통령이 영어를 잘한다고 익히 듣긴 했지만 행여 발음이 꼬이지 않을까,
갑자기 말문이 막히지 않을까 하는 걱정으로 은근히 가슴을 태웠다.
연설은
무난히 끝났고, 감동적이란 평가도 따랐다. 어떤 이는 영어 실력만큼은 싸이가 한 수 위라는 엉뚱한 트집을 잡기도 했지만 나는 ‘우리 대통령이 참
고생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편한 우리말 두고 왜 굳이 영어
연설을 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미국의 마음을 사기 위한 애잔한 노력이 아니고 뭔가. 그 나라 말로 소통하려는 건 그 나라와 국민에 대한
존중과 배려의 표시다. 영어 발음에 ‘빠다(butter)’ 맛이 얼마나 나느냐는 중요치 않다. 정작 감동을 주는 건 또박또박 전하려는 성의이기
때문이다. 지난해 3월 서울에 온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이 외대에서의 특강을 “같이 갑시다”라는 우리말로 마무리한 게 진한 여운을 남기지
않던가.
여성인 박 대통령의 연설은 1943년 아시아 여성으로선 처음으로 미 의회에서 영어 연설을
한 쑹메이링(宋美齡) 여사를 떠올리게 했다. 장제스(蔣介石)의 부인인 그는 “여러분의 말로, 여러분과 같은 마음으로 말한다”며 미국의 도움을
호소해 기립 박수를 받았다.
영어를 사용하고 싶은 열정만큼은 장제스의 라이벌
마오쩌둥(毛澤東)도 뒤지지 않았다. 회화 수준엔 이르지 못했지만 영어 단어는 많이 외웠다는 게 저우언라이(周恩來)의
전언이다.
마오는 자신의 영어 공부에 세 가지 이유를 댔다. 첫째는 재미있어서,
둘째는 두뇌 전환을 위해, 셋째는 영어로 된 정치와 철학 서적을 원문으로 읽고 싶어서였다. 그래서 마오의 비서 린커(林克)는 가방 속에 늘
마오의 영어 교재를 넣고 다녔다. 마오 자신의 중국어 저작물을 영어로 번역한 것 등이 그의 주요 학습
교재였다.
박 대통령은 다음 달 마오의 나라인 중국
방문이 예정돼 있다. 북핵 해결은 물론 경제·사회·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중국은 미국 못지않게 우리에게 중요한
나라다. 그 중국의 마음을 어떻게 살 것인가.
박
대통령이 다시 한 번 고생을 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중국의 심장부 베이징에서 중국어 연설을 하는 것이다. 베이징대학이나 칭화(淸華)대학 등 중국
최고의 명문 캠퍼스를 무대로 한·중 공동 발전의 꿈에 대해 중국어로 연설하는 모습을 그려
본다.
외국 정상 중에서 이제까지 중국어 연설을 한 사람은 케빈 러드 전 호주
총리밖에 없지 않았나 싶다. 그러나 그는 대학에서 중국어를 전공한 뒤 베이징에서 외교관으로 근무했으며 루커원(陸克文)이란 중국어 이름까지 갖고
있는 중국 전문가다.
이에 비해 박 대통령은 중국 비전공자다. 그리고 그의 중국어는 EBS 교재를 통해 5년간 독학한
결과다. 박 대통령의 중국어 연설이 몇 배 더 큰 감동을 줄 수 있는 이유다.
지난 5년간 MB정부와 편치 않은 관계를 보냈던
중국이 박 대통령에게 거는 기대는 크다. 겸손하고 편향적이지 않으며 중국어와 중국문화에도 정통해 중국과 보다 소통이 잘될 것이라는 믿음이 크기
때문이다.
중국 언론도 이제까지 박 대통령에 대한 호의적 보도 일색이다. 어려운 시기에 처했을 때 풍우란(馮友蘭)의
『중국철학사』를 읽고 마음을 다스렸으며, 『삼국지』의 한 영웅인 조자룡(趙子龍)을 좋아한다는 점 등을 미담으로 소개한다.
그런
중국을 상대로 중국어 연설만큼 효과적인 배려는 없어 보인다.
반면교사도 있다. MB정권 때 상하이 총영사로 발령받은 인사가
있었다. 영어 실력이 뛰어난 그는 부임 후 중국인들과의 한 모임에서 영어 연설을 했다. 이게 자존심 강한 상하이인들의 비위를
건드렸다.
중국어를 못하면 그냥 통역을 두고 한국말로 연설하면 될 것을, 중국 땅에서 웬 영어 연설이냐는 것이었다. 이에 우리
총영사가 한동안 냉대를 받아 마음고생이 심했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현재 강조하는 게 중국꿈(中國夢)이다. 그는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 실현이 중국꿈이라 말한다. 배경엔 19세기 중엽 이래 서구 열강의 침략을 받아 치욕스러운 100년(百年恥辱)을 보낸 걸
잊지 말자는 외침이 깔려 있다.
그만큼 중국은 외부의 존중에 목말라 한다. 그런 중국을 상대로 한 외국 정상의 중국어 연설은
중국에 진한 감동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박 대통령이 오랫동안 중국어를 사용할 기회가 없었다면 중국어 원고를 준비해 또박또박 읽거나
아니면 연설의 핵심 부분만을 중국어로 연설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중요한 건 정성이지 발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의 중국어
연설은 한국 사회에도 의미 있는 메시지를 전하는 계기가 된다. 해방 후 이제까지 우리 사회는 영어 중심의 삶을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어는 언제나 입시의 주요 과목이었고 미국에 유학해야 출세하기 쉬운 세상이었다.
박 대통령의 중국어 연설은 이런 시대에 한 획을
긋는 역사적 사건이 될 것이다. 대한민국이 21세기를 주도하기 위해선, 또 그런 대한민국의 리더가 되기 위해선 영어권과 중국어권 모두를 아우르는
실력을 갖춰야 한다는 걸 몸소 보여주는 산 교육이 되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의 중국어 연설을 편한 마음으로 지켜보게 되기를 기대해
본다.
유상철 중국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