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한테 격려금·막걸리파티 받았다" | |||||||||
최창봉씨 '그때 그 시절 KBS 이야기'서 회고…"KBS 기자는 나가라"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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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마을 운동 홍보에 열을 올리던 박정희 정권 시절 당시 이 사업을 추진했던 KBS 출신 인사가 대통령으로부터 격려금과 축하파티도 제공 받았다는 증언이 나왔다. 형식적으로나마 언론의 모습을 갖추기 전 KBS 기자들이 기자실조차 출입하지 못하던 실태도 공개됐다. KBS 부사장과 MBC 사장까지 지낸 바 있는 PD출신의 최창봉 한국방송인회장은 최근 KBS 사우회가 펴낸 ‘그때 그 시절 KBS 이야기’(커뮤니케이션북스)에 수록된 ‘KBS와 새마을운동’ 편에서 1971년 말 1973년 초 새마을운동이 본격 확산되던 무렵 KBS가 어떻게 새마을운동 사업에 기여했는지를 상세하게 기술해 당시 정책 캠페인에 앞장섰던 KBS의 과거를 잘 보여주고 있다. KBS는 1972년 4월 1일 새마을 운동 집중 지원을 위해 KBS 내에 새마을방송본부를 발족시켰다. 최 이사장은 “1973년 대통령이 직접 작사, 작곡한 ‘새마을의 노래’가 나오고 작가 한운사씨가 쓴 ‘잘살아보세’ 노래도 널리 보급되면서 새마을운동은 착실히 정착돼 나갔다”며 “국가비상상태에 이어 1972년 10월 17일 국회 해산 비상계엄령과 유신헌법이 선포되는 등 걷잡을 수 없는 정치 소용돌이 속에서도 KBS의 새마을운동 방송은 꾸준히 계속돼 나갔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이 새마을운동 방송에 대한 공로로 박정희 전 대통령으로부터 금일봉을 받은 일화도 소개했다. 그는 “당시 홍성철 내무부 장관이 정동에 있는 외인클럽으로 새마을방송본부 PD와 기자 등을 몇 차례 초청해 만찬을 베풀고 그때마다 필자에게 대통령이 주는 격려금을 전해줬다”며 “박 대통령도 본부 스태프 20여 명을 청와대로 불러 막걸리 파티를 열어주고 그 자리에서 대통령의 18번인 고복수의 ‘타향살이’를 구성지게 불러 주기도 했다”고 회고했다.
그에 따르면 “(KBS) 간부회의에서 ‘모처럼 정부가 제창한 농촌 개혁을 위한 새마을운동의 확산을 위해 KBS가 총력을 기울여 앞장서 나가자’고 강조했”고, KBS는 곧 이 운동이 범국민운동으로 퍼져 나가도록 뉴스시간마다 새마을운동 코너를 설치하고 관련 소식을 중점적으로 보도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군사독재정권이란 호된 비난이 끊이지 않고 있었지만 정부가 하는 일에는 냉랭하던 지식인들이 새마을운동에 대해서는 점차 동참하는 분위기가 싹트기 시작한 듯했다”고 회고했다. 나아가 “(KBS가) 다른 정치 홍보성 프로그램 등을 억제하면서 오로지 새마을 방송에 충실하기만 했던 탓이었을까, 그 엄청난 비상사태를 겪으면서도 시청자들이 KBS를 그렇게 외면하지 않고 오히려 민방과 비교해서 더 공신력을 쌓게 해 준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었다”고 자평했다. 한편, 박정희 정권 시절 KBS 기자의 위상을 한마디로 표현해주는 사례도 소개됐다. KBS에서 청주방송총국장까지 지낸 호천웅 대한언론인회 편집위원(현 수필가)은 ‘나는 왕따 기자였다’는 글에서 KBS 중앙방송국 기자가 된 직후인 1970년 8월 서대문경찰서 출입 취재 명령을 받아 경찰서에 찾아갔다가 면박당했던 일화를 전했다. 그는 “경찰서 기자실로 들어가 ‘KBS에서 왔다’고 하니 한 기자가 벌떡 일어나더니 ‘여기는 당신이 올 곳이 아니니 나가라는 것’이 아닌가”라며 “다른 몇몇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고 전했다. 호 위원은 “KBS 기자는 취재 일선에서 ‘왕따’였던 분위기도 모른 채 호랑이 굴에 들어갔던 셈”이라며 “권력에 대한 비판이 기본 사명인 언론에 공무원기자가 가당키나 하냐는 것이 그들의 입장이었던 것”이라고 회고했다. 당시 KBS는 문공부 산하 중앙방송국이었고, 그 직원은 공무원 신분이었다. 이 때문에 다른 곳보다 경찰 출입기자 사회에서는 KBS에 대한 거부감이 살벌할 정도였다고 한다. 밖에서 ‘공무원기자’로서 단단히 설움을 겪어야 했던 그는 KBS 내부에서도 역시 ‘왕따기자’였다. 기자사회에서 당한 그런 설움 때문에라도 사건사고 기사라도 우직하게 제대로 취재해 보도하려 했던 것이 당시 KBS 상황에서는 안에서도 외톨이가 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다 경향신문 출신의 사회부장 김은구씨의 신임을 얻어 시경캡까지 하게 됐다는 비화도 전했다. 하지만 ‘좋은 시절’ 역시 오래가지는 못했다. 보도국장이 새로 부임하면서 불편함과 왕따가 재연됐고, 시경캡 을 하다거 돌연 부산으로 좌천되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고 순탄치 않았던 KBS 생활을 회고했다. 지극히 대조적인 두 사람의 몇 십년전 행보와 회고는 그러나 ‘그 때 그 시절’의 일만은 아닌 것 같다. 지금 KBS에서 진행되고 있는 상황을 보자면 ‘그 때 그 시절’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이다. 역시 역사는 ‘과거’와 ‘현재’와의 끊임없는 대화인 셈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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