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을 만든 사람은 지금까지는 중국 당나라 때의 시인이자 당 현종의 '기대조 (棋待詔; 황제의 바둑 상대역을 맡는 벼슬의 일종)'를 지냈던 바둑 고수 왕적신(王積薪)이라는 것이 정설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92년 여름 대만의 중국교육성 바둑편찬위원인 주명원(朱銘源) 씨가 "위기십결은 왕적신이 만든 것이 아니라
송나라 때 사람 유중보(劉仲甫)의 작품"이라는 새로운 학설을 제기함에 따라 현재 위기십결의 원작자가 누구냐 하는 문제는 한-중-일 바둑사 연구가들의 숙제로 남아 있는 실정입니다.
1. 부득탐승 (不得貪勝)
너무 이기려고만 하지 말라는 충고입니다. 바둑은 승부를 다투는 게임이므로 바둑을 둘 때는 필승의 신념을 갖고 자신 있게 두어가야 합니다.
필승의 신념과 이기려고 하는 마음은, 언뜻 들으면 거의 똑같은 말 같지만 사실은 정반대의 것입니다.
필승의 신념이 있으면 과감하게 나가야 할 때 과감할 수 있고 모험을 해야 할 상황이라면 모험도 불사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꼭 이기고 싶어하는 마음---이것은 뒤집어 말하면 '져서는 안 된다' '지면 어떡하나'하는 마음 자세인데,
이렇게 처음부터 심리적으로 위축이 되어서는 바둑을 활달하게 둘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필승의 신념이 있고 자신감이 있으면 어깨에 힘이 들어가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꼭 이겨야 한다고 조바심을 하게 되면 어깨에 힘이 들어가기 마련입니다.
부득탐승---이것을 쉽게 말하면 어깨에 힘을 빼고 바둑을 두라는 말입니다.
물론 그게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닙니다. 오랜 기간 인격수양을 해도 도달하기 어려운 경지지요.
'큰 승부에 명국 없다'라는 바둑속담이 있습니다.
수십 년 동안 바둑만 두어온 프로기사들도 상금이 크게 걸린 바둑이나
이기고 지는 것에 따라 자신의 명예가 좌우되는 그런 바둑을 두는 경우에는 평소의 기량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기가 일쑤라는 사실을 말해 주는 속담입니다.
프로바둑의 타이틀 매치는 바둑승부의 꽃입니다.
보통 5번기나 7번기로 진행이 되죠.
다섯 판을 두되 먼저 세 판을이기는 사람, 혹은 일곱 판을 두되 먼저 네 판을 이기는 사람이 타이틀을 차지하게 됩니다.
그런데 5번기에서 먼저 두 판을 거푸 진 사람이 그 후에 3연승을 해서 타이틀을 차지하는 경우도 있고,
심지어는 7번기에서 먼저 세 판을 내리 진 사람이 그 뒤에 4연승을 함으로써 타이틀을 획득하는 것도 우리가 종종 보아온 일입니다.
사람들이 흔히 기적이라고 말하는 3연패 후 4연승 같은 대역전 드라마 ---이것의 열쇠가 바로 '부득탐승'입니다.
3연패를 당한 사람은 타이틀에 대한 욕심을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어차피 타이틀은 틀렸으니 최선을 다해 좋은 내용의 바둑을 두어 보자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한 판이라도 이길 수 있으면 0패는 면하게 되니 다행이고 져도 그만이기에 마음은 홀가분해집니다.
그에 반해 3연승을 한 사람은 이제 한 판만 이기면 부(富)와 명예를 장악하게 된다는 생각에 마음이 들뜹니다.
인지상정입니다. 마음의 평정을 잃으면 판단이 흐려져 과감하게 나가야 할 때 물러서고 참아야 할 때 무리를 하게 됩니다.
이런 심리 상태의 차이가 결국은 역전을 부르고 드라마를 만듭니다.
여러분들도 늘 경험하시는 일 아닙니까. 라이벌 친구와 치수 고치기 같은 것을 할 때 한 번 '열을 받으면' 평소에는 호선으로 어울리는 바둑이 2점, 3점으로 치수가 고쳐지지 않습니까.
'부득탐승'은 간단히 도달할 수 있는 그런 경지가 아닙니다.
'위기십결'의 원작자가 바둑을 잘 두기 위한 10가지 비결을 궁리하면서 바둑의 기술적인 내용들을 제치고 '부득탐승'이라는 마음의 자세를 제일 위에 놓은 것도,
이것이 아마도 실천하기가 가장 어려운 항목이라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2. 입계의완 (入界誼緩)
경계를 넘어 들어갈 때는 천천히 행동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뜻으로 해석이 됩니다.
예컨대 포석이 끝나면 상대방 진영과 내편 진영 사이의 경계가 윤곽을 드러내게 됩니다.
그런 시점에서 서두르지를 말라는 것이죠.
세상에 서둘러서 좋은 일은 별로 없습니다.
누구나 내 집보다는 남의 집은 커 보이는 법이고,
겉으로는 안 그런 척 할지 몰라도 속으로는 내 집만 일방적으로 크게 키우는 방법이 없을까를 연구하기 마련인데,
'입계의완'은 바로 '그래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조화, 중용, 타협, 절충, 인내---이런 것들을 한데 섞어 한마디로 압축해서 표현한 말이라고나 할까요.
나아가 '입계의완' 이 지향하고 있는 바는 요컨대 '정확한 형세판단'의 경지라고도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내가 지금 불리한지, 유리한지를 알아야 약간의 무리를 무릅쓰고라도 일전을 불사할 것인지,
평화를 택할 것인지, 깊이 뛰어들 것인지, 가볍게 삭감만 할 것인지 결정할 수 있을 것 아니겠습니까.
입신의 경지라고하는 세계 초일류 프로 九단들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것을 한 번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바둑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형세판단이다.
형세판단은 감각, 수읽기, 전투력 등 각자가 지닌 기량의 총체적 표현이기 때문이다.
'위기십결'을 만들면서 제일 처음에 마음의 자세를 말하고 그 다음에, '입계의완'이라는 말로써 바둑의 기술적 부분의 총체를 상징적으로 강한 것은 실로 용의주도한 배려였다고 아니 할 수 없습니다.
3. 공피고아 (攻彼顧我)
상대방을 공격하고자 할 때는 먼저 나 자신을 한 번 돌아 보라,
나에게 약점은 없는지, 혹시 반격을 당할 소지는없는지 등을 일단 잘 살펴 본 후에 공격을 하라는 가르침입니다.
4. 기자쟁선 (棄子爭先)
돌 몇 점을 희생시키더라도 선수를 잡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하수는 돌을 아끼고 상수는 돌을 버린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초심자일수록 자기 편 돌은 하나라도 죽이지않으려고 애쓰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수들은, 초심자가 보기에는 대마 같은데 필요에 따라서는 쉽게 버리곤 합니다.
이 말은 사석작전, 즉 버림돌 작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환격이나 회돌이, 먹여 쳐 파호하기 등은 아주 초보적인 버림돌 작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자쟁선'은 또 요석과 폐석을 잘 구분하라는 가르침을 포함하고도 있습니다.
용무를 마친 돌은 덩어리가 아무리 커도 가치가 적은 것이고,
비록 한 점이라도 상대방을 끊고 있는 돌이라든가 근거에 관계된 돌은 죽여서는 안되는 것이겠죠.
조치훈(趙治勳) 九단과 중국의 섭위평(섭衛平) 九단은 '기자쟁선'을 가장 멋지게 보여 주는 대표적인 프로기사입니다.
"버려라. 그러면 이긴다."
불가(佛家)의 선문답(禪問答)을 연상케 하는 이 말은 섭위평 九단이 승부의 좌우명으로 삼고 있는 말이라고 합니다.
바둑에서 선수의 중요성은 흔히 하는 얘기로 아무리 강조를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호선바둑에서 덤을 5집반이나 내야 하는데도 프로기사들 이 흑을 들고 싶어하는 것은 선수의 가치를 잘 말해 주는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5. 사소취대 (捨小取大)
작은 것을 버리고 큰 것을 취하라. '기자쟁선'과 일맥상통하는 말로서 너무도 당연한 얘기입니다.
그러나 이게 말처럼 그렇게 쉬운 것은 아닙니다.
승부에 몰두하거나, 집착을 하게되면 냉정을 잃게 되고 판단이 흐려지기 일쑤입니다.
더구나 작은 이익은 눈앞에 보이고 큰 이익은 멀리 있어 잘 보이지 않는 경우가 많은 법입니다.
그럴 때 냉정하게 멀리 내다보고 작은 이익을 먼저 포기하기란 정말이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도 왕왕 경험하는 일 아닙니까.
6. 봉위수기 (逢危須棄)
위기에 처할 경우에는 모름지기 버리라는 것입니다.
곤마가 생기지 않도록 하는 것이 최상 책입니다만, 바둑을 두다 보면 피차 곤마가 하나 둘, 혹은 그이상 생기기 마련입니다.
곤마가 생겼을 때는 먼저 그 곤마의 관상을 잘 보아야 합니다.
살아가는 길이 있다면 살려야 하지만, 도저히 살릴 가망이 없다고 판단이 된다면,
또 살더라도 여기저기서 대가를 크게 지불해야 할 것처럼 보인다면 될 때는 미련을 두지 말고 과감히 버리는 것이 차선책은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망이 없는 곤마를 질질 끌고 나가게 되면 잡히는 경우에는 대패를 하게 되고 살더라도 결국은 지고 맙니다.
곤마는 덩어리가 커지기 전에 일찌감치 버릴 것인지, 살릴 것인지 결단을 내려야 하는 것입니다.
결단의 시기는 빠르면 빠를수록 좋겠지요.
물론 그 대마의 생사에 승부가 걸려 있다면 죽든 살든 헤쳐나가 보아야겠지요.
7. 신물경속 (愼勿輕速)
바둑을 경솔히 빨리 두지 말고 신중히 한수 한수 잘 생각하면서 두라는 말이겠지요.
'위기십결' 가운데에서는 '부득탐승'과 함께, 바둑의 기술적인 면이 아니라 정신적인 자세를 강조한 가르침입니다.
'위기십결'의 원작자가 십결을 하나 둘 만들어 가다가,
바둑을 두는 마음가짐을 강조하는 데에는 아무래도 '부득탐승' 하나만으로는 미흡하다고 느낀 것인지 모릅니다.
'부득탐승'은 너무 어려운 내용이니까 이번에는 좀 쉬운 말로 한 것이겠지요.
감각을 훈련하는 데에는 속기로 많은 판을 두어 보는 것도 한 방법이 되지만, 실제 대국에서는 빨리 두어서 좋을것이 별로 없습니다.
빨리 두다 보면 착각이나 실수가 자주 튀어나오기 마련이니까요.
어떤 아마추어분들은 "나는 10분에 한 판을 둔다" 혹은 "한 판에 15분이면 충분하다"고 자랑삼아 얘기를 하시는데, 그게 결코 자랑은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빨리 두어서 이긴다면 또 모르지만 빨리만 두고 맨날 지기만 한다면 그것처럼 무의미한 일, 우스운 노릇이 어디 있겠습니까.
아마추어로서는 감히 넘볼 수조차 없는 속기의 천재, 서능욱 九단 같은 프로 고수도 속기의 악습을 고쳐보고자 한때는 염주를 들고 다니지 않았습니까.
8. 동수상응 (動須相應)
행마를 할 때는 모름지기 이쪽 저쪽이 서로 연관되게, 서로 호응을 하면서 국세를 내 편에 유리하게 이끌 수 있도록 그런 방향으로 운석하라는 것이겠죠.
바둑돌은 판 위에 한 번 놓여지면 그 위치는 변경될 수가 없지만, 그 역할은 시시때때로 바뀌어 갑니다.
그래서 바둑은 살아 움직이는 유기체와 같다고들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의 깊은 뜻을 잘 음미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 말의 깊은 뜻을 이해하신다면 그때 여러분은 어느덧 고수가 되어 있으실 것입니다.
9. 피강자보 (彼强自保)
상대가 강한 곳에서는 내 편의 돌을 잘 보살피라는 것입니다.
형세가 조금 불리하게 느껴진다고 해서 상대편 병사가 많은 곳에 마구 뛰어들어간다거나
내 돌에 약점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싸움을 벌인다거나 하는 것은 패국으로 가는 지름길이 될 뿐입니다.
불리할수록 참고 기다리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꾹 참고 기다리다 보면 언젠가 찬스는 찾아오는 법입니다.
바둑이 불리해진 것은 내가 실수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상대도 사람인지라 실수를 합니다. 시쳇말로 '손님 실수 기다린다'는 것하고는 다릅니다.
내쪽에서 되지도 않는 수를 두면서 요행을 바라는 것이, 손님 실수를 기다리는 행동이고
불리한 대로 침착하게 정수로 두어가면서 기회를 보는 것이 참는 것이요, 인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둑에서는 대개 참는 자가 이기게 되더군요. 이창호(李昌鎬) 七단을 보십시오.
10. 세고취화 (勢孤取和)
'피강자보'와 결국은 같은 말로서, 상대편 세력 속에서 고립이 되는 경우에는 빨리 안정하는 길을 찾으라는 뜻입니다.
일단 살고 나서야 후일을 도모하든지 말든지 할 것 아닙니까.
'에잇, 사나이 대장부가 목숨을 구걸할 수 있나. 치사하게 사느니 싸우다 죽는 것이 낫지'하면서 무조건 싸우려고하시는 아마추어 분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만용일 따름입니다.
'삼국지' 같은 것을 보면 천하를 도모하는 수많은 영웅호걸이 등장하는데,
그런 영웅호걸들도 때가 아니다고 느끼거나 형세가 불리하다고 판단이 될 때는 남의 가랑이 밑을 기지도 않습니까.
원대한 꿈을 실현시키기위해 순간의 불편이나 굴욕은 참고 넘어가는 것, 그것이 진정한 용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