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허무한 역사 주장과 개망신
(칠지도와 장고형고분長鼓形古墳)
**칠지도(七支刀)는
일본 나라 현 덴리 시 이소노카미 신궁(石上神宮)에 보관 중인
길이 74.9cm의 양 옆으로 모두 6개의 가지가 뻗은 철제 칼로
칼에는 표면(앞면)에 35자, 이면(뒷면)에 27자로 총 62자의 금상감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한.일양국간 명문(銘文) 해석을 가지고 논란이 벌어졌는데..
*일본, 백제가 헌상했다고 주장
명문의 해석을 둘러싸고 한일 역사학계에서는 서로 해석을 달리하고 있다.
해석 문제는 광개토왕릉비와 더불어 임나일본부설의 실재 여부를 입증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되기 때문이다.
학자 마다 다르게 해석하고 있지만, 대개 앞면과 뒷면에 새겨진 명문(銘文)은 다음과 같다.
-앞면
泰□四年十一 月十六日丙午正陽造百鍊[鐵]七支刀[出]辟百兵宜供供侯王□□□□作
태△ 4년 5월 16일은 병오인데, 이 날 한낮에 백번이나 단련한 강철로 칠지도를 만들었다.
이 칼은 온갖 적병을 물리칠 수 있으니, 제후국의 후왕에게 나누어 줄만하다.
△△△△가 만들었다.
-뒷면
先世以來未有此刀百濟王世[子]奇生聖音故爲倭王旨造傳示後世
지금까지 이러한 칼은 없었는데, 백제 왕세자가 기이하게 성음聖音을 낳다.
고로 왜왕 지(旨)를 위해 이를(칠지도) 만들었으니 후세에 전하여 보이라.
1945년 이전의 연구는 일본서기의 신공황후기에 언급된 칠지도가 실재하므로
일본서기와 신공황후에 대한 신빙성을 증명하는 것에 사용되었고
신공황후의 삼한정벌에 대한 증거로 채택되어 한반도 병합의 역사적 명분으로 이용되었다.
칠지도 명문에 대한 해석이 본격화된 것은 1945년 이후 일본 학자들에 의해서였다.
그들의 연구에 따라 명문이 61자인 것이 확인되었고, 이 칠지도가 한일 고대사의 중요한
비밀을 가지고 있다는 사료로서 가치가 인정되었다. 이러한 연구 결과로 일본학자들은
《일본서기》(니혼쇼키) 신공기 52년조에 언급되고 있는 "칠지도"로 해석하여 이 칼이
백제 왕이 일본 천황에게 헌상했다고 주장했다.
한국 역사학계에서는 오랫동안 이 칠지도는 연구되지 않았으나 1963년 북한의
김일성대학의 김석형이 오히려 이 칼의 명문을 근거로 임나일본부설을 부정하고
1966년에 발표한 《초기조일관계사》라는 저서에서 칠지도가 백제왕이 일본 천황에게 바쳤다는
일본 학자들의 주장을 부정하고 오히려 백제왕이 일본 천황에게 하사했다고
주장했다. 김석형의 백제왕이 칠지도를 하사한 것이라는 학설은 남북 역사학자들의
지지를 받고 있으며 당시 유물의 상감기법 등으로 제작 연대가 6세기로 추정되고
칠지도를 《일본서기》의 내용에 맞추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있다.
*오히려 백제가 일본왕에게 하사
근초고왕 24년(369)에 만들어져 372년에 왜에 보내진 칠지도는 이 칼에 새겨진 금상감
명문(금상감기술도 백제고유의것)에 의하면 백제는 왜왕 旨를 후왕(候王)으로 표현하고
있다. 근초고 대왕 때의 백제는 한반도를 넘어서 요서를 점령하는 등, 지금의 중국등지에
까지 진출해서 일대의 대제국을 만들었던 매우 강대했던 시기였는데 백제로부터 문화,
정치 체계 등 거의 모든 문물을 받아들이며 나라의 골격을 형성하던, 한마디로 아주
철저하게 백제의 속국에 불과한던 왜가 도리어 백제의 상국이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한마디로 일고의 가치도 없는 궤변에 불과한 것이다.
다음은 칠지도에 새겨진 명문의 해석인데 우선 짚고 넘어갈 사항은 칠지도의 泰□ 四年
이란 구문에서 泰다음의 글자는 판독 불가인데 우리나라의 식민 사학자들과 일본
사학자들은 이를 泰和라고 해서 동진의 연호라고 주장하지만 이건 두말할 것도 없이
근초고대왕이 사용하던 백제의 연호다.
막강했던 백제의 근초고왕이 미개한 제후국 후왕인 왜에게 칠지도를 하사한 것이다.
이에 동양 역사학자들은 일본의 주장을 일축하고 조롱거리로 삼았다.
**장고형 무덤(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
전 일본열도를 떠들썩하게 했던 영산강 유역의 장고형 무덤!
과연 임나일본부의 또 다른 증거인가?
전남 함평 신덕고분의 발견은 한일역사학계를 초긴장시켰다.
사각형과 원형 두 개의 봉분이 서로 이어진 듯한 독특한 외형!
붉게 칠한 무덤내부, 함께 나온 일본식 유물 등 완연한 일본풍의 무덤이었던 것.
이 독특한 무덤의 출현에 일본 학계는 고대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한 증거라고
주장하고 열광한다.
*일본고유의 것이다?
일본은 왜 장고형 무덤의 출현에 열광하는가?
앞쪽은 사다리꼴, 뒤쪽은 둥근 형태의 독특한 외형을 가진 무덤을 한국에서는
장고형무덤, 일본에서는 전방후원분이라 한다. 대표적인 일본의 전방후원분인
인덕천황(仁德天皇)릉은 길이 486미터, 주변의 해자까지 합치면 1킬로미터에 달하는
세계 최대의 무덤이자 일본의 상징이다.
이 전방후원분은 일본 최초의 고대국가인 야마토 왕국이 각 지역을 차츰
정복해가면서 보급한 무덤으로
만약 장고형 무덤이 일본의 전방후원분이라면 영산강 지역이 일본의 지배지로도
해석될 수 있는 상황인 것!
일본이 한반도의 장고형 고분에 그토록 집착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들은 이 장고형 무덤을 <4세기 후반 야마토조정이 바다를 건너 조선으로 출병하여
반도남부 임나라는 곳에 식민지를 건설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을 뒷받침하는 증거로 보고
있는데..
*장고형 무덤은 기존 한반도의 작품
1996년 충남보령(주교면 관창리)과 영산강 유역에 장고형 무덤이 발견되어 일본
역사학계를 흥분케 하였다.
한때 이 일로 일본 고고학계가 기뻐서 미쳐 날뛴 적이 있었다.
NHK의 헬기가 직접 날아와 9시 뉴스에 내보내고 난리도 아니었다.
일본의 자생적 고분형태라고 자랑해온 장고형 무덤이 한반도에서 발견되었으니
임나일본부설, 고대 일본의 한반도 진출설이 사실임을 증명해주는 결정적 증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왜 고고학자들의 낯짝이 똥색으로 변하는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 일대에서 방형, 장방형 등 각종 형태의 무덤이 속속 발견된 것이다. 한데 이들
고분의 공통점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점차 물을 빼기 편리한 주구(周溝)의 형태로
발전되어 갔다는 사실이었다.
그 최종 단계에서 나타난 것이 다름 아닌 장고형 무덤이었다.
결국 영산강에서 발견된 장고형 무덤은 고대 일본의 한반도 진출설을 뒷받침하는
증거가 아니라, 일본이 그렇게 자랑해온, 일본 자생 문화라고 자부해온 장고형 무덤이
사실은 한반도에서 생겨난 무덤 양식의 일종이라는 증거가 되고 말았고 연대도
인덕천황릉 생성시기 훨씬 오래전부터 주구모양의 고분이 한반도에 기히 자생하고
있었다는 증거가 속속 발견되고 말았다.
오히려 한국의 장고형무덤분이 일본으로 건너가 전방후원분이 되었다는것!
이에 일본 역사학계는 사색이 되고 말았고
일본의 한 저명한 고고학자는 “내 평생을 바친 연구가 헛되고 말았구나!”라고 탄식했고
기뻐서 길길이 날뛰던 일본의 취재 헬리콥터는 맥없이 돌아가고 말았다.
**역사가들의 조롱거리
일본은 일본서기의 신공왕후조의 ‘삼한정벌설’에 집착하여 어떤 것이든 이 기록을
우선시하고 거기에 사실을 꿰맞추려 하다보니까 오늘날 개망신 당하고 있는것이며
특히 대륙 침략의 명분을 얻기 위해 어떻게든 역사를 조작하려고 발버둥 치고 있다.
자기네들이 식민지배 36년동안, 대륙지배(삼한정벌)한 근거와 역사를 찾으려고 한국의
팔도강산을 샅샅이 뒤지고 찾았지만 실패했고 지금은 자기네 역사학자들도 삼한정벌설이
허위라는것을 인정해야했다.
역사를 올바로 기록하지 못한 자기네 선조들의 어리석음이 오늘날 일본인의
자가당착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양식있는 일본학자들은 이점을 인식하고 있지만 위정자들은 정치적인 논리로
이를 외면하고 온갖 망언과 왜곡을 하고 있는 현실이다.
역사가들은 일본역사서 ‘일본서기’는 삼류소설보다 못한 웃기는 역사서라 하며,
일본의 역사왜곡은 세계 역사가들의 조롱을 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