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절한 집념의 사마천
(司馬遷.龍門출신.BC145경~BC85경.천문관.역사가)
본 필자는 중국인물중에서 사마천을 제일 존경한다.
참담한 자신의 처지와 환경속에서도 인내하고 극복하여 사기(史記)라는
대 역사서를 남겼기 때문이다.
*그는 누구인가
그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한무제(漢武帝)때 태사령太史令(사관의 우두머리)이 되어 역사
편찬에 종사했다. 그러나 한때 비운의 패장이자 친구사이로 알려진 이릉(李陵)을
변호하다가 궁형(宮刑, 남근을 절단하는 형벌)을 당한 불운의 사나이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이릉을 변호하다가..
기원전 99년 그의 운명을 급전직하로 떨어뜨리는 사건이 일어난다.
그것이 ‘이릉(李陵)의 화(禍)’이다. 이릉 장군이 불과 5000명을 이끌고 흉노족 토벌에
나섰다가 중과부적으로 투항한 사건이다.
한무제도 이릉을 처벌하려했고 대신들도 오랑캐에 항복한 이릉을 대역죄인으로 성토한다.
그러나 유독 사마천만이 “이릉이 어쩔 수 없이 투항한 것”이라면서 변호한다.
그것이 한무제의 노여움을 산다. 흉노족의 침략에 혼쭐이 나기 일쑤였던 한무제는
오랑캐에 투항한 역적(이릉)을 변호하는 사마천에게 사형이라는 청천벽력 같은 선고를
내린다. 사마천은 흉노에 투항한 이릉을 변호했다가 사형을 당할 위기에 처하게 되었고,
아버지의 유언을 받들어 역사 편찬을 마무리 짓기 위해 궁형을 자처함으로써 목숨을
부지하였다. 이릉이 사마천의 절친 쯤 되는 줄 알았는데, 술 한번 같이 나눠마신 적
없는 사이였다.
*사마천 거세당하다.
사마천에게는 몸을 보전할 마지막 기회는 있었는데 50만전의 벌금을 내면 죄를 대속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가난하여 그만한 돈이 없었다.
어쨌든 궁형을 받은 이후 사마천의 작업은 원점으로 되돌아가게 되었다. 사마천은
천문과 지리, 역사를 담당해온 집안에서 태어난 명문가의 자손이었고 그의 앞은
탄탄대로였지만..
사마천은 울부짖는다.
“궁형을 당하는 것보다 더 큰 치욕은 없습니다. 저 또한 거세되어..천하의 비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하루에도 창자가 9번 끊어지는 듯하고 집안에 있으면 갑자기 망연자실합니다. ..
아아! 몸이 망가져 이제 쓸모가 없게 되었습니다.”
(<한서> ‘사마천전·보임안서(報任安書)’ <사기> ‘태사공자서’ 등)
이후 감옥살이를 하다가 출옥한 뒤 자살을 하려했으나 참아내고 그 굴욕을 역사서 편찬
사업으로 이겨 내려하며,
사마천은 피를 토하면서 참아야 했던 까닭을 밝힌다.
“문채(文彩)가 후세에 드러나지 않을 것을 한스럽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보십시오.
주 문왕은 유폐 당했을 때 <주역(周易)>을 풀이했고. 공자는 진(陳)과 채나라에서
고난을 당했을 때 <춘추(春秋)>를, 초나라 굴원(屈原)은 쫓겨나는 신세가 되어
<이소(離騷)>를, 좌구명(左丘明)은 실명한 이후에 <국어(國語)>를 지었습니다.
손자는 발이 잘린 뒤 <손자병법>을, 한비(韓非)는 진(秦)나라에 갇혀 <세난(說難)>과
<고분(孤憤)>을, 여불위는 촉나라로 좌천된 뒤 <여씨춘추(呂氏春秋)>를 간행했습니다.
시(詩) 300편도 현성(賢聖)들이 스스로의 비분을 촉발하여 지은 것입니다.”
*사기 저술에 몰두하다
이릉 사건은 사마천 개인에게는 비극이었지만 <사기>를 불후의 걸작으로 만든
동인(動因)이었다.
당시 사마천에게 50만 전이 있었다면, 아님 50만 전을 빌려줄 친척, 친구가 단 한 명
이라도 있었다면 궁형을 면할 수도 있었다. 사마천이 느꼈을 상실감과 배신감,
외로움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사기란 BC 90년경에 만들어진 책으로, 사마천의 역작이자 명저로 알려져 있다. 마치
서양 역사의 아버지 '헤로도토스'의 <역사>가 있다면 동양 역사에는 사마천의 <사기>가
있는 것이다. 아직도 사마천의 <사기>가 한 권짜리 책이라 생각하는 분이 있다면
큰 오산이다.
사기는 총 130권으로 방대하게 이루어져 있는데, 본기本記 12권, 표表 10권, 서書 8권,
세가世家 30권, 열전烈傳 70권의 5부로 나누어져 있다.(종이가 아닌 죽간으로)
이 역사서에는 중국의 전설시대 하夏, 은殷, 주周, 춘추전국시대, 진제국의 통일과
와해를 거쳐, BC 2세기 한제국 초기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역사가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훗날 무제의 화가 누그러지자 다시 황실의 총애를 받아 중서령(中書令)이 되었다.
그러나 자기가 당한 치욕을 잊지 못한 채 은퇴해서 역사서 완성에 몰두했다.
책을 저술하기 위해 모은 자료도 다양하고 그는 각지를 여행하며 직접 주민들의
이야기도 듣고 역사의 현장도 직접 찾아가 보기도 하며 진(秦)·한(漢)의 황실 문헌뿐만
아니라 그보다 이전에 나온 여러 역사서, 제후국들의 궁정 연대기, 경전이나 제자백가의
저술 등의 기록을 모았다. 심지어 역사적인 사실에 어느 정도 근거한 가공의
이야기까지도 자료로 이용했다.
‘사기’는 줄곧 중국 역사서의 걸작으로 인정받아왔으며, 훗날 중국 역사서의 본보기가
되었다. 또한 중국은 물론이고 중국 문학적 전통의 영향을 받았던 여러 나라에서도
역사서의 모범으로 인식되어왔다.
술한잔도 나눈적이 없는 사람을 위하여 목숨을 걸고 변호하며, 사형대신에 받은
궁형의 비참함속에서 역사적인 작업을 완성한 그..
당신 같으면 그리 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