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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군, 아차산 최후의 날

대한인 2013. 8. 29. 22:20
 
   
 
   
 
고구려군, 아차산 최후의 날
한반도의 옥새와도 같았던 한강유역 아차산. 한반도 패권을 노렸던 많은 나라들이 이 아차산에서 싸웠고, 이겼고, 패배해서 쫓겨갔다. 그런데 그 동안 이 한강유역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던 고구려의 유물들이 불과 2달 전에 발견되었다. 최초로 발견된 고구려의 투구, 복발이 1500년 동안 침묵을 지키던 고구려의 한강에 얽힌 비밀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세부설명
   
  1. 고구려의 군사요새, 아차산 제4보루성

복발이 발견된 한강유역은 한반도를 차지할 수 있는 상징과도 같은 지역이다. 서해 해상권이 걸려있었고, 이를 통해 중국과 교역을 넓히면서 국제무대의 발언권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강유역을 둘러싼 고구려, 신라, 백제의 다툼은 치열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제까지 한강유역에서 발견된 고구려 유물은 전혀 없었다.


2. 고구려군의 중대와 소대

5세기 초 죽은 고국원왕의 증손이기도 했던 장수왕은 427년 평양으로 도읍을 옮기고, 증조부의 원수인 백제를 치기 위해 남하를 시작했다. 그렇게 쌓은 남진 기지가 바로 아차산의 보루성이다. 하지만 이 보루성 뿐이었을까? 보루성이 군사기지로서 존재했었다면, 그와 비슷한 성격의 다른 고구려 유적들 또한 있으리라고 쉽게 추측해볼 수 있다.


3. 구의동 유적복원

삼국사기에 나타난 고구려의 군사들은 3만 기병, 5만 보병식으로 전투에 나섰던 총 병력만 나타나 있기 때문에, 그들이 어떤 세부 단위와 어떤 조직으로 나뉘어져 있었는지 전혀 알 길이 없다. 병사들 생활이라든가 막사의 생김새, 나름대로의 규율은 과연 어떠했을까? 이번에 발견된 유적들을 통해 이런 의문들을 해결할 수 있었다.


4. 제4보루성 영상복원

보루성은 고구려 중대다운 엄청난 크기이다. 특히 중대급 막사는 언뜻 보기에도 100여 명은 충분히 생활할 수 있을 것 같고, 구의동 유적과는 다르게 많은 수의 온돌들이 방마다 한 두 개씩 배치되어 있다. 또한 한 방에 특히 많이 모여있는 토기들에서는 고구려군 나름대로의 군기와 질서가 보인다.


5. 무기로 알아보는 군인들의 역할

삼국시대의 문헌기록을 보면 고구려 군대는 2만, 3만의 군대가 아무런 체계도 갖추지 않고 싸운 것 같이 되어있다. 과연 이 기록이 사실일까? 서울 구의동 유적의 유물들은 당시 기습을 받아 불에 탄 후 흙속에 묻혀버린 까닭에 마치 아이스박스에 냉동된 듯 몰살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이 모습에서 고구려 군대의 조직체계를 유추할 수 있다.


6. 삼국의 형세

고구려라는 강력한 적을 맞은 백제와 신라는 군사동맹을 맺는다. 고구려는 백제와 신라 깊숙이 들어가 영역을 확장하는데, 나제 동맹이 힘을 발휘하면서 삼국의 전선은 교착상태에 빠진다. 이때의 고구려 최전방 국경선이 한강의 아차산 일대라 추측된다.


7. 551년 D-DAY

551년 어느 날 밤, 이곳 구의동 초소는 최후를 맞이한다. 발굴당시 구의동 초소는 토기나 무기들이 이곳 저곳에 널려있고, 심지어는 온돌에 철솥까지 그대로 걸려있는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