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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원행을묘정리의궤> 그리고 후면도 서울대학 규장각에는 당시 정조의 행차를 볼 수 있는 <원행을묘정리의궤>의 원본이 그대로 보관되어 있다. 그리고 또 화성행차 당시 누군가가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15미터 길이의 행렬 후면도가 하나 더 있다. 훼손 상태는 심하지만, 화려한 채색을 한 행렬의 뒷모습을 통해 정조행차의 복장과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이 행렬도 역시 <원행을묘정리의궤>에 보이는 정조 행차의 숫자와 정확히 일치한다. 2. 화성행차 당시의 정치관계 회갑잔치 행차에 마치 도성의 행정체계가 모두 움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행렬 속에 꼭 있어야 할 사람이 한 사람 빠져 있다. 바로 정조의 비인 중전이다. 시어머니의 회갑잔치에 며느리인 중전이 참석하지 않고 창덕궁에 남아 있었다는 이야기다. 여기에는 화성행차 당시의 정치관계가 얽혀 있었다. 3. 화성의 의미 스물 여덟의 한창 나이에 아버지 영조의 지시로 뒤주에 갇힌 지 8일만에 굶어 죽은 비운의 사도세자. 사도세자와 혜경궁은 동갑이었기 때문에 정조에게 이 행차는 아버지 사도세자를 기리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당시 화성에는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이 있었기 때문에 화성에서 회갑잔치를 하려는 것은 어쩌면 정조로서는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단순한 회갑잔치 행차로 보기에는 그 행렬의 규모가 너무나 크다. 더욱이 이 시기는 정치적으로 대단히 미묘한 시기였다. 4. 대규모 군사훈련 화성행차 당시 정조의 행적을 담아 놓은 여덟 폭의 병풍을 살펴보면 정조의 화성행차 목적이 분명해 진다. 이 병풍 그림은 정조가 화성에서 대규모 군사훈련을 하는 과정을 담아 놓은 것이다. 어머니의 회갑잔치를 하러 가서 대규모의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이것은 매우 엉뚱한 일처럼 보인다. 5. 신분을 초월한 양로잔치 정조는 행차 마지막 날 노인들을 초대해서 양로잔치를 열었다. 화성에 거주하는 노인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또한 정조의 행차 길에는 언제나 꽹과리가 울리고 백성들이 적극적으로 민원을 제기했다. 그리고 정조는 그 자리에서 바로 백성들의 민원을 청취하고 해결해 주었다. 정조는 어떤 정치를 꿈꾸었던 것일까? 6. 화성행차 결산 보고서 <원행을묘정리의궤>는 화성행차 결산 보고서이다. 놀랍게도 정조는 이 보고서에 자신이 먹은 밥값까지 기록해 놓았을 정도로 화성행차의 전모를 숨김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행차의 전모를 이처럼 투명하게 기록하여 <원행을묘정리의궤>를 제작하기까지는 6개월이나 걸렸다. 정치적 기록은 정치행위에 대한 공개성, 투명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