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개념 그리고 아이콘
철학에 대한 재미있고 유익한 글을 만났습니다.
현실, 철학, 개념 그리고 아이콘들의 상호관계를
보시기 바랍니다.
1. 컴퓨터의 전원을 넣으면 윈도우와 함께
화면에 주르르 올라오는 도상적 기호들 즉,
아이콘이 있다.
윈도우의 '아이콘'은 문자숫자 코드로 된 명령어의 시각적 압축이다.
2. 철학에서 아이콘과 비슷한 기능을 하는 것이 있다면,
바로 '개념'이 아닐까?
아이콘이 복잡한 명령어의 시각적 압축이듯, 개념은 복잡하기
그지없는 철학적 사유의 시각적 은유라고 할 수 있다.
아이콘 덕분에 굳이 컴퓨터를 몰라도 그것을 자신의 목적에
맞게 사용할 수 있듯이,
철학적 개념들을 알아두면 굳이 철학에 관한 전문적인 지식없이도
자신의 관심사에 관해 철학적 수준에 맞먹는 깊은 사유를 할 수 있다.
3. 오늘날 철학은 세계의 '기술'이 아니라,
그저 세계의 '해석'으로 여겨진다.
책은 우리에게 '세계'보다는 '저자'에 대해 알려준다.
책을 읽고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세계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저자의 생각이다.
철학자들이 제공해주는 것은 세계의 객관적 진리가 아니라.
세계를 바라보는 다양한 관점이다.
4. 이렇게 진리가 의심받는 시대에 철학은 차라리 예술에 가까워진다.
그리하여 오늘날 우리가 철학에서 기대하는 것은
더 이상 세계의 올바른 기술이 아니라, 세계의 참신한 해석이다.
이것이 니체가 말한 관점주의(perpectivism)다.
5. 오늘날 철학적 진리는 예술적 진리에 가까워졌다.
들뢰즈에 따르면 철학의 임무는 '개념을 발명'하는 데에 있다.
새로운 개념은 세계를 새로운 눈으로 보게 해준다.
세계를 열어 보여주는 것은 전통적으로 예술의 임무였다.
오늘날에는 철학이 세계를 열어서 보여주려 한다.
그 일은 물론 개념의 발명을 통해 이루어진다.
6. 예술작품이 작가의 개성을 보여주듯이,
개념은 그것을 발명한 철학자의 인격이 된다.
이를 들뢰주는 '개념-인격'이라 부른다.
가령 예술에 뒤샹-레디메이드가 있다면,
철학에는 헤겔-시대정신,
마르크스-프롤레타리아, 프로이트-무의식이 있다.
7. 가끔은 책을 읽은 감동이 너무 진하여
책을 덮고도 여전히 철학을 뒤집어쓰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다시 말하자면, 철학은 세계가 아니다.
그것의 해석일 뿐이다.
특정한 철학에 대한 존경이 지나쳐 그것을
거의 숭배의 대상으로 삼는 이들을 흔히 본다.
하지만 철학은 우상이 아니다.
그것은 세계를 해석하는 데에 쓰이는 개념들의 도구상자에 불과하다.
8. 비트겐슈타인은 '낱말의 의미는 사용에 있다'고 밀했다.
개념도 낱말이기에 그것의 의미 역시 사용에 있을 것이다.
철학의 개념은 사태를 정교하게 들여다볼 수 있게 해주는 확대경이라 할 수 있다.
유감스럽게도 철학을 한답시도 확대경을 닦는 데에
전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매끄럽게 닦여 타인의 앞에 놓인 자신이 고성능 렌즈에 도취되곤 한다.
그들이 망각해버린 것은 그 확대경으로 사물을 들여다부는 일이다.
아무리 훌륭한 렌즈라 하더라도 뭔가를 들여다보는 데에 사용하지 않는다면,
결국 남에게 자랑하는 데에 소용되는 값비싼 수집품일 뿐이다.
-출처: 진중권, (진중권의 아이콘), 씨네북스, pp.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