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한국의 성웅 이순신장군(1545~1598)의 유훈과 어록
우리 한국의 성웅 이순신장군의 유훈과 남기신 말씀을 올려 존경하는 마음을 표합니다.
*장군의 유훈(遺訓)
집안이 나쁘다고 탓하지 말라
나는 몰락한 역적의 가문에서 태어나
가난 때문에 외갓집에서 자라났다
머리가 나쁘다 말하지 말라
나는 첫 시험에서 낙방하고
서른 둘의 늦은 나이에 겨우 과거에 급제했다
좋은 직위가 아니라고 불평하지 말라
나는 14년 동안 변방 오지의 말단 수비장교로 돌았다
윗사람의 지시라 어쩔 수 없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불의한 직속 상관들과의 불화로
몇 차례나 파면과 불이익을 받았다
몸이 약하다고 고민 하지 말라
나는 평생동안 고질적인 위장병과
전염병으로 고통 받았다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고 불평하지 말라
나는 적군의 침입으로 나라가 위태로워진 후
마흔 일곱에 제독이 되었다
조직(나라)의 지원이 없다고 실망하지 말라
나는 스스로 논밭을 갈아 군자금을 만들었고
스물 세 번 싸워 스물 세 번 이겼다
윗사람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불만 갖지 말라
나는 끊임 없는 임금의 오해와 의심으로
모든 공을 뺏긴 채 옥살이를 해야 했다
자본이 없다고 절망하지 말라
나는 빈손으로 돌아온 전쟁터에서
열 두 척의 낡은 배로 133척의 적을 막았다
옳지 못한 방법으로 가족을 사랑한다 말하지 말라
나는 스무 살의 아들을 적의 칼날에 잃었고
또 다른 아들들과 함께 전쟁터로 나섰다
죽음이 두렵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적들이 물러가는
마지막 전투에서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
*장군의 어록 1
이순신 장군은 우리나라 전쟁사에 길이 남을 업적을 남겼지만 이순신 장군이 존경받는
이유는 무패신화의 업적이 아니라 이순신 장군의 정신과 행동에 있다.
이순신 장군은 주옥같은 명언과 타의 모범이 되는 리더의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이순신 장군의 명언 중 몇 가지를 알아보겠다.
워낙 장군은 성격이 신중하고 말수가 적었기 때문에 그리 많지 않음을 양해하시라.
-이순신 장군이 무과에 합격한 1576년 32세 때 율곡 이이가 유성룡을 통하여
이순신 장군을 만나보기를 청하였으나
“나와 율곡이 같은 성씨이니 의리상 서로 가깝게 지내야겠으나
그가 관리의 인사를 맡고 있는 동안에는 만나 볼 수 없다.”라며 거절했다.
당시 율곡 선생은 이조판서로 정부의 인사를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1579년 35세에 훈련원 봉사로 근무할 때 병조판서 김귀영이
첩의 딸을 소실로 보내려 하자 “내가 처음으로 벼슬길에 나섰는데
어찌 감히 권세가에 의탁하여 승진을 꾀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며
청렴함을 중요시 여겼다.
-1592년 5월 7일. 임진왜란 첫 출전인 옥포해전을 앞두고 계속되는
패전 소식으로 긴장하고 공포에 떠는 병사들에게
“가벼이 움직이지 말라. 침착하게 태산같이 무거이 행동하라.”라고 말하여
병사들이 전쟁경험 부족을 극복하고 전장에서 여유와 냉철함을 가지도록 하였다.
-1597년 8월 18일 당쟁에 휘말려 이순신 장군이 하옥 되고 수군통제사로
임명된 원균이 무모한 전투를 벌여 해전에서 대패하자
다시 이순신 장군을 수군통제사로 임명하였으나 전선이 12척뿐 이었는데
이에 수군을 폐하고 육전에 참가하라는 임금에 밀지에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사옵니다.”라며 강력히 반대하였다.
1597년 남은 12척의 배와 한척의 배를 더 공수하여
13척의 배로 133척의 왜선과 전투를 벌인 명량해전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싸움에 있어 죽고자 하면 반드시 살고 살고자 하면 반드시 죽는다.”
라고 말하며 열세를 극복해냈다.
※必死則生(필사즉생) 必生則死(필생즉사)
죽기로 싸우면 반드시 살고, 살려고 비겁하면 반드시 죽는다. -1597년 9월 16일 이순신-
손자병법의 ‘허실’편에 나오는 구절로 이순신 장군의 명언 중에 나오는 말이다.
이 말은 이순신 장군이 명랑해전을 앞두고 부하들에게 외친 소리로 유명하다.
왜군에 대한 공포감과 사기 저하 등 패전의 후유증에 시달리는 병사들, 그나마 수적으로
열세에 놓여 패색이 짙은 가운데 병사들에게 당부한 결의에 찬 진군의 채찍이었다.
*장군의 어록 2
(舜臣은 爲人이 寡言笑하고 容貌雅飭이 如修謹之士하고 而中有膽氣하니 忘身殉國은 乃其素所蓄積也니라.)
순신은 사람됨이 말과 웃음이 적고 용모가 바르고 삼감이 (마음을) 닦고 (몸가짐을) 삼가는
선비와 같았고, 속에는 담력이 있었으니 자기몸을 잊고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것은 곧 평소에
축적된 것이다.
(戊戌十月에 追敵船하여 至南海界할새 舜臣이 親犯矢石力戰이러니 有飛丸이 中其胸하여 出背後라.
左右가 扶入帳中이어늘 舜臣曰 "戰方急하니 愼勿言我死하라." 하고 言訖而絶하니라.)
무술년(1598) 시월에 적선을 쫓아 남해의 경계에 이르렀을 때, 순신이 몸소 화살과 돌을 무릅쓰고
힘써 싸우더니, 어떤 날아오는 탄환이 그 가슴에 맞아 등뒤로 나왔다. 좌우 사람들이 부축하고 휘장
안으로 들어가거늘, 순신이 말하기를 "싸움이 바야흐로 급하니 삼가 내가 죽었다는 것을 말하지 말라."
하고, 말이 끝나자 목숨이 끊어졌다.
이상은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의 《징비록(懲毖錄)》에 실려 있는 내용이다. 이 책은 저자가 전쟁 후
은퇴하여 있으면서, 임진왜란 중의 사실에 관하여 기술한 수기인데 이 부분은 이순신 장군의 조카
이분(李芬)이 쓴 충무공 행장(行狀) 등을 참고로 기록한 것이라고 한다.
*장군의 어록 3
-“전장에서 죽음이란 항상 등짐같이 짊어지고 다니는 것일 뿐.
괘념치 말게나. 전장에서 지는 아쉬운 목숨이 어디 한둘이겠는가.”
(권준에게서 형님의 사망소식을 전해 듣고)
-“여해(如海 - 바다와 같음)로 하라.
늘 바다처럼. 젊은 시절 나 또한 여해였다.” (딸의 이름을 지어달라는 부하에게)
-“나는 이 바다에 수많은 부하와 백성을 묻었다.
누구 하나 아깝지 않은 목숨이 없었다. 할 수만 있다면 내 목숨과 바꾸어서라도 그들을
살릴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었다.”
-“신(臣)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今臣戰船 尙有十二)
(충무공이 다시 해군 사령관으로 임명을 받고 해군을 재정비한 결과 전선 12척에 군사
120명이 다였다.
그러자 "해군을 해산하고 육군으로 참가하라"는 임금의 지시가 떨어졌고, 충무공은
해군을 없애서는 안 된다고 조정에 강력히 건의한다.)
-“경거망동 하지 말라. 침착하게 태산같이 무거이 행동하라.”(勿令妄動 靜重如山)
(1592년 5월 7일. 임진왜란 중 처음으로 출전한 옥포해전을 앞두고, 경상좌우도 해군과
육군의 패배 소식으로 긴장하고 당황한 군사들에게. 공포심과 전쟁경험 부족을 극복하고
전장에서의 여유와 냉철함을 가지라며.)
-“안 된다. 절대로 안 된다. 아무리 좌수사의 명령이라 하더라도 나라의 물건을
마음대로 자를 수는 없다.”
<전라 좌수사가 사람을 보내어 거문고를 만들 감영내의 오동나무를 찍어 오라고
고흥지방의 만호(좌수사보다 낮은 벼슬)인 이순신에게 청하자 이렇게 말하고
거절했다고 한다.>
-“장부가 세상에 나서 나라에 쓰이면 목숨을 다해 충성을 바칠 것이요, 만일 나라에 쓰이지 않으면
물러가 농사짓고 공부하면 되는 것이다.” 백의종군의 어명을 받고..
*일본 우익들의 이순신 폄하
그런데 정작 일본 우익들의 정신적인 토대가 되는 메이지 유신 직후의 일본에서는
사적으로 이순신에게 제사를 지낸다거나, 도고 헤이하치로같은 사람이 이순신에 대한
경의를 숨기지 않는 등 한동안 이순신이 압도적 열세에서 기적적으로 강대한 적의
군세를 격파한 점 때문에 숭모의 대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우익들은 쓸데없는 자존심 때문에 애써 충무공의 전과를 폄하하는 데 여념이 없다.
각종 우익사관과 역사왜곡이 판을 치는 질 낮은 일본 문서들 중에서도 충무공 관련 문서는
주요 왜곡대상 1위로, 그 왜곡의 범위가 크고 심하다.
그것은 장군님이 너무 훌륭하시기 때문에 열등감에서 그만큼 질투하는 것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