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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공명과 대등하게 맞짱뜬 사마의

대한인 2013. 9. 6. 04:10

제갈공명과 대등하게 맞짱뜬 사마의(司馬懿.중달.179-251.하내河內온현溫縣출신.위魏의 대신)

 

소설인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를 보면 사마의는 제갈공명(諸葛亮.孔明.촉의승상.181~234)에게 매번 혼쭐이 나고 패한 위(魏)의 우둔한 장수로 나온다.

그러나 실제 정사(正史) 삼국지에 의하면 그렇지 않다. 공명의 5번 출병에서 사마의와 싸운것은 1차때와 마지막 5차뿐인데 1차때는 오히려 공명이 가정싸움에서 져서 패하고 5차때는 사마의의 지구전에 고전한 나머지 공명이 진중에서 죽고 촉군은 철수한다. 실제 이기거나 대등한 위치에서 전쟁한 것이다.

 

공명의 의도는 위에 쳐들어가 정복하는 것이고 사마의의 의도는 방어하는 것이기에 오히려 공명이 실패하고 사마의 쪽에서는 최후에 승리한 것으로 봐야 된다.

더더우기 마지막 5차출병때는 공명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오장원 진중에서 죽고 철수하지 않았는가? 이는 소설 삼국지연의가 유비와 공명의 옹호하는 입장에서 씌여졌기 때문에 마치 사마의가 번번히 혼나고 지는 모습을 연출한 것이다.

만약 사마의가 없었다면 위(魏)는 풍비박산이 났을 것이리라.

(물론 공명은 지혜롭고 충성스러운 인물이다.)

 

*사마의는 누구인가?

자는 중달(仲達). 지금의 하남성 온현 출신. 명문가 집안에서 태어난 사마의는 학식이 깊어 명성이 자자했다. 이를 들은 조조는 그를 초빙해 태자의 스승으로 삼았으며,

뛰어난 안목과 책략으로 조정에서 큰 활약을 했다. 조조가 죽은 후 조조의 아들 조비를 섬겼으며 조비가 죽은 후에는 조예를 보좌하였다. 이때에 대장군이 되어 제갈량이

이끄는 촉한의 공격을 물리치기도 하였다. 후에 조조, 조비, 조예, 조방을 모두 섬긴 4대 충신으로 추앙 받아 무양후에 봉해졌다. 사마의는 어려서부터 영민하고 유학에 조예가 깊었다. 후한 말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늘 천하를 걱정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최염(崔琰)은 사마랑에게 말하길, “당신의 동생(사마의)은 총명, 성실하고 결단력 있고 영특하니 그대보다 낫다”고 했다.

 

조조는 사마의가 마음 속에 큰 뜻을 품고 있음을 알아채고 경계하며 그리 신임하지 않았다.

조조는 사마의가 낭고상(狼顧相)이란 소문을 듣고 사마의를 오게 하여 고개를 돌려보게 했는데, 몸을 움직이지 않고도 얼굴이 똑바로 뒤를 향했다. 또 조조는 세 마리의 말이 한 구유(槽:조씨의 曹와 음이 같다)에서 먹이를 먹는 꿈을 꾸어 이를 매우 언짢게 여겼다고 전해진다. 세 말은 훗날 위나라를 멸망의 길로 들게 하는 사마의, 아들 들인 사마사(司馬師), 사마소(司馬昭)를 뜻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조조는 아들 조비(曹丕)에게 “사마의는 다른 사람의 신하가 될 사람이 아니다”라며 항상 경계할 것을 충고했다.

조비는 사마의와 평시 도움을 주고 받았었는데 조조의 말을 듣고 이 때문에 그를

멀리하였다. 사마의는 조조의 의심을 거두기 위해 하급 관리의 직무를 밤을 새며 보고 가축을 기르는 하찮은 일까지도 기꺼이 함으로써 조조를 안심시켰다.

조비가 후한으로부터 선양받아 위魏나라의 황제가 되었을 때,상서(尙書)로 임명되었다.

224년 무군대장군(撫軍大將軍)과 급사중(給事中) 녹상서사(錄尙書事)의 벼슬이 더해졌다.

조비의 사마의에 대한 신뢰는 매우 두터웠고 사이가 매우 좋았다한다.

 

*1차 대결(街亭싸움)과 읍참마속의 고사

제갈량의 북벌은 227년부터 장장 7년 동안 5차례에 걸쳐 행해지는데, 1차 북벌의 가정에서 제갈량과 사마의가 대결한 것이다.

가정(街亭)싸움에서 마속이 제갈량의 말을 듣지 않고 진을 쳤다가 사마의에 의해서

포위를 당해 가정을 빼았기고 만 것이다. 촉군의 생명선과도 같은 가정을 빼앗기자

제갈량은 곧 대군을 철수시켰다. 승승장구하며 중원으로 진격하려던 계획이 모두

물거품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후 한중으로 돌아온 제갈량은 패전의 책임을 물어 눈물을 흘리며 마속을 베었다.

저 유명한 "읍참마속"이란 고사성어는 이렇게 생겨났는데

읍참마속(泣斬馬謖)은 “눈물을 머금고 마속의 목을 벤다”는 뜻이다.

 

서기 228년, 제갈량이 북벌정책을 추진하면서 위(魏)를 공격하는데 이때 기산에

주둔하면서 마속이 선봉을 서게 된다. 허나 마속은 제갈공명의 지시를 따르지 않고

독자적인 행동을 취했다가 대패하고 마는데...이의 경과는..

제갈공명이 위나라를 치기 위해 삼군을 이끌고 한중(漢中)으로 향하고 그는 여러

전투에서 위나라 군사들에게 승리를 거두었다. 위기에 몰린 위나라는 사마중달로 하여금 20만 대군을 이끌고 공명의 침공을 막도록 했고 사마중달은 기산의 들판에서 촉군의 침입에 대비한 부채꼴 모양의 진을 쳤다. 제갈공명은 이미 그를 물리칠 책략을 세워놓고 있었으나 촉군의 군량 수송로인 가정(街亭)이 불안했다. 그곳이 위군에게 막히면 촉군은 꼼짝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때 제갈량이 총애하는 마속(馬謖)은 자신이 병법에 능통하다고 생각해 가정에 나가서 싸우기를 간청, 싸움에 패하면 처형해도 좋다고 말하며 전투의 승리를 장담했다.

제갈량은 마속에게 가정은 산세가 험하니 산기슭의 길을 사수해 위나라 군사가 접근하지 못하게 하라고 당부했다. 그러나 가정에 도착한 마속은 수비하는 것이 아니라 적을 소탕하는 전공(戰功)을 세우고 싶었고 산 정상에서 적을 유인 파죽지세로 공격코저 했다.

결국 마속은 위군에게 물길이 끊겨 화공(火攻)을 당하여 패하고, 제갈량 역시 수송로가 막혀 전군을 철수시켰다. 마속은 패전의 책임을 물어 참형을 언도 받자 많은 장군들이 그를 참형하는 것은 유능한 인재를 잃는 것이라며 용서해 줄 것을 청했으나 결국 마속은 처형되었고, 제갈량은 엎드려 울었다고 한다.

인선(人選)이 잘못된 결과다.

 

*2차 대결(오장원)과 공명의 죽음..촉군 철수

공명의 234년 5차 북벌(2차 대결)때에는 오장원(五丈原)에서 이루어졌는데 제갈량이 성을 굳건히 지키기만 하는 사마의를 격발하고자, 여자 옷을 보내어 겁쟁이로 조롱하는 계책을 부리면서까지 도발했지만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사마의는 전선에 도착한 후 성문을 굳게 닫고 촉군이 양식이 떨어져 철군할 때까지 버티는 지구전으로 일관하였다.

'적을 피로하게 만들고 험한 요새에 의지해 싸움을 피하는 것이 상책'이라는 <북벌

방어전략>을 충실히 이행한것이다.

드디어 격무와 과로에 지친 제갈량은 오장원에서 숨을 거두고(234년) 지휘관을 잃은

촉군은 눈물을 머금고 전면 철수하고 위나라는 최대의 국난을 벗어나게 됐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제갈량의 죽음을 안 사마의가 즉시 전군에 공격 명령을 내렸으나

제갈량의 목상을 보고 아직 살아있는 줄 착각하고 놀라 도망쳤다고 한다..☞正史에

안나오는 허구라함) 어쨌든 최후의 승자는 사마의인 셈이다.

 

(※사마의 전법과 공명의 전법 비교)

사마의;

군사의 대요大要에는 다섯 가지가 있다.

싸울 수 있으면 마땅히 싸우고(能戰當戰),

싸울 수 없으면 마땅히 지키고(不能戰當守),

지킬 수 없으면 마땅히 달아나는 것이다.(不能守當走)

나머지 두 가지는 오로지 항복 아니면 죽음 뿐이다.

 

제갈량:

작전 계획은 주도면밀하게 세우고 공격은 질풍처럼 신속해야 한다.

적을 포획할 때는 매처럼 잽싸게 낚아채야 하고,

전투는 물밀듯이 결판을 낸다. 이렇게 하면 아군은 피로하지 않고 적은 자멸하게 되는데, 이것이 용병술用兵術의 극치이다.

 

천하의 제갈공명이 다섯 번이나 북벌을 시도했으나 실패한 것은 위나라의 국력이 너무 부강하고 인재가 많았기 때문이다. 역사가들은 설사 사마의가 없었어도 공명이 쉽사리 중원을 통일하기는 쉬운일이 아닐 것이라고 평하기도 한다.

사견(私見)이지만 공명이 유비의 고명(顧命)에만 집착하지 말고 차라리 촉의 국력을

기르기만 못하다고 여겨진다.

 

*사마의 전권을 쥐다

후일 실권자인 위의 대장군 조상(曹爽)이 그를 배척하려 하는중, 조상측이 청주자사

이승이 병문안을 핑계로 사마의의 근황을 살피러 오자 거짓으로 말귀를 잘 알아듣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며 쇠약하고 병들어 조만간 병사할 것 같은 명연기를 보여 주었다.

결국 방심에 빠진 조상 일파가 한가로이 왕릉 참배로 도읍을 비운 사이 249년 전격적인 쿠데타로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였다. (고평릉의 변變)

정변 성공 후 조상의 동생 조희는 "사마의의 계략은 비교할 수가 없다. 공명조차도

이기지 못할 것이다. 하물며 우리 형제야 어떡하겠는가" 하고 탄식하였다.

가히 고금에 비견할 바 없는 탁월한 속임수가 아닐 수 없다.

 

*사마의 후손들 진(晉)나라를 세우다

사마의의 권력은 두 아들 사마사(司馬師),사마소(司馬昭)에게 이양되고 위의 원제(元帝)를 폐한 뒤 손자 사마염(司馬炎.晉 世祖 武皇帝.236년~290년)이 스스로 제위(帝位)에 올라 무제(武帝)라 일컫고, 국호(國號)를 진(晉)이라 했다. 그 이후 사마의는 오래 전부터 앓아온 지병을 앓다가 73세로 죽는다. 진 제국 성립 후 사마염은 사마의에게 선황제의 시호를 올렸다.

조조는 사마의를 경계했지만 그 불길함이 결국 적중된 것이었고 사마의의 후손들에 의해 조조의 후손들이 결단이 나고만 것이다.

 애당초 좀 쎄~하면 바로 그때 아작을 내야 하는것이 아닐까?

뭐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