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슈바이쳐 장기려(張起呂.1911~1995.향년 84세)박사
우리는 독일의 슈바이처는 알아도 한국의 장기려 박사는 잘 모른다.
지난 9월3일 모여대생 청부살인 주범 윤길자씨를 구속집행정지로 풀려나게 10차례
허위진단서을 발부한 박모 의사가 구속됐다.
돈 몇푼에 자기양심을 버린것이다.
그러나 여기 이분을 보라. 이분에 대해 알면알수록 고개가 숙여지고 존경의 마음을
금할길없다. 존경하기에 이분에 대해 글을 올린다.
어느 지난날에 부산 청십자병원에서 경남 거창에 사는 한 가난한 농부가 진료가
끝났건만 환자는 나가지도 못하고 의사 눈치만 보며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그것은 다름아닌 치료비 돈이없어 쩔쩔매던 가난한 환자였던 것..
의사는 부드러운 미소로
“지금 이 문으로 빨리 나가면 무사히 나갈 수 있을 것이오. 집에서 푹 쉬면서 이 약을
먹으면 차도가 있을 것이니 며칠 뒤에 다시 찾아주시오 돈이 없어도 되니 꼭 오셔야 하오.”
차비까지 쥐어주며 환자에게 뒷문을 열어주며 얼른 나가라 안내하는 의사가 바로
장기려박사 이다.
*장기려 그는 누구인가?
성산(聖山) 장기려(張起呂) 박사는 1911년 평안북도 용천(龍川)에서 태어났다.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할머니의 사랑 속에서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장기려 박사의 부친이 직접 설립한 의성학교를 졸업하고 송도보통고등학교를 거쳐 현재
서울대 의대에 해당하는 경성의전에 입학했다.
그는 1932년 경성의전을 수석졸업한 뒤 당시 국내 최고의 외과의사였던 백인제(백병원
설립자)선생의 조교로 경성의전 외과에 근무했고 당시 그는 복막염 연구로 1940년 일본
나고야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는 경성의전 교수직을 물려주려는 스승의
제의와 보장된 길을 마다하고 평양의 연합기독병원에서 의사로서 첫 발을 내딛고
이곳에서 그는 바쁜 병원업무 속에서 짬을 내 빈민촌에서 무의촌 진료를 시작했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몸소 팔을 걷어붙인 것이다.
이후에는 평양의 연합기독병원, 평양도립병원에서 일을 했다. 그러던 중, 1947년
김일성대학의 외과학 교수로 재직 당시 한국전쟁을 맞이하게 되었고, 그는 둘째 아들
가용(전 서울대 해부학과 교수)군과 함께 피난길에 올랐다. 차남과 함께 남하하였지만,
아내와 5남매 그리고 다른 가족 들은 북에 남게 되었다.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외과 교수가 된후 1951년 1월 부산 서구 암남동에 현 고신의료원
의 전신인 복음병원을 세워 피난민 등 가난한 사람을 무료진료하면서 1976년 6월까지
25년간 복음병원 원장으로서 인술을 베풀었다.
이후 그는 일생을 외로이 혼자 사셨다. 주위 사람들의 재혼 권유에도 불구하고
"결혼은 오직 한번 하는 것"이라는 자신의 신념을 따라 40년이 넘도록 홀로 살았는데
특히 남북간 이산가족 방문의 길이 열려, 그의 특별한 위상의 영향으로 북한에 갈 수
있는 길이 열렸지만, 다른 많은 사람들이 북한을 방문할 수 있을 때까지 먼저 가지
않겠다고 거절한 일화는 유명하다.
평생을 북에 남겨둔 부인과 자식들을 그리워하였으나, 가족을 만날 수 있는 순간조차도
다른 사람들에게 양보할 정도로 남을 배려하는 삶을 살았다.
장박사는 1968년 한국 최초의 사설 의료보험조합인 부산 청십자의료협동조합을
설립하였고, 1976년 청십자의료원을 설립하여 환자 진료를 계속하였다. 1974년 한국
간(肝)연구회 창립을 주도하여 초대회장을 맡았으며, 장미회(간질환자 치료모임)창설,
부산 생명의 전화 설립, 장애자재활협회 부산지부 창립에도 앞장섰다.
그는 1943년 우리나라 최초로 간암 환자의 간암 덩어리를 간에서 떼어내는데
성공하였고, 1959년에는 간암 환자의 간 대량절제술에 성공하였다. 그는 간의 혈관과
미세구조 등에 대한 연구 업적으로 많은 간질환 환자의 고통을 덜어주었으며 한국
외과학에서 미개척 분야였던 간장외과의 발전과 의료 인재양성에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
이러한 공적으로 박사는 1976년 국민훈장동백장을, 1979년 막사이사이상(사회봉사부문)을 받았으며,
1995년 인도주의 실천의사상 등을 받았다. 노년에는 병고(당뇨병)에
시달리면서도 백병원 명예원장으로서 집 한칸 없이 협소한 사택에서 지내면서
마지막까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박애와 봉사정신으로 인술을 펼쳐 한국의
성자로 칭송 받고 있다.
*할머니의 가르침
박사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할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부친이 설립한 의성학교를
마치고, 송도보통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할머니는 장기려 박사에게 나눔의 진정한
의미를 말해줬는데 경성의전으로 진학하게 된 계기가 된 할머니의 웅숭깊은 이야기를
장기려 박사는 이렇게 전했다.
“옷이라는 건 말이다, 네 몸의 온기를 가두어두는 것일 뿐이란다. 옷 자체가 따뜻한 건
아니잖니. 그런데도 우리가 옷을 입으면 따뜻하다고 느끼는 이유는, 그 옷이 네 몸에서
나오는 열기가 허공으로 헛되이 흩어져버리는 것을 막아주기 때문이란다. 그러니까 결국
온기를 지닌 건 바로 너 자신이란다. 옷 때문에 따뜻한 게 아니고. 사람은 원래 그렇게
따뜻한 존재로 이 세상에 나온 거란다. 기려야, 너는 옷을 여러 벌 껴입는 사람이 되고
싶으냐, 아니면 다른 사람을 따뜻하게 해주는 옷과 같은 사람이 되고 싶으냐.
이 할머니는 네가 다른 사람들의 옷이 되어줬으면 싶구나. 다른 사람들의 체온을
지켜주는 옷처럼 늘 사람들 곁에 머무는 그런 사람이 되어준다면 더 바랄게 없겠구나..”
*부산에서 복음병원 설립해 무의촌 진료 계속
해방 후 평양도립병원장과 평양의과대학 외과교수로 재직하던 중 6.25전쟁이 발발했고
그는 피난민이 들끓는 부산에서 진료소를 세워 가난한 사람들을 무료로 진료했다.
틈만나면 평양에서 그랬던 것처럼 무의촌 진료를 계속했다.
최초의 의료보험에 해당하는 영세민 중심으로 ‘청십자의보조합’ 만들어 가난한 사람들의
진료 부담을 낮춰주기도 했다.
*나눔을 실천하다
1975년 퇴임했을때 그에게 남아있던건 복음병원에서 마련해준 20여평 관사가 전부였다.
박사는 가난한자를 위해 더나눔센터를 설립하였는데 더나눔센터 담당자 최은진 씨는
“더나눔센터는 장기려 박사의 뜻을 기리면서도 그의 나눔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했다.
365일 늘 열려 있으니 더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 나눔의 의미를 되새겼으면 좋겠다.”
는 바람을 전했다.
평생을 통해 봉사와 나눔을 실천한 성산 장기려 박사, 그는 자신의 삶을 통해 후손들이
무엇을 기억하길 바랐을까? 그가 남긴 커다란 병원도 의사로서의 업적도 아닌 빈부
귀천을 넘어 생명은 오직 그 자체로 소중하다는 믿음, 그리고 사랑은 베풀수록 더
커진다는 진리가 아니었을까. 생명의 소중함을 점차 잃어가는 우리 시대에 박사의 삶이
가져다주는 메시지가 제법 크다.
*
부인, 자녀들과의 생이별
장기려 박사는 경성의전을 졸업한 뒤 평양에서 의료활동을 전개하던 중 6·25 전쟁이
발발한다. 평양도립병원장과 평양의과대학 외과교수로 재직할 때였다. 공산주의
치하에서 환멸을 느낀 장기려 박사는 둘째 아들 가용(張家鏞·전 서울대 해부학과 교수)군
을 데리고 피란길에 올랐는데 이 길이 가족들(아내와 5남매)과의 생이별이 될 줄은
예상조차 못한 채..
*45년 홀로 살며 절개 지킨 장기려 박사
장기려 박사는 월남한 뒤 결혼하지 않고 45년간 혼자 살았으며 머리맡에 늘 북한에
두고 온 부인 김봉숙 여사의 젊은 시절 모습을 두고 살았다. 남북한 이산가족이 만나게
된 이후에는 80대 모습을 담은 사진을 함께 두고 기도했다. 주위 사람들이 누차 재혼을
권유했지만 그는 기다리는 아내를 위해 그럴 수 없다고 잘라 거절했다.
1985년 9월 남북고향방문단 및 예술단이 서울과 평양을 오갈 때였다. 이산가족 상봉이
추진되면서 그에게도 가족을 만날 기회가 왔지만 그는 함께 기다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도리가 아니라며 거절했다. 다른 이산가족들과 떳떳이 고향을 찾겠다며 아내에게는
편지로 갈음했다.
그는 편지에서 “만일 우리 둘 중 누가 하나라도 세상을 떠나게 되더라도 이 사랑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우리가 육으로 있을 때 뿐 아니라 떠나 있을 때에도
영원히 꺼지지 않는 생명이다”라고 설파했다.
그의 머리맡에는 늘 부인 김봉숙 여사의 젊은 시절 사진이 놓여 있었고 장기려 박사는
사진의 의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부모님과 아이들이 힘든 일을 당할 때마다 저는
마음속의 당신에게 물었습니다. 그때마다 당신은 이렇게 하면 어떠냐고 응답해 주셨고,
저는 그대로 하였습니다. 잘 자란 우리 아이들, 몸은 헤어져 있었지만 저 혼자서 키운
것이 아닙니다….”그는 1951년 부산으로 피란해 부산에서 무료의술을 펼치고 살면서도
45년간 재혼하지 않았고 주변의 재혼 권유를 그는 북에 두고 온 아내에 대한 변함없는
사랑으로 뿌리쳤다.
박사는 북에 두고 온 아내와 자녀들에 대한 그리움을 가슴 깊이 안고 살았다.
아내와의 깊은 사랑을 그는 이렇게 표현했다.
“신혼시절의 어느 날이던가. 나는 마루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고 아내는 마당에서
빨래를 널고 있었어. 잠시 책에서 눈을 떼고 아내의 모습을 바라봤지. 그때 마침 아내도
나를 쳐다보는 거야. 아내의 고운 눈빛이 잔잔하게 내게로 향했지.아주 짧은 순간이었어..
그런데도 그 눈빛에서 영원을 느꼈어…. 아… 저 사람과 나는 영원히 함께 하는구나
하는 그런 느낌…. 그 뒤로는 단 한 번도 아내 외의 여자를 생각해 본 적이 없었지.”
그는 절개를 지키며 45년 평생을 홀로 살았다. 주위 사람들이 자꾸 재혼하기를
권유했지만 그럴 때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의 사랑하는 아내가 북에 살고 있다.
아내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데 내 어찌 그 기다림을 저버릴 수 있겠는가?
내가 평양에서 결혼할 때 주례하시던 목사님이 우리 부부를 앞에 세워놓고 백년해로
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니 재혼하는 것은 100년 뒤에 가서 생각해 보겠다.”
이웃을 향한 나눔과 봉사만큼 고결했던 그의 품성을 알게 해주는 대목이다.
*고향 방문도 마다한 장기려 박사
1985년 9월 남북고향방문단 및 예술단이 서울과 평양을 오갈 때였다. 이산가족상봉이
추진되면서 장기려 박사에게도 가족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정부는
사회·문화계 인사들에게 특별히 가족상봉을 주선하며 장기려 박사에게도 가족과의
만남을 제안했고 애타게 그리워하던 가족을 만날 수 있는 기회였다. 하지만 그는 함께
기다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도리가 아니라며 거절했으며 다른 이산가족들과 함께 떳떳이
고향을 찾겠다며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로 대신했다.
북한에서 아내는 애틋한 편지를 보냈다. 성서에 나오는 이야기를 성가곡으로 작곡한
노래였다. 아내는 안타까울 때마다 부르는 노래라면서 노랫말과 함께 이런 내용을
편지에 써서 보내왔다.
“사랑하는 나의 친구 언제나 도라오려나.
썩은 나뭇가지에서 꽃이 필 때에 오려나.
일구원심 나의 맘에 그대마음 간절하다.
사랑하는 나의 친구 언제나 도라오려나...
암만 말하여도 안타깝기만 하여(중략)
당신과 가용이네 가족이 건강하여 만나게 될 그때를
기다리고 또 기다리겠으며 부디 옥체 건강하시기를 바라고 또 바라옵니다.”
*항상 가난한 사람의 편이었던 장기려 박사
그가 복음병원에 일할 당시, 치료가 불가능한 병도 고친다는 장기려 박사에 대한 소문
때문에, 전국의 가난한 수술 환자들과 치료불가 판정을 받은 환자들이 몰려들었다.
우여곡절 끝에 그들은 입원하게 되었고, 수술을 받아 병을 고쳤지만, 가난한 살림탓에
병원비와 약값을 지불할 수 없는 문제가 생겼지만 그는 이러한 환자들의 치료비를
자신의 월급으로 대신 지불해주었다.
이렇다보니 장기려 박사의 월급은 항상 적자였고, 병원 운영도 어려워지자 직원들에
의해 무료환자에 대한 모든 결정권을 박탈당하게 되었다. 심각한 상황임에도 박사는
치료비를 내기 힘든 환자들에게 자신이 병원 뒷문을 야밤에 열어 줄테니 도망을 가라고
하였다고 한다.
1958년에는 부산 서구 토성동에 있는 지금의 부산대학병원 뒤쪽에 행려병자 진료소를
차려놓고 2~3년간 무료치료를 해주었으며, 다음해에는 국내 최초로 간 대량 절제술에
성공하는등 국내 의학 발전에도 큰 기여를 하셨다.
1968년에는 영세민들을 위해 국내 최초의 의료보험조합인 ‘부산 청십자의료협동조합’을
설립하였고 이 협동조합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치료비의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설립되었으며, 정부의 의료보험보다 10년이나 앞선 순수 민간의료보험 기구이다.
"의사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
평생 무소유의 삶을 몸소 실천했던 그는 생을 하직하게 되었을때, 이런 말을 하였다고
한다.
"죽었을때 물레밖에 남기지 않았다는 간디에 비하면 나는 아직도 가진것이 너무 많아요.."
*노년 중풍 중에도 영세민 환자 돌봐
집 한칸없이 병원 옥탑방에서 지낸 박사는 아내를 만날 기회를 가지지 못한 채 끝내
중풍으로 쓰러지셨다. 그는 중풍으로 쓰러져서도 하루도 거르지 않고 영세민 환자들을
돌보았다. 왕진을 청하는 환자들의 요구를 한번도 거절한 적이 없었고 그는 가난한
환자의 치료비를 월급으로 대신 내 주기도 하고, 입원비 낼 여력이 없는 환자를 몰래
도망치게 해주기도 하고, 며느리가 혼수로 해온 이불을 춥고 배고픈 고학생에게
건네주기도 했다.
*바보 의사 장기려
평소 제자들에게 까지 “선생님처럼 살면 바보소리 듣게요”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그런 제자의 말에 “바보소리 들으면 성공한 거야. 바보로 살기가 얼마나 어려운줄 아나?”
라며 껄껄 웃었던 장기려 박사..
* 장기려 박사의 죽음을 향한 메시지
장기려 박사가 노년에 남긴 다음 글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지를 말해주는데 죽음을
향한 성자의 메시지는 이러하다.
“인생의 승리는 사랑하는 자에게 있다.
사랑받지 못한다고 슬퍼하지 말라.
우리는 자진해서 사랑하자.
그러면 사랑을 받는 자보다 더 나은 환희로 충만하게 되리라.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목숨을 아끼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다.
잘 죽는 자가 잘 사는 자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버리는 자만이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사람이다.
생명은 죽음에 있다.
이제부터 다시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라.”
*장기려 박사의 죽음
노년의 장기려 박사는 당뇨병에 앓으면서도 집 한 칸 없이 작은 사택에 살며,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들에게 봉사 의료를 펼쳤다. 그리고 늘 입버릇처럼
"의사는 불쌍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 고 말하였다.
그러던 장기려 박사는 1995년 12월 25일 성탄절에 북에 남겨 두고 온 가족들과 찍은
단 한 장의 사진만을 가진채 84세로 별세하셨고 묘지는 경기도 마석의 모란공원 내에 있다.
1996년에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되었으며, 2006년에는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 에
헌액되었다.
세상을 뜰 때 1000만원이 든 통장하나만 갖고 있었다는 장기려 박사는 그 통장마저
간호인에게 주고 떠났다.
가난한이의 치료를 위한 각종 단체와 시스템을 많이 만들었으며 선행스토리도 많지만
이만 줄인다.
이런 장기려 박사의 행적을 추모하기 위해 지난2009년 <그청년 바보의사>(안수현 저)란
책이 출판되었고, 지난 2011년에는 장기려 박사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뮤지컬
<장기려, 그사람>이 공연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의 훌륭했던 행적에 비해 아직까지
많은 사람들이 장기려 박사를 모르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진정한 봉사의 정신을 몸소 실천한 한국의 슈바이처 장기려 박사를 추모하는 행사나
장학재단 설립을 통해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교육이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아들인 서울대병원 장가용 박사는 2008년에 타계하였고 마석 모란공원에 아버님과
나란히 누워 계신다.
요새 의사가 자기 임신한 아내를 죽이기도 하고 돈몇푼에 허위진단서를 남발하는
의사들을 보고 개탄을 금치 못하며, 다시금
한국의 슈바이쳐 장기려박사님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기립니다.
의술(醫術)은 인술(仁術)이라합니다. 이 의미를 요새 의사들이 얼마나 되새기고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