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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6' 그 때 그 사람과 그 장소...지금은?

대한인 2013. 10. 9. 18:58

'10·26' 그 때 그 사람과 그 장소...지금은?

 

 "박정희 전 대통령을 쓰러뜨린 10.26사태의 총성은 그의 주변

 

인물들의 삶까지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사진은 1979년 당시 ...

 

연합뉴스 
박정희 전 대통령을 쓰러뜨린 10.26사태의 총성은 그의 주변 인물들의 삶까지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사진은 1979년 당시 ... /연합뉴스
 
31년 전인 1979년 10월 26일 서울 종로구 궁정동 안가에 유신(維新) 정권의 최고 실세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고(故)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은 김계원(金桂元) 비서실장, 차지철(車智澈) 경호실장, 김재규(金載圭) 중앙정보부장이 배석한 가운데 술잔을 기울였다. 여대생 가수 심수봉과 모델 신재순이 자리를 함께했다.

오후 7시40분쯤 잠깐 자리를 떴다가 돌아온 김재규가 갑자기 총을 뽑아들고 박 대통령 가슴을 향해 쐈다. 이 순간을 기점으로 한국 현대사는 격랑에 휩싸이게 됐다. 역사의 한 분수령이었던 그날로부터 31년이 지난 지금 그때 그 사람들과 그 장소들은 지금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 그때 그 사람들

박 대통령이 시해된 ‘10·26’ 사건을 촉발한 직접적 계기는 김재규와 차지철 간의 권력암투 때문이라는 견해가 우세하다. 실제로 김재규가 현장에서 가장 먼저 쏜 것도 차지철이었다. 차지철은 김재규의 총탄에 팔을 맞고 화장실로 도망갔다가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가 김재규에게 배에 총탄을 한 방 더 맞았다. 차지철은 중앙정보부 소속 경비대원인 김태원이 쏜 총에 머리를 맞아 죽었다고 알려졌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스냅샷으로 크게 볼 수 있으며, 10·26 사건 이후 주요 인물들의 전·후 변화에 대한 내용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조선닷컴
김재규는 차지철뿐 아니라 박 대통령도 노렸다. 김재규가 총을 쏘자 박 대통령은 “뭣들 하는 거야!”라고 소리를 질렀다. 김재규는 정좌한 채 눈을 감은 박 대통령에게 총을 쐈다. 긴박한 순간 총이 고장 나 뛰어나온 김재규는 박선호로부터 38구경 리볼버 5연발 권총을 낚아채고 돌아와 쓰러진 대통령의 머리 50㎝까지 총구를 들이대고 방아쇠를 당겼다.

사건 직후 그는 안가의 다른 곳에서 식사 중이던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동반해 용산 육군본부로 가서 사태를 장악하려 했지만, 뒤늦게 도착한 김계원 비서실장이 “김재규가 범인”이라고 정 총장에게 전달했다. 김재규는 그 자리에서 체포됐고 이듬해 5월 대통령 시해 혐의 등으로 서울 구치소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현장에 있었던 심수봉과 신재순의 운명도 순탄치 않았다. 심수봉은 “당시 계엄사에서 조사를 받다가 서울 한남동에 있는 정신병원으로 끌려가 한 달간 감금당했다”고 회상했다. 1981년까지 방송출연을 금지당하기도 했다. 신재순도 같이 조사를 받고 은둔에 가까운 생활을 하다 재미교포와 결혼해 미국으로 떠났다.

10·26의 최대 ‘수혜자’는 전두환 전 대통령이었다. 당시 국군 보안사령관으로 있던 그는 시해 사건 진상조사를 담당한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을 맡아 ‘권력의 무대’를 장악했다. 주도권을 잡은 그는 재빠르게 움직였다. 그 해 12월 12일 대통령 암살장소에 있었다는 이유로 계엄사령관 정승화를 체포하면서 모든 권력을 손아귀에 넣었다.

최규하 국무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을 거쳐 통일주체국민회의 선출 대통령으로 취임했으나, 전두환은 1980년 8월 최 대통령을 하야 시켰다. 전두환은 이어 육군대장으로 예편한 뒤 장충체육관에 소집된 통일주체국민회의에 대통령선거 단일후보로 나서 제11대 대통령 자리를 차지했다.

◆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진 10·26의 자리

사건 발생지인 궁정동 안가는 청와대 남서쪽 효자로와 창의문 길 교차로의 공원 자리에 있었다. 김영삼(金泳三) 대통령 취임 넉 달 뒤인 1993년 7월 안가는 헐리고 무궁화 공원이 됐다. 총을 맞은 박 대통령이 실려갔던 경복궁 동쪽 서울지구병원은 31년이 지난 지금 이전 논의가 한창이다. 2009년 초 이명박(李明博) 대통령은 이 병원과 옛 기무사 부지에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을 만들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청와대와 5분 거리인 '대통령 전용 병원'이라는 점 때문에 경호처가 난색을 보였다.

서울특별시 중구 충무로에서 동대문구 용두동까지 이어지는 삼일고가도로도 역사의 장소가 됐다. 박 대통령을 암살한 김재규는 정승화 육군참모총장과 함께 삼일고가도로에 들어섰다. ‘남산 중앙정보부로 갈 것인가, 용산 육군본부로 갈 것인가’ 고민하던 김재규는 병력 배치를 하려면 육군 본부가 좋겠다는 전 총장의 말을 따랐다. '역사의 갈림길'이 된 삼일고가도로는 2003년 청계천 복원을 앞두고 건설된 지 33년 만에 모두 헐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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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김재규가 중앙정보부로 향했다면 사태가 바뀌었을 거라는 분석도 나온다.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남산 정보부 건물로 가 지휘소를 차리고 정부 요인들을 소집했다면 손쉽게 사태를 장악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남산 중정 본관은 현재 서울유스호스텔로 탈바꿈했고 지하취조실은 서울종합방재센터, 수사국 건물은 서울시 남산별관으로 쓰이고 있다. 이들 건물은 서울시가 '남산 르네상스 마스터플랜'에 따라 철거 계획을 밝힘에 따라 역사 속으로 사라질 운명에 처했다.

육군본부 벙커 총장실에 모인 최규하(崔圭夏) 총리와 각료 앞에서 김재규는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48시간 동안 비밀에 부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김재규가 박 대통령을 암살했다는 사실이 전해지면서 그는 허무하게 붙잡혔다. 김재규의 운명이 바뀐 육군본부는 1989년 계룡대로 옮겨갔다. 이 자리에는 1994년 전쟁역사와 6·25 등에 관한 전시실을 갖춘 전쟁기념관이 개관했다.

서울 용산구 육군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끌려간 김재규는 이곳에서 전기고문까지 당하는 고초를 겪었다. 이 보안사 서빙고 분실은 훗날 12·12 쿠데타를 일으킨 신군부의 중요 거점으로 쓰이다가 헐렸고, 지금은 2004년에 지은 기무사 직원 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김재규가 수감됐던 ‘남한산성 군 교도소’ 자리에는 현재 국군체육부대가 자리잡고 있고, 당시 사형장이 있었던 서울구치소(옛 서대문형무소)는 독립공원으로 바뀌었다.

10·26 당시 김재규가 살던 서울 성북구 보문동 집은 현재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 도자기와 고서화 등이 많고 운치 있었다는 양옥집은 오래 전에 헐리고 그 자리에 4층 건물이 들어서 있다.

[InfoGraphics] 10·26사건 이후 다시 가 본 그 현장
박정희 사후 30년… 이제 그를 역사화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