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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에 순정을 바친 사나이

대한인 2013. 10. 21. 05:02

 

우리가 가진게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은 여유로움 마저도, 원조각하와 조국 근대화와 산업화에 몸 바친 분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믿는다.

이분들에게 너무 감사한 마음으로 조국근대화 1등공신 박태준회장 글을 올린다. 

 

 

 

 

 

 

 

1927년 지금의 부산 기장군에서 태어난 박태준은 여섯살때 아버지를 따라 일본으로

건너갔다.

식민지 조선인에 대한 차별이 극심했던 시절, 하지만 일본 학생들 틈에서 박태준은

여러방면에 두각을 나타낸 우등생 이었다.

 

와세다대학 기계과를 다녔던 박태준은 해방후, 한국으로 돌아와 군인의 길을 선택한다.

육사생도 박태준은 이때, 운명적인 만남을 갖는다.

당시, 육사교관 이었던 박정희와의 인연이 시작 된것이다.



 
 

 

박정희의 5.16이 성공한 1961년,

 

집권한 박정희는 육사교관 시절부터 눈여겨 봐왔던 박태준을 발탁한다.

기계와 수학에 밝았던 박태준에게 중책이 맡겨졌다.

1964년, 박태준은 대한중석 사장으로 임명된다.

텅스텐 수출업체인 대한중석은 당시, 만성적인 적자에 허덕이고 있었다.

군인출신 30대 젊은사장은 쉬지않고 현장을 누볏다. 적자 기업은 1년만에 흑자로 돌아섰다.

그의 경영인 으로써의 재능과 감각이 확인된 시기였다.



 

경제개발을 추진하던 대통령 박정희에게는 숙원사업이 있었다.

바로, 제철소건설, 1965년 미국을 방문한 박정희는 제철소건설 비용마련을 위한 국제차관단

구성을 논의한다.

이 사업은 선진국의 협조와 의지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마침내, 5개국 7개 회사로 구성된 대한국제제철 차관단이 결성된다.

그리고, 1968년 4월 포항종합제철 주식회사가 문을 열었다.

초대사장은 경영능력을 인정받은 박태준이 맡게된다.



 

박태준은 불가능해 보이는 도전에 야전사령관 이었다.

제철소를 제대로 본적도 없는 직원들이 제철소를 만들겠다고 나선 것이다.


 

의욕은 넘쳤지만, 일은 날로 꼬여만 갔다.

특히, 국제부흥 개발은행의 보고서는 한국의 제철업 성공 가능성을 극히 낮게 평가했다.

제철소건설에 부정적이기는 국내 여론도 마찬가지였다.

초대사장 박태준은 물러설곳이 없었다.


 

 

자본도 기술도없이 공사가 지지부진하던 1968년, 대통령 박정희가 처음으로 현장을 

방문한다.

제철소건설에 누구보다 관심과 기대가 컷던 박정희,

하지만, 황량한 모래벌판 앞에서 그 마저도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고 만다.





 

박태준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 에게 제철소건설은  단순한사업 그이상의 애국적소명 이었다.



 

박태준은 미국으로 날아갔다. 계속 미뤄지는 차관문제를 해결짓기 위해서다.

하지만, 차관단 미국측 대표는 투자할수없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보기좋게 거절당한 박태준은 귀국길에 하와이에 들른다. 잠시 이곳에서 생각을 정리하고

다른 대안을 찾아볼 작정 이었다.

망망대해를 바라보며 고민하기를 몇일, 박태준의 머리에 떠오른것이 있었다.

대일 청구권자금 이었다.

 
 

대일 청구권자금은, 1965년 한일 국교가 정상화 되면서 일본이 식민지배에대한 보상 차원에서 준 돈이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자금의 용도가 농림수산업에만 한정되 있었던 것이다.

자금의 용도를 바꾸기위해선 일본의 동의가 필요했다.

그는 정, 재계 지도자들을 일일이 만나 설득했다.

일본의 태도는 부정적 이었다. 특히, 통산상 오히라같은 일물은 매우 완강하게 버텻다.

하지만, 끈질길 설득끝에 1969년 종합제철소 건설을위한 한일기본협약이 체결 된다.

 

그 배경엔, 한국이 경쟁상대가 되지 못할거라는 일본의 계산이 있었다.


 
 


 
 

 

1970년 4월1일 포항제철 착공식이 온국민의 관심속에 성대히 치러졌다.

경부고속도로보다 3배나 많은 비용이 들어가는 국가적사업, 자칫 잘못하면 나라에 엄청난

손실을 끼칠수있는 일이었다.

 




 
 
 
1971년 열연공장 공사가 3개월이상 지연됐다. 박태준은 건설비상 1호를 발령하고 전국에

모든 레미콘을 포항으로 집결시켰다.

 
 
 

 

마침내, 1973년 6월, 제1고로가 완성됐다. 박태준 사장을비롯한 모든 임직원들이 들뜬 
마음으로 용광로앞에 모였다.

 
 
 
용광로에 불을 지핀지 스물시간, 기다렸던 순간 폭발하는 불꽃과함께 시뻘건 쇳물이

쏫아졌다.

 

눈물로 범벅된 만세가 함께 터졌다. 간절하게 기다렸던순간 사장 박태준의 눈에도 뜨거운

눈물이 고였다.


 
 

 
 
 


 

그리고 1992년, 제2제철소인 광양제철소가 착공 10년만에 완성됐다.

이로써, 24년간 이어진 제철소건설 사업의 기나긴 여정이 대단원의 막을 내린것이다.

 

한국경제 근대화의 핵심 동력이 된 포스코, 오직 제철보국의 신념으로 무에서 유를 창조한

박태준의 리더쉽이 함께 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박원순 고인 빈소에서 인터뷰)




 

(박태준회장 아현동 집판돈 이 개새끼한테 속아서 아름다운재단에 기부했음.)

 

40년 정든집을 기부한 고 박태준 명예회장,

그는 생전에 단 한주의 포스코 주식도 갖지 않았다.

 
 
 

 

 

 박태준 명예회장의 혼이담긴 포스코는 올해 창립 45주년을 맞았다.

창립이후 포스코는 비약적인 성장을 이뤘다. 이제 포스코는 대한민국을넘어 세계시장을

누비는 글로벌 기업이다.

14개국 60여곳에 진출한 세계 4대철강 메이커, 그것이 오늘날 포스코의 이름이다.

 

(2010년 기준 )

수많은 외부환경의 도전속에서도 굳건히 그 명성을 지켜나가고 있다.

 성공에 초석을닦은 박태준 명예회장,

 

세상은 그를 잊지않을 것이다.

  
 
 

 
 


 

 


 

 

한 평생, 용광로보다 뜨거운 심장으로 조국을 사랑했던 철의 사나이,

 

 

"야,,, 까치가 환영식도 열어주네,,,ㅎㅎㅎ 까치가 언제 왔어?"


 

 

이제 그가, 조국의 품에 잠들었다.


 

틈만나면 대한민국을 부정하고, 선대들의 노력과 헌신을 가치없이

폄하하는 인간들이 다시는, 청와대에 들어가는 일이 없어야한다.

 

 
 


 

 

 

이런 멋진분이 또 있을까? 앞으로도 대한민국에 박태준회장 같은

멋진분들이 많이 나오길 진심으로 바란다.

 

 


이 뱃지는 원조각하시절 중앙정보부부터, 안기부까지 정보원을

하시고 퇴직한 77세 고령의 고모부께서 주신 뱃지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