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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성·김해 배씨(盆城·金海裵氏)

대한인 2013. 10. 27. 08:46

분성·김해 배씨(盆城·金海裵氏)
일세조 휘(諱): 배원룡(裵元龍), 분성군(盆城郡)

분성(盆城)은 경상남도 남동부 낙동강(洛東江)의 서안에 위치한 김해(金海)의 고려 때 지명으로 본래 가락국(駕洛國)이었는데 신라에 병합되어 법흥왕(法興王) 때 금관국(金官國)이 되었다가 문무왕(文武王)이 소경(小京)을 두었으며 경덕왕(景德王) 때 김해(金海)로 고쳤다. 고려 태조(太祖)가 부(府)로 강등시켜 뒤에 임해현(臨海縣)이 되었으나 성종(成宗) 때 금주(金州)로 개칭되고 원종조(元宗朝)에 와서 김녕도호부(金寧都護府)가 되었다가 충선왕(忠宣王) 때 다시 김해로 고쳐 부(府)로 하였다.
조선조에 와서는 태종(太宗)이 이곳에다 도호부(都護府)를 설치했고, 세조(世祖) 때 진(鎭)을 두기도 했으며 고종(高宗) 때 군(郡)으로 승격, 1906년 양산군의 2개면을 병합하고, 1981년 시(市)로 승격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분성 배씨(盆城裵氏)는 고려 창업의 일등원훈(一等元勳) 배현경(裵玄慶:중시조)의 6세손인 원룡(元龍)을 일세조(一世祖)로 받들고 있다. '분성배씨대동보(盆城裵氏大同譜)'에 의하면 그는 고려 때 삼중대광(三重大匡)으로 가락군(駕洛君)에 봉해진 사혁(斯革)의 아들 4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나 공민왕(恭愍王) 때 병부 상서(兵部尙書) 겸 도원수(都元帥)를 지내고 나라에 공을 세워 분성군(盆城君)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그를 일세조로 하고 분성을 본관(本貫)으로 삼게 되었다고 한다.
가통(家統)을 이어온 인맥으로는 원룡(元龍)의 아들 중 장남 서(署)가 고려조에서 감무어사(監務禦使)와 전객령(典客令)을 지냈으며, 손자 단(端)은 평장사를 역임하여 세도가문(勢道家門)의 기틀을 다지기 시작했다. 생원(生員) 윤온(允溫)의 아들 극수(克壽)는 일찍부터 벼슬에 뜻을 두지않고 강진 대곡 평덕리(康津大谷平德里)에 송정정사(松亭精舍)를 세우고 후진양성에 진력하며 거문고와 독서로 여생을 보냈으며, 윤검(允儉)의 아들 극부(克富)은 야은(冶隱)길 재(吉 再)와 도의상교(道義相交)하며 학문으로 명성을 떨쳐 도덕(道德)과 문장(文章)의 가통을 세웠다.교수(敎授) 상금(尙錦)의 장남인 문보(文甫)는 중종(中宗) 때 고성 군수(高城郡守)를 지내고 청백리(淸白吏)로 명성을 떨쳐 그가 죽자 왕이 제문(祭文)을 내려 공적(功績)을 치하했으며, 직장(直長) 유 흥(有興)의 아들 진은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지내고 문장과 필법이 탁월하여 아들 맹후(孟厚)와 함께 이름을 떨쳤다. 1462년(세조7)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한 맹후는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을 거쳐 여러 관직을 역임한 후 성종(成宗) 때 사신(使臣)으로 일본에 다녀왔으며 이조참의(吏曹參議)가 되어 조정의 기강(紀綱)을 바로잡아 왕으로부터 포상이 내려졌다. 그의 아우 중후(仲厚)는 문장과 도학(道學)으로 사림(士林)의 추앙을 받았으며, 숙후(叔厚)는 연산군(燕山君) 때 이조 정랑(吏曹正郞)을 지냈고, 계후(季厚)는 경주 판관(慶州判官)과 칠원 현감(漆原縣監)을 거쳐 선산 도호부사(善山都護府使)를 역임하였다.
온후한 성품과 지극한 효성으로 영릉 참봉(英陵參奉)에 천거되었던 학(鶴:용양위 부호군 세즙의 아들)은 벼슬의 뜻을 버리고 노천(老泉) 김 식(金 湜)에게 글을 배웠으며 도천(道泉)에다 별서계구당(別墅戒懼堂)을 세워 성리학(性理學)에 전심하면서 스스로 호(號)을 임천(林泉)이라 하였다. 문벌의 가문에 무맥(武脈)을 형성한 철중(鐵重)은 선조(宣祖) 때 무과에 급제하여 아산 현감(牙山縣監)을 거쳐 홍주 영장(洪州營將)을 지내고 손가락을 잘라 모친의 병환에 수혈하여 사림(士林)의 주청으로 정려(旌閭)가 세워졌으며, 병마단련사(兵馬團鍊使)를 지낸 담(湛)은 청백리(淸白吏)로 명성을 떨쳤고 학행으로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던 영(渶)과 함께 가문을 빛냈다.
임진왜란 때 창의(倡義)하여 의사(義士) 박경전(朴慶傳)과 함께 운문협에서 회맹(會盟)했던 원우(元祐)는 전쟁에 나가 무훈(武勳)을 세워 선 무이등공신(宣武二等功臣)에 책록되었으며, 석학(碩學) 조 식(曹 植)의 고제(高第)인 명원(明遠)은 병마절제사(兵馬節制使)로 성(城)을 지키다가 순절하여, 원종이등공신(原從二等功臣)에 책록된 아우 형원(亨遠)과 더불어 의절(義節)의 가맥을 지켰다.
광해군(光海郡) 때 병조 참의(兵曹參議)로 대북(大北)에 가담하여 폐모론(廢母論)을 주장했다가 인조반정(仁祖反正) 후에 삭직당했던 대유(大維)는 문장과 글씨로 명망이 높았고, 군신부자(君臣父子)의 윤리와 오위진결(五衛陳訣)을 공부했던 응남(應男)은 임진왜란에 공을 세워 숙부(叔父) 원우(元佑)와 함께 하양사(河陽祠)에 배향되었다.
그밖의 인물로는 사오당(四吾堂) 양옥(良玉)이 문장과 행의(行誼)로 추앙을 받았으며, 홍우(弘祐)는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장현광(張顯光)의 휘하에서 의병(義兵)을 모집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순절하여, 죽림(竹林)에 정사(精舍)를 세워 후진 양성에 진력했던 동도(東度), 숙종(肅宗) 때 효행으로 동몽교관(童夢敎官)에 임명되었던 여경(汝慶), '심경보사(心經補辭)'의 저자인 일장(一長), 항일투사 동석(東奭)등과 함께 분성배씨를 더욱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분성, 김해 배씨(盆城, 金海裵氏)는 남한에 총 13,202가구, 53,56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