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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평가 유영익 석좌교수

대한인 2013. 10. 29. 04:55

 

유영익, 전 연세대학교 국제대학원 석좌교수로, 현재 한동대 T.H. Elema 석좌교수, 연세대 현대한국학연구소 초대 소장으로 있다

 

"해방 당시에 저는 9살이었다. 그때 우남 이승만은 ‘국부(國父)’로 무조건 존경받는 대상이었다. 그 후 나는 6·25를 겪었고 전쟁 와중에 장성들이 군수물자를 빼돌리는 바람에 국민방위군으로 징집된 국군 사병들이 대거 아사하거나 동상으로 병신이 되는 비참한 광경을 목격했다. 그때 나도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갖게 되었어요. 그 후 서울대를 졸업하고 4·19를 겪으며 나는 완전히 反이승만으로 돌아섰다. 그리고 저는 그러한 생각을 가슴 속에 품은 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하버드대에서 동양사를 전공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하버드-옌칭 도서관에서 우연히 청년 이승만이 저술한 <독립정신>을 발견해 읽었다. 그런데 이 책을 탐독하면서 이승만에 대한 저의 생각이 크게 달라졌다.


 당시 나는 동학농민봉기와 청일전쟁 같은 19세기 후반의 조선 역사를 연구하고 있었기 때문에 근대 중국과 일본의 선각자들에 대해 꽤 많이 알고 있었다. 그런데 1904년 이승만이 한성감옥에서 쓴 <독립정신>에 나타난 그의 개혁사상과 국제정세에 대한 식견은 중국의 쑨원이나 일본의 후쿠자와 유키치의 것보다 훨씬 뛰어나다고 느꼈다. 커다란 충격이었다. 


19세기 후반 조선의 역사를 공부해 보면 당시의 한국은 정말 비참하고 암울했다. 그러한 상황에서 이승만이 한민족이 부활 활로를 용기 있고 명쾌하게 제시한 글을 읽으며 크게 놀랐다


이승만 대통령은 한학에 조예가 깊었다. 상당히 많은 간찰들이 한문으로 작성되어 있는데 웬만한 한문 실력이 없으면 그 필체를 해독하는 것조차 불가능 정도였다. 그리고 영문으로 된 문서들을 읽어보면 이 대통령의 영어실력이 한문보다 낫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마디로, 한문과 영어에 동시에 능통하지 않으면 손대기 어려운 작업이었다


제일 먼저 착안한 것은 그의 인품과 재능인데, 이승만은 한마디로 탁월하게 유능했던 애국자라고 말 수 있다. 이승만은 여러 권의 저서와 함께 수백편의 신문논설, 외교문서 등을 남겼는데 그 수준은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까지 한국인이 남긴 글 가운데 최상급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이승만이 동시대 지성인 가운데 정상급의 인물이었다는 것은 그가 5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미국의 일류대학(조지워싱턴, 하버드, 프린스턴 대)에서 학사, 석사, 박사학위를 모두 취득한 사실이 증명해준다. 그는 동서양 학문에 두루 통달한 출중한 학자였고 역사와 국제정치를 파악하는 안목이 뛰어난 세계적 정치가였다. 


아울러 그는 독실한 크리스천으로 확고한 소명의식을 가진 카리스마적 인물이었다. 그는 23세의 나이에 고종황제의 폐위를 도모하다 실패하여 옥에 갇혔을 때 기독교에 귀의했다. 그는 옥중에서 영한사전을 만들면서 간수와 죄수들을 전도했다. 그 결과 40여명이 기독교로 개종했다. 이승만의 투철한 소명의식과 불굴의 의지는 바로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이 자신을 지키고 있다는 일종의 선민(選民)의식에서 비롯되었다고  수 있다. 


이승만은 한마디로 ‘일벌레’였다고  수 있다. 엄청난 노력가였고 항상 톱이 되어야 한다는 모범생 콤플렉스를 갖고 있었다. 그의 일기를 보면 항상 어떤 일에 몰두해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동시에 그는 꼼꼼히 금전출납을 기록 정도로 매사를 주도면밀하게 처리했다. 그는 항상 남보다 3배 정도의 일을 하고 그 만큼 성과를 냈다. 예컨대, 5년 8개월의 한성감옥에 갇혀 있을 때 그는 죄수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도서실과 옥중학교를 개설, 운영했다. 틈틈이 영한사전도 편찬했다. 그러면서 <독립정신>이라는 대작을 탈고했다. 


이승만은 항상 자신은 공인(公人)이라는 의식 속에 살았다. 그래서 책임의식이 대단히 강했다. 왕족의 후예인데다 어린 시절 서당과 배재학당에서 항상 우등생이었던 그는 무슨 일을 하든 최고를 지향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그렇게 많은 문서를 남긴 것도 그의 몸에 밴 책임의식에서 나왔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모든 면에서 완벽을 기하다 보니 스스로 자기가 최고라는 의식을 갖게 되고 이러한 자부심은 남들에 대한 우월감을 자아내어 결과적으로 사람들에게 유아독존적이라는 나쁜 인상을 남겼다. 그 점은 매우 아쉬운 부분이다. 그가 이동휘, 안창호, 김규식 등 여러 빼어난 독립운동가들과 원만한 인간 관계를 유지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그렇게 된 이유는 그가 6대 독자로 태어나 고집이 워낙 센데다 다른 독립운동가들에 비해 학력과 능력 등이 탁월했기 때문에 자부심 내지 자만심이 생겨 자기를 비판하는 사람을 포용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이 외에, 그는 정치가로서 언제나 원칙을 중요시하여 자기와 이념을 달리하는 인물들과는 타협을 거부하고 노골적으로 적대적인 태도를 취했기 때문이다. 


이승만 대통령이 이와 같이 일부 독립운동가와 정치인들에게 비타협적이고 독선적 인물로 비춰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모든 사람들에게 그렇게 처신한 것은 아니다. 반대로 그는 대단히 폭넓은 사교가였다. 

그는 국적, 연령, 남녀를 구별하지 않고 능력이 있다고 판단되는 사람들과 적극적으로 교제를 펼쳤다. 그 가운데 독립운동 기간에 이승만이 가장 신뢰하고 의지한 친구들은 배재학당의 선후배와 동창생, 그리고 한성감옥의 옥중동지, 서울YMCA와 하와이의 한인 기독교회 교인들과 목회자들, 그리고 호놀룰루와 로스앤젤레스에 근거를 둔 대한인동지회의 멤버들이었다. 이승만의 동업자들 가운데는 양반(兩班) 출신보다는 중인(中人)이나 상민(常民) 출신들이 많았다. 

이승만은 또 하와이에서 한인기독교회나 대한부인 구제회 등을 통해 사진 결혼을 했기 때문에 가정적으로 불행했던 여성들로부터도 헌신적인 지지를 받았다. 이승만은 동시대의 어느 독립운동가들 보다 월등히 많은 외국 친구들을 포섭했다. 그 가운데에는 언더우드, 게일 등 선교사를 비롯 맥아더, 굿펠로우와 같은 군인들이 있었고 특히 윌슨 대통령과 그의 딸 제시, 루스벨트 대통령의 부인 엘리너 루스벨트 여사, 노벨 문학상 수상자 펄 벅 여사,  중국의 린유탕(임어당), 필리핀의 로물로 등이 포함된다. 이러한 그의 폭넓은 국제적 사교력이 오스트리아 출신 여성 프란체스카와 결혼하게 되는 배경이었다. 


잘 알려진 대로 이승만은 철저한 친미, 용미(用美)주의자다. 미국의 힘을 빌려야 한민족은 독립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이른바 ‘외교독립노선’이다. 반면에 민족주의 계열은 자강(自强)을 통한 자력으로 독립을 추구했다. 이러한 민족진영은 후에 이승만을 친미주의자로 비판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지만 사실 이승만의 건국비전은 좀 더 넓고 깊었다. 


이승만은 1919년 임시정부의 수반직을 맡은 순간부터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군주제를 폐지하고 미국을 본 뜬 민주공화제 국가를 수립하겠다고 마음먹었다. 동시에 그는 새로 태어나는 조국을 아시아 최초의 기독교 국가를 만들겠다고 공언했다. 다시 말해 이승만이 추진한 독립운동의 궁극적 목적은 미국을 벤치마킹한 아시아 최초의 모범적인 기독교적 민주주의 국가였다. 이승만은 미국이 세계 제일의 부강하고 문명한 나라가 된 비결이 바로 기독교를 숭상하는데 있다고 본 것이다. 그것은 어떤 면에서는 신라가 한반도 통일을 이룩한 후 그 지도자들이 스스로 중국을 따라잡자는 소중화(小中華)의식 내지 모화(慕華)사상을 갖고 국력배양에 힘을 기울인 것과 상통한다. 그것은 자신감에서 나온 것이지 비굴한 사대주의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이승만은 민족의 광복이 실현된 다음 미국을 따라잡는 아시아 최초의 기독교적 민주국가를 건설함으로써 신생 한국이 적어도 동아시아권의 패자(覇者)가 되어 한민족에게 최대의 복락을 안겨주는 꿈을 꾼 독립운동가이자 애국자였던 것이다."- 유영익, 서울대학교 정치학 학사와 브랜다이스대학교 서양지성사 학사, 하버드대학교 대학원에서 동아시아지역학 석사와 동양사 박사학위를 받았고 고려대학교 사학과 교수와 한림대학교 사학과 교수, 한림대학교 부총장, 연세대학교 국제대학대학원 한국학 석좌교수를 지냈으며, 한일역사공동연구촉진위원회 운영위원, 국사편찬위원회 위원, 연세대학교 국제대학원 석좌교수를 지냈다. 하성학술상과 제13회 성곡학술문화상 인문사회과학부문, 제3회 효령상 문화부문, 옥조근정훈장, 제2회 경암학술상 인문사회부문을 받았으며 현재 한동대 T.H. Elema 석좌교수, 연세대 현대한국학연구소 초대 소장으로 있다. 그는 40여년을 한국 현대사와 이승만 연구에 힘써왔으며, 이화장 내에 있던 10여만 장에 달하는 이승만의 일기와 편지, 메모 등을 분석하여 이승만 대통령의 재평가를 처음으도 주도한 인물로 꼽힌다. 4.19혁명 당시 이승만 대통령을 반대했었다ㅣ2011년 8월 17일 미래한국과 가진 인터뷰의 내용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