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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북좌파에게 암살당한 독립운동가들

대한인 2013. 12. 1. 06:02

<김좌진 장군과 북로군정서 부대의 청산리전투 대승 직후 모습> 

 

1924년 좌익의 임시정부 방해책동
좌익세력이 임시정부를 없애고 독립운동세력을 장악하려고 기도하다가 김구에게 쫓겨나 개조파는 소련으로 창조파는 북중국 화북으로 각각 이동해갔다.

1926년 김규식 암살.
만주 항일독립군벌의 지도자 중 한사람인 김규식을 중공계(항일동북아혁명군) 공산당원이 암살했다.

1928년 박용만 암살.
구미위원부와 임시정부로 보낼 자금을 모금하던 박용만이 거리에서 암살당했다. 이승만과 안창호의 동지이면서 라이벌 이었던 미국 한인회 지도자 박용만을 공산주의자 김원봉이 이끄는 의열단원이 저격한 것이다.

1929년 자유시 참변
청산리와 봉오동 전투에서 혁혁한 전과를 세웠던 홍범도와 서일의 군정서는 일제의 탄압을 피해 몽고 경계와 가까운 소련의 백러시아 자유시 지역으로 옮겼다.

백러시아에서는 소련 공산당에 대항하는 백러시아 자유민주주의 운동가들이 있었다. 소련공산당에서는 한인 독립군에게 백러시아 군을 진압하는데 동참하면 활동을 지원하겠다고 했고, 한인 독립군은 그 약속을 믿고 백러시아 군과 교전했다.

약속과 달리 소련은 한인독립군에게 무장해제명령을 내렸다. 한인 독립군은 여기에 불응하였고, 소련은 소련공산당 소속 조선 공산주의 병사들을 보내 자유시에서 숙영하던 한국 독립군을 모두 살해하였다.

동포를 죽이면 안된다 하며 서일, 홍범도 등은 공격하지 말라고 했으나 조선공산주의자들은 한인독립군을 무차별 학살했다. 9백명이 현장에서 살해되고 8백여 명이 포로로 잡혀가고 실종자도 2,3백여 명에 이른다.
병력을 잃은 서일은 책임을 통감하고 자결을 선택했고 홍범도는 소련군에게 끌려가 이르크츠크로 이송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남만주에 숨어있던 김좌진은 공산주의자에 대한 복수를 다짐하고 반공인사가 됐다.

1931년 김좌진 암살.
공산주의자들을 향해 소련, 중국 공산당과 손잡은 매국노라 선언하고 토벌을 선언했다. 1931년 고려공산당원 박성실과 박상실 등이 북로군정서 숙소에 난입하여 김좌진 장군을 암살했다.
김좌진이 공산주의자들에게 암살당한 소식을 나중에 알게 된 김두한은 단순 골목깡패에서 강경파 우익인사로 거듭나고, 박헌영, 남로당, 여운형 등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복수를 다짐해 박헌영, 남로당, 여운형에 대한 강력한 청소를 감행했다. 김두한은 뒤에 공산당 토벌 공로로 훈장을 수여받았고, 부친 김좌진 장군의 독립훈장도 수여받았다.

1935년 남목청 저격사건
임시정부의 홍진, 이동녕, 조소앙, 현익철, 김구, 지청천(이후 소련에 끌려갔으나 감옥에서 탈출하여 광복군 사령관이 됨)이 모여서 각자의 정당을 통합시키는 회의를 지청천의 거처인 남목청에서 열었는데, 이때 고려공산당에서 보낸 공산주의자 이운환이 임시정부 인사들을 저격했다.

김구, 홍진, 지청천 등은 병원으로 옮겨졌고, 현익철은 끝내 병원에서 사망했다. 김구는 죽을 때까지 총탄을 제거하지 못했다. 이운환을 보낸 고려공산당과 김원봉의 민족혁명당은 임시정부 장차관들을 암살하고 자신들이 임시정부를 차지할 목적으로 이운환을 지청천의 거처에 신분을 숨긴 세작으로 들여보냈다.

1949년 조선정판사 위조지폐사건
4월 조선정판사, 현 한국조폐공사 전신에서 위조지폐가 나왔다는 소문이 돌다가 위조지폐 뭉치가 서울 종로 등에서 발견됐다. 이 위조지폐들은 박헌영의 남로당원이 정치자금을 쓸 목적으로 일과시간 이후에 비밀리에 공산주의자들이 정판사 내부 좌파들과 밀통하여 위조지폐를 대량으로 찍어냈던 것이다.

1950년 조만식 처형
10월 19일 조만식을 평양에서 처형했다. 조만식은 기독교 신자로 비폭력 무저항운동과 한국물산 장려운동을 지휘한 한국의 간디로 알려진 평화주의자다. 45년 온건좌파의 건국동맹에는 협력했지만, 46년 9월 김일성이 조선인민위원회를 만들고, 47년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을 만들자 여기에 반발하여 단독정부 반대를 선언했다가 감금당했다.
48년 조만식은 자신의 최후를 인식하고 처자와 비서 이윤영을 남으로 보내고, 50년 김일성에 의해 친미주의자로 몰려 살해 당했다.

그 외 신탁통치 찬성으로 한반도를 분단시킨 반민족 만행을 저질렀다.

 


<최초 항일 정규전 승리인 봉오동 전투 지휘관 홍범도 장군과 군정서 대원들>

한국의 대표적 진보주의자 조봉암과 장준하도 친북좌파라면 치를 떨었다.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일으켜서 대중적 동원운동을 하는 중에 소련 정부의 지시라 해서 신탁통치 반대대회를 열어놓고 신탁통치 찬성결의를 하게 한 것 같은 일은 전혀 한국 사람의 상식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어리석은 짓일 뿐 아니라 민족을 배반하는 폭거",
"내 나라 내 겨레는 잊어버린 채 소련의 이익을 위해 일하는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는 생각해 본 일이 없다" - 조봉암

(미국은 카이로 회담을 통해 이미 조선의 독립과 해방, 자유를 보장하는 선언을 전세계에 했다.

일본과의 막바지 전쟁에서 미국은 일본군의 전투력을 높게 평가하는 어처구니 없는 실수로 소련에게 협조를 요청함으로써 소련이 한반도를 먹으려는 야심을 본격화 하게 하는 기회를 주고 만다.

일본 패망 후 조선-한반도에 소련이 지리적으로 가까워 조선을 장악할 것을 우려한 미국은 부랴부랴 서둘러 서울에 입성하게 된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왜 독일 식민지였던 프랑스와 다르게 조선은 승전국의 일원이 되지 못했나이다.

그 이유는 매우 간단하다. 승전국의 기준-당시 강대국의 기준에서 1940~1945년 사이에 군사적 독립무장투쟁을 했느냐인데, 첫째는 프랑스내에서 레지스탕스 게릴라 무장투쟁이 지속됐고, 두 번째는 수복과정에서 영국에 주둔해 있던 드골이 이끌던 프랑스 군대가 파리에 먼저 입성했다.

소련마저도 소련인 600만명이 죽어 갈 정도로 독일군에게 저항했다. 이게 슬픈 일이다. 1%의 목숨을 건 무장선봉세력과 여기에 동조하는 10%의 적극적 국민만 있으면 그 나라는 망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조선에는 1%의 독립무장투쟁세력이 있었지만 10%의 적극적 지지가 없었다는 점이고, 그 1% 선봉세력마저 친북좌파들의 암살에 의해 사그러 졌다.

프랑스와 다르게 조선 독립무장투쟁은 친북좌파들이 민족주의 독립군세력 핵심 인물들을 암살함으로써 막강한 일본군의 탄압 집중과 함께 1940~1945년 사이의 무장투쟁 맥이 미리부터 끊겨 버렸기 때문에 조선은 승전국이 될 수 없었다. 따라서 조선은 승전국이 되지 못하고 승전국의 관리대상국이 되고 만 것이다.

이러한 민족적 반역죄를 저지른 친북좌파들이, 한반도 단일국가를 건설하는데 있어서도 국제사회에서 인정 받는 것은 당시로써는 완전한 독립국이 되려면 국민투표-민주주의 방식을 통한 정권이 창출되는 것이었는데, 소련의 신탁통치 한반도 분단에 앞장서며 유엔 선거 감시단이 한반도에 들어 오지 못하도록 막았다.

이처럼 애초부터 한반도 통합을 원치 않던 친북좌파들은 철저하게 소련의 지시를 받아 신탁통치에 찬성함으로써 마침내 한반도를 분단분열시키고 말았다.)

"6.25가 일어났다. 그러나 하늘은 무심치 않아 그래도 이 백성을 공산역도들의 손아귀에 아주 넣지는 않은 것이다." - 장준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