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 경축식>
"지방에서 출몰하고 있는 무장폭도의 도량은 단순한 행동이 아니라 우리가 입수한 정보에 의하면 북한의 괴뢰집단은 평양에 있는 소위 강동 정치학원이라는 곳에서 게릴라 전술을 습득한 청년 2천명이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을 타고 월남하여 지방 각지에 분산되어 살인 방화를 선동하고 있는 것이다." - 내무차관 장경근,1949년 여름
(http://blog.naver.com/qnwkkr/120055286437 스탈린의 비밀편지에 테러난동의 필요성이 언급되어 있다.)
강동정치학원
1947년 9월 평안남도 강동군에 설립(교장 소련파 박병율)되었고, 남노당이 한국에서 척결되면서 월북한 남노당 간부들이 주로 입교했으며, 선전선동 공작원과 테러분자를 양성했다. 1949년에 신안주로 이전하였고, 이 중 이현상(본명 이상현)과 맹종호는 남파되어 조선인민유격대 지도부를 구성해서 활동했다.
6.25남침에 패배한 이후 강동정치학원 출신 대부분은 미국 간첩혐의로 처형되고 학교는 폐쇄되었다. 이현상은 인민유격대 제2병단 지도자로 남부군 총사령관으로 활동하다 1953년 9월 18일 지리산 산청군 생비량 빗점골에서 사살됐다.
또한 제주 4.3폭동을 일으켜 무수한 양민을 학살하고 제주도의 비극을 만들었던 김달삼(본명 이승진)도 제주도에서 도망쳐 강동정치학원에서 테러분자 교육을 받은 후 다시 월남해서 인민유격대 제3병단 태백산지구사령관(1949년)이 되어 영덕, 봉화, 태백, 울진, 청송 등에서 테러활동을 하다 1950년 3월 21일 저녁 반론산에서 국군진압대에게 사살되었다.
인민유격대, 빨치산 테러조직
1949년 북한노동당 중앙위원회 직속 중앙당 14호실(대남공작부)은 예하에 한국내 테러조직을 결성하기로 결정한다.
여순반란 사건의 잔존 지리산 세력과 대구반란 사건의 팔공산 잔존 세력 등과 북한 강동정치학원 출신 2,000명(2,000~2,700명설)을 침투시켜 49년 7월부터는 인민유격대라는 이름으로 오대산 지구 제1병단(이호제), 지리산 지구 제2병단(이현상), 태백산 지구 제3병단(김달삼)으로 조직을 강화했다.
(인민유격대 총사령관 이승엽은 남침패전 직후 1953년 8월 3일 내란음모죄로 김일성에 의해 처형당했다.)
이들이 내건 선전선동 구호는 '결정적 시기가 도래한다, 각 지방당은 정권접수를 위한 준비로 해방지구 1,2개 구를 확보하라, 당조직을 군사조직으로 전환해 결정적 투쟁을 전개하라, 좌익들은 돈과 재산을 바쳐 무기를 준비하라' 등이었다.
최후까지 활동한 지리산 지구 제2병단은 예하에 6연대(이현상, 70명, 지리산-산청,함양,남원,구례일부), 7연대(박종, 130명, 백운산-광양,하동,곡성,구례와여수 일부), 8연대(200명, 조계산-순천,곡성과 화순일부), 9연대(정금모, 250명, 덕유산-무주,거창,수군 일대)를 두었다. (6.25 남침전)
조직체계는 현지당 -> 세포당 -> 야산대대, 서부 대대로 나누고, 점령 마을은 민주부락이라고 불렀으며, 양민계급분류는 1급-즉정(총살), 2급-재산몰수, 3급-개전설득 등으로 분류했다.
(이들 약탈 점령당한 마을들은 주로 30~70가구 규모의 화전민과 산중 마을로 일부는 현지 경찰관 면사무소 직원 등 지방공무원들조차도 마을이 존재 하는지를 몰라서 가보지 않은 지역이었다.)
물자조달은 각 마을을 장악하여 세포들을 두고, 공출할 쌀, 의복, 부식물 등 필요량과 시기를 정하면 세포들이 등에 지고 지정된 장소로 운반해서 해결했다.
경찰서와 관공서를 습격할 때는 습격 시간이 20분을 넘기지 않도록 해서 지원부대의 공격을 회피하도록 했다.
후에 군단이라는 이름으로 재편했는데, 1군단은 초기에 진압되다시피 해서 3군단과 합쳐졌으며, 2군단은 6.25남침 격퇴 이후에도 오래도록 테러 만행을 저질렀다.
1병단은 실제 활동이 미미했는데, 태백산으로 들어가는 길목인데다 초기에 한국군에게 진압되었다. 인민유격대가 출범하기 이전인 49년 6월에 400여명, 7월에 200여명이 오대산으로 보내졌으나 오대산 도착과정에서 대부분이 사살되어 7월에 남파된 200여명 중에 겨우 30여명만 오대산에 도착할 수 있었다.
49년 9월 6일 이호제가 이끌고 침투했던 1병단 360명 가운데 100여명만이 살아남아 오대산 거점을 마련했던 테러분자들과 합세해 한 때 400여명에 달했으나 활동이 미미한채로 버티다 1949년 12월 경에 거의 궤멸되어 태백산으로 도주해 3병단에 가세했다.
대구6연대 반란 세력이 주축이 된 대구 팔공산 테러분자들의 활동도 두드러졌었다. 팔공산에서 대구로 들어가는 불로동 입구에 국방경비대 대대가 차단하고 있었지만 이미 입산한 테러분자들이 300여명에 달했다.
이들은 야산대와 합세해서 밤마다 염불봉, 수봉, 인봉, 노적봉에 봉화로 불을 밝혔고, 낙동강 전투 때에는 북한군과 내왕할 정도였다. 이들 팔공산 테러분자들은 와촌면 양민학살 뿐만 아니라 1950년 7월 27일에는 대구비행장을 2일동안이나 점령하기도 했다. 이후 소탕 작전으로 잔존세력이 60여명에 불과했지만 1950년 3월에는 서울에서 검거된 김삼룡과 이주하 구출작전 지령을 받고 출동을 모의할 정도였다.
<빨치산, 인민유격대 1병단과 3병단 테러 만행도. 지명 첨가-10.20, 사진 누르면 더 큰 사진>
6.25 침략전 북한 테러분자들의 침투
아성작전, 9월 공세
회피적 전투에서 경찰서와 관공서를 직접 공격하여 타격을 가한다는 1949년 9월 아성작전에 돌입하기 이전에 각 빨치산 근거지에 테러분자들을 증강하기 시작한다.
1병단이 있던 오대산 근거지에는 6월에 400여명을 보낸데 이어 7월에도 200여명을 추가 보충하고, 3병단에는 8월에 300여명, 9월에는 360여명을 태백산으로 보내고(이 360명은 아래에 언급한대로 1병단 소속으로 260여명이 사살되고 100여명만 3병단에 합류하게 된다), 경북 지경리에 100여명이 해상침투 한다.
1차 침투
1948년 11월 12일 북한 강동정치학원 테러분자 180명은 태백산맥을 타고 태기산으로 들어와 남하를 기도했다. 11월 14일 태기산과 응봉산에 배치되어 있던 원주경찰서 대원들이 테러분자 척후대 60명과 교전하여 4명을 사살했다. 11월 18일에는 평창군 방림면 주촌리 대미동 민가에서 3명을 사살 후 일본군 99식 소총 5자루와 실탄 350발을 노획했다.
1948년 11월 23일 테러분자 주력 120명이 가리승산, 치악산, 백덕산 방면으로 남하해서 영월군 북면 태기리에 침입하자 제7사단(대령 유재흥)은 교전으로 13명 사살, 2명 생포, 소총 23정을 노획했다.
11월 29일 영월지구에서 패주하던 테러분자 100여명은 20여명의 다른 테러분자와 합류하여 영월군 수주면 사자산으로 들어 갔다. 오후 4시경 원주경찰서 대원들이 백병전으로 적 12명을 죽이고 소총 13정을 노획했다.
2차 침투
1949년 7월 1일 양양에서 출발한 100명의 테러분자들은 오대산을 거쳐 7월 8일 평창군 수암면 호오리에 침입해 식량을 수탈하던 중에 평창경찰서는 진부지서에 전투지휘소를 설치하고 전병산으로 퇴각하는 적을 추격하다 1명을 사살했으나 역습에 걸려 2명 전사, 캘빈 1정을 탈취당했다.
테러분자들은 만항지를 지나 발왕산으로 남하하자 강원도 경찰국은 횡성 원주 삼척지구 경찰관을 동원해 사령부를 정선군 북면지서에 설치하고 포위했다. 적들은 포위망을 탈출하여 7월 10일 강릉시 왕산면 구절리 상봉동에 결집하다 다시 포위되자 재탈출하여 구절리 시동으로 빠져나가 문래산으로 입산했다.
15일 새벽 4시 쌍방간에 10여m를 사이에 두고 수류탄 투척과 육박전으로 적 7명 사살, 생포 1명, 일본군 경기관총 1정 38식단총 1정 99식 소총2정을 노획했으나 전사3명 부상4명의 피해를 입었다.
3차 침투
1949년 8월 1일 남침한 60여명의 북한 테러분자들은 8월 5일 새벽 4시 평창군 봉평 화명동에 침투하자 창평경찰은 남하요로를 차단한채 화명동 근처에서 휴식중인 테러분자들을 기습해 5명을 사살하고 99식 소총 3정을 노획했다.
8월 8일 오후 2시 태기산에 주둔하던 테러분자들은 30명을 봉평면 면온리 양조장으로 식량 약탈을 위해 접근하던 중 휴식중이던 경찰대를 습격하여 2명 납치 소총6정을 강탈하여 도주했다. 이에 군경 합동작전으로 8월9일 오전 11시경 적을 포위하여 52명을 사살하고 총기 50정을 노획했다.
4차 침투
1949년 9월 3일 98명(지휘자 김승삼)이 가리산으로 숨어 들자 강원도경찰은 원주 횡성 경찰서에서 1개 중대씩을 동원하여 8월 4일 홍천군 북촌면 야족대리 북방 야산(381,382, 453고지)에서 적 17명을 사살하고 경기관총 1정, 소총 14정을 노획했다.
테러분자들은 청벽산을 거쳐 공작산 정상에 인공기를 게양하고 진지를 구축했으나, 군경합동진압대가 포위하여 적 21명 사살 소총 20정울 노획했다.
경북 침투
1949년 '9월 아성공세'를 기점으로 영양 일월산의 봉화재에 지휘본부를 두고 영덕, 봉화, 태백, 울진, 청송 등의 지역을 중심으로 게릴라전을 펼치던 3병단에 오대산에 근거지를 뒀던 1병단 잔여 세력이 합세하게 된다.
본격적으로 49년 9월 6일 1병단 360명이 월남침투하여 태백산맥을 타고 남하다가 진압군에 의해 260여명이 사살되어 잔여병력 100여명만이 오대산에 도착해 잔존세력과 합류하였다가 태백산으로 이동하여 제3병단(김달삼)과 합류해 1군단을 재편해서 테러난동을 벌였다.
마침내 이들은 진압군의 강력한 섬멸작전에 의해 분산되고 축소되어 1군단으로 통합(총책 이호재, 부총책 김달삼)되어 50년 2월 월북을 꾀하고 있었다. 울진 백암산에 400여명이 집결중이라는 첩보를 입수한 강원도경은 백암산 밑에 매복하여 선발대로 월북에 나선 김달삼이 인솔하던 70명을 정선 남면 왕피리 조기에서 공격하여 6명 사살, 1명 생포했다. 후속으로 출발한 330명을 5월 21일까지 추격하여 대부분 사살했다.
1950년 3월 21일 저녁 국군 제185부대(준장 이형근)의 전격진압작전에 의해 3병단을 이끌던 김달삼은 정선군 북면 반론산에서 사살당해 응징 되었다.
경북 해상 침투
6월 11일 인민유격대 60여명이 강릉 밑에 상륙했다. 1949년 11월 6일 100여명의 테러분자들이 경북 포항 송라면 지경리에 상륙침투하여 보현산 부근에서 해동여단과 3병단과 합류하여 난동을 부렸다.
경기도 침투
1948년 8월 12일 철원에서 출발한 북한 테러분자들의 선발대 15명이 명지산 부근에 머물며 용문산까지 정찰왔으나 국군에게 쫓겨 도로 월북했다. 8월 15일 주력 40여명이 명지산을 거쳐 용문산까지 침투했으나 국군에 의해 20명이 사살되고 나머지는 도주 월북했다.
그 외
1949년 11월 6일 테러분자 50여명이 북한군 38경비 제1여단의 지원하에 침투했으나 토벌되었고, 1950년 3월 28일 김상후 김무현 부대 700여명이 강력한 화력으로 무장한채 가래봉으로 침투했다.
북한 테러분자들은 9월공세로 전환해서 파출소,면사무소, 전화전신국,역과 열차, 곡물창고 등을 습격했으며, 민간인 마을에서는 공출을 이유로 갖은 약탈을 자행하면서 여기에 반발하는 양민들을 무차별 학살했다.
가장 피해가 컸던 전라도뿐만 아니라 경상도만 해도 7,8월에 거친 습격으로 봉화, 태백, 울진, 청송, 영양, 달성, 의성, 영천, 거창, 합천, 영덕 등이 테러분자들의 만행에 의해 적지 않은 양민 희생자가 발생했다.
10월 27일 진주에는 300여명의 테러분자가 습격해서 도심지 진입에는 실패했지만 경찰력과 군사력이 미치지 못했던 외곽 산간지역에서는 희생과 피해가 발생했다.
<빨치산들에게 귀순을 권고하는 안내문>
대테러 진압작전 진행
48년 10월 30일 호남지구 전투사령부(준장 송호성), 49년 3월 1일 지리산지구 전투사령부(준장 정일권), 49년 3월 2일 태백산지구 전투사령부(준장 원용덕)가 설치되었다. (서북청년단은 민간차원에서 지원과 전투를 수행하다 정규군으로 편입됐다.)
49년 7월부터 12월까지 6개월간 진행된 542회의 초기 진압작전으로 테러분자 세력은 막대한 타격을 받아 50년 3월 막바지 진압작전 때는 빨치산 테러분자들은 380여명으로 줄어 들었다. 12월 1일까지의 전과로만 봐도 사살한 테러분자가 365명에 생포 187명에 불과했지만 테러분자 4,964명이 자유대한에 항복하고 전향함으로써 애초에 성공할 수 없는 테러에 불과했다.
남노당 두목 박헌영의 장담과 다르게 인민유격대는 민중들에게 거부되고 오직 아무 것도 모르는 산골 마을 사람들이나 화전민들이 힘에 굴복해서 수탈 당할뿐이라서 민중의 지지를 얻는데 실패함으로써 잔인했지만 효과가 없는 사회주의이념을 내세운 양민학살 만행으로 끝나고 말았다.
(사회주의 이념의 모순점은 평등을 내세워 소수 권력골수분자를 빼고는 나머지 거의 대부분이 똑같이 가난할 수 있도록 유혈 착취와 수탈을 일삼다는 점이다.
이 것은 오직 힘만을 내세웠던 제국주의와 매우 유사한 형태를 보인다. 반면에 자본주의는 다수가 부유하도록 하며 그 풍요와 자유를 지키고 확대하기 위해 피를 흘린다.
어차피 인간사회의 소유욕에 따른 독점의 형태는 이름만 다를 뿐 같을 뿐이라서, 역사상 대표적으로 무식한 소유독점 투쟁은 고대 씨족말살유혈정복시대와 전현대유혈제국시대 그리고 유혈사회주의시대라고 할 것이다.
혁명은 본래 삶의 향상을 위해 피를 요구하지만, 사회주의는 오직 이념을 위해 삶의 희생과 피를 요구하는 폭력을 추구한다.)
(인민유격대 빨치산 2병단, 속칭 '남부군'과 김일성이 남침중에 빨치산을 이용하려한 내용은 다음 기회에 살펴보도록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