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북좌파들은 반미 역사왜곡을 셔먼호 사건에서부터 시작한다. 왜냐하면 북한이 반미 역사편파의 출발점을 셔먼호 사건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북한은 셔먼호 방화 사건을 대미 7대 전승중 첫 번째 대승이라고 한다.
『1866년 침략선 《셔먼》호의 침입으로 시작된 미제의 조선침략력사는 세기와 세기를 이어 오늘까지 계속되고있다.
미제는 침략선 《셔먼》호를 우리 나라에 침입시켜 우리 민족의 머리우에 침략의 첫 불화를 들씌운데 이어 1868년에는 침략선《챠이나》호를, 1871년에는 6척의 군함으로 《원정함대》를 두어 우리 나라에 침입시킴으로써 조선에 대한 침략의 길을 넓혀나갔다.
그러나 그때마다 미제는 우리 민족의 결사적인 반미항전에 부딪쳐 수치스러운 참패를 당하고 말았다. 』 - 북한 김태영, 2003년 3월 사설 "미제와의 총결산으로 민족의 한을 풀자" 중에서
여기에서 과연 저너럴 셔먼호가 북한의 주장대로 조선을 침략하기 위한 미국의 술책이었느냐 하는 점에 의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조선과 미국의 첫 접촉은 1886년에 이뤄진다.
1866년(고종 3) 2월에 미국 상선 사불(士佛: 조선 문정관이 기록한 한자식 이름)호가 부산진 사등 앞바다에 도착 했는데, 이 배는 1865년 10월 일본 장기에서 무역을 끝내고 1866년 2월 일본 장기에서 출발해서 가던 중 풍랑으로 표류하다 부산 앞바다로 밀려와 음식물을 얻기 위해 부산진에 들어 오게 된다. 부산진 관청에서는 이들에게 음식물을 제공하면서 심문을 마치고 떠나 보낸다. 미국인 6명, 중국인 2명으로 8명이 승선하고 있었다.
1866년 5월 서프라이즈호는 중국 연대에서 감초를 실고 출발하여 유구로 향하던 중 풍랑을 만나 파선돼 구명선을 타고 평안도 철산부 선암리 선사포에 상륙했다. 철산부 관청에서 취조를 마친 후 그들의 의사에 따라 북경으로 호송하였다. 이들은 병인박해 때라 프랑스인으로 오해 받지 않기 위해 미국인임을 특별히 강조한 사건 이었다. 미국인 2명, 영국인 2명, 네델란드인 2명, 중국인 2명으로 8명이 승선하고 있었다.
(1852년, 1855년 미국 포경선과의 접촉도 있었다.)
(차이나호 사건은 미국에 의해 주도된 것이 아니라 다국적 성격으로 독일이 일으킨 사건이다. 당시 독일인 페르노트가 두 번의 통상교섭 시도가 조선의 쇄국정책에 의해 실패하자 프랑스 신부 페롱과 조선인 천주교 신자들의 의견을 받아 들여 미국인 젠킨스의 자금지원을 전용해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구(球)의 묘를 발굴해서 유골과 부장품을 이용하여 대원군과 통상문제를 흥정하고자 했던 사건이다. 그 사건에 동원된 배가 일본에 정박해 있던 차이나호와 그레타호라는 두 척의 상선이지만 이 배들은 임대 되었을 뿐이다.)
같은 해 8월 조선과 미국 사이의 최초의 분쟁이 되는 셔먼호가 다가오고 있었다.
<남북전쟁에서 군함으로 쓰이던 프린세스 로얄은 용도폐기되어 민간인 불하 후 영국 메도스 상사와 12인치 함포2문이 달린채로 사용계약되어 셔먼호가 됐다.>
1866년 8월9일 중국 산동성 지푸를 떠난 저너럴 셔먼호는 1866년 8월 16일 평안남도 용강현 다미면 주영포에 다다르고 그 다음 날 황해도 황주현 삼전방 송산리를 거쳐 3일 후 평양 초리방 사포구에 도착한다.
당시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선교사들도 권총을 소지하던 때라서 셔먼호가 비록 상선이었지만 해적들의 공격에 대비해 다른 상선들처럼 2문의 대포가 장착되어 있었다. 그 화포는 다른 상선과 다르게 함포용이었기에 위험했다.
셔먼호는 영국선적으로 영국의 메도스 상사와 임대합작으로 타국과 통상을 해왔다. 선주는 미국인 프레스턴이었지만 그 배를 직접 운행하는 선장은 덴마크인 페이지였고, 탑승인원은 영국인 선교사 토마스(최난헌)와 화물감독 호가스, 미국인 1등항해사 윌슨을 포함한 서양인 5명, 통역인 이팔해와 요리사 조능봉을 비롯한 청국인 13명, 말레이시아인 5명(미국측은3명, 오성록에서는 태국인)으로 다국적 형태를 띠고 있었다.
(안내인 우문태가 백령도 근처 도도(돗섬)에서 합류했지만 이내 하선한 것으로 보인다. 우문태는 나중에 조선에 서양인2명과 중국인2명의 선원이 생존해 있다고 조선인 김자평의 발언을 내세워 주장했다.)
그 무렵 조선은 병인박해로 인해 프랑스의 보복 공격에 대한 우려 때문에 변방에서의 변동에 민감할 수 밖에 없었고, 초기에는 보복하러 온 프랑스 해군으로 알았다가 나중에 프랑스 해군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평안도 관찰사 박규수가 침범한 목적을 물었다.
선교사 로버트 토마스는 선원들을 일일히 소개하면서 상거래가 목적임을 알리고, 배에 실고 온 망원경, 자명종 시계, 비단과 유리그릇 등을 조선의 쌀, 사금, 홍삼, 호랑이 가죽과 교환하기를 원하다고 답변했다.
(이 대목에서는 조금 다시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미국측 자료에 의하면 13명의 중국선원과 3명의 말레시아 선원들이 천진의 술집에서 고용되어 승선했다고 하는데, 그들 임시 고용 선원들이 조선이 거래를 거절할 것이지만 조선의 금과 다른 귀한 물건들을 약탈한 다음에 돌아와야 한다고 떠들고 다녔다는 점이다.
이런 소문내기를 과연 고용주들이 받아 들였을 것인가에 대한 점이다. 물론 상황을 살펴보자는 선에서 끝났을 것이지만, 그 속내는 오직 그들만이 알고 있었다. 당연히 거래라도 성공하기를 바라는 입장에서 솔깃할 수도 있겠지만 조선의 금이라는게 국법으로 광산개발이 엄금되어 있어서 금이 대량으로 흘러 나오지도 않았고, 또한 조선의 국고는 텅비어 청나라에게서 빚을 내야 하던 시점이었다.
따라서 일본이 황금의 나라로 알려지고, 남미가 황금의 땅으로 알려졌었듯이 환상을 담은 이국에 대한 풍문 수준이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게다가 선교사 토마스는 상해의 윌리엄 목사 집에서 조선인 신자들과 조선인 상인들에게서 조선 말과 글을 배웠고, 1885년 이미 조선 황해도 지방을 4개월간 방문했었기 때문에 조선의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용호한록 평양사실에서는 셔먼호는 처음에는 동남아로 가려고 했으나, 토마스가 선주 프레스턴과 화물감독 호가스를 '조선으로 가면 무역도 열 수 있고 큰 이익을 볼 수 있다'고 설득했다고 나와 있다.)
사소한 거래라도 국법으로 금하고 있기에 관찰사가 물물교환을 거절하고 철수를 요구했지만, 양측 사이에서 갈등은 없었다. 그러는 사이 정부로부터 '즉시 떠날 것을 요구하고, 따르지 않으면 그들을 죽이라(현장에서 알아서 대처하고 죽이라)'는 교지가 관찰사 박규수에게 전해진다.
선교사 토마스는 조선인들에게 성경책을 배부했는데, 당시 평양은 선교의 중심지에다 기독교인들이 많은 곳이라 성경책을 얻기 위해 올라 온 조선인들로 꽉차서 갑판에는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오문환, 도마스 목사전) 관청에서도 충돌을 피하기 위해 순화책으로 고기 채소 등 음식과 땔감을 제공했다.
(오문환의 저서 도마스 목사전에 대해 오문환의 일제 말기 친일경력을 들어 부정하기도 하나, 도마스 목사전은 오문환이 일제에 협력하기 10년 이전인 1928년에 저술된 것이다. 내용 또한 일본과 관련이 없기에 자료수집과 분석에서의 오류와 기독교적 미화는 있을 수 있지만 사건에 대한 상세한 내용을 기술하고 있다.
셔먼호가 식량난에 시달렸다는 일부 주장은 신빙성이 없어 보인다. 천진에서 선원들을 모으고 식량을 실어서 곧바로 조선으로 향했기 때문에 오랜 항해를 했다고 할 수 없으며, 또한 이미 백령도에서 다른 외국 범선들처럼 정박했다가 다시 대동강을 향해 출발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양측은 긴장감을 해소하지 못하고 무력 충돌 속으로 휘말려 들게 된다.
문정관 안상흡이 한 장의 명령서를 가지고 이현익의 배로 이동하던 중, 조선군의 동태 변화에 불안감을 느끼던 셔먼호가 보낸 소청선에 의해 중간에서 그 명령문을 탈취 당하고 만다. 중국인 선원을 통해 셔먼호 제압 명령문이라는 것을 안 순간 감시선에 타고 있던 군관 이현익과 부하 박치영, 유순원을 셔먼호로 유인해 납치 감금하면서 비극이 발생한다. 명령문의 내용은 셔먼호 선원들을 전원 육지로 유인하여 제압해서 처형하라는 것이었다. (패강록- 납치당한 이현익의 아들 이홍근의 기록)
(다른 일설에 의하면 박치영과 유순원은 급물살에 휩쓸려 죽고 이현익만 납치되었다고 한다.)
이에 신태정이 제너럴 셔먼호에 접근하여 이현익 등의 석방을 요구했으나, 그들은 석방조건으로 쌀 1,000석과 금, 은, 인삼 등을 요구한다. 협상이 진전 없는 가운데 퇴교 박춘권이 셔먼호 인질구출 작전을 전개해서 이현익을 구출하지만, 구출작전 중 유순원과 박치영은 살해당하고 만다.
이 사건으로 인해 평양 주민들도 우호적 입장에서 적대적으로 바뀌어 일부가 욕설과 돌팔매질도 했으며, 뒤이어 교지를 받든 조선군과 셔먼호간의 포격전이 전개되어 조선인 7명이 사망하고 5명이 부상당한다. 명령문을 탈취당한 때부터 평양에는 포수들도 참여한 조총부대가 긴급 확대편성되고 포가 배치되었다.
(고종실록은 셔먼호가 먼저 발포했다고 기록하고 있고, 평양지와 패강록은 조선군이 먼저 발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미국의 문서 2개는 객관성을 위해 참조하지 않았다.)
마침내 관찰사 박규수는 퇴교 박춘권을 지휘관으로 삼아 최후의 공격 명령을 내렸다. 당시 수군 공격대는 준비가 미흡했다. 황급히 인근 어선들을 징발하여 거북선을 흉내내 소가죽으로 둘러 씌운 다음 포를 장착해서 셔먼호에 최대한 접근해서 발포를 시작했다. 하지만 구식 포는 화력이 떨어져 셔먼호에 흠집하나 내지 못했다.
이에 퇴교 박춘권은 작은 어선 두 척을 연결한 다음 황과 염초 더미를 잔뜩 쌓아 불을 붙혀 셔먼호로 보냈지만 빗나갔다. 그 다음 화선이 셔먼호를 향해 보내졌지만 셔먼호 선원들에 의해 벗어나고 말았다. 세번째로 다시 화선들이 보내져 셔먼호와 충돌했다. 셔먼호 선원들은 불길을 피해 강물로 뛰어 들었지만 조선군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화공작전을 전개해서 셔먼호를 무력화하고 선원 2명은 뭍으로 끌어내서 처형하고 화포 2점을 노획한다. 대부분의 선원들은 배 안에서 익사하거나 불타 죽었는데(조선측 기록에 의하면), 통역을 맡았던 선교사 토마스는 평양 주민들에게 맞아 죽었다는 설과 박춘권의 칼에 참수당했다는 설이 존재한다.
(운하견문록 적호기에서는 선교사 토마스는 조선군의 신분증을 창끝에 걸어 흔들며 항복의사를 밝히고 물에 뛰어 들었다고 한다.
박춘권은 나중에 목사가 된다. 조선 정부는 셔먼호를 본따 철선을 제작했지만 진수에 실패한다.
침몰했다는 고종실록의 기록과 다르게 셔먼호는 완전 전소되지 않고 1868년 미국에게 인도되어 노스캐롤라이나 월링턴 근교에서 1874년 1월 10일 침몰하기까지 존재했다고 미해군 기록보관소에 나타나 있다.(조선과 미국측 다른 자료들로 인해 미해군 자료는 신뢰하기 힘들다.)
당시 조선은 쇄국양이정책을 펴고 있었지만 무력이 동반되지 않는 경우 환대해서 돌려 보내는 정책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이 시기에는 병인박해와 맞물리면서 셔먼호에 대한 강경책을 썼다고 볼 수 있다.
한편으로 셔먼호 선원들이 약탈하고 강도질에 강간까지 했다는 주장은 너무 감정에 몰입되다 보니 거짓을 기록했거나 정당성을 내세우기 위해 의도적으로 집어 넣은 것으로 보인다. 셔먼호 선원들은 초기 몇 번을 제외하고는 뭍으로 나가지 못했다고 보는게 더 타당하다.
7월 15일 3명이 상륙하여 옥현지역까지 갔지만 중군 이현익 일행이 감시하고 있었고, 토마스가 갑자기 총을 쏘자 배를 저어 왔던 다른 일행4명이 귀선하다말고 다시와 시급히 실고 물러났다. 박규수의 장계에서도 뭍에 상륙했다는 것만을 질타하고 방어와 감시를 더욱 엄중히 지시했다고만 나와 있을 뿐이다. 17일에는 한사정에서 이현익 석방건으로 협상이 잠시 있었다.
우선 셔먼호 선원들이 자유롭게 뭍에 오를 수 있었다면 셔먼호 선원들을 뭍으로 유인해 전원 사살하라는 명령을 내릴 필요가 없었다. 또한 무력충돌 이전 안정기에도 성경책 배포가 뭍이 아닌 셔먼호 갑판 위에서 이뤄졌다는 점이다.
더구나 상선이 출현했을 때부터 감시의 대상이었기에 이들의 활동이 모두 포착되고 있는 상황에서 약탈과 강도, 강간이 이뤄졌다면 육지에서는 쉽게 처형당했을 것이다. 이후에는 상호 총포격전이 진행되고, 포위된 상황에서 소수의 선원들이 뭍에 상륙할 수 있는 기회가 아에 사라졌다는 점이다.
(병인박해는 당시 흥선대원군이 쇄국양이를 하되 양이끼리 견제하도록 하는 외교정책을 편 것으로 흥선대원군은 프랑스의 힘도 끌이 들이기 위해 특정 프랑스 선교사를 이용하려고 만남을 시도했지만 불발로 끝나고 흥선대원군은 분노하게 된다. 곧장 병인박해가 일어 난다.)
셔먼호 피격 사건이 미국 본국에 알려지자 미국은 선원들이 구금되어 있을 것이라고 보고 중국 북경주재 영사측에 한양으로 급파하여 석방금을 지불하고 선원들이 풀려 나도록 조치를 취하라고 명령을 하달한다. 한양에 도착한 북경주재 미 영사측은 전원처형 소식을 듣고는 북경으로 귀환한다.
1867년 1월 셔먼호 선체를 찾기 위해 각 함정 1척씩을 두 차례 동원해 해상 수색에 나서지만 실패한다.
(셔먼호 방화 사건은 조선에서 병인박해를 피해 탈출에 성공한 델리신부가 12월 15일경에 북경에 소식을 전함으로써 북경주재 미국공사 벌린게임이 정식으로 접수해 문서로 1867년 1월에 국무부에 보고했다.
셔먼호 수색 작전에 나선 슈펠트 제독(나중에 조미통상수호조약 체결을 담당한다)은 동지나해에서 중국인(광동지방) 해적들을 소탕하던 중이었다.
수펠트는 미수교국간에 발생한 불상사로 셔먼호가 내강 항해를 금지한 조선의 법을 어긴 것이며, 이 불법에 맞선 조선의 행동은 정당하다고 판단한다는 보고서를 작성했다. 아울러 조선은 서해에 출몰하던 중국 해적들로 간주했을 것이라고 적었다.
2차 조사에 나선 페비거는 정반대의 보고서를 작성했다. 2차 조사과정에서 미군 함정은 대동강 진남포에서 조선수군으로부터 2발의 포격을 당하지만 피해가 없자 반격에 나서지 않았다.
미국은 중국을 조선의 실질적인 종주국으로 판단하여 중국에게 손해배상을 요구하지만, 중국은 조선은 자주행위를 하는 나라임을 내세워 거절한다.
조선의 현장 관리와 조선정부 모두 정체 미상의 서양배가 무슨 까닭으로 그랬는지 모르겠다는 식으로 축소 보고를 올리고, 또한 청국에 통고하였다.
이후 수색 함정과의 접촉에서 조선은 슈펠트의 서프라이즈호를 구조해 준 것에 감사드린다면서 셔먼호의 진상을 묻는 질문서찰에 대한 답신에서 셔먼호는 침략해 왔기 때문에 침몰시켰으며 가을철 먼지만한 사건이므로 서로가 상해하는 일이 없도록 우호관계를 유지하기를 바란다고 언급했다.(의황해도관찰사 답미국인조회))
충격에 빠진 미국은 보복을 결정하고, 이로 인해 신미양요가 발생한다.
1871년 5월 슈펠트제독이 이끄는 5척의 군함이 강화도 근해에 들어와 손해배상과 통상을 요구한다. 이에 조선 수군은 함대를 동원해서 기습 공격을 감행하지만 실패한다.
기습공격에도 불구하고 미 해군은 평화적으로 협상을 지속하기를 바란다고 화평책을 고수했다. 조선의 강력한 거부로 상륙작전을 감행해서 강화도를 무력 침탈하여 작약도에 머물면서 1달간 지속적으로 협상에 임할 것을 요구했지만 조선의 입장 변화가 없자 철수한다.
(이 전투에서 350명의 조선군과 양민이 죽었다. 고종실록에는 전사자 53명 부상자 24명이다. 조선인 포로 15명은 얼마후 풀려났다.)
나중에 미국과 조미수호통상조약을 맺은 이후 조선과 미국은 공식적 접촉을 통해 '서로의 풍습을 알지 못해 발생한 사건'이라는 명분으로 셔먼호 사태를 양국 모두 비공식 사건으로 마무리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