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직과 이영훈을 중심으로 한승조, 지만원, 김완섭, 조영남 등은 일제의 식민지배가 조선을 근대화하는데 기여했다는 친일정신을 보여주고 있다.
1. 왜 갑자기 식민지근대화론이 나왔으며 근대화란 무엇인가?
1) 권력투쟁의 선봉에 선 친일정신 계승자들
사회는 친일파와 친북좌파 논쟁으로 매우 치열하게 대립하고 있다. 친북좌파들은 자기들 뜻에 맞지 않으면 모두 다 친일파다. 그 근거는 매우 간단하다.
북한은 친일청산에 성공했고, 한국은 친일청산에 실패함으로써 여전히 친일파가 득세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것은 철저하게 거짓이다. http://blog.naver.com/qnwkkr/120055387601
사실 민족을 망치고 분단시킨 세력이 분명하게 북한이며 친북좌파이기에 친북좌파들은 수세를 역전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수 많은 이론과 논리들을 만들어 내면서 친일파로 몰아부치기, 친북좌파의 항일투쟁 부풀려 절대시 하기, 한국과 일본 미국을 엮어 반민족자로 내모는 논리, 민족주의 가로채기 등으로 자신들의 원죄를 감추기 위해 수 십년을 노력해 왔다.
그에 반해서 대한민국을 지켜왔던 민족주의와 보수주의는 독재라는 취약점으로 아킬레스건을 물린채 당연히 수호해야 할 반공논리를 계발하는 공부를 게을리 해왔다. (독재에 대한 정의는 각각 다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박정희는 혁명으로 보고 전두환은 군사반란으로 평가해서 가장 경멸한다. 김일성 김정일 왕조독재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지만 독재는 독재였던 것이다. 다만 북한의 왕조독재권력에 비해 너무나 혹독하게 비판받는다는 점에서 흑막을 의심한다.)
(이러는 사이 민주당은 2번에 거쳐 정권을 장악하는데 성공한다. 축하 해줬어야 하고 지지했어야 마땅하다. 당연히 민주당이 친북좌파성만 없다면 앞으로 최소한 3번은 더 권력을 장악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친일파 청산에서 열우당에게만 악독한 친일파 후손들이 다 있었다. 명분을 잃어 버린 것이다.
이러는 상황에서 권력을 상실한채 친일파란 똥물을 뒤집어 쓰면서도 정신 못차리고 안동 김씨 세도정치에 맛들렸던 경상도 패권세력에게는 크나 큰 수치였다. 민주당도 역시 국민정서를 거스른채 막연한 대북 퍼주기를 하면서 경제정책에서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당장 반격을 당하고 말았다.
이런 일련의 과정에서 한나라당=경상도 권력패권 추구 세력은 위기를 탈출하고자 개혁과 혁신적 정책안을 제시하면서 민심을 얻어가는데 성공하면서도 차마 불안감이 가시지 못해 친일정신 계승자들마저 껴안는다. 결국 한나라당이 친일정신 계승자들을 버리지 않는 이상 시달림을 계속해서 당하고 상당한 표를 잃게 될 것이다.)
수세에 몰리자 이제는 친일정신 계승자들마저 받아 들였다.
("한 번 관리가 되면 시중꾼이 구름같이 몰려들어 인민을 박탈하여 앞서거니 뒤서거니 짐바리에 가득 채워 돌아오니, 그러므로 관직을 갖는다는 것은 가장 유리한 직업으로 생각한다. 관직을 얻으면 살게 되는 것이요 얻지 못하면 죽게 되는 것이나 다름없으니 미치광이처럼 달려들어 아첨을 그치지 아니하고, 이름을 손상시키고, 법을 해치며 수단을 가리지 아니한다. 구하는 자의 수는 관원보다 많아서 시국을 뒤엎거나 타인을 쫓아내지 아니하면 벼슬자리를 차지할 수 없다" - 한국통사(박은식 1915)
사실 이 뿐만은 아니다. 당시 조선을 방문했던 한 영국 여성은 조선 관리들을 "흡혈귀"라고 적었을 정도로 권력에 대한 한국인들의 집요한 근성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특히 경상도 지역의 권력욕은 '경상도 패권주의'라고 불릴 정도로 사림 정신이 변절되면서 임진왜란 거짓보고와 왜군 복장으로 다른 고장 약탈을 거치면서 안동김씨 60년 세도정치를 비롯해 지금에 이르기까지 지독한 부패의 속성으로 남았다.
드러나지 않게 움직이는 수도권 토박이들의 '제2인자 권력욕' 또한 무섭다. 이들 수도권 권력야욕자들은 현대에 새롭게 등장한 비애국적 비민족적 권력의 화신들이기에 권력이 어떠한 속성을 가져도 상관없이 그저 2인자의 권력만 누리면 된다는 식이다.
바란다면 권력에 대한 욕망을 표현하고 이뤄나가되, 친일정신 계승자들을 껴안는 추악함마저 보이면서까지 시도할 것이 아니라 정도를 걸으며 추구하라는 것이다. 이 것이 바로 지역감정 해소에 도움이 되고 지역주의로라도 나갈 수 있는 길이 될 것이다.)
일제가 자신들의 식민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축적해 놓은 자료들이 정보화 사회가 되면서 풀려 몇 몇 관심있는 사람들이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얻자 호기심어린 시각에서 지식적으로 접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그러다가 80년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기존 학설에 대한 새로운 맛을 첨가하느라 식민지근대화론을 주장하기도 했지만 주목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친일정신 계승자들이 권력과 결합하면서, 또한 대한민국 주류인 반공주의에 접근하여 합류하는데 성공하면서부터 커다란 힘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즉 민족주의와 보수주의 입장에서는 뉴라이트 같은 단체가 등장하도록 방치한 것은 스스로 독약을 마시고 할복하는 것과 같은 패착이 된 것이다. 한국민의 의식 속에 흐르고 있는 것은 일제치욕을 잊지 않는 반일정신과 남침피해를 잊지 않는 반공정신이었는데도, 그만 친일정신 옹호라는 수렁에 몸을 던진 것이다.
(사실 대한민국 정당사를 공부하다 보면 차마 밝히지 못할 정도로 친일에 있어서는 어느 누구도 자유롭지 못하다. 북한 김일성도 속속 친일파를 등용했는데 김일성의 위협마저 받는 한국도 설계자와 기술숙련자가 필요하기에 더욱 당장 북한으로부터도 살아남기 위해 친일파를 이용하게 된다.
친일파 청산에서 정말 때려 잡아야 할 정당은 민주당이었다. 친일지주정당인 민주당, 그런 민주당 계열은 모른척, 털어버리는 척 하면서 친일파 청산을 요구하는 사람들의 욕구를 채워 나간다. 반면에 한나라당은 정작 친일파가 없으면서도 군사반란자 전두환의 민자당을 물려 받았다는 죄의식 때문에 항상 비굴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하긴 그런 권력 국물 근성 때문에 친일정신 계승자들마저 받아 들여 스스로 친일파 논쟁의 목졸림을 당하겠지만 정당사에서의 친일파 논쟁에 있어서만큼은 한나라당이 민주당보다 더 자유롭다. 그럼에도 한나라당을 지지할 수 없는 이유는 친일파 사망 이후 세대에서 친일정신 계승자들을 받아 들였기 때문이다. 억울한가? 그럼 친일정신 계승자들을 껴안은 뉴라이트를 멀리하라.)
친북좌파들의 친일파 공세를 차분히 사실을 밝혀 극복하기 보다는 어리석게 친일정신 계승자들의 식민지배 옹호론을 빌어서 맞불을 놓은 우를 범한 것이다.
덕분에 친일정신계승자들은 자신들의 세력을 확보하고 친일정신을 퍼뜨릴 좋은 장소와 기회를 얻었으며, 또한 권력과 친밀해 지는 놀라운 성과를 얻게 된 것이다. 대신 이들 권력을 위해 가끔씩 글을 써주면 되는 것이다.
2)조선과 일본이 생각한 근대화
역사적 관점에서 보면 르네상스 이후 기존의 역사는 역사가 아니고 현재(르네상스 이후)부터의 역사가 역사라는 것이다. 근대화 역사는 자본주의, 공산사회주의 등을 모두 포함하는 것으로서 결국 경제생산토대의 변화에 기인한 것이다.
1870년대 초반 이와쿠라 사절단의 구미 순방이후 일본을 문명개화라는 단어가 휩쓸었다. 근대화의 개념은 초기에는 문명문화라는 단어로 번역되다가 후쿠자와 유키치 등에 의해 문화는 빠지고 그 빈자리를 개화가 채우면서 문명개화라는 뜻으로 변하게 된다.
조선에서는 1880년 김윤식 등이 전통적 가치(문화)는 지키되 서양의 기술을 받아들여 부국강병의 길로 나가야 한다고 동도서기론을 주장했다. 후일 유길준 등은 일본의 문명개화론을 따라 근대화 단계를 야만 미개 반미개 문명으로 구분하기도 했다
일본은 도쿠토미 소호를 중심으로 일본의 전통을 철저히 부정하는 방향으로 나간다. 도쿠토미 소호는 일본의 문화보호를 주장하는 세력들에게 "나폴레온 법전을 선택하고 동시에 유교적 윤리를 유지할 수 있는가?"라고 반박했다. 이 것은 동양의 모든 것을 버리고 백인을 닮자는 탈아시아주의로 발전하게 된다.
나중에 일본이 서양에 대한 위기의식에서 나온 대립으로 치닫기 시작면서 또한 막상 국가권력구조 재편에 있어서 서구식 권력구조가 일왕제와 충돌하면서 일본식 탈아시아인 대동아공영으로 바뀌게 된다. 일본은 자생적으로 먼 길을 돌아 왔지만 조선은 힘이 미약해서, 미리 그 길을 걷고 있었어도 그 정신을 피워내지 못하고 일제의 만행에 피를 흘리고 말았다.
이 것은 다른 면에서는 서양이 걸어왔던 피눈물의 역사를 압축해서 뛰어 넘어야 했던 동양의 역사에서 일본은 간교함으로 기술을 얻으며 국민들을 희생시키는 대신에 조선은 힘이 약해 변화 자체를 시도할 수 없는 상황에서 (매국녀 민비만 빼면) 국민들의 희생을 최소하려다 보니 외압에 의해 받아 들여야 했고 조선은 망하고 말았다.
동양의 근대화에 대한 염원은 허버트 스펜서의 사회진화론을 국가간 경쟁에 대입한 중국 변법파의 양계초가 쓴 신민설(1902)에 모두 근거하고 있다고 할 정도다.
조선에서는 거의 모든 개화 학교에서는 신민설을 가르쳤으며, 내용은 생존을 위한 자강이었다. 또한 신채호도 신민설의 영향을 받아 국가(대아)를 위해 개인(소아)이 희생하자는 주장을 했다.(사실 신채호는 후일 사회주의적 무정부주의자에 가까웠다.) 신민설에 따라 소아를 대아로 이끌어 갈 영웅을 갈망하게 되고, 이 영웅열망은 조선의 독립과 부강을 추구해 열강패권에 참여하자는 소망으로 이어져 교육과 언론 등에서 다뤄졌다. 이러한 시대적 열망은 학교에서 문약망국론으로 이어져 체육을 장려하는 운동회가 퍼져나갔다.
2. 토지에 관한 식민지근대화론의 허구성
먼저 뼈아프지만 다른 이야기 한 귀절 인용해 본다.
일반 백성은 관원들을 매우 두려워 하지만 "일단 외국인에게 고용이 되고 나면 매우 우쭐되며 교만해져서 본래의 모습을 볼 수 없게 된다" - 조선잡술(허오)
(사실 이런 썩어빠진 정신은 지금도 부유층을 중심으로 영어 우월병에 동조하면서 외세 의존적인 추악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민족성이 없는 외국어 능력은 그저 기계일 뿐이고, 단순한 그 외국어 능력을 갖춘 인간기계가 한국을 움직이는 권력이 되면 한국은 망하게 된다.
지금 대한민국엔 외국어 하는 인간기계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정신 제대로 박혀 한글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창조적 지도능력을 갖춘 한국 태생의 한국 교육만을 받은 순혈 한국인이 필요하다. 공장 생산은 기계가 대신할 수 있지만 대한민국 영위는 외국어 잘하는 인간기계가 대신할 수는 없다.)
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에서 1911년 11월 지적장부 조제 착수를 시작으로 1912년 3월 조선부동산등기령과 조선민사령, 동 8월 토지조사령, 1914년 3월 지세령, 동 4월 토지대장규칙, 1918년 5월 조선임야조사령 등을 거치며 조선의 토지를 장악하게 된다.
이 결과 조선시대의 전통적인 소유권(주로 구두로 정한 경계를 인정하던 방식)과 경작권(도지권=논 주인은 아니더라고 대를 이어 그 땅에서 농사지을 수 있는 권리)이 무너짐으로써 소작농의 급작스런 팽창을 가져오게 된다. 겉으로 보기에는 지주와 소작농이 보다 확실하게 구분된 것처럼 보이지만 소작농들은 영구적인 경작권을 상실한채 년단위 단기계약으로 내몰려 생존권 박탈에 이르게 된다.
총독부가 전체 농경지의 약 10%, 전체 임야의 약 60%를 국유지로 편입하는 등 전국토의 40% 정도를 몰수 했다는 주장도 있다. 농경지의 경우를 보면 미군정 때 일본인들의 논을 귀속재산으로 환수한 신한공사를 중심으로 1946년 실시한 45년도산 공출에서 쌀 공출이 목표량의 12.4% 밖에 달성되지 못했으며 생산량의 5.3%였다는 점에서 일반 농민들의 참여가 거의 없는 상태에서 신한공사 위주로 진행된 것을 보면 타당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일제의 착취는 나중에 만주가 해금되면서 조선인이 대거 만주로 이동하게 되는 배경이 된다.)
식민지근대화론자들은 경작면적의 증가를 들어 일제가 농민들에게 혜택을 주었다는 어처구니 없는 논리를 펴고 있다.
"시장경제를 통해 쌀과 노동력이 일본으로 흘러간 대신, 일본에서 자본이 들어와 농장을 차리고 공장을 지었다. 한국과 일본 사이의 자금과 물자의 총순환은 일본으로부터의 지속적인 자본 유입을 특징으로 했다"는 것이다.
그 예로 군산 간척지를 들고 있다. 형식상으로는 무의인도(현재의 옥서면 옥봉리)까지의 6km와 어은리에서 알산도(미성동 옥선마을)까지 모두 14km의 방조제를 축조하여 750만평를 간척하고 9.6만평은 옥구저수지로 하고 5.4만평은 수로와 도로 등으로 사용하는 등 15만평을 제외한 600만평을 농경지로 간척한 것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이 중 3백만평을 일본 농업이민 1,630명에게 할당하고, 다른 300만평에 조선인 소작인들을 배치했지만, 시간이 가면서 전북지역에서는 구마모토 헤이료(熊本利平)같은 일본인 혼자서 논만 1천만여평을 소유하면서 조선인 소작농을 2만명이나 부렸을 정도로 결국 일본인 농장주 지원정책으로 드러났다.
실제로도 전주 김제 정읍 익산 농민들의 94%이상이 소작농이었고, 전북지역은 75.9%가 소작농이었다.(조선은행 1948) 문제는 일제의 토지수탈 이후에 생계조차 잇지 못하는 소작농이 증가했다는 점이다. 조선시대에 유지되었던 도지권(경작권)이 붕괴되고, 일제 농장주들의 착취, 토지권이 소수에게 집중됨으로써 당연히 조선농민들은 더욱 자살하고 싶을 정도의 생을 연명하게 된다.
일본의 토지수탈은 다른 측면에서 조선의 자본을 수탈해 가고 있었다. 토지조사사업이 완료되자 토지세 부과 대상은 239만9842정보에서 434만2019정보로 늘어 났으며, 징수액은 624만5000원 정도(1911년)에서 1115만7000원정도(1920년)로 증가했다. 즉 쌀 뿐만 아니라 이렇게 조세에서도 수탈해 갔던 것이다.
여기에다 1940년도부터 시행된 공출제도는 농민수탈을 극도로 자행하게 했다.
공출해간 것은 쌀 뿐만이 아니라 보리, 밀, 대두, 소두, 녹두, 밤, 감자 등 농산품과 소, 돼지, 닭, 토끼 등 축산품과 목재, 장석, 솔가지, 목탄, 산채 등 임산품과 마포, 면포, 건포 등 섬유품, 백금, 금, 은, 비녀, 가락지, 전유 등 금속품 등 총 80여가지에 달했다고 한다.
일제가 생산비도 안되는 가격으로 식량 강제공출을 계속하자 농민들이 아에 농사를 포기하면서 해방직전까지 40여만 정보의 논이 사라져 버렸다. 이 것은 해방이후에도 여전히 식량난으로 나타났다. 특히 남부에서 경작지 감소가 심각했는데 전체적으로 1919년 농가 1호당 경작면적이 1.696정보에서 1943년 1.250정보로 줄어 들었다는 사실을 볼 수 있다.
여기에다가 조선인 1인당 쌀 식사량에서도 일제의 쌀 수탈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알게 해준다. 1910년 1인당 쌀 소비량이 약 0.71석이었는데 1919년 0.62석, 29년 0.44석, 38년 0.77석, 44년 0.56석으로 줄었다.
(일본은 조선에서의 식량착취를 일찍부터 시작할 수가 없었다. 1907년 12월~1909년6월 사이에 의병들이 연인원 12만1360명이 나서 일본군과 3714회의 전투를 벌이고, 1907년~1911년 사이에도 총14만명이 의병투쟁을 전개했기 때문이다.)
한편 일본은 국내에서 심각한 식량부족 사태에 직면해 있었다. 강화도 조약 이후 청국과의 무역규모와 흑자 모두를 몇 년만에 앞지를 정도로 조선과의 교역에서 (서양의 면직물 중심으로 고가에 팔고 쌀과 면화 같은 원자재 최저가 수입으로) 막대한 이익을 남기던 일본도 열도의 식량사정은 해결할 수 없었다.
일본의 피비린내 나는 막부투쟁을 거치면서 생산된 시골낭인들과 더불어 일본이 공업화를 진행하면서 농사짓던 시골의 젊은이들이 도시로 몰려들면서 농경지의 수확량은 점점 떨어져 갔다. 더구나 쌀 도매상들이 가격담합으로 쌀 가격을 폭등시키자 더욱 일본 내에서는 쌀 부족을 느끼게 된다. 1918년 도야마 현에서 어부들이 쌀값 인하를 요구하며 쌀가게를 습격해서 방화한 것을 시작으로 쌀폭동사건이 발생했다.
일본은 열도에 대한 쌀 공급을 늘리기 위해 1920년부터 1925년까지, 2차 계획은 1926년부터 1934년까지 조선에서 산미증식계획을 실시한다. 이 계획에 따라 일본 열도에는 쌀이 풀렸지만 이로 인해 오히려 일본산 쌀가격 폭락사태가 발생하고, 조선인들은 먹고 살 길을 찾아 만주로 떠나는 사태가 발생하는 등 조선에서 식량부족이 야기되자 1934년에야 중단했다.
그럼에도 세계1차대전 과정에서 교전국들에게 양다리를 거치며 물건을 팔면서 공업노동력 차원에서 점점 농촌 젊은 인구가 주는 과정에다 세계2차대전에 참전하게 된 일본은 또다시 1940년 쌀 공출제도로 조선의 농민들을 죽음으로 몰아 넣었다.
쌀 수탈의 역사는 항구의 역사에서도 알 수 있다. 일찌기 지방에 은행이 세워질 때 부산과 목포를 중요시 할 정도였는데, 특히 쌀을 수탈해가던 항구들인 군산과 목포항은 일제가 패망하고 광복이 되면서부터 몰락했다는 사실에서도 얼마든지 일제의 잔혹한 토지수탈이 이뤄졌는지 짐작할 수 있다.
3. 공업에 대한 식민지근대화론의 허구성
당시 서구의 조선에 대한 시각은 "조선은 결코 혼자 설 수 없을 것이고 일본은 조선을 먼저 온 자의 먹이로 남겨둘 수 없을 것"이라고 했던 영국 타임즈지에 잘 나타나 있다. 1893년 조선을 방문했던 영국정치인 커즌은 "이 작은 나라는 독립을 유지하기에는 너무 부패했고, 독립을 통해 이득을 얻어내기에는 너무나도 쇠약했다."라고 하고 있다.
서구의 시각에서는 러시아의 남진이 가장 큰 걱정거리였으며, 조선은 스스로 독립할 힘이 없다는 판단아래 러시아의 조선지배를 허용하느니 힘의 균형을 위해 일본이 지배하도록 해서 러시아의 남진을 저지하는게 더 낫다는 판단했다. 이런 시각은 영일조약(1902년) 이후 영국이 일제의 조선지배를 식민지가 아닌 보호령이라고 공식화 했다는 점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이런 면에서는 영국이 카이로회담에 참석해서 조선의 독립에 찬성했다는 것으로 보면 이승만의 독립외교노력이 헛되지만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러시아의 동진정책이 아닌 한 자유로웠던 미국은 조선을 이용해 러시아의 남진정책을 구태어 피를 흘려가며 막을 필요가 없었기에 조선은 그만큼 중요한 외교정책 대상이 아니였으며, 적어도 일본이 미국에게 적대감을 드러내기기 전까지는 조선의 일제 식민지배 사태에 관여할 까닭이 없었다.
일본은 세계1차대전 동안 참전국들에게 물건을 팔아 착실하게 부를 쌓아 나갔다. 1914년 6억원선이었던 무역규모는 10여년 사이에 21억원을 넘어섰는데, 무역수지 흑자로 절반을 채웠다. 이로 인해 일본내 기계공업은 8배나 성장하게 되고, 금속공업 또한 6.5배나 성장한다.
이 의미는 일제 초기 일본의 자본력으로는 조선에까지 진출하기 힘들었다는 것이다.
조선총독부는 회사령을 통해 공장설립에 있어서 허가제와 언제든지 폐쇄명령권을 유지해서 조선민족자본이 거대화 하는 것을 막았다. 그렇지만 일본의 부가 어느 정도 축적되자 1920년 4월에 허가제에서 신고제로 바꿔서 일본의 자본이 조선에서 독점자본권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준다.
여기에는 군사적으로 만주를 지배함으로써 조선은 일본과 만주를 동시에 지원해줄 공급기지의 역할이 더 주어 졌을 뿐이지만 그 과정에서 미국에게 망해서 그 꿈은 사라져 버렸다.
(실제 은행 설립에 있어서도 조선계 은행들은 모두 일제의 투자가 밀려들던 시기에 영업실적 하락으로 망했다는 공통점이 있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그 이유는 매우 명확하다. 조선에 있던 자본은 거의 대부분이 일본독점자본이었기 때문이다. 즉 조선인 자체의 자본력이 총독부의 억압으로 자라지 못했다.)
1920년 2087개에 머물던 조선 내 공장수가 1차대전을 통해 쌓은 일본 잉여자본의 독점자본화로 인해 1928년 5342개로 갑자기 증가하게 된다. 이런 수치통계를 가지고 친일정신 계승자들은 더 나서서 1911년~1938년까지 조선의 경제성장율이 연평균 3.7%를 이뤘으며, 농업생산인구 비중이 줄고 (공업인구 비중이 무려 41%였다는 터무니 없는 근거까지 제시하면서) 공업생산인구 비중이 늘었다라고 하고 있다.
조선에 진출한 공업은 주로 경공업 중심에 불과했다. 전체 공업비중에서 식료품공업이 63.5%를 차지하고, 방직업이 10.9%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식료품공업은 다름아닌 곡창지대에 일제가 쌀공출을 위해 세운 정미업이 대부분이었다.
더 중요한 부분은 전체 조선의 공업자본에서 일본의 자본은 95.4%나 달했고, 조선인 자본은 총독부의 회사령으로 인해 투자와 성장이 억압되다가 일본 자본이 힘을 가지자 이 조치가 풀린 다음에는 겨우 4.6% 밖에는 차지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따라서 흥남의 질소비료공장은 조선인 쌀을 더욱 수탈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수풍의 수력발전소는 만주국 개발5개년계획에 따른 것에 불과하며(중일전쟁 발발후 승리가 확인되자 시작한 공사), 진남포의 공업단지는 조선의 금을 캐내 녹여서 수탈해 가던 곳에 불과한 것이었다.
일제가 조선에 총투자한 자본이 60~70억엔이라는데 조선에서 일제가 수탈해간 자본은 통계에서만 들어난 것으로도 302억엔이고, 물건으로 가져간 것만 해도 140억엔이었다. 이 것은 식민수탈 기간에 추정한 조선 GDP 550억엔의 80%이상을 빼앗아 간 것이다.(한국근현대사와 일제의 식민지 지배-권태억)
일제의 수탈은 심지어 조선인들의 솥단지 뚜껑을 쇠가 아닌 나무로 바꿔 쓰도록 했을 정도이고, 일본군의 겨울외투 내피용으로 개들을 때려잡아 삽살개가 멸종되도록 하기까지에 이르렀다.
"일제가 조선에게 준 것은 천황폐하 만세이고, 조선이 잃은 것은 생존터전이다. 그럼에도 일제가 가져 간 것은 껍데기이고, 우리가 지켜 낸 것은 민족정신이다." - 개인적인 표현이다.
이 껍데기를 사랑하는 친일정신 계승자들이 권력에 들러 붙어 민족혼을 죽이려고 하고 있다. 친북좌파들의 허황된 친일파 논란에 휩싸여서는 안된다. 친일파는 김일성 동생 김영주 빼고는 다 죽었다. 남은 것은 권력에 기대어 뜻을 펴려는 친일정신 계승자들을 척결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