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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광주민주화운동과 북한군 특수부대 침투라는 거짓

대한인 2013. 12. 1. 06:16

 

들어가는 글

 

왜 전두환은 군사 반란자인가?

 

혁명과 쿠데타는 종이 한 장 차이 밖에는 없다. 그렇지만 그 종이 한 장의 차이는 무게로 따질 수 없을 만큼 크다. 아래에서 위를 치든, 위가 위를 치든, 옆이 옆을 치든지 간에 모두 명분을 내세우지만 폭력을 동원해 헌법을 위배하는 행동임에는 다르지 않다. 오직 구분점은 국민 구성원 다수의 지지를 받느냐 하는 점에서 쿠데타와 혁명으로 갈리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혁명이 3번 일어 났다고 보는데, 둘은 4.19시민혁명과 5.16군사혁명으로 권력이 매개된 정치혁명이었고, 나머지 하나의 혁명은 국민들 스스로가 오랜 시간에 거쳐 점진적으로 사회환경을 변화 시켜 온 사회혁명이다.

 

전두환의 행위는 그저 동일체제 안에서 지배권력 장악만을 목적으로 함으로써 명분도 없었고 대중의 지지마저 갖추지 못했기에 명백한 쿠데타였으며, 그는 반란자였다. 전두환은 정치활동을 금지하였으며, 군대를 동원해 국민을 학살했으며, 반대파를 기습체포하고, 정부요인을 불법체포와 감금하고, 언론기관을 장시간 점령하여 검열하는 등 온갖 방법을 동원해 권력을 탐했다.

 

 

<12.12 반란자들의 쿠데타 후 정승화 제거기념 12월 14일의 기념사진 촬영> 

 

12.12 반란사태

 

박정희 서거 직후 계엄이 실시되면서 계엄사령관을 겸직하게된 육군참모총장 정승화는 군대를 부패하게 하던 사조직- 특히 대표적으로 부패권력집단이었던 하나회를 분쇄하기 위해 12.13 행정부 개각을 단행하면서 동시에 전두환을 동해안경비사령관으로 발령내려고 했다.

 

국방부차관 김용휴가 전두환에게 정보를 빼돌렸고, 전두환은 개각 전날인 12일을 쿠데타 거사일로 정했다.

 

"노 장군(노태우)에 의하면...(정승화를 제거해야 겠다고)... 전 장군(전두환)의 결심이 이미 11월 초에 확고히 섰으며... 12월 12일은 부총리였던 신현확씨가 국무총리에 내정되어 다음날 13일에 국무회의가 열려 새로운 내각의 구성을 논의하게끔 되어 있었다. 따라서 전두환 장군은 개각 전날 정 총장을 연행 수사하고, 그 결과가 국무회의에 연결, 군의 인사에 반영된다면 10.26사건 수사는 수사대로 완결되고 육군참모총장의 자연스런 교체가 가능하여 군의 신뢰와 단결을 가져올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 5공화국 전사 3편, 보안사 1982

 

12월 12일 1차 쿠데타를 한 전두환에게는 동지라고는 오직 같이 총을 든 반란군인들 밖에는 없었다. 적어도 박정희의 봉기는 한강을 건넌 당일 미8군 정보대에서 서울 시민들을 대상으로 한 비밀조사에서 조건부 지지까지 포함하여 70% 정도가 찬성한데서 알 수 있듯이 정치적 반대파를 제외하고는 4.19시민혁명정권의 무능력과 (친북좌파들의 연방제 통일난동으로 인한) 사회불안으로 힘겨워 하던 국민들은 저항하지 않고 오히려 환영했다.

 

반면에 전두환은 아직 대통령 권력을 탈취하지도 진급하지도 않았고, 여전히 같은 소장 계급에 머물러 있었지만 국민들의 반대는 미리부터 크게 일어나고 있었다. 처음부터 전두환은 국민들에게 환영받지 못했다.

 

이제와서 전두환마저 보수주의 정당성에 이용하려고 보수주의진영에서 보수를 가장한 극소수 문외한들이 설치고 있지만, 아무리 후세의 평가에 의해 역사평가가 달라질 수 있다고 해도 역시 그 당시 국민들의 반전두환 정서가 더 정당했다는 점이 가장 중요한 평가요소가 되기에 전두환은 끝내 반역자로 기록될 수 밖에 없다. 더구나 전두환은 권력 찬탈후 보여 준 역사적 성과가 없다.  

 

서울의 봄

 

서울의 봄은 모든 사람들을 설레이게 하는 가운데 특히 기존 야당 정치인들에게는 축복이 내려진 듯 했다.  정치적으로도 대통령 최규하가 5월6일 국무회의에서 정부의 정치 발전 일정은 순조롭다고 강조해야 했을만큼 새로운 정치 환경이 도래할 것이라는 자신감에 차 있었다.

 

5월 7일에는 국민연합(윤보선, 함석헌, 김대중)이 민주화촉진국민선언문 발표를 통해 계엄령 해제, 정부의 일방적 개헌시도 중단, 신현확과 전두환 퇴진, 정치일정 단축 등을 요구했다.

 

학교들도 역시 79년의 기나 긴 겨울방학이 끝나고 80년 봄 다시 개강을 맞으면서 기존과 다르게 역동적인 활기로 가득차 있었다. 강제적인 학도호국단이 해체되고, 3월 28일 서울대 총학생회의 출범을 시작으로 직접선거에 의한 총학생회가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학원민주화' 열기가 급속하게 퍼져 나가고 있었다.

 

4월 들어 21개 대학에서는 부패한 총장 학장들을 퇴진 시키려는 운동이 펼쳐졌고, 24개 대학에서는 어용교수 퇴진을, 12개 대학에서는 재단비리 척결을, 11개 대학에서는 재단의 교육시설 투자를 요구하는 운동이 전개됐다. 4월 24일부터는 서울지역 대학 361명의 교수들이 부패한 사학재단 경영자 퇴진을 요구했다.

 

학내 안정화에 치중하던 대학생들은 정치에도 시야를 넓혀 전두환 신군부의 정치 개입이 민주화의 가장 큰 걸림돌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학내 시위를 전개하기 시작했다. 한때는 계엄령 해제, 전두환과 신현확 퇴진, 노동3권 보장 등을 정부가 실천한다면을 조건부로 내걸어 기존의  병영집체훈련 거부를 중단하기도 했다.

 

5월 1일에는 서울대 총학생회가 철야 토론을 통해서, 5월 10일에는 고려대에 열린 전국 23개 대학 총학생회장 모임에서도 비상계엄 즉각 해제, 전두환과 신현확 퇴진 등을 요구하는 결의를 했다.

 

5월 7일 외국어대생 800여명의 가두시위를 시작으로 서울지역 대학은 학내 문제에서 전두환 퇴진이라는 정치 문제로 방향을 본격적으로 선회하게 된다.

 

5월 13일 연세대가 주체가 된 서울지역 6개 대학생들 2,500여명이 세종로 일대에서 가두시위를 본격화 하면서 더욱 확산되어, 5월 14일에는 서울지역 27개 대학생들 7만여명이 서울 시내 가두 시위를 밤 10시 넘어서까지 벌였다.

 

5.17 전국계엄확대라는 현대사의 비극이 발생하기 이틀 전인, 아니 광주에서 대량학살이라는 반란자 전두환의 학살이 시작되기 3일 전인 5월 15일 오후 2시에는 서울지역 35개 대학생 10만여명이 서울역 광장에 집결하여 계엄해제, 전두환 퇴진 등 민주화 요구 시위를 이어갔다. (이 때 학생 시위대가 현장에서 빼앗은 시내버스 1대가 돌진하여 전경 1명이 사망하고 4명이 부상 당하는 불행한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국민여론이 이처럼 거세지자 5월 15일 밤 7시 50분에 국무총리 신현확이 특별담화를 통해 연말안으로 개헌안을 확정하고 81년 상반기에 대선과 총선을 실시하여 정권을 넘기겠다는 약속을 발표한다.

이에 따라 길거리로 몰려 나왔던 학생들은 이 담화를 믿고 '서울역 회군'이라고 불릴 정도로 신속하게 시위를 중지하면서 5월 15일 자정에 서울지역 23개 대학과 지방 24개 대학 총학생회장 모임에서 수업에 복귀하기로 결정했다.

 

<충정작전 표지, 계엄확대전 미리 내린 준비명령, 전두환 중장진급 의결서, 군부통치반대하는 국민들>

 

1. 국민대학살의 서곡, 전두환의 5.17 계엄확대 만행

 

1) 5.17 비상계엄의 실체

 

5월 8일 계엄사령부(이희성)의 긴급 계엄위원회(황영시)가 열린 회의장에 갑자기 중앙정보부(전두환)에서 '학원대책방향'이라는 문건을 보내왔다.

 

1단계(5.7-5.10): 문교부장관 경고담화 발표 및 학생들의 교외진출 저지,

2단계(5.11-5.13): 주동자 색출 및 범법자 처벌,

3단게(5.14-5.16): 대학 휴교 및 주동자 등 일제 검속 및 계엄사령관 담화 발표,

4단계(5.17-): 비상대책 강구와 적지 조치를 한다는 것이 내용이었다. - 긴급계엄회의 결과보고, 보안사 1980.5.8

 

학원대책방향이라는 문건을 더 살펴보면 이미 1단계 조치에서도 "사태 악화에 대비 군 병력 출동 태세 완비 등 시가 집단 시위난동 방지를 위한 사전 대비태세 완비(내무,계엄사,중정)"라고 제시함으로써 이미 군대를 동원한 국민 학살을 예고하고 있었다.

 

학생들의 길거리 시위가 5월 7일 처음 발생했기 때문에 이 문건은 5월 8일 계엄위원회에 제출되기 훨씬 이전에 작성됐다는 점에서 전두환의 국민 학살 음모 진행에 더 놀라게 된다.

 

또한 육군본부 작전참모부(김재명)가 작성한 문건 '학생시위 대처 방안'에서도 군대 투입을 준비해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1단계(5.7-5.10): 문교부 담화문 발표와 군 투입 준비,

2단계(5.11-13): 학교 자진휴교 유도하고 시위 주동자 신상을 부모에게 통보하며, 포고령 발표,

3단계(5.14-15): 강제 휴교, 시위 주동자 색출하고 계엄포고,

4단계(5.17): 계엄군 투입/으로 명시되어 있다. - 계엄일지, 보안사 1980.5.8

 

이렇듯 전두환은 시위가 격해져서 공수부대를 투입한 것이 아니라 아에 학생들이 길거리로 나서기 이전부터 철저하게 애초부터 아에 군대를 투입하려고 작정하고 계획을 세워 놓고 있었다.

 

이러한 계획들은 실제로 5월 17일 밤9시40분: 비상국무회의, 비상계엄 전국확대 의결, 23시00분: 민주인사, 복적생, 학생운동 지도부 등 예비검속 실시 24시 00분: 비상계엄 전국확대, 각 대학에 계엄군 진주 및 학생 연행 등으로 실행됐다.

 

즉 발생하지도 않았던 학생 가두시위를 빌미로 미리부터 계엄군을 풀어 놓기 위한 군사작전을 세워놓고서 5.17전국비상계엄의 명분으로 삼았던 것이다. 5월16일 오전 10시에 열린 계엄위원회 회의에서 조차도 전두환 지지 참석 군인들은 학생들이 폭동을 일으킬 것이라면서 군대를 투입한 강경 조치를 거듭 주장했다. - 5.18 수사기록, 서울중앙지검, 701보안부대장 김병두

 

2)북한 남침설의 실체

 

심지어는 북한의 비정규전 부대가 침투했을 때 국가가 멸망할 것이라는 이유를 들어 5.17 비상계엄과 공수부대 투입이 필요하다고 적고 있다. (5.17 전군 비상계엄 배경, 보안사 1980)

 

북한 남침설은 중앙정보부(전두환)의 2차장 김영선이 일본 내각조사실의 에비스라는 한반도 담당반장에게서 입수했다며 전두환에게 첩보를 보고한 것에서 시작됐다.

 

'북한은 한국 정부가 80년 4월 중순경에 김재규를 처형할 것으로 예상하고 4월 중순 김재규 처형에 맞춰 남침을 감행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김재규 처형이 지연됨에 따라 남침을 연기하였다가 마침 5월들어 학생과 노동자 소요사태가 격화되자 최고조에 이를 것으로 예상되는 80.5.15-5.20 사이에 남침을 감행하기로 결정했다'는 내용이다.

 

그 근거로 김일성이 유고에서 오진우를 대동해서 소련 브레즈네프를 만났고, 조선일보의 주일파견 이 모 기자가 북한군이 휴전선에 배치 완료됐다고 일본 방위청에서 들었으며, 미 7함대 소속 항모 1척이 서해상으로 이동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미 항모는 아에 이동없이 한미연합방공훈련에 참가하지도 않고 그냥 일본 요꾜스까에 정박중에 있었다.)

 

관련 첩보로 첨부된 내용에는 정작 한국군이 수집한 북한군 동향은 북한육군에 경계강화 명령이 내려지기는 했지만 평상시와 전혀 다름없이 이동이나 전개 징후가 없는 정상을 유지하고 있다고 되어 있다. 미국도 김일성이 여전히 루마니아에 체류중이고, 북한군에 특이징후가 없기에 일본측 제보는 신빙성이 없다고 했다.

 

이미 79년에도 성탄절 남침설(일본 외무성 동북아과장), 80년 1월 새해 남침설(주일 중공대사관 무관), 80년 2-3월 남침설(아세아 친선교류협회 업무국장, 주일 중공대사관 직원), 80년 5월 남침설(일본 공안조사처, 중공 신화사 기자, 대만 정보기관), 80년 가을 남침설(일본 공안조사처, 일본주재 중공기자)이 계속 재생산 확대되고 있었다.

 

당연히 육본 정보참모부는 남침일자에 전혀 근거가 없기에 가치 없다고 폐기시켰다. - 북괴남침설 분석, 육본 정보참모부 1980.5.10

 

이런 북한의 남침설에 대해서 5월12일 계엄사 일반참모부회의에서 황영시(육참차장겸 계엄사 부사령관)는 "북괴가 남침준비를 위해 병력전개를 완료했다는 일본의 첩보는 벌써 6회나 거짓말을 하고도 체면이 선다는 것인가? 혹시 그들의 고등술책일 수도 있다"고 짜증을 냈다. - 일반참모회의록, 계엄사령부 1980.5.12

 

그럼에도 이러한 북한 남침설을 위협적으로 민주화 운동 참여 국민들을 학살한 것에 대해 정당성을 부여하는 도구로 끝까지 활용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유혈진압 이후 육군본부에서 작성한 '소요진압과 그 교훈'에서는 한국 내부의 민주화 운동에 대한 평가를 '민주화 운동 지지자들은 북한의 선전 선동과 대남공세에 따라 혼란을 초래했으며, 따라서 공수부대를 동원한 충정계획은 정당했다'고 적고 있다. - 소요진압과 그 교훈, 육군본부 1989


3) 국민학살을 위한 충청작전 준비

 

80년 서울의 봄이 오고, 각 대학은 막 개강을 시작하던 시점인 80년 3월4일~3월6일까지 수경사에서 제1차 충정회의가 열렸다. 회의 목적은 수도권 소요사태 대비태세 점검이었다. 수도권에서 다중의 집단이 폭도활동을 하면 군과 경찰이 공세적으로 진압해야 한다는 것이 내용이었다.

 

연이은 충정계획에 따라, 학생들이 학내민주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을 때, 전두환은 이미 학생들을 폭도로 규정해놓고서 군대를 투입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각 군에서는 4월부터 전국 각지로 군대를 이동시키기 위한 준비에 들어가 4월 12일에는 특전사령부는 수도권 지역 충정작전 출동을 위한 차량 배치를 육참총장에게 요청했다. -충정작전 출동을 위한 긴급 소요 차량 건의, 작전 331.12, 특전사령부

 

육군본부 작전교육참모부는 "공지(공군과 육군) 협동작전으로 조기에 소요군중을 무력화 하여 병력 및 장비의 피해를 방지하고 신속한 작전종결을 보장"해야 한다고 했다. - 소요진압 공중지원 방안 연구, 육군본부 1980

 

실제로 제1항공여단에는 5개 항공조가 편성됐으며, 특전사는 화학탄과 화염방사기 및 병력을 1항공여단에 지원하며 각급 부대는 공격용 헬기 500MD 운용계획수립과 훈련을 실시했다. - 작전명 제80-8호, 1군사령부 1980.4.20

 

9공수여단은 수도군단으로 이동 배속됐으며(육본 작전명령 제12호-80호), 해병1사단을 부산 지역의 진압 계엄군으로 동원을 지시했다가 해병1사단 2개 연대 규모로 축소시켰다.(국방부 작전전 제214호, 1980.5.6, 작전전 제225호 1980.5.9, 육본 작상전 제0-186호 1980.5.9).

 

제13공수특전여단은 5월7일에, 제11공수특전여단은 5월8일에 강원도 화천 오음리에서 경기도 김포 1공수여단에 합류했다. 20사단은 5월 15일에 경기도 양평에서 서울 효창공원으로 이동 배치됐다. - 상황일지, 계엄사령부 1980.5.8.오전8시

 

3군 사령부 방송차량 7대가 특전사에 배치됐고, 1군사령부 장갑차 26대는 수도경비사령부에 지원됐고, 3군사령부 강갑차 24대는 수도사단으로 이동 배속됐다.

 

이처럼 전방에 있어야 할 대규모 부대들이 속속 민간학살을 위해 수도권으로 몰려 들면서 5월14일 오전8시50분을 기해 전국 각 부대에 육본 소요사태 진압부대 투입준비 지시를 내리면서 오후 1시에는 소요진압본부가 설치됐다. - 충정작전, 육군본부 1980

 

5월15일에는 12억원(1,191,125,000원)을 특전사와 화학부대 그리고 수경사에 지원하기로 결정했으며, 따로 특전사가 요청한 진압봉 등의 시설자재 지급을 승인했다. - 참모회의 의제, 육군본부 1980.5.15

 

아직도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가 국무회의 안건으로 올려지기 이전(국무회의는 5월 17일 밤9시 42분 경에 열렸다)에 벌써 5월17일 오후4시50분에 육본에서는 모든 부대에 비상계엄 선포에 대비해 정위치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작전상황일지, 육군본부 1980.5.17

 

5월 17일 오전 11시 40분에 국방부 제1회의실에서 열린 전군주요지휘관회의(44명)에서는 온통 군대의 정치개입 필요성이 언급됐다.

 

특전사령관 정호용은 "국회가 개원되면 국가를 오도할 사례가 많아진다. 우리나라 장래가 극히 염려된다"고 발언했다. 국방부장관 주영복은 "정치 및 중도단체의 문제인물을 완전히 제거해야 한다. 이 시점에서 요망되는 것이다... (불순분자가) 전국에 200~300명 될까요? 그들을 뽑아버리면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 여러 분의 의견을 요약하면 현 정세 하에서 전국비상계엄선포 건의로 본다"라고 발언했다. - 전군 주요지휘관 회의록, 보안사 1980

 

하지만 광주민주화 투쟁이 가열되자, 광주시민 전체를 전국에 불순분자가 겨우 200~300명에 불과하다면서도 불순분자도 아닌 형법상 반역자를 의미하는 이적자들로 이름지어 아에 적으로 규정지어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내세운 전두환, 정당한 정치활동을 금지시키며 국회를 탱크로 무력점령>

 

실제로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포고와 동시에 모든 정치활동은 금지됐으며, 5월 18일이 되자 김대중, 김종필  등 26명의 주요 정치인들은 끌려가고, 김영삼은 주택감금상태에 놓이게 되고, 국회는 탱크에 둘러 쌓인채 마비되었다.

 

회의를 마친 그 날 밤 수경사 무장병력에게 에워 쌓인채 5월 17일 밤9시 42분 경 개회된 국무회의는 찬반토론 없이 8분만에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를 결의하고 다음날 계엄포고 제10호를 발표한다.

 

(계엄포고 10호의 국민자유 압살 주요 내용만 적어본다.)

 

포고문

1. 1979년 10월 27일에 선포한 비상계엄이 계엄법 제8조 규정에 의하여 1980년 5월 17일 24시를 기하여 그 시행지역을 대한민국 전 지역으로 변경함에 따라 현재 발효중인 포고를 다음과 같이 변경한다.

2. 국가의 안전보장과 공공의 안녕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가. 모든 정치활동을 중지하며 정치목적의 옥내외 집회 및 시위를 일체 금한다.
나. 언론 출판 보도 및 방송은 사전 검열을 받아야 한다.
다. 각 대학(전문대학 포함)은 당분간 휴교조치한다.
라. 정당한 이유 없는 직장 이탈이나 태업 및 파업행위를 일체 금한다.
마. 유언비어가 아닐지라도 1)전.현직 국가원수를 모독 비방하는 행위 3)공공집회에서 목적 이외의 선동적 발언 및 질서를 문란시키는 행위는 일체 불허한다.

본 포고를 위반한 자는 영장 없이 체포.구금.수색하며 엄중 처단한다.

1980년 5월 17일 계엄사령관 육군대장 이희성


4) 대국민 학살작전 충전작전 화려한 휴가 돌입

 

5월 18일 00:00시를 기해 내려진 전국확대계엄에 따라 전국 201곳의 지역에 2만3천8백6십명의 계엄군이 배치됐다.

 

(물론 실제 국민탄압은 하루 전날인 5월 17일 오후1시에 열린 전국 보안부대 수사과장 회의에서 대공처장 이학봉이 예비검속을 실시해 체포를 개시하라는 지시가 내려져 진행됐다.(제5공화국 전사, 보안사 1982) 회의 직후 광주에서는 505보안대에 의해 22명이 잡혀 갔다.)

 

정작 핵심인 보안목표 109곳에는 불과 2,385명만이 배치된 반면 나머지는 전국 92개 대학에 계엄군 병력의 93%인 2만2천3백4십2명이나 배치됐다.

 

서울-
강북: 15개 대학에 계엄군 10,912명, 장갑차 39대 배치.
강남: 3개 대학에 계엄군 1,999명, 장갑차 20대 배치.
경기-
4개 대학에 계엄군 1,382명, 장갑차 21대 배치.
강원-
11개 대학에 계엄군 847명, 전차 3대, 장갑차 7대 배치.
충청-
8개 대학에 계엄군 1,019명 배치. (2군 3관구)
경상-
경북: 9개 대학에 계엄군 2,102명, 장갑차 2대 배치. (2군 5관구)
경남: 12개 대학에 계엄군 2,250명, 장갑차 2대 배치. (2군 2관구)
전라-
30개 대학에 계엄군 1,953명 배치. (전교사)

 

충청과 호남지역에는 비상계엄 전국확대 선포날짜보다 훨씬 이전인 5월 10일 오후 2시 56분에 2군에서 전교사에 명령을 하달해 전북대에 7공수여단 32대대, 충남대에는 7공수 31대대, 전남대와 광주교대에는 7공수 33대대, 조선대와 전남의대에는 7공수 35대대를 배치하도록 계획했다. 이미 7공수 여단은 충정훈련을 매일 실시했다. - 전교사 작전일지, 전교사 1980.5.10 (실제로는 전북대에는 31대대가, 충남대에는 32대대가 서로 바뀌어 배치됐다.)

 

5월14일에 계엄군은 광주 시내에 투입되어 전일방송, KBS, MBC, CBS 등 방송국과 주요 시설물에 31사단이 배치됐으며(작전상황일지, 31사단 1980.5.13~5.28), 전교사는 5월14일에 5.18 00:00 시를 기해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됨과 동시에 실시될 충정작전(화려한 휴가)에 대비해서 주요 목표물을 파악하도록 31사단과 35사단에 명령을 내렸다(전교사 작전일지, 전교사 1980.5.14)

 

5월15일부터 5월 17일까지 전교사에서 트럭 29대, 3관구사령부(대전)에서 트럭 19대, 35사단에서 트럭 18대가 금마에 위치한 7공수 여단에 도착했다.

 

계엄령 전국확대를 다룰 국무회의가 아에 열리지도 않은 5월17일 오후 5시에 2군사령부는 "충정작전 유효, 5.18. 00:01를 기해 불순분자를 체포, 5.18. 04:00 이전 주요 학교 점령"(군 사령관 구두 지시) 명령을 내리고, 학교 점령시간 변동지시(04시에서 02시로 변경)를 하달했다.(육본 작상전 414호)

 

전북대는 5월18일 새벽1시5분, 충남대는 새벽1시25분, 전남대와 광주교대는 새벽2시, 조선대는 새벽2시30분에 계엄군에게 점거당했다.

 

광주에서는 5월 14일 오후 1시 이후에야 전남대생들이 교문을 벗어나 전남도청 분수대에서 거리 시위를 벌였다. 5월 15일에는 광주지역 대학생들이 도청에 모여 비상계엄 즉각 해제하라, 노동 3권 보장하라, 정치일정 단축하라는 구호를 외쳤다.

 

서울지역 대학들이 신현확의 자유 대선과 총선실시를 약속한 특별담화를 믿고 5월 15일 밤을 기해 수업으로 복귀한다는 결의를 내린데 반해, 광주지역 대학생들은 5월 16일 3만여명이 모여 횃불 시위를 전개해 5.16 화형식을 끝낸 후 시위현장 길거리 청소를 실시하고는 며칠간은 사태를 관망하며 쉬고 5월 19일에 다시 결의대회를 열자며 시위를 마감했다.

 

호남지역 대학들을 점거한 7공수 여단은 교내에서 학생들 79명을 잡아갔다. (그중 전북대에서는 학생이 연행을 피하려다 실족했다. 전투상보- 7공수 여단 1980) 전교사 전투상보 기록에는 169명으로 더 많은 연행자 숫자가 적혀 있다.

 

5월 18일 확대 계엄령 포고와 강제 휴교 사실을 모르던 전남대 학생들은 교문에서 출입통제 당하자 도서관 이용 등을 내세우며 항의했다. 오전 10시가 되자 확대계엄령이 발동되면 오전 10시에 정문에서 모이자는 약속을 한 학생들이 약속장소에 나타나면서 200여명으로 항의학생 숫자가 늘어 났다.

 

계엄군은 학생들의 항의가 지속되자 2개 지대를 정문에 더 배치했고, 학생들은 병력증강에 분노해 일부는 돌을 집어들어 던지기도 했다. 이에 공수부대원들은 무력진압에 나서 인근 주택과 상가는 물론 시내버스 안까지 뒤지고 다니며 젊기만 하면 아무나 걸리는데로 무작정 곤봉으로 때려 기세를 꺾고 놓고 봤다.

 

"초동단계에 신속진압. 군이 진압을 위해 투입되면 인명을 상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과감하고 무자비할 정도로 타격해 데모대원의 간담을 서늘하게 함으로써 군대만 보면 겁이 나서 데모의 의지를 상실토록 위력을 보여야 함. 군이 출동하면 최강의 위엄과 위력을 과시하여 위압감을 주어야 한다" - 부마지역 학생소요사태 교훈, 보안사 정보처 1979

 

이에 따라 광주에 투입된 계엄군도 시민들을  과감하고 무자비할 정도로 타격 가해 충격적인 폭력을 휘두를 준비를 이미 충정훈련을 통해 마친 상태였다. 각 공수여단은 80년 2월부터 정규 훈련을 거의 포기한채 시위대와 진압군으로 역할을 나눠 오직 시위진압 충정훈련만 했으며, 그 강도는 기존에 비해 월등히 강했다.

 

교문 앞에서 강제 해산당한 학생들은 화를 삭히지 못해 도청으로 향했고, 이동 중에 저지하려는 경찰 진압대와 동구 카톨릭센터 앞에서 대치하고 있었다. 시내 시위 발생을 확인한 계엄군은 오후 3시 40분에 7공수 33대대와 35대대를 투입시켜 오후 4시에 금남로와 충장로에 도착해 진압작전대형을 갖췄다.

 

5월18일 오후 3시에 수도경비사령부는 서울 동국대를 점거하고 있던 11공수여단에 명령을 내려 1개 대대는 수송기로, 여단은 열차를 이용해 광주에 내려가 2군 작전통제하에서 광주시위를 진압하라고 했다. 기다렸다는듯 11공수여단은 불과 명령을 받은지 43분만에 병력을 광주로 이동시키기 시작했다.(육본 작전명령 19-80호, - 전투상보, 11공수여단) 11공수여단은 다음 날인 19일 새벽 3시에 광주역에 도착했다. (이 11공수여단은 4월 초에 발생했던 사북탄광 노동자 생존권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1군 사령부 명령에 의해 출동할 뻔 하기도 했다.) 

 

오후 2시 30분에 광주에서는 31사단과 7공수가 참석한 시내 시위 진압출동 회의가 시작됐는데, 서울에서는 오후 3시에 지리상 가까운 충남이나 경남도 아닌 서울에서 그 것도 수송기를 이용해서 급하게 광주로 11공수여단마저 출동시켰다는 사실은 광주시민 학살이 아에 처음부터 계획되어 있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게 하는 대목이다. 

 

오후 4시에 금남로와 충장로에서 이미 진압대형을 갖춘 7공수여단은 진압작전 전개 30분만에 103명을 연행하고, 저녁 7시까지 173명을 추가 연행했다.


당시 진압작전은 충정계획에 따라 시위대 해산이 아에 배제된 철저한 체포위주의 작전이었기에 물리적 진압은 더욱 강경할 수 밖에 없었고, 당연히 민간인 피해는 더 클 수 밖에 없었다. 다음날 5월 19일에는 더 강화되어 "포고령 위반자는 가용수단 동원 엄중 처리... 소요자는 최후의 1인까지 추격하여 타격 및 체포"하도록 했다. - 충정업무 일일 주요사항, 2군 사령부 1980.5.19

 

<진압대와 시위대의 부상자가 발생하지 않도록 했다는 이유만으로 끌려 간 전남도경국장 안병하>

<전남도경국장 안병하 사진 아래로는 뻔뻔한 전두환의 진급사진과 멍한 체육관 대통령 선서 모습>

 

반면에 시위진압시 진압대와 시위대 모두 부상자가 발생하지 않도록 주의시키며 시위진압을 지시했던 전남도경국장 안병하는 오히려 5월27일 진압이 완료되자 전두환의 지시에 의해 합수부로 끌려가 직무유기 혐의로 수사를 받아야 했다. 자발적인 사직 형식으로 물러나 고문 후유증으로 1988년 10월에 사망했다.- 합수조치내용, 전남합수단 (당시 합수부로 끌려가는 인물들은 전두환의 분류 허락이 있어야 했다.)

 

5월 19일 새벽 1시 50분부터는 골목길 가택수색 작전을 통해 자기 집에서 자고 있던 젊은이들마저 닥치는대로 끌고 갔다. - 충정병력 출동 및 광주사태 상황일지, 특전사령부 1980.5.19

 

5월 20일부터는 2군사령관은 훈시를 통해 계엄군이 이성적으로 행동할 것을 지시하면서 시위자들을 아에 이적행위자라고 발언하여 적군으로 규정했다.

 

21일에는 계엄사령관 이희성이 "고정간첩들이 사태를 극한적인 상태로 유도하기 위해 여러 분의 고장에 잠입, 터무니없는 악성 유언비어의 유포와 공공시설 파괴 방화, 장비 및 재산 약탈행위 등을 통해..."라고 아에 광주 민주화 운동을 불순분자와 고정간첩들의 소행으로 규정해 버렸다.

 

공수부대 계엄군에 의한 첫 희생 사망자는 5월 18일에 나왔다.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던 김경철은 식당에서 점식을 먹고 귀가하던 중 온몸을 구타당해 숨졌는데 직접적인 사인은 후두부타박에 의한 뇌출혈이었다.

 

시민 여론 동향 파악임무를 하던 보안사 조차도 "시민들이 소요시 계엄군이 너무 지나친 행동을 하지 않느냐는 등의 말을 하고 있다"는 보고에도 진압작전은 악랄하게 진행됐다. - 광주사태 상황보고, 보안사 1980

 

따라서 시민들과 학생들의 분노도 더 커져갔고, 대응하는 시위방식도 점점 과격해져 갔다. 급기야 5월 19일 오전 11시에는 계엄군이 탱크 2대를 투입하고, 10분 후에는 장갑차들을 동원해 시위대를 해산시키며 추격해 체포했다.

 

 <피로 물든 대검, 5월19일  착검한 공수부대원들과 화염방사기를 매고 전진하는 공수부대 병사>

<착검진압과 화염방사기 사진은 당시 전남일보 기자였던 신복진, 지금도 너무 유명한 사진작가다.>

 

공수부대 계엄군은 이미 5월 19일부터 대검을 사용해 광주시민들을 학살하고 있었다. "7공수대 총검진압" - 작전상황일지, 전교사.  1985년 안기부가 작성한 자료에도 "7공수여단 착검진압"이라고 적혀 있다.

 

당시 민주화 운동 현장 사진에도 7공수여단 서 모 중사가 착검을 한 채 시위대원을 쫓아가는 장면이 있다.(당시 서 모 중사는 현재까지도 묵비권을 행사하고 있다.) 또한 1980년 광주지검 검시조서에도 11명이 칼에 의해 사망했다고 적고 있는데, 그 중에서 주남마을 공수부대 버스총격 사건을 보면 사살부터 부검소 이송까지 공수부대원에 의해 모두 관리된 상황으로 한 젊은 여성은 부검결과 좌측 유방에서 대검 자상이 발견됐다.

 

5월 22일에는 전교사 연병장으로 헬기로 끌려가 내리던 연행자를 술에 취한 공수부대원이 대검으로 귀 뒷부분을 찌르는 것을 전교사 전투발전부장 준장 김순현과 작전참모 대령 백남이 등이 목격하고서는 그 부상자를 국군통합병원으로 이송했으나 사망했다.


2. 누가 먼저 총을 발포했나?

 

(사실 이런 질문을 한다는 것과 여기에 답변을 달아야 하는 것은 유치하기까지 하다. 상식적으로 쿠데타 세력의 권력 장악에 동원된 상대방이 총을 들고 있다면 당연히 또다른 쿠데타 세력을 거부하는 상대방도 저항하기 위해 총을 들게 되어 있다. 누가 먼저 쏘았느냐는 사실 아무런 의미가 없는 트집잡기식 문제제기일 뿐이다.)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위에서 길게 인용하거나 쓰면서 적어 왔다.

 

이미 광주시민들은 처음부터 반역도로 규정되어 있었으며, 79년 김영삼을 둘러싸고 발생했던 부산마산 민주화 투쟁이 시범적으로 공수부대 계엄군에게 진압당해 성과의 표본이 되었듯이 80년에는 광주가 전두환에 의해 공수부대 계엄군에게 시범적으로 진압당해야만 했던 희생자였다.

 

12.12 군사반란으로 요직을 차지한 전두환 반란세력에게 80년 서울의 봄은 절대로 반가운 것이 아니었다.

 

국무총리 신현확이 발표한대로 정치일정이 그대로 진행되어 자유로운 직접 비밀선거로 대선과 총선 실시가 이뤄지면 국민의 지지를 배경으로 한 새로운 정권이 탄생함으로써 12.12 반란을 일으켰던 전두환 세력들의 몰락과 체포는 뻔했기에 아에 짧은 시기에 국민 대부분이 포함된 거대한 반대세력들을 무자비하게 속전속결로 제압해야 할 필요성을 스스로 충족시켜야 했던 것이다.

 

이로 인해 전두환의 충정작전은 화려한 휴가를 전국으로 떠났고, 광주에서는 피의 살육제를 즐겼던 것이다.

 

반대로 그만큼 대한민국 민주발전과 미래를 위해서는 전두환 반란세력을 먼저 퇴진시켜야 한다는 것을 국민들은 너무나 현명하게 알고 있었고, 광주시민들은 그 것을 실천하는 뜨거운 용기와 강렬한 투쟁을 보여 주었다.

 

<전두환 퇴진, 민주화 회복에 동참한 고교생들.>

 

<고등학생 여러분

역사의 흐름은 젊은 고교생들의 적극적인 민주화 운동 참여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광주학생독립운동 4.19 의거 등은 광주 고교생이 선구로 일어난

신성하고 거룩한 운동이었고 우리는 그들의 자랑스런 후배들인 것입니다.

타오르는 눈빛의 젊은 고교생들이여!

칠판을 바라보고 공부하는 것만이 학생의 본분은 아닙니다.

여러 분은 천인공노할 살인마 전두환의 만행을 보고 있습니다.

여러 분들의 부모형제 동생들이 그들의 흉체한 총살에 쓰러진 것을

그대로 방관만 할 것입니까.

여러 분 조국의 민주화는 앉아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 몫도 아닙니다.

그 것은 피를 마시고 사는 흡혈귀와 같아서 숭고한 피의 댓가 없이는

이루어 질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 분!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 선혈을 뿌린 학생들의 진정한 듯을 깨닫고

참다운 삶의 가치관을 냉철히 판단하여

조국의 민주화가 이룩 될 때까지 끝까지 투쟁합시다.>

 

광주에서 최초의 총격은 5월 19일 오후 4시 50분에 계림동 큰 길인 광주고와 계림파출소 사이에서 계엄군이 발포함으로써 발생했다. 계엄군 장갑차를 시위대가 공격하자 11공수여단 63대대 작전장교 대위 차 모가 발포해 조대부고 3학년 김영찬이 쓰러졌다. - 5.18 사건 수사기록, 조창구 2회 피의자 심문조서, 서울지검.  광주사태 일일 속보철, 보안사 1980. 5. 20. 01:00  (대령 조창구는 11여단 63대대장으로 차 모 대위로부터 보고를 받았다고 진술했다.)

 

반면에 505보안부대는 무성권총으로 시위대에 숨어 있던 특정 세력이 사격해서 계엄군이 발포한 것으로 선동했다는 거짓 보고서를 올렸다. 보고서는 다수의 파편이 박혀 총기 제원 파악이 힘들다고 하면서도 소음기가 장착된 권총이라고 단정하고 있다. 권총 사격이면 더욱 더 파편이 많을 수가 없으며, 파편이 많은 산탄총이라면 당시로써는 소음기를 달 수 없다. 505보안부대 보고서를 제외하면 그 어떤 진압군 각 부대 보고서에도 발포사실을 아에 기록하지 않고 은폐했다.

 

계엄군의 다음 발포는 5월20일 밤부터 이뤄졌다. 20일 밤 3공수여단 본부중대 병력들이 전남대에서 탄약을 실고 광주역으로 지원 나가는 과정에서 막아 선 시위대를 향해 총기 사격을 했다. - 3공수여단 본부중대 하사 이 모, 한겨레신문 2006. 5. 18 이 때 2명의 시민이 3공수여단의 총격으로 사망했다.

20일밤 9시 50분경에 광주역에서 3공수 16대대 중사 정관철이 시위대 차량에 치여 사망하자 3공수 여단장 최세창이 실탄을 장전하도록 지시했다. - 광주사태 일일속보철, 보안사 1980. 5. 20 22:27

 

반면 정작 3공수 여단은 5월 20일 밤부터 5월 21일 새벽까지의 상황에서 화염방사기, M203(유탄발사기)를 사용해 시위대를 제지했다면서도 발포사실은 기록하지 않았다. - 전투상보, 광주소요사태 진압작전, 3공수여단 1980

3공수 여단 본부중대원들은 광주역 계엄군에 실탄을 공급한 후 전남대로의 철수 과정에서 방망이, 망치, 대검을 사용해 머리를 때리거나 찔러 시위대를 또 살해했다. -광주사태 검시결과 참여 보고서, 보안사 505부대 1980

 

31사단에서는 20일 밤 11시 4분에 연발총성을 듣고는 발포 사실을 파악했다고 적고 있다. 11시 20분에는 시청 옥상의 공수부대가 예광탄 사격을 했고, 11시 30분에는 계림동 파출소 쪽에서 3,4발씩 발포 소리가 나고 11시 35분에는 사격이 중단된채 군가 소리가 들려 왔다고 되어 있다. - 광주사태시 전교사 작전일지, 전교사 1980

 

이에 2군 사령부는 3공수 발포 이후 5월20일 밤 10시 30분에 작전지침 추가하달(작상전 444호)을 통해 "발포 금지와 실탄 통제, 특전사 부대 임무 20사에 인계 검토, 특전사 부대 대대 단위로 분산 집결, 선무공작을 위한 홍보활동 강화"를 지시했다. 곧이어 작상전 445호를 통해 광주시 외곽 교통로를 봉쇄하라는 명령이 하달됐다. (이 명령은 일부에서 지켜지지 않아 11공수여단 예하 61, 62, 63 대대는 실탄을 계속 분배했다.)

 

이 의미는 광주시민들의 저항이 거세서 21일 오후부터 외곽으로 이동한 것이 아니라 이미 20일 밤 10시 30분에 내려진 명령과 직후 곧바로 내려진 명령에 의해 계획에 따라 이동했음을 보여 준다. 즉 부산마산 민주화투쟁에서 효과를 보았던 초기 강경진압이 먹혀들지 않자 이제는 선무공작과 홍보활동 강화로 진압작전을 일시 바꿨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또한 완전 무력진압을 위해 준비작업에 돌입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5월 21일 새벽4시 30분 계엄사 대책회의에서는 명분으로 삼을 자위권 발동문제를 다뤘는데, 그 날 전두환과 이희성이 자위권 발동을 주장했다. - 광주권 충정작전간 군 지시 및 조치사항, 2군사령부(사령관 진종채 친필기록), (이희성이 주장했다는 내용은) - 제5공화국 전사, 보안사

 

자위권 발동은 국방부 장관실에서 이희성(계엄사령관), 주영복(국방부 장관), 김종곤(해군참모총장), 윤자중(공군참모총장), 유병헌(합참의장), 진종채(2군사령관), 백석주(연합사부사령관), 정도영(보안사 보안처장) 등에 의해 공식적으로 21일 오후 4시 30분에 결정됐다. - 5.18 수사기록, 이희성 피의자 4회 심문조서, 서울지검

 

이처럼 국민에게 본격적으로 총격을 가하는 중대한 문제를 국무회의나 대통령의 결단없이 그저 전두환 반락세력들이 자기들 맘대로 밀실에서 결정해 버린 것이다.

 

3공수여단에게 죽임을 당한 2구의 사체가 5월 21일 새벽 도청 근처에 도착했다. 아침 7시에 11공수여단과 7공수여단 35대대가 추가로 도청 진압 계엄군에 합류했다. 시위대는 아침 8시부터 추모제를 펼치며 도지사 면담을 요구하고 있었다.

 

오전 9시에는 시위대가 아세아자동차 공장에서 장갑차 3대와 그 밖의 버스 몇대를 몰고 나왔다. 이 장갑차 3대 탈취가 사실상 최초의 광주시내 시민들이 행사한 자위권을 위한 군사무기체계 무장이라고 볼 수 있다.

 

(당시의 아세아자동차가 지금은 현대기아로 넘어 갔기에 지금의 기아자동차 생산공장 위치가 아마 맞을 것이다. 어쨌든 아세아자동차가 있던 곳은 광천동 오밀조밀한 공장지대였으며 지금의 광주터미널과 신세계 백화점 부근이다. 이 공장이 당시에도 시내에 바로 붙어 있었다라고 알고 있다.)

 

계엄군은 도청 공간을 장악유지하기 위해 시위대 저지선을 도청 분수대를 기준으로 300m 떨어진 지점에다 두고 있었다(11공수여단 63대대 정보장교 장 모, 5.18 수사기록 장 모 2회 진술조서). 한편 도청 수산국장실에서는 도지사와의 면담을 통해 "계엄군의 무차별 폭력에 대한 공개사과, 연행 학생과 시민석방, 정오 12시까지 공수부대 철수"를 요구하고 있었다.

 

장갑차를 앞세운 시위대가 돌진하자 계엄군은 최류탄을 쏘며 저지하다 도청 분수대에서 100여m 떨어진 광주경찰서 앞 4거리까지 밀려났다. 밀려난 공수부대와 자리를 교대한 11공수여단 63대대는 실탄을 장전하기 시작했다.(11공수여단 63대대 정보장교 장 모, 5.18 수사기록 장 모 2회 진술조서, 서울지검)

 

이 때가 계엄군이 최초로 실탄을 장전한 것이 아니라, 이미 5월 19일과 20일에 시위대에게 발포를 했다가 20일 밤 10시 30분에 작전명령(작상전 444호) 추가하달에 따라 총기에서 탄창을 제거했다가 다시 장전한 것이다.

 

이후 11공수여단은 하사관들까지 실탄을 장전한 상황에서 61대대장 안부응은 발포를 주장했고, 62대대장 이제원은 반대했다.(5.18. 수사기록, 각각 이제원 피의자 심문조서와 안부응 3회 피의자 신문서, 서울지검)

 

오전 11시경 전남도지사가 헬기를 타고 공수부대가 정오 12시까지 철수할 것이라고 방송했지만 정오 12시까지 공수부대는 철수하지 않았다. 약속을 지키지 않자 시민군의 장갑차가 공수부대 병력을 여기저기서 밀어내려고 애쓰자 뒤로 밀려나던 계엄군은 최종 저지선을 도청 분수대에서 50여m 밖에 떨어지지 않은 전일빌딩과 YMCA건물로 삼았다. (일병 이 모, 11공수여단 63대대 9지역대 8중대 2006.3.21)

 

전남도지사가 발표한 공수부대 철수 약속이 지켜지지 않자 정오 12시 55분 쯤 시위대가 던진 화염병이 기갑학교 소속 장갑차 표면에서 터져 불이 붙어 뒤로 빠지면서 생긴 빈 공간으로 시민군의 장갑차가 돌진해 들어가면서 계엄군 전열이 무너지게 된다. 혼란 중에 계엄군이 우왕좌왕 하면서도 전방에 있던 11공수의 61대대와 62대대는 모두 시민군 장갑차를 피했지만 후방에 있던 63대대 8지역대 무전병 일병 권용운은 미처 피하지 못하고 시민군의 장갑차 치여 사망했다.

 

사람을 치자 잠시 머뭇거리던 장갑차에 일시에 계엄군의 사격이 집중됐고, 순식간이라 여전히 뒤따라 들어오던 버스에도 총격이 가해졌다. 버스 운전자는 그 자리에서 사망하고 버스는 도청 분수대를 들이 받으며 멈춰섰다. 이런 총격 속에서도 광주시민들은 흩어지지 않고 도청으로 행진했다.

 

(그 시각 공교롭게도 애국가 방송이 울려 퍼졌는데 이 것은 전남도청 내무국장이 진정하라는 의미에서 틀었다고 한다. - 5.18사태 주요 사건일지, 전라남도, 보안사 383-1980-97)

 

이러한 시민들의 기세에 놀란 계엄군은 마구잡이로 총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시민들은 흩어져 달리기 시작했고, 등 뒤로도 사격이 가해졌다. 심지어 총격으로 쓰러진 시민을 구하기 위해 나선 사람들에게마저 총격을 가하며 도청광장을 사수하는데만 혈안이 되어 있었다.

 

무차별 사격으로 시위대를 무력화 시킨 계엄군은, 11공수여단 61,63대대는 분수대 바로 앞 상무관 쪽으로, 62대대는 수협 쪽으로, 7공수여단 35대대는 도청 쪽으로 재집결하여 주변 건물에 저격수들을 배치하여 다시 도청을 향하는 시위대나 차량에 정확히 조준 사격을 가했다. 도청 외곽인 금남로 진입길인 노동청 쪽에서는 진압군 장갑차가 배치되어 장갑차에서 사격을 시작했다.

 

오후 1시 30분 경에는 태극기를 들고 시민군 장갑차에 올라 도청을 향해 가다가 관광호텔 앞에서 계엄군의 사격으로 현장에서 즉사했다.

 

시민군의 최초 발포는 21일 오후 1시 30분경 도청 앞에서 쏜 권총 발사였다고 전두환 반란세력의 기록은 적고 있지만 거짓임이 드러났다.

 

시위대가 쏜 권총에 맞아 11공수여단 61대대 3지역대 8중대 하사 권용운이 사망하고, 다른 2명이 중태에 빠져 국군통합병원으로 헬기 수송됐다고 적어 놓고 있다.(광주사태시 전교사 정보처일지(전교사), 7공수 35대대 상황일지(김일옥), 광주사태(육군본부), 전교사 작전일지(전교사), 충정병력 출동 및 광주사태 상황일지(특전사)) 이들은 동일 사건을 가지고 각각 다른 목소리로 기록하고 있지만 구체적 무기는 권총이었다고 하고 있으며, 특전사는 권총이 아닌 사냥용 엽총도 거론하고 있다.

 

이렇게 전두환 반란세력은 21일 오후 1시경 도청 앞에서 시민들을 학살할 때, 시위대도 1시 30분경에 계엄군에게 권총을 발사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정작 계엄군이 공식 발표한 사상자 명단 기록에는 시민군이 쏜 권총에 맞아 계엄군이 숨졌다는 주장과 다르게 5월 21일 도청 앞 계엄군의 시민 학살사격 때 시민군이 쏜 총에 맞아 총상을 당한 계엄군 부상자나 사망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는 사실에서 거짓임이 밝혀졌다.

 

계엄군의 각 기록에 의하면, 광주에서 시민군이 최초로 총기를 소유한 때는 5월 21일 새벽 3시로 광주세무서 방화 전에 직장 무기고에서 캘빈 17정을 가져 갔으나 실탄은 없었다. 오전 7시 30분경 광주에 진입하던 20사단 60연대에게서 군용차량 14대와 M60기관총 3정, 무전기 10여대를 탈취했으며, 오전 8시 나주군 반남지서에서 캘빈 3정과 실탄 270발을 탈취했다.(방화는 광주 MBC와 KBS, 광주 세무서 3건이 민주화운동 기간 내내 유일하다.)

 

오전 9시경 나주군 남평지서에서는 총기와 실탄을 탈취하려다 (김유범) 체포됐다. -상황일지, 전남도경 1980 

 

계엄군 기록에 의하면 오후 1시경 부터 시작해서 광산군 하남, 화순 본서와 광업소, 나주 본서와 남평 신포 금성 예비군 무기고, 영광 파출소 등에서 오후 내내 총기 탈취가 이뤄 졌다. (아무리 대부분의 인원이 광주 시위진압에 동원됐다고 해도 너무 허술하게 탈취당했다. 아마도 심정적 동조로 방치하지 않았다면 현실적으로 탈취가 힘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최초로 보고된 무기의 광주 등장은 21일 '오후 2시 30분에 학동시장 앞에서 화순 광업소에서 가져온 TNT가 목격되었고, 공포탄 사격이 있었다'는 것이다. - 광주사태 일일속보철, 보안사 (이후 TNT 뇌관 2,300개는  학생 4명 이경식(이후 사망자 문용동), 양 모, 박 모, 김 모에 의해 제거되어 전남북계엄분소에 반납됐다. 또한 이후 수류탄도 분리 되어 폐기됐다.)

 

시민들이 본격적으로 무장한 오후 4시 경부터 대응 맞사격이 이뤄졌고, 계엄군은 21일 오후 3시 35분 내려진 이희성의 작상전 455호 명령에 따라 광주시 외곽으로 빠져나가기 시작해 광주 봉쇄 작전으로 변경해 돌입했다. 이 때부터는 광주 외곽 군민들이 분풀이로 쏘아 대는 계엄군의 사격에 아무 이유없이 희생당하는 시기로 접어 든다.

 

이후 광주 민주화 운동은 5월 23일부터 준비에 나선 상무충정작전에 의해 27일 도청 현장에서의 민주화운동만큼은 종말을 고하게 된다.

 

<전두환 쿠데타 반란군의 지시를 받은 계엄군에게 살해당한 시신들과 남겨진 사람들의 눈물>

 

3. 북한군 특수부대 900명은 광주에 실제 침투해서 대남공작을 펼쳤나?

 

(당시 재직하던 신문사에서 쫓겨 날 정도로 광주 현장에서 직접 취재했던 극우파 조갑제 마저도 이런 주장에 대해 결단코 아니라고 답변한다. 뿐만 아니라 조선일보도 무시하며 침묵할 정도다.)

 

2006년부터 자유북한군인연합대표 임천용이 주장해오고 있는 내용인데, 2007년에는 직접 증거를 북한으로부터 가져오겠다고 했지만 2008년 발표도 2006년 내용과 토씨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다. 더구나 김일성이 3번의 남침 기회(그 중에 4.19시민혁명 때와 5.18 민주화 운동 때다)를 놓쳐 안타까워 했다는 말은 이미 수 십년 전에 한국 땅에 흘러 다녔던 말이다.

 

임천용이 주장하는 주요 내용은  제1321부대(신천주둔 복수여단)에서 1개 대대 600여명이 남포에서 출발해 서해안에 상륙해서 광주로 갔다는 것이고, 주로 2군단 예하 여단들에서 차출된 정찰대대 소속 300여명은 신포에서 출발해서 동해안에 상륙해 광주로 갔다는 것이다.

 

무려 900여명이다. 이들을 10명씩으로 나눠 실어 나른다고 해도 썰물이며 밀물, 달의 밝기, 해안초소의 경계 상황, 기존의 노출된 루트 회피 등을 고려한다면 정규전이 아닌 이상 불과 하룻 밤 혹은 이틀 밤만에 다 실어 나를 수가 없다. 뜨락선이라고 표현한 배 중에서 대규모로 실어 나르려면 더욱 더 해상경계에서 걸리기 쉽다.(해군력이 너무나 미약했던 6.25 남침 당일 밤 대대병력을 실고서 부산에 상륙하려던 북한 해군 수송선은 한 밤중에 그 자리에서 격침됐다.)

 

아에 고정간첩으로 활동할 소수의 공작원이 아니라 단기간 공작하고 돌아가야 할 특수부대원 900여명이라는 대규모 인원은 아무리 분산해서 실어 나른다고 하다라도 노련한 안내원도 계엄령 확대 선포되어 경계가 강화되어 있었기에 감당하지 못한다. 이런 대규모 적군 병력이동인데도 경계가 뚫렸다고 한다면 이 것은 정부와 당시 반란권력자 전두환의 직무유기 책임이다.

 

더구나 아무리 광주 시내에서 암약하던 고정간첩이 송신기를 이용해 송신하고 평양에서 생중계(사실은 날조 방송이겠지만)를 하고 있었다고 해도 침투 루트 안내방송이 아니라는 점이다.

 

당시 북한에서 생중계 했다는 주장을 분석하기로는 그 것은 고정 남파 간첩들이 송신기로 띄운 하루 단위 보고를 편집한 중계였을거라고 추측할 수 있고, 평양에서는 있는 말 없는 말 더해서 실시간 현장중계를 흉내 냈겠지만, 실시간 중계는 당시 남파간첩의 송신 장비수준이나 기술로는 아주 어렵거니와 통신위성을 통하지 않고는 더더우기 힘들고, 지금도 최첨단 장비를 갖췄어도 안전이 보장되지 않은 심각한 상황이라면 현장중계를 할 수가 없다. 그렇지 않다면 북한이 IT산업 최첨단일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북한이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광주민주화 운동당시 사진을 북한만의 단독공개라고 공개하지 못한 것으로 증명된다. 이 뿐만 아니라 당시 시내상황을 한 번도 녹음청취라도 들려 주지 못하고 있다.) 

 

더욱 확실하게 말한다면, 6.25 남침 격퇴 때부터 한국군은 미군의 장비 공여로 국방부 직속 정보부대가 북한의 통신망을 감청하고 송신되는 위치를 탐지하는 장비를 갖추고 있었기에, 이후 시간이 흘러 더욱 기술적으로 발전했음으로 광주민주화운동 현장에서 발신되는 고정간첩의 장시간 생중계 송신 위치는 즉각 걸리게 되어 있다. 특정 주파수로 장시간 송신되고 있는데도 그 지점을 잡지 못한다는 것은 기술적으로 설명이 되지 않는다. 북한 평양으로 직송되어 생중계로 활용될 정도의 강력한 송신이라면 십 초만 보내도 즉시 걸리고 동시에 몇 초 후면 송신위치가 파악된다. 그래서 남파간첩들도 평양에 보고하는 시간은 몇 분내로 극히 짧았고, 그 위치도 수시로 변동했다.

 

하물며 24시간 내내 몇 날 며칠 간 남파 고정간첩이 생중계 했는데도 잡지 못했다면 이 역시 반란자 전두환의 반역동조에 불과하다.

 

(또한 당시 한국인이 북한방송을 청취하던 것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의도적으로 듣는 것과 들리는 것은 다른 것이다. 그 시절에는 일제 라디오가 잘 팔리는 제품이었는데, 소니 라디오만 봐도 SW-1, SW-2(숏  웨이브: 단파방송)라고 표시되어 있어서 여기에 맞춰놓고 다이얼을 돌리면 일본 방송 뿐만 아니라 북한 방송도 한국 방송처럼 선명하게 들리던 시절이었다.

 

정부는 이 일제 라디오 수입에 아무런 제재도 가하지 않았다. 매일 밤 고정간첩에게 보내는 5수조 난수표 방송은 여기 저기서 흘러 나왔다. 그 당시 아무나 들을 수 있었던 북한 라디오 방송을 들었다는 것으로 친북좌파성을 평가 할 수는 없다. 정작 90년대 초반 의도적으로 들었던 주사파들이 친북좌파들이었다.

 

계엄군에 의해 전화선도 끊기도 뉴스도 없었던 광주시민들은 갇혀 포위된 상태에서 오히려 자신들의 상황에 대해서 알고 싶으면 못 알아 듣는 일본방송이 아닌 그래도 알아 들을 수 있는 북한 방송 외에는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를 고려해야 한다. 역으로 그만큼 언론통제를 통해 언론보도를 왜곡했던 전두환이 책임져야 하는 것이다.)

 

80년은 60년대와 다르게 한국군이 (담력 키우기 차원에서) 휴전선 넘어가 북한 민간인 밭에서 강냉이 구어 먹고 오고, 북한군이 (사회주의 해방 전과획득 차원에서) 넘어와 막사에서 잠자던 국군의 목을 잘라갔다는 식의 이야기가 회자되던 시절이 아니라 경계가 살벌하던 시기였다. 더구나 박정희 서거 상황과 맞물려 권력찬탈에 눈이 벌겋던 전두환이 전방에서 공수여단을 빼돌렸기에 더욱 더 경계를 허술히 하도록 놔두지 않았다.

 

안그래도 광주민주화 운동을 친북과 연결시키려던 전두환이 북한군 특수부대의 침투흔적을 꼬투리라도 발견했다면 그 것 보라며 더욱 당당히 외쳤을 것이고, 심판 받으러 가서 법정에서 선채 12.12 쿠데타 유죄 판결을 순순히 받아 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역시 마찬가지로 5.18 광주 민주화운동에 대해서도 참으로 할 말이 많았을 것이다.

 

하나의 침투조를 침투 시키기 위해서는 최소한 1년의 시간이 필요하다. 루트 개척부터 해서 루트 침투 훈련, 한국군의 경계태세 파악 등등의 요소를 다 고려해서 준비를 마쳤다고 해도 실전연습만 해도 몇 개월을 필요로 한다. 실제로 경계 태세가 한국보다 훨씬 느슨한 일본에 상륙해서 아무나 잡아 오면 되는 민간인 납치도 오랜 준비와 연습이 필요하다.

 

설령 어처구니 없는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여 주장대로 조건을 설정해서 살펴봐도, 그러니까 북한 김일성이 아에 처음부터 광주에서 일을 한 번 벌려야겠다고 맘을 먹고 했다고 해도 광주에서의 상황이 무르익어야 침투시킬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계엄군이 최초 발포했던 5월 19일 사건을 접수하고 불과 몇 시간만에 판단을 내려서 북한군 특수부대원을 내려 보낸다고 하다라도 당장 하루 이틀만에 광주까지 올 수가 도저히 없다.

 

더구나 해상침투 상륙지점이 상식적으로 (또한 무장공비 침투루트를 참고해도) 광주에서 가장 가까운 영산강 근처도 아닌 포항에서 혹은 경기도 한강 지역에서 침투해서 어느 세월에 육상 검문을 다 피해서 그 인원이 모두 광주에 도착할 수 있겠나? 합법적인 주민등록증이 있는 서울 학생들도 광주에 도착한 날짜는 20일경 무렵에 겨우 200여명에 불과했으며 이후로는 없었다.

 

게다가 현지 무기고를 습격해서 무장하면 될 것을 멍청하게도 시위대로 위장하기 위한 것이랍시고 북한에서부터 M1소총을 보물 감싸듯 들고 뛰어야 하던 북한군 특수부대가 단 한명도 광주 외곽 계엄군 경계에 걸리지 않았던 것도 설명이 되지 않는다. 현지 무기고가 털리지도 않았는데 무려 900여정이나 되는 M1 소총이 갑자기 등장한다면 바보가 아닌 이상 북한군 특수부대가 들어 왔구나 하고 알 수 있다.

 

(또 한가지 임창용의 주장대로 살펴 본다면 북한의 엉뚱함은 M1소총이다. 지금도 북한이 한국예비군을 가장하기 위해 M1 소총을 보유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한국에서 M1소총은 예비군용으로도 잘 쓰지 않는다. 포장지도 뜯지 않은 M1소총 육해군에 쌓여있었지만 칼빈을 예비군용으로 많이 사용했다. 80년 당시 호남지역 예비군 무기고에는 칼빈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런데 북한군이 구식 M1소총을 들고 광주에 왔다? 당연하게도 광주에서 M1 소총은 한 자루도 발견되지 않았다.)

 

만약에 광주 민주화 운동이 김일성의 기획 작품이었다면 가장 어리석은 전략적 선택이었다라고 말한다. 반대로 한국에서 공작을 펼친다면 당연히 평양이다. 역시 북한도 서울-그 것도 북한이 인정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하에서-에서의 민중봉기가 가장 효과적이며, 정말 김일성이 원했다면 서울이야 말로 가장 좋은 조건을 갖췄다. 더구나 광주 민주화 운동 상황까지 예측할 정도라면 차라리 5월 15일의 서울역 광장 최대인원 집결 집회를 노렸어야 했다.

 

결국 북한군 특수부대 침투설은 허무맹랑한 것이다. 온통 듣기만 했지 자신이 직접 침투했다는 사람은 없다. 설령 자신이 했다고 나서도 또한 증거가 필요하다. 친북좌파들이 황당한 주장을 한다고 보수주의를 표방하는 사람들까지 그런 방식을 따라서는 안된다.

 

더 형편없게도, 시민군과 계엄군 양쪽에 침투해서 공작을 펼쳤다고 하는데, 계엄군은 아무리 짧게 잡아도 80년 2월부터 충정훈련을 받으며 서로의 얼굴을 훤히 알고 있는 상황에서 조직 속으로 낯선 인물들이 군복입고 다가오면 의심하게 되어 있다. 더구나 상부 연락을 통해 신분확인은 기본이다. 또한 시민군에서도 역시 낯선 자의 접근은 혹시나 계엄군이나 경찰의 공작원이 아닌가 해서 의심하게 되어 있다. (실제로 시민군은 시민군을 가장한 계엄군 공작원의 군용 짚 차량을 따라 이동에 나섰다가 매복해 있던 계엄군의 집중 사격을 당해 희생당한 경우가 있었다.)

 

한편으로 북한이 19일에 생방송으로 발포 소식을 듣고 호기라고 여겨서 부랴 부랴 특수부대원을 침투시켜 최소한 21일까지 전원 광주에 침투하는데 성공했다고 하더라도 이미 21일 오후부터 계엄군이 시외곽으로 빠져나가기 시작해 광주 봉쇄작전과 완전 섬멸 작전을 펼칠 준비를 하고 있었던 상황에서 광주에서 북한군 특수부대가 할 수 있었던 역할은 없었다.

 

당연히 사망한 계엄군 숫자와 시민군 사망자들을 살펴봐도 사망일시를 보면 북한 특수부대원들이 한창 날뛰고 있어야 맞을 시점에는 정작 계엄군이 물러나 장악하고 있던 시외곽을 빼고는 광주 시내에서는 총격전 자체가 없었다. 그런데도 임천용은 북한 특수부대원이 편을 갈라 계엄군에 속해서 시민들을 죽이고, 시민군 쪽에 합류해서 계엄군을 쏘아 죽이며 동시에 공작차원에서 시민군을 일부러 잔인하게 살했다고 주장한다.

 

임천용의 계속된 주장에 의하면 5월 25일에 북한 특수부대 총지휘자 이하일이 1차 철수 명령을 내려서 400명 정도가 포항으로 철수했다고 한다. 따라서 임천용의 주장은 난센스다. 북한 특수부대원 900여명이 정말 광주에 침투했다면 그들은 가장 안전한 시기에 들어와 총 한 방 쏘지도 않고 가장 안전한 시기에 빠져 나간 것이다.

 

설령 북한군 특수부대가 5월 20일에 광주에 도착했다고 하더라도 19일부터 해서 가장 저항이 치열했던 21일 사이를 살펴봐도 북한 특수부대가 개입한 흔적은 발견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임천용의 주장과 다르게 19일과 20일에 계엄군 사격에 의해 사망한 시위대는 3명이었고, 있다면 21일 계엄군에 의한 사격에 의해 역시 일방적인 시위대의 희생 뿐인데, 정작 임천용이 주장하듯 이 시기에 시위대에 숨어 있던 북한 특수부대가 남남 갈등을 노려 시위대 등짝에 대고 총을 갈겼다면 21일에 수거된 시신들에 시위대 후방에서 날아 온 총탄에 의해 사망한 숫자들이 가장 많이 집중해 있어야 하지만 그렇지 않다. 또한 21일에는 그 어떤 계엄군도 시위대가 쏜 총탄에 의한 사상자가 나오지도 않았다.

 

(오직 들었다는 증언만 내세우는 자유북한군인연합이 전하는 허무맹랑한 증언 가운데 하나를 보면 "이씨에 따르면 광주사태 당시 2군단 정찰대대를 모토로 각 특수부대들에서 선발한 최정예 전투원 1개 대대가 해상을 통해 남파됐으며 그 가운데 3분의 2가 희생되고 나머지 인원만이 귀대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말이 되지 않는 소리다. 대대급이면, 특히 북한군은 한국군 대대급에 비해 인원이 훨씬 더 많이 편제되어 있다. 따라서 남파됐다는 북한군 일부인 대대급 인원으로만 계산해도 전두환이 발표한 계엄군과 민간인 전사 혹은 사망자 총인원을 엄청나게 초과하고 만다.)


따라서 시민군의 미숙한 총기 사용에 의해서 극히 소수의 시위대가 뒤에서 날아 온 총탄에 극히 소수가 사상된 것이다. 대부분은 도망치다 계엄군이 쏜 총탄을 등뒤에 맞아 숨진 것이다. 

 

김대중이 광주 시위를 조종했는가?

 

(김대중은 햇볕 정책이라는 실패한 통일정책을 폈으나 친북좌파는 아니다. 그의 통일관련 신념이 잘 못되어 있다 보니 결과적으로 북한을 이롭게 했을 뿐이다.)

 

김대중이 지시했다는 부분도 완전 거짓이다. 상기했듯이 5월 18일 00:00를 기해 포고된 계엄령 확대에 의해 김대중은 5월 18일에 핵심 동지들과 함께 이미 잡혀 들어가 있었다.

 

또한 광주 교도소에서 복역 중이던 빨치산 류락진을 구하기 위해 처 신애덕과 동생 류영선이 시위에 가담해 교도소를 습격하도록 선동했다는 조작을 지금도 믿고 있는 사람들이 있지만 사실과 다르다. (그렇다고 광주교도소를 습격했던 다른 무리들이 잘한 것은 결코 아니다. 그 것은 민주화 운동의 뜻과 다른 전형적인 친북좌파의 행동이었다.)

 

류영선이 교도소 습격 도중에 총상으로 사망했다고 했으나(광주교도소 습격사건, 보안사 1980), 류영선은 조카 류소영을 찾아 다니다 5월 21일 도청 앞 계엄군의 사격으로 두부 관통상으로 현장 즉사했다. 류소영은 이미 예비검속으로 체포되어 있었으며, 신애덕은 실종된 딸을 찾아 해매고 있었다.(업무보고, 605보안부대)

 

(이 부분에서 쓸데없는 내용까지 올린다면, 빨치산 류락진이... 요즘 인기 있다는 누구였지... 아... 문근영이라는 젊은 연기자의 외할아버지인줄 몰랐다.

 

사실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다름아니라 전두환과 5.18민주화 운동, 5.18민주화 운동과 북한군 특수부대 침투설에 대해 사실관계 여부를 쪽지로 질문을 해 오신 어느 분이 사실관계가 궁금하다고 해서 일부러 시간내서 올리는 글이다.

 

그 분이 예시한 카페 주소를 찾아 전두환을 옹호하며 5.18민주화 운동을 비난하는 글들을 몇 편 읽다 보니 이런 사람들도 있구나 하면서 찾다가- 군대 있을 때는 관심있게 지켜 봤던 젊은 인물이었지만 어느 새 횡설수설하다 못해 친일정신으로 치닫고 있는 지만원이 문근영이라는 어린 배우를 그저 혈족따라 비판했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전두환 옹호 카페를 운용하시는 그 카페지기 분에게는 정말 미안하지만 처음에는 5.18 민주화 운동을 알리기 위해 일부러 그런 특이한 전두환 찬양 카페를 운영한다고 생각이 들 정도로 텍스트 읽기와 분석 능력과 평가능력이 매우 떨어지신 분이었다. 반대하기 위해 인용한 텍스트에는 카페지기의 글에 반박하는, 주장도 아닌 사실이 버젓히 동시에 쓰여 있을 정도였다.)

 

미스테리 여인 전옥주와 복면부대

 

전옥주(당시 쓰던 가명)라는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의 여성이 등장해서 간살거리는 목소리로 과격 시위를 조장했다. 이에 따라 광주 시민 시위대는 간첩으로 의심된다며 사로 잡아서 계엄군에게 넘겨 줬다. 계엄군은 불과 수 시간만에 나주에서 그냥 풀어 줬다. 전옥주는 도청이 진압된 이후 한참 지나서야 다시 체포되어 감옥살이를 마치고 한국 땅에서 잘 살고 있다. 반대로 계엄군의 프락치라고 의심을 해야 할 정도였다. 그러므로 전옥주는 간첩이 아니다.

 

다음으로 북한군 특수부대와 연관 짓는게 일명 복면부대라고 불리는 얼굴을 감춘 일련의 시위대다. 이들 역시 의심스러울 것은 전혀 없다. 왜냐하면 이들은 시민군이 무장했을 때에야 본격적으로 얼굴을 감춘채 등장했기 때문이다. 사태가 어떻게 끝날지 모른 상태에서 무기를 소지하면서 활동했을 때 나중에 체포되면 형량이 크다는 것을 감안한 것에 불과하다.

 

덧붙히자면, 지금까지 무장한 시민군의 사진들을 통합해 분석해 보면 얼굴을 가린 사진들보다 맨얼굴인 상태에서 무기를 든 시민군 사진이 훨씬 더 많다. 그래서 더욱 복면부대가 특수부대원이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또한 없다. 무장한 시민군이라고 해봐야 숫자가 적은데다 21일 오후부터 계엄군이 철수하자 곧바로 시민군이 자체적으로 무기 회수에 나섰기 때문에 무기를 사용할 공간은 더욱 협소해졌다.

 

이런 면에서 시민군 자체 무기회수 장면의 사진을 가지고도 마치 무기 분배장면인냥 활용하는 전두환 지지자들을 보면 정말 한심하기만 하다. 이들은 이미 보수세력이 아니다. 

 

특히나 광주 사건이 전라도 상당 지역에 알려지면서 (아무리 언론을 통제했다고 해도, 산을 넘어 탈출에 성공한 사람들, 심지어는 모 교사는 곡성군에 있는 학교에 출근하기 위해 19일에 밤을 세워 산을 넘었기에) 아마도 19일과 20일에 발생했던 계엄군의 발포로 인해 자위권을 강하게 주장하던 강경파들에 의해 소식이 광주 근처 지역에는 퍼져 각 지역에서도 청년들이 가담했기 때문이다. 

 

(한편 전라도의 아이러니는 막상 전두환이 만든 민정당이 출현한 이후 실시된 총선에서 모든 전라도 지역에서 민정당 후보들을 모두 국회의원에 당선시켜 줬다는 점이다.)

 

따라서 시위대 무장을 주장하는 강경파는 이미 시위대가 계엄군의 사격을 당한 19일 밤부터 나타났을 것으로 보이며, 20일부터는 행동계획을 구체적으로 세웠을 것이라고 추측해 본다. 어쨌든 본격적인 무기탈취는 21일부터 이뤘졌고, 그 명분 획득은 19일과 20일의 계엄군 발포에 의한 것이었다.

 

북한군 특수부대라면 더더욱 얼굴을 가릴 필요가 없었다. 금방 떠날 사람들이 뭐하러 얼굴을 감출 것이며, 오히려 얼굴을 드러내며 활동하는게 북한에서 훈장 받을 수 있는 증거가 된다. 고정간첩 파견도 특수부대에서 선정하는 경우는 많지 않기 때문에 더더욱 복면부대가 북한 특수부대원이라고 연결짓는 것은 무리다. 차라리 외국처럼 신분노출을 꺼려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는 것을 한국에서 효시화 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광주 민주화운동 현장에도 고정간첩이 활동했다는 것은 증거는 없지만 확신한다. 바로 매일 밤 일일 보고서를 올리고 평양에서는 그런 단편 보고에 의해 하루종일 생방송 운운하며 창작방송을 했다는 것이 그나마 내세울 수 있는 주장이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 혼령들에게 광주 민주화 운동 희생자 묘역에서 참배하는 대통령 이명박>

 

광주 민주화 운동은 쿠데타 반란자 전두환에게 대항했던 애국 시민들의 투쟁 중 가장 큰 성과었다. 비록 실패했지만 4.19 시민혁명에 견줘서도 그 의의는 너무나 크기만 하다. 5.18의 민주화 투쟁 정신은 끝내 6.10 시민민주화 투쟁으로 연결되어 마침내 전두환과 노태우를 법정에 세울 수 있게 된다. 지금 오직 전두환을 옹호하는 일부 몇 몇에 의해 폄하될 뿐, 매국녀 민비에 대항에서 봉기했던 동학농민 혁명 봉기 이후로 가장 처참했던 민주주의 회복 유혈혁명 시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