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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민주당 간략사

대한인 2013. 12. 1. 06:17

<개인적으로 평가하는 한국정당사 분류, 큰 사진은 첨부파일>

 

1945년 9월6일 조선건국준비위원회(여운형)가 '조선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한다.

상해임시정부 환국 환영국민대회, 한국국민당, 고려민주당, 조선민주당 등 민족주의 민주진영은 여기에 크게 반발하여 결집한다. (송진우, 김성수, 김도연, 장덕수, 백남훈, 허정, 홍성하, 유억겸, 윤보선 등)

 

(송진우는 "일찍이 너희들은 고이소총독 관저에서 합법운동을 일으키려다가 조소당한 도배들이며, 해운대 온천에서 일본인 진호의 협력과 조선의 라우엘이 될 것을 꿈꾸었던 도배들이며, 일본의 압박이 소멸되자 경무총감과 경기도 경찰부장으로부터 치안유지 협력의 위촉을 받고 피 흘리지 않고 정권을 탈취하겠다는 야심을 가지고 나선 일본제국의 주구들이다"라고 여운형을 비판했다. - 송진우는 1945년 12월 12일 사회민주주의 위원회 행동대원 한현우에게 암살당한다.

 

나중에 박헌영의 남노당에 포섭되어 남노당국회프락치 사건으로 처벌받은 김약수와 노일환은 초기에는 김구의 협상 통일론에 동조하며 김구에게 접근하는 등 극좌파 수준이었으나, 양군철수 주장관철 과정에서 나 돈 공산계 유인물 - 조선에서 분할계획을 배격하자! 남조선 단독정부를 계속 반대하자! 양군 동시 철퇴로 조선통일 민주주의 정부수립을 우리 조선인에게 맡기자! 국제 제국주의 앞잡이 이승만과 김성수 등 친미자들을 타도하자! 노동 임금을 지금의 배로 올려라! 모든 정권은 인민위원회에 즉각 넘겨라! -의 주장이 김약수 노일환 등의 주장과 너무나 유사했기에 김구마저도 근심했다.)

 

1945년 9월 16일 천도교 회관에서 "한국민주당(한민당)"을 창당하고, 이승만, 김구, 이시영, 문창범, 서재필, 권동진, 오세창을 공동대표로 추대하며 수석총무에 송진우를 선임했다.

 

(조선민족당과 한국국민당의 공동비율로 8명의 총무(원세훈, 백관수, 서상일, 김도연, 허정, 백남훈, 조병옥, 김동원)를 두고 중앙감찰위원 30명에 각 실무부서를 책정했다. 1947년경 당원의 수가 86만 5,760명이었다.)

 

창당결의문

 

일본 제국주의 철쇄는 끊어졌다. 혈한의 투쟁! 참으로 36년, 세계사의 대전환과 함께 우리는 드디어 광복의 대업을 완성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반만 년의 빛나던 역사를 도로 밝혀 완벽무결한 자주독립의 국가로서 구원의 발전을 약속하게 되었다.

3천만 가슴에 뒤꿇어 용솟음치는 오늘의 기쁨이여! 이 기쁨은 곧 혁명동지들에게 바치는 감사로 옮겨지고 더욱이 포한종천하신 순국제현에게 생각이 사무치매 도리어 몰래몰래 슬플 뿐이다. 참으로 이 크나큰 광복의 공훈은 해내 해외의 들입고 감추인 무수한 혁명동지들의 혈한의 결정이 아니고 무엇이랴.

우리는 머지않아 해외의 개선동지들을 맞이하려 한다. 더욱이 인방 중경에서 고전역투하던 대한임시정부를 중심으로 결집한 혁명동지들을 생각건데 그들은 두 번 거듭나는 세계의 대풍운을 타서 안으로 국내의 혁명을 고동하며 밖으로 민족의 생맥을 국제간에 현양하면서 나중엔 군국주의 박멸의 일익으로 당당한 명분 아래 맹방 중미소영 등 연합군에 끼어 빛나는 무훈까지 세웠다. 오늘의 기꺼운 광복 성취가 이 어찌 우연한 바이랴.

우리는 맹세한다. 중경의 대한임시정부는 광복 벽두의 우리 정부로서 맞이하려 한다. 그리고 또 우리는 약속한다. 군국주의의 전루를 폭멸하고 세계평화를 확립시키는 세기적 건설기를 당하여 자주독립을 회복한 우리는 맹방 제국에 최고의 사의를 표하는 한편으로 국제평화의 대헌장을 끝까지 준수 확충하려 한다.

나아가 우리 민족이 장래할 세계의 신문화 건설에 뚜렷한 공헌이 있기를 꾀할진대 무엇보다도 완벽무결한 자주독립국가로서 힘차게 발전해야 될 것이다. 이는 오직 전제와 구속없는 민족주의 제도 앞에 개로개학으로써 국민의 생활과 교양을 향상시키며 특히 근로대중의 복리를 증진시켜 호말의 차별도 중압도 없기를 기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전국민의 자유로운 발전을 보증하며 전민족의 단결된 총력을 기울여 써 국가의 기초를 반석 위에 두고 세계 신문화 건설에 매진하려 한다.

동지여, 모이라! 한국민주당의 깃발 아래로.

 

한민당은 자주독립국가의 기약, 민주주의 정체의 수립, 근로대중의 복리 증진, 민족문화의 앙양과 세계문화에의 공헌, 국제헌장의 준수와 세계평화의 확립 기약 등의 내용을 정강으로 채택했다.

 

정책으로는 국민기본생활의 확보, 호혜평등의 외교정책 수립,언론, 출판, 집회, 결사 및 신앙의 자유, 교육 및 보건의 기회균등, 중공업주의의 경제정책 수립, 토지제도의 합리적 재편성(농민들에게 분배), 국방군의 창설을 내세웠다.

 

한민당은 공산주의 세력인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의 조선인민공화국 수립 선포에 대항하기 위한 제반의 세력들이 모인 정당이었다.

따라서 집단의 구성은 매우 혼란스러웠다. 이승만의 대한독립촉성회, 김구의 한국국민당, 김병로의 조선민족당, 백관수, 조병옥, 장덕수 등 신간회 출신들, 김성수, 김준연 등 대지주 재벌출신들, 나중에 조선공화당을 만든 김약수 등 독립당출신의 공산변절계열에다 서구식 민주주의에 익숙한 해외유학파, 경기 영남의 지식인 계층까지 복잡했다. (어찌보면 범국민참여세력이었다고 할 수도 있다.)

 

건국에 대한 뜻은 같았지만 실천방법에 있어서 미군정과의 우호관계를 유지해 원만하게 풀어나가자는 주장에서부터 미군정과 대립각을 세우기까지 순탄하지는 않았지만 좌익세력을 척결하고 나라를 세우는데 큰 기여를 했다.

 

(미군정의 행정고문으로 김성수, 김용무, 김용순, 강병순 등이 참여하고, 경무부장에 조병옥, 수도청장에 장택상이 참여했다.
제헌의회가 탄생하고 건국준비가 진행되면서 미군정 하지는 자신들이 추천하는 인사들을 발탁해 줄 것을 이승만에게 부탁했지만 거절 당한다.

 

한편으로 한국민주당을 창당하는데 발로 뛰었던 송진우, 김성수를 들어 한국민주당을 보성파(보성전문학교) 혹은 호남파(송진우의 고향)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명백히 잘 못된 것이다.

이런 방식의 접근은 안그래도 항일투쟁세력 내부에서 발생했던 평안도파와 경기파의 알력같은 것도 소급하게 됨으로 적절치 않다고 하겠다.)

 

소련의 집요한 외교정책으로 인해 신탁통치 논란이 발생하자 한국민주당 내부에서도 노선갈등이 나타났다.

1946년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면서 이승만은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했다.
같은 임시정부파임에도 김구 계열은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했고, 이승만은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했다. 한민당이 이승만의 주장에 동의하면서 단독정부 수립 주장이 힘을 얻게 된다.

 

(일부에서는 미소공동위원회 회담 참석차 서울에 온 소련대표 스티코프 중장의 기자회견을 내세워 미국이 신탁통치를 먼저 주장했다는 근거로 내세우기도 한다.

갈 수록 공개되고 있는 러시아 비밀문서들에 의해 스탈린은 남북분단과 함께 남침전쟁을 통해 미국과 중국의 힘을 함께 소진시킬 의도를 실천했다.

이 당시에는 남하정책을 포기할 수 없는 소련입장에서는 유럽에 위성국가들을 건설하고, 몽골을 위성국가화 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한반도에서 북한을 위성국가화 하겠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이 대목은 한국 내부의 상황에서도 충분히 나타나고 있다. 친북좌파들의 서울에서의 신탁통치반대 궐기 대회 당일날에 갑자기 신탁통치 찬성 지시가 급하게 명령으로 내려와 준비했던 플랙카드에 적힌 신탁통치 반대 글자를 찬성으로 바꾸느라고 큰 소동이 발생했다.)

 

나중에 조봉암의 발언에서도 언급되듯이, 미소가 철수한 후에 남북협상으로 남북통일에 합의한 후 정부를 세우자는 세력과 빨리 남한만이라도 안정시키기 위해 단독정부를 수립해야 한다는 세력이 있었고, 관련국가들과의 관계를 고려해서 신중하게 정부를 수립해야 한다는 세력이 있었다.)

 

이승만은 전북 정읍에서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했다. 이후 이승만은 민족통일총본부(1946.6.29)을 결성해 자신의 주장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한다.

 

민족 현실론과 이상론 사이에서의 애매함은 장덕수 암살사건에서 잘 드러난다.
장덕수는 미소간의 냉전과 소련의 남진정책으로 인해 남북한 유일정부의 탄생이 어렵다고 확신했다. 이에따라 단독정부수립으로 갈 것으로 확신하고 남한정부의 안정성에 맞춰 선거대책예산을 수립한다.
공산주의자들의 침투를 막기 위해서는 농촌과 공장 지대를 중점으로 해서 240명의 후보를 내고 1인당 100만원씩 선거자금을 집중지원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신탁통치에 찬성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져 종로경찰서 경사 박광옥(23세)과 배희범(20세)에게 암살당한다.

 

현실에 있어서 김구의 남북협상 통일론은 실현되기 어려웠다. 이미 김일성은 소련 극동군 대위의 자격으로 들어와 가명을 쓰면서 정치공작을 한 후 평양을 점령했기 때문이다.

소련의 남진정책은 유럽에서 뿐만 아니라 아시아에서도 그대로 나타나 자신의 군대 소련군 대위 김일성을 내세운 이상, 더구나 미영중이 세계에 조선의 자주독립을 공포한 카이로회담 선언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기에 한반도 통합정부의 탄생을 기대할 수 없었다는게 맞는 분석이다.

결국 김구는 비현실성으로 인해 이상하리만치 후세의 평가와 다르게 당시에는 남한과 북한 그 어느 곳에서도 세력을 확대하지 못하고 오히려 위축되고 만 것이다. 당장 아래에 언급할 5.10 제헌의원 총선거에서도 김구는 승리하지 못했다.

 

한국민주당은 카이로회담에서의 독립공약을 내세워 신탁통치안을 반대하는 결의를 제헌의회에서 표결로 통과시킨다. (그 지지를 바탕으로 이후 한국 건국을 하게 된다.)

 

5.10 제헌의원 총선거에서 이승만이 이끌던 '대한독립촉성국민회'의 55석에 이어 두 번째인 29석을 확보하는데 머물지만 정치적 투쟁성과 장악력은 이승만 계파에 비해 강했다.

 

(제헌의회의원 선거는 1948년 2월 6일 UN총회 한국위원회에서 다뤘던 의제인 가능한 지역 내에 한하여 선거를 실시하라는 유엔 소총회의의 투표결과에 의해 기반이 조성됐다.

유엔결의를 기초로 1947년 9월 3일에 미군정하의 남조선과도입법의원에 의해 만들어진 미군정하의 남조선과도입법 의원법을 골격으로 제헌의원선거법이 마련됐다.

이 임시선거법안은 대한민국 국회에서 자체 국회의원선거법을 제정할 때까지만 유효했다.

 

친일파를 배격하기 위한 선거권 박탈에 관련 법안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일본 정부로부터 작위를 받았던자, 일본 제국의회의원이었던 자, 중추원 부의장 고문 참의원이었던 자, 부(府) 또는 도(道)의 자문이나 결의기관의 임원이었던 자, 고등관으로서 3등급 이상의 지위에 있었던 자, 판임관 이상의 경찰관급, 헌병 헌병보이거나 고등경찰의 직에 있었던 자, 밀정행위를 한 자 등의 선거권을 제한한다."

 

여기에다 유권자로부터 200명 이상의 출마지지서를 작성해서 제출해야 한다는 항목이 있었다.)

 

제헌의회의원 선거에서 거대 무소속 세력을 제외하면 최대당이 된 한국민주당은 유진오가 기초한 내각책임제 헌법안을 기본으로 하여 헌법제정을 시도하지만 이승만의 대통령제 주장을 꺾지 못했다.

 

(제헌국회는 구성이 끝나자 헌법제정을 위한 절차에 들어가 헌법기초위원회를 구성했다. 유진오는 신익희가 구성했던 정경연구회도 끌어 들여 행정연구반원들과 함께 헌법안 구성작업을 진행했다.

국가권력구조를 어떻게 확정하는가에 있어서 내각책임제 양원제와 대통령중심제 대한 논의가 진행됐다. 행정연구반 안과 권승렬 안 모두 내각책임제와 양원제를 지지하고 있었다.

 

이승만은 대통령중심제를 강하게 강조했는데, 그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추측한다면 정치에서의 완전한 승리를 거두기 위해서 대통령제 하에서의 당선, 강력한 집권제를 통한 건국과 국가발전 시행 포부, 미국 정부구조에 대한 경험 등 이었을 것이라고 할 것이다.

 

15차 본회의에서 헌법기초안 상정을 앞두고 이승만은 강력하게 표결을 주장했지만 패배하고 만다. 이에 이승만은 대통령중심제가 채택되지 않으면 정계은퇴를 하겠다면서 퇴장해 버린다.

신생국에서 내각책임제가 혼란이 발생하면 통제가 쉽지 않다는 신익희와 김준연의 정치적 절충이 필요하지 않는냐는 발언에 따라 제헌의회의원들은 밤샘토의를 거쳐 국무총리제를 도입한 절충식 대통령제를 하기로 결정하고 통과시킨다. 1948년 7월 17일 헌법이 공포된다.) 

 

 

결국 대통령제하에 이승만이 대통령이 됐지만, 한민당 당선자 수 저조, 헌법제정에서의 상호 대립, 초대 정부내각 구성에서 반이승만 견제세력의 소외 등 갈등이 점점 커진면서 몰락의 길을 가게 된다.

 

(이승만과의 갈등은 결국 봉합되지 못하고 신익희(대한국민회세력)과 대동청년단(지청천) 세력이 뭉쳐 내각제 관철을 명분으로 내걸고 1949년 2월 10일 한민당을 해체하고 '민주국민당(민국당)'을 창당한다.)

 

사실 한국민주당은 처음부터 장기적으로 존속하기에는 태생적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이승만계의 대한독립촉성회에서 235명이 출마자를 선정했고, 한국민주당에서 91명, 대동청년단이 87명, 조선민족청년단이 20명 등을 출마시킨 가운데, 한국민주당의 당선자가 29명 밖에 되지 않았다.

보다 더 큰 이유는 무소속이 무려 417명이나 출마한 것에서 볼 수 있듯이 한국민주당이 후보자들에게서 당선에 대한 확실성이 없는 것으로 간주될 만큼 인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다른 측면에서 보면, 무소속의 돌풍은 당시 충분히 개인적 명망이 통할만한 시대 상황이었고, 역시 마찬가지로 어떻게 향후 전개될지 모르는 예측불가능을 염두해 둔다면 차후 자신의 길을 정할 수 있는 무소속이 편했을것이다.)

 

이런 이승만계의 우위를 바탕으로 대한민국이 건국되어 대통령에 당선된 이승만은 내각을 구성하는데 있어서 한국민주당을 거의 모두 배제시키고 오직 김도연만을 재무부 장관으로 기용할 뿐이었다.

 

이런 관계는 결국 이승만은 독자적인 정당을 구축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됐고, 이승만에게 분노하게 된 한국민주당은 세력의 새로운 출발을 필요로 하게 된다.

 

한국민주당의 한국정당사에서의 기여는 친북좌파들을 척결하면서 대한민국을 건국하여 지금에 이르도록 시초를 마련했다.

 

(한국민주당 내부에서의 일부 친일파 논란은 상당히 악의적이다. 북한도 이미 명목상 친일파 청산이었지만 실제로는 수 많은 친일파들을 그대로 등용했다. 그 이유는 바로 인적자원의 한계성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