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과 희망을 주는 동기부여

인간의도리인오대덕목(五大德目)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지키자. 태극기, 애국가, 무궁화, 한글 사랑은 애국입니다

조경에 관한 다양한 자료들

카테고리 없음

장준하 선생 연대기

대한인 2013. 12. 1. 06:21

 

이름 : 장준하
출생 : 1918년 8월 27일
학력 : 일본 신학교
약력 : 1945년 김구 주석 비서
1947년 조선 민족청년단 참가
1949년 도서출판 '한길사' 설립
1952년 월간 '사상' 창간
1962년 막사이사이상 언론상 수상
1974년 대통령 긴급조치 제1호 위반으로 구속
1975년 8월 17일 경기도 포천군 약사봉에서 의문사

평북 의주(義州)출생. 일본의 도요[東洋]대학 예과를 거쳐 니혼[日本]신학교를 졸업하였다.
1944년 6월 일본군 학도병으로 중국전선에 배치되었다가 곧 탈영하여 중국군에 편입된 후 6천리를 걸어 김준엽 등과 함께 충칭[重慶]으로 가서 1945년 1월 광복군에 가담해 광복군 대위가 되었고, 1945년 8월 중국 시안[西安]에서 미육군 군사교육을 받고 국내 밀파 특수공작원으로 대기하다가 8·15해방을 맞이했다. 1945년 11월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의 수행원으로 입국, 김구의 비서, 비상국민회의 서기 및 민주의원 비서 등을 역임했고, 1953년 4월 월간 〈사상계〉를 창간하여, 지속적으로 자유·민주·통일·반독재 투쟁에 헌신했다. 1962년 8월 막사이사이 언론문학부문상을 수상했고, 1967년 3월 야당통합을 위한 4자회담을 주선하여 통합을 이루어냈다. 1967년 정계에 들어가 그해 제7대 신민당 소속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1967년 4월 대통령 선거운동중 국가원수모독죄로 구속되어 3개월간 투옥되었으며 그해 6월 옥중출마로 서울 동대문을구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1972년 민주수호국민협의회에 참가했고, 1973년 민주통일당 창당에 참여하여 최고위원에 피임되었다. 1973년 12월 '민주회복을 위한 개헌청원 백만 인 서명운동'을 주도했으며, 1974년 1월 대통령 긴급조치 제1호 위반으로 구속되어 1974년 4월 15일 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12월 지병인 협심증이 악화되어 형집행정지로 출옥했다. 출옥 후 곧바로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서한' 등을 통해 다시 박정희정권과 맞섰고, 1975년초에는 민주회복을 위한 범민주세력의 단합을 강력히 촉구, 각계에서 그의 호소에 동조하는 성명이 잇따르면서 재야세력의 확고한 구심점이 되기도 했다. 1975년 8월 17일 경기도 포천군 이동면 도평 3리 약사봉에서 의문사했다. 저서에 《돌베개》가 있다.


1950 문교부 국민정신계몽 담당관으로
1950 국민사상연구원 기획·서무과장, 사무국장 역임
1952 (9월) 국민사상연구원의 지원으로
1952 (9월) 피난수도 부산에서 월간지 「思想」발간
1952 (12월)「思想」 12월호(4호)까지 발간 후 재정문제로 중단
1953 (4월) 국민사상연구원을 사직
1953 (4월) 『思想界』를 창간
1953 (9월)『思想界』 9월호를 끝으로 부산시대를 마감
1953 (9월) 서울 종로 한청빌딩에서 『思想界』 계속 발간
1958 (8월) 함석헌의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는 글로
1958 (8월) 함석헌과 함께 연행됨
1959 (2월) 이사보안법파동 관련
1959 (2월) 『思想界』 백지권두언으로 자유당 정권 비판
1960 (3월) 3·15부정선거 관련『思想界』 권두언에서
1960 (3월) 집권당의 횡포를 신랄하게 규탄
1960 (5월)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중앙집행위원에 피임,
1960 (5월) 홍보분과위원장 역임
1961 (1월) 국토건설본부(본부장 장면) 기획부장으로 활동
1962 (8월) 1962년도 막사이사이상(賞) 언론·문학부문상 수상
1964 (3월) 한·일굴욕외교 반대투쟁위원회의 초청연사로 전국을
1964 (3월) 순회하며 70여회의 연설 통해 박정희 정권 비판
1964 (4월)『思想界』긴급증간호(한·일회담의 문제점) 발행
1964 (4월) 박정희 정권의 매국(賣國)외교를 규탄
1965 (7월)『思想界』긴급증간호(신을사조약의 해부) 발행
1965 (7월) 한·일협정 조인을 정면으로 반대
1966 (10월26일) 민중당 주최 '특정재벌 밀수진상 폭로 및
1966 (10월26일) 규탄 국민대회' 에서의 연설이 문제가 되어 구속
1966 (10월26일) 연설 내용은 "박정희란 사람은 우리나라 밀수왕
1966 (10월26일) 초", "존슨 대통령이 방한하는 것은 박정희 씨가
1966 (10월26일) 잘났다고 보러 오는 것이 아니라 한국청년의 피
1966 (10월26일) 가 더 필요해서 오는 것" 등
1966 (12월) 보석으로 풀려남
1966 (12월) 다음해(1967년2월)의 공판에서 징역 6월 선고
1967 (1월) 야권의 정치지도자 회담인
1967 (1월) '사자회담(四者會談-유진오·윤보선·이범석·백낙준)'
1967 (1월) 주선
1967 (2월) 사자회담의 결과로 형성된
1967 (2월) 신민당(당수 유진오, 대통령후보 윤보선)에 동참
1967 (5월7일) 대통령 선거법 제148호 위반으로 또다시 구속
1967 (5월7일) 구속혐의는 "박정희 씨는 국민을 물건 취급, 우리
1967 (5월7일) 나라 청년을 월남에 팔아먹었고, 박씨는 과거 공산
1967 (5월7일) 주의 조직책으로 임명되어 조직활동을 한 사람"이
1967 (5월7일) 라 하여 국가원수를 모독
1967 (6월) 제7대 총선에 신민당 후보로
1967 (6월) 서울 동대문(을)구에서 출마하여 압도적인 지지로
1967 (6월) 옥중 당선
1967 (7월1일) 제7대 국회의원으로 4년의 임기 시작
1967 (11월) 국회에 등원하여 의정활동을 시작
1967 (11월) 경제과학분과 위원회와 국방부과 위원회 소속
1968년 (1월1일) 『思想界』발행인직을 부완혁에게 위임
1971 (4월) 신민당을 탈당하여 무소속의원으로 활동
1971 (4월) 자서전 「돌베개」 출간
1971 (5월) 제8대 총선에 국민당 후보로
1971 (5월) 동대문(을)구에서 출마하였으나 여당의 부정선거로
1971 (5월) 낙선
1973 (1월) '10월유신'에 반대하여 양일동과 통일당을 창당
1973 (1월) 통일당 최고위원에 취임
1973 (3월) 제9대 총선에 통일당 후보로 출마했으나 낙선
1973 (3월) 민주회복운동을 지속적으로 추진
1973 (3월) 재야정치세력 연대·연합의 자유로운 촉구·주선을 위해
1973 (3월) 통일당 탈당
1973 (12월) 민주회복을 위한 개헌청원 백만인 서명운동 주도
1974 (1월) 대통령 긴급조치1호 위반혐의 제1호로 구속
1974 (1월) "헌법개정을 빙자하여 국론을 분열시키고 사회의 불
1974 (1월) 안을 조성"했다는 죄목으로 징역 15년, 자격정지 15년
1974 (1월) 선고
1974 (12월) 심장협심증과 간경화 증세 악화로 형집행정지 출감
1975 (8월17일) 경기도 포천군 이동면 약사봉에서 의문의 죽음
1975 (8월21일) 경기도 파주군 광탄면 천주교 묘지에 잠드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