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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주의자의 길(1) -장준하-

대한인 2013. 12. 1. 06:22

 

 

이 글은 『씨알의 소리』1972년 9월호에 게재되었던 글이다.

1
민족주의자가 가야할 길은 무엇인가? 한 인간이 민족적 양심에 따라 자기의 생애를 살아가는 길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기의 개인적인 삶, 고달픔과 보람을 민족의 그것과 함께 하는 것이리라.
민족적인 삶이 헐벗고 굶주리고 억압받고 있을 때 민족적인 양심에 살려는 사람의 눈물과 노력은 모두 이런 민족적인 간난을 극복하려는 데 바쳐진다.
하물며 민족이 민족으로서의 존재조차 없어지려 할 어두운 시절에는, 민족이 외세의 침략에 눌리어 그 마지막 숨통이 끊어지려는 암울한 시절에는, 민족주의자는 자기의 생명조차 민족적인 삶을 되찾는 싸움 속에서 불태우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민족의 생명, 민족의 존재가 이미 없어져버릴 때는 민족의 한 사람인 그의 개인적인 인간적인 생명과 존재조차 없어져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민족적인 생명과 존재와는 따로 있는 자기, 민족의 생명이 끊어진 뒤에도 살아 있는 자기, 민족이 눌리고 헐벗고 있을 때 그렇지 않은 자기는 이미 자기 아닌 자기이며, 그렇기에 자기의 생명을 실현하는 인간이 아닌 것이다.
이것이 민족적 양심에 따라 살려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자기의 삶을 사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 참으로 인간적인 자와 그렇지 않은 자가 살아간 길의 갈림점이었다.
애국자의 길과 매국노의 길, 민족적 사랑의 길과 배신의 길이 갈리는 길목인 것이다.
그렇기에 비민족·반민족적인 길에 빠져버리거나 스스로 택하는 자의 모든 '개인적인', '인간적인' 번뇌는 아무리 그것이 절실하고 불가피하고 자기대로 푸념할 수 있는 것일지라도 이미 진실로 '인간적인' 것은 아닌 것이다. 인간의 가장 고귀한 모습, 또 그의 본질은 자기를 성장시켜 가고 실현해 가는 것이지 노예의 부귀와 영화에 있지 않은 것이다. 저 길 바닥에 던져진 한 개의 돌멩이조차 모진 비바람 속에서도 끝까지 그가 돌임을 지켜갈 때 그는 자기를 실현하고 있다고 하겠거니와 설사 옥(玉)으로 바뀐다 하더라도 그 때는 하나의 돌은 아닌 것이다.
하물며 노예의 부귀와 영화와, 참으로 인간적인 영광과는 정반대의 길이며, 오히려 노예 가운데서도 이를 벗어나려는 싸움이야말로 고귀한 인간적인 삶의 모습인 것이다.
불행하게도 민족적인 삶의 길이 험난했던 민족의 경우에는 살아가는 일조차 이렇게 험난했다. 말 그대로, 말은 쉽지만 행동은 힘들었고 그랬기에 구슬처럼 맑게 살아간 젊은 시인조차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윤동주)라고 옥중에서조차 절규하지 않았는가?
우리 민족의 지난 날, 더욱 가까이 최근세는 정말 험난의 연속이었다.
세계의 시궁창이 이리로 흘러들었고, 세계의 모순, 세계사의 범죄가 이 땅을 무대로 일어났다. 산 높고 물 맑은 강토에 살던 착한 우리 백성들은 홍수처럼, 악마의 불길처럼 밀려드는 이 세계사의 시궁창물에 휩쓸리지 않을 수 없었다. 세계사의 악 중의 악인 제국주의가, 악마중의 악마인 군국주의가 그 가장 표독한 이빨을 우리 민족에 들이댔던 것이다.
누르고 뺏고 마침내 말도 빼앗고 성조차 갈려고 했다. 까닭 없는 싸움터로 내몰아 앞세워 죽이고, 마지막 땀방울까지 빼앗아가고 인류의 족보 위에 한민족의 존재조차 말살하려는 것이었다.
하건만 표독한 이빨 앞에서도 끈질긴 항쟁이 있었다. 비록 총칼 든 전투, 이름난 의사·열사가 아니더라도 들판에서 공장에서 낯선 이국 땅에서 끊임없이 싸웠다. 이 싸우는 민중에게는 바로 민족적인 삶이 자기의 개인적인 삶이었고 국토를 빼앗기는 것은 생활의 터전을 빼앗기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광복은 생활의 터전과 자기의 인간적인 삶을 되찾는 길이었다.
이와는 달리 애국이 자기의 삶과 일치하지 않고 지식과 논리가 삶의 터전에 뿌리박지 못하고 있던 일부 지식인 지도층에서는 민족에 대한 배반도 일어났다.
하지만 항쟁의 길이 고달프고 외로운 듯 했지만, 그 실은 온 민중과 함께 있는 것이기에 그렇지 않았으며 그렇기에 그 승리의 영광은 더욱 보람찬 것이었다.

2
장구한 싸움 끝에 일제는 패망하고 우리 민족에게는 광복이 왔다.
빼앗던 자가 망하고 억누르던 자가 쫓겨가고 포악한 침략전쟁이 패망하여 우리 민족의 삶을 다시 찾은 이 해방의 순간보다 더한 감격이 어디 있겠는가?
민족해방의 환희, 그렇게도 그리던 기쁨, 이 기쁨을 기다리고 참고 견딘 어두운 고통, 이 고통스러운 싸움 속에서 그리던 희망, 이 기쁨과 희망을 이제 현실로 실현하려는 설레임, 이 벅찬 설레임을 무엇에다 비길 수 있으랴.
이 벅찬 설레임이 하나하나 실현되고 알차게 영글어갔다면 이에 비길 행복이 어디 있으랴만 세계사의 흐름은 그렇게 쉽사리 우리 민족의 앞길을 밝혀주지 않았다. 압제자 일본군국주의를 무장해제하기 위해 남북한에 나누어 진주한 외국군은 군사적 진주와 점령에 그치지 않고 이것을 정치적 진주와 점령으로 굳혀갔다. 세계사의 새로운 모순, 동서냉전체제라는 새로운 범죄가 우리의 강토, 우리 민족의 생명 위에서 새로운 운명을 장난질했다.
게다가 세계사의 이와 같은 새로운 모순이 이 민족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이 새로운 외세에 의한 민족의 양분(兩分)이란 것을 분명히 깨닫지 못하고 이를 권력장악의 조건으로 이용한 일부 신생권력층은 안에서, 밖에서 강요한 양분체제에 대응하였다.
통분스러운 일이지만 이렇게 민족은 양분되었고, 통일을 갈망한 민중의 염원은 현실적인 힘을 얻지 못하고 내외가 상응한 분단체제에 묶여 들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원통한 냉전체제에 의한 민족의 분단은 기억하기도 참혹한 열전으로까지 터지고 말았다. 세계의 갈등이 그 가장 참혹한 열전으로까지 터지고 말았다.
도대체 우리에게 언제 그토록 불구대천의 원수로 갈라진 무슨 주의가 있었고, 그 주의에 따라 나라와 민족을 두 동강 내어 살기를 원했던가? 그뿐인가, 역사의 똥인 전쟁, 그 가장 더러운 동족상잔을 우리가 청부맡아 했다니 5천년 민족사 앞에 아니 인류의 역사 앞에 무슨 낯을 들 수 있으랴.
회상하기도 끔찍하고 몸서리치게 싫지만 다시 다짐하지 않을 수 없다.
전쟁에 앞서 평화를 확보한 자보다 이긴 승자는 없다. 하물며 동족과 형제끼리의 싸움에 평화보다 더 영광스러운 승리는 없다.
어떻든 우리 민족은 금세기 가장 더러운 세계사의 범죄를 청부받았다.
전후(戰後) 냉전체제에 의한 남북분단은 적어도 두 가지 의미에 있어서 우리 민족에게 자기부정을 의미하고 있다.
하나는 이 분단에 대응한 국내세력의 움직임이 어떠했든 그 기본적 계기는 외세에 의한 것이었다.
그리고 다음 하나는 분단된 민족은 역사의 실천단위로서는 적어도 하나의 주체적 자기존재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는 없다. 둘로 나누어진 그 한쪽은 어느 쪽도 하나의 주체적 단위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는 강변(强辯)은 분단의 합리화를 위한 거짓명분일 뿐이다.
어떻든 이 분단체제 그 세계적 주범인 양극냉전체제도 긴장완화니 해빙이니 하고 근본적으로 새로운 모습으로 변해갔다. 미국과 소련, 미국과 중공의 대결과 대립의 완화, 소련과 중공의 동맹과 대립의 과정은 근본적으로 우리의 주변정세를 바꾸어 놓았다.
적어도 냉전체제의 최전선에서 총칼을 앞세운 대결은 의미를 잃었고 오히려 대국의 공존을 방해하는 것으로도 보이게끔 되었다.
이와 같은 양분 무력대결의 근본조건이 바뀌어져가는 상황 아래 우리 민족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외세에 의한 자기분열을 강요했던 자기부정의 조건이 스스로 변화하는데 그래도 우리는 어리석게도 자기부정을 고집하고 있어야 한단 말인가?

3
이와 같이 새로운 정세 앞에서 우리 민족이 해야할 단결은 스스로 분명해진다. 그것은 갈라진 하나를 다시 하나의 자기로 통일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노력과 힘을 갈라진 양쪽에서 함께 기울이며 기르는 것이다.
민족적 양심에 살려는 사람 앞에 갈라진 민족, 둘로 나누어진 자기를 다시 하나로 통일하는 이상의 명제는 없다. 이를 위한 안팎의 조건을 만들어가는 일 이상의 절실한 과제는 없다.
어떤 논리도 이해도 이 앞에서는 뒤로 물러나야 한다.
이런 대원칙 아래서 굳어진 논리, 고집스러운 자세를 고쳐가야 한다.
근본과 말단을 바꾸어서는 안 된다. 무엇이 거기에 따르는 것인가를 가려야 한다.
모든 통일이 좋은가?
그렇다. 통일 이상의 지상명령은 없다. 통일로 갈라진 민족이 하나가 되는 것이며, 그것이 민족사의 전진이라면 당연히 모든 가치 있는 것들은 그 속에 실현될 것이다. 공산주의는 물론 민주주의, 평등, 자유, 번영, 복지 이 모든 것에 이르기까지 통일과 대립되는 개념인 동안은 진정한 실체를 획득할 수 없다. 모든 진리, 모든 도덕, 모든 선이 통일과 대립하는 것일 때는 그것은 거짓명분이지 진실이 아니다.
적어도 우리의 통일은 이런 것이며, 그렇지 않고는 종국적으로 실현되지도 않을 것이다.
지난 7월 4일 남북한공동성명이 발표되고 8월말과 9월초에는 적십자회담을 위하여 갈라졌던 동포가 27년만에 오고갔다.
민족적 양심에 살려는 사람의 지상과제가 분단된 민족의 통일이라고 할 때 어떻게 이 사실을 엄청난 감격으로 받아들이지 않겠는가?
말로 따지고 글로 적기 전에 콧날이 시큰하고 마침내 왈칵 울음을 떠뜨리지 않을 수 있으랴.
이것을 감상이라고도 하고 감정적이라고도 할지 모르지만, 이 감상, 이 감정 없이 그가 하나의 인간, 민족분단의 설움으로 지새워온 민족양심을 가진 사람이라고 하겠는가.
생활에 바빠 일에 쫓기어 이런 소식에 늦은 우리 동포가 있을지 모르나 그 모든 민중의 소리내지 않는 가슴의 밑바닥에 파도처럼 철렁이는 감격을 누가 부인할 수 있으리오.
그리고 이 뜨거운 눈물과 감동과 열정 없이 어떻게 얼음처럼 쇠처럼 차디차게 얼어붙었던 분단의 벽이 녹아내릴 수 있겠는가?
실로 남북을 잇닿은 전화줄은 한두 사람의 대화의 수단이 아니라 갈라졌던 형제동포의 눈물과 호소와 환희를 서로 만지는 가슴이며 손이어야 한다.
남북공동성명과 적십자회담의 결과로 진실로 평화적인 민족통일의 길이 열린다면 이보다 더 위대한 일은 세계사에도 우리 민족사에도 없을 것이란 말을 감히 하겠다.
생각해 보면 지난 4반세기의 민족분단은 얼핏 말하듯 이념과 제도의 차이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민족 한 사람의 생활의 분단이자 곧 파괴요, 나 자신의 분열이요 파괴였다.
남북한에 걸쳐서 민족의 정력은 모두 민족적 적대, 자기파괴를 위해 고갈될 지경에 이르렀다. 이 가난, 이 부자유의 최대의 원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민족분단에서 찾지 않을 수 없다. 그보다 더는 '이산가족' 흩어진 가족이란 말에도 보이듯 우리들 한 집안 또 한 사람의 가장 큰 인간적 불행이 어디에서 왔는가를 따져 생각해 본다면, 그 역시 민족적 분열에서 왔음을 깨닫지 않을 수 없다.
부모형제가 만나지 못하고 부부가 헤어져 살고, 형제끼리 죽이고 죽었고, 어버이와 자식을 잃은 불행이 어디에서 왔던가?
남북분열, 적대적 대결로 남북 양쪽 모두 정치, 경제, 사회, 문화가 얼마나 비뚤어져 달리기만 해서 마침내는 모두 절름발이가 될 지경에 이르고 말았지 않은가?
그러하기에 우리 민족의 양분, 무력대결은 휴전선의 튼튼한 철조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민족 또 개인 한 사람 한 사람의 모든 것의 파괴와 왜곡을 뜻한다.
진실로 남북공동성명과 적십자회담이 민족평화통일의 첫발이 된다면 그것은 우리 민족 모두의 인간적 고통의 해결이요, 민족사가 자기파괴와 왜곡의 역사를 청산하고 새로운 막을 올리는 계기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