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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공산주의 반자본주의 중도주의자 조봉암

대한인 2013. 12. 1. 06:25

 

[공산당과 그 지도 아래 있는 모든 정치활동을 부인하는 성명서] - 1946년 6월 23일. "우리는 노동계급의 독재나 자본가 계급의 전제를 반대한다"

박헌영이 카멜레온 여운형을 암살 시도하며 한국을 공산화 하려고 난동을 부리자 공산주의에 환멸을 느끼고, 독립운동 후 공산당을 탈퇴하고 인천치안유지회를 조직하여 산업시설 보호와 치안유지에만 힘썼다.

48년 6월 1일 제헌의원 35%를 차지하는 무소속 72명과 함께 무소속구락부를 발족하고, 자신은 '미국, 관련국가들과의 관계를 고려해서 신중히 정부를 세워야 한다'는 2그릅에 속한다고 했다.
1그릅은 미소가 철수한 후에 남북협상으로 남북통일에 합의한 후 정부를 세우자면서 속내는 공산화를 획책하는 좌파 계열이고, 3그릅은 내전이 발생하더라도 빨리 남한만이라도 공산주의의 마수로부터 안정시키기 위해 단독정부를 세우자는 것이었다.

초대 농림부 장관이던 시절에는 (호남중심의) 토지자본을 공업자본으로 유도하기 위해 이승만이 실시한 자유주의적 유상토지개혁 정책을 한민당의 반대 속에서도 순조롭게 진행해 나갔으나 북한의 침략을 당해서 끝내 완수하지는 못했다.

조봉암의 추진력이 돋보이는 대목이고, 결과적으로 유상토지개혁으로 인해 대북무장격퇴기 때 농민들이 북한의 사회주의를 거부하게 한 성과로 나타났다.

공산주의를 버린 조봉암은 진보당 창당준비위원장 자격으로 1956년 5월 15일에 실시된 제3대 정부통령 선거에서 유효 득표율 22.5%에 이르는 2백16만 3천8백8표를 얻어 국민적 지지를 확대해 나갔다.

1956년 11월 10일의 진보당 선언문에서
2. 우리는 공산독재는 물론 자본가와 부패분자의 독재도 이를 배격하고 진정한 민주주의체제를 확립하여 책임있는 혁신정치의 실현을 기한다.
4. 우리는 안으로 민주세력의 대동단결을 추진하고 밖으로 민주우방과 긴밀히 제휴하여 민주세력이 결정적 승리를 얻을 수 있는 평화적 방식에 의한 조국통일의 실현을 기한다.
를 강령으로 발표함으로써 중도주의 노선을 본격적으로 걷기 시작했다.

불행하게도 통일론에서 당시 시대적 상황과 충돌했다. 건국 이전부터 폭력을 일삼아 왔던 공산주의에 대한 불안감 속에서 실제로 북한의 대규모 침략으로 수 백만명이 죽거나 다친 분노로 인해 국민들은 철저한 반공노선을 견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국민적 비극의 경험은 헌법에서도 그대로 나타났다. 대한민국이 한반도에서 유일한 합법 국가이며, 북한은 반국가단체로 북한지역을 불법 점령하고 있다고 보았다. 대한민국의 영토는 북한지역을 포함한 한반도와 그 부속 도서라고 명시했다.

북한에게서 그 어떠한 침략에 대한 사죄나 배상이 없는 가운데 무조건 북한을 평화적으로 수용하자는 조봉암의 주장은 당시 상황에선 받아 들여지기 힘들었다. 지금도 역시 무조건적인 북한 포용 주장은 국민들에게 절대적 지지를 못받고 있다.

조봉암의 너무 앞선 비현실적 주장은 위험하기조차 했으며, 당장 자유당의 정권유지에 위협이 됨으로써 과거 공산주의 활동을 걸어 간첩죄를 조작해서 처형하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