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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굴(석굴암)에 대한 조선과 일본의 대응

대한인 2013. 12. 1. 06:31

 

석굴암은 18C 중엽 조선의 지도 경주부에 '석굴'로 기록되어 있다.(조선 화가 정선은 '골국석굴'이라고 적었다.)

현대사에는 1909년에 석굴이 처음 발견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일본의 시각일 뿐이다.

석굴암은 숙종 29년(1703- 종열), 영조 34년(1758-대겸)에 수리되었고, 말엽에도 울산병사 조예상에 의해 수리된 적이 있다고 전해진다.
그럼에도 1909년 발견된 당시에는 석굴암 천장이 일부 붕괴되어 토석이 떨어져 들어 왔고, 불상의 코는 깨지고 연화대도 심하게 갈라지고 깨져 있었다.

 



조선 말기 정부는 석굴암을 수리할 여력이 없었거나(매국녀 민비는 당시 충북에 자신이 피신할 대규모 궁궐 공사를 벌이고 있었음에도) 의도적으로 방치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불자들의 무관심도 석굴암이 붕괴되도록 했을 것이다.

1910년 강제병합 되면서 일부 일본인은 석굴암 내부의 석물들을 일본열도로 반출하려는 시도를 한다. 24위의 조각상 가운데 실제 2위는 사라져서 지금도 나타나지 않고 있다.
그 이후로 본존불 이마에 박힌 거대 보석을 빼갔다느니 몸체 안에 보석이 들어 있을까봐 엉덩이 부분을 깼다느니 하는 소리마저 돌았다.

현지 관리의 반대로 총독부는 (조선이 병합되었음으로) 총독의 현지 시찰을 통해 현지 보존쪽으로 방향을 선회한다.

석굴암을 대대적으로 수리하는데 투입된 기술진은 당시 조선의 물자를 수탈해서 공출하고, 만주 정복을 위한 일본군 수송로 확보 철도공사를 하던 인부들이었다.(러일 전쟁 당시 일본은 지나 내륙에서의 전투 때 조선인들에게 일당을 주고 동원해서 군수물자를 수송한 경험이 있었다.)
이들은 기차 터널 공사기법을 사용하기로 결정하고 목재로 버팀목을 만든채 작업에 들어 갔다.

다만 시멘트로 보수 공사를 했다는 점에서 비난 받고 있지만 시멘트 공사는 당시로서는 최첨단 공사법이었다.
(1892년까지도 시멘트에 철근을 섞는 공사법 특허 출원이 이뤄지고 있었고, 실제 시멘트 건물은 1871년 시카고 대화재 이후 등장했다. 시멘트의 폐해성이 발견될 시기가 아니었다.)
이 점은 해방 후에 한국 정부도 역시 별다른 방법이 없어서 1961년에도 시멘트 공사로 석굴암을 재보수 했다는 점에서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누수로 인해 생겨난 이끼류를 제거할 목적으로 고온증기 세척으로 이끼를 없앴다. 이끼는 없앴지만 조각상 표면이 마모되어 돌가루가 떨어지는 부작용이 생겼다. 한국도 역시 1957년까지 고온증기 세척법을 사용했으나 중단해야 했다.

중요한 것은 오랫동안 보존방식에 있어서 습도 조절(결로현상 방지)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는 점이다.

처음 석굴암을 조성할 당시 샘물을 일부러 바닥 밑으로 흐르게 했다. 샘물로 인해 석굴암 내부의 온도차는 바닥이 차가워져 바닥에만 이슬이 맺히게 된다. 이렇게 함으로써 벽면과 천장에는 이슬이 맺히지 않도록 했다.

이 조건은 석굴암을 노상에 완전개방시켰을 때의 이야기다. 석굴암을 목조로 암자를 지어 보호한다거나 유리 등으로 에워쌌을 때는 현재처럼 공기냉각 장치를 설치해야 한다.
천장의 누수는 또다른 문제다. 천장의 방수는 다른 방법을 써야 한다.

일본이 반출을 포기하고 보수 했다고 고마워 해야 할 이유는 단 하나도 없다. 일본이 조선을 강제 병합하지 않았다면 조선은 스스로 더 자연적인 전통 방법으로 보수했을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