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폐의 제도는 국가를 위해 우선적으로 해야 할 바이니 대개 국용을 풍담하게 하여 민력을 유복하게 하기 때문이다. 성종15년 4월(996년)에 비로소 철전을 사용하였다" - 고려사 식화지(食貨志)
통설에 따르면 성종은 의천과 윤관의 주청에 의해 주전제를 실시했다고 한다. 고려시대에 발행된 화폐명칭들은 해동통보, 해동중보, 삼한통보, 삼한중보, 동국통보, 동국중보 등과 함께 은병, 소은병(작은 은병) 등으로 불리고 있다.
제도적 관점이 아닌 일반적으로 편한 시각에서 고려의 화폐에 접근해 보자.
우리나라 최초의 화폐 사용은 언제부터였을까? 누구도 확신할 수 없지만 기록을 통해 유추해 볼 수 있다.
기록에는 없지만 고려시대 화폐로는 해동원보는 실체로 존재하고 있고, 기원전 3세기로 추정되는 고조선 화폐 원절식명도전(박도 모양의 주전)도 실물로는 많이 발견되었다. 또한 삼국시대 이전 삼한시대에 쓰였던 철정전도 실물로 존재한다. 다만 기록에 남아 있지 않을 뿐이다.
<고조선 화폐 원절식명도전, 삼한시대 화폐 철정>
여기에서는 기록을 살펴보도록 한다.
정조와 순조 때의 사학자인 한치윤(韓致奫)의 해동역사 권25 식화지 전화(錢貨) 편에서 중국의 문서를 인용하여 우리나라 화폐의 역사를 설명하고 있다.
"진한국(辰韓國)에서는 철이 생산된다. 시장에서 매매하면서는 모두 철을 써서, 마치 중국에서 전을 쓰는 것과 같이 한다. <삼국지>
동옥저국(東沃沮國)의 돈에는 문양(文樣)이 없다. 동옥저의 혼인 풍속은 여자의 친정집에서 돈을 요구하는데, 신랑 집에서 돈을 다 지불하면 이에 신랑 집으로 돌아온다.” <위략(魏畧)인용-천지(泉志)>
이 대목은 옥저의 혼인풍습제도가 10살 이전에 미리 혼약을 하고 아내를 데려와 같이 살다가 성인이 되면 여자가 친정으로 돌아가 남편의 폐백을 받고 나서야 다시 시댁으로 떠난다는 민며느리제도였다는 점과 남편은 이를 위해 폐백으로 폐전을 지불했다는 것으로 보아 신뢰할만 하다.
다만 한치윤은 '동옥저국(東沃沮國)의 돈에는 문양이 없다'고 하였는데 출처는 불명확하다. 그럼에도 그 시대의 여타 문양없는 동전의 발견으로 인해 같은 시기에 동전을 썼다면 역시 문양없는 동전이었을 것이라고 수긍할 수 있다.
고구려의 풍습 또한 삼국지에 의하면 미리 혼약이 이뤄지면 저녁에 신부집에 당도하여 자신의 이름을 외치며 꿇어 절하며 첫날 밤을 간청한다. 몇 번 한 후에 받아들여 지면 신랑은 돈과 폐백을 자리에 쌓아 둔다라고 했다.
신라국(新羅國)의 돈에는 문양이 없다. 전등록(傳燈錄)에 이르기를, 홍주(洪州)의 개원사(開元寺)에 성을 쌓으면서 신라의 승(僧) 김대비(金大悲)에게서 돈 2만 냥을 받고는 육조대사(六祖大師)의 머리를 가지고 해동으로 가서 공양하게 하였다.
위에서 말한 문양이 없는 쇠로 만든 돈은, 살펴보건대, 파저(巴氐), 담지(倓氏), 빈지(賓氏), 소월지(小月氏), 대진국(大秦國), 동옥저(東沃沮), 아구강(阿鉤羌), 파사국(波斯國), 고창(高昌), 여국(女國), 우전(于闐), 두박(杜薄), 신라(新羅), 불니(佛尼), 아기니(阿耆尼), 굴지(屈支), 가필시(迦畢試), 도화라(睹貨邏), 범연(梵衍), 삼불제(三佛齊), 층단(層檀), 남비(南毗) 등 여러 나라는 모두 금과 은으로 돈을 만드는데, 모두 문양이 없어서 구분할 수가 없다. 이에 지금 각각 한 가지 종류에다 기록하고, -살펴보건대, 대(大)와 소(小) 두 가지 모양이 있다.- 감히 홍씨(洪氏)와 같이 억지로 분류해 놓지 않았다. <서청고감(西淸古鑑)>"
<문양이 없는 동전>
이미 한반도에서의 삼국시대가 전개되기 이전에 우리나라에 화폐가 통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경중에 따라 통화량이 달랐다고 할 수 있는데, 가장 흔히 이뤄지는 혼인예물로 화폐가 통용되었던 옥저의 경우에는 화폐의 사용이 대중화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무역에 있어서는 옥저와 신라의 화폐가 언급되어 있듯이 금과 은이라는 보석을 화폐화 해서 사용했다는 측면에서 달러가 국제통화기준이 되기 이전에 통용되었던 금본위제처럼 동양에서도 금과 은이 국제통용 통화기준이었음을 알 수 있다.
옥저의 혼인예물로 통용되었던 화폐는 금이나 은과 같은 보석은 아니었을 것이고, 다만 철이 화폐로도 쓰였다는 점에서 철의 재질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해 볼 수 있다.
한편으로 백제의 화폐사용에 대한 기록을 아직까지는 찾기 힘들다. 다만 진한(신라형성 이전 부락)시대와 후기신라 시대(722년)에서의 화폐사용 기록이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옥저와 고구려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특히 초기 고립된 신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해외교류가 활발했던 백제의 경우에도 화폐가 쓰였다고 봐야 할 것이다.
고려시대에서는 화폐 사용 시기가 언제부터 일까?
고려시대의 화폐사용에 대해서는 우선 996년(성종 15) 건원중보설과 1097년(숙종 2) 주전관 설치 후부터라는 설로 아직도 나뉜다. 성종 15년 설이 더 설득력이 있다.
일부 국내 백과사전류는 성종설보다는 숙종설에 더 신빙성을 두고 있다. 하지만 이미 삼국시대 이전부터 화폐가 통용되고 있다는 점에서 여전히 잘 못된 정보를 올리고 있다고 할 것이다. 고려사 식화지에서도 이미 성종15년 4월(996년)에 비로소 철전을 사용하였다라고 밝히고 있다. 고려사절요도 성종설을 지지하고 있다.
해동역사도 역시 독자적인 주장이 아니라 '숙종 7년(1102)에 주조한 돈 1만 5천 근을 재추, 문무 양반, 예하 군인들에게 나누어 준 데에서 시작되었으며, 그 문양을 해동통보라고 새겼다<고려사>'라고 인용하면서도 '그렇다면 여러 가지 돈은 모두 숙종 2년 이후에 주조된 것이다. 그런데 성종조 때 이미 철전(鐵錢)을 사용하였으니, 삼한통보나 삼한중보는 혹 성종 때 주조된 것인가?'라고 하고 있다. 이 것은 성종설을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삼한통보나 삼한중보가 숙종 때 제작되었다는 근거를 찾지 못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고려에서의 화폐 사용은 생각보다 형편 없었는가?
고려시대에서의 화폐 사용을 그냥 뭉뚱거려서 거의 사용을 하지 않았다고 쉽게 판단하기에는 조금은 아쉬운 부분들이 있다.
확실하게 고려시대 이전에 비해 축소되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너무 폄하되어 있다는 점도 지적하고 싶다.
우선 고려의 화폐 사용이 저조했다는 출처가 다양하게 제시된 해동역사에서 인용한 중국측 자료들을 먼저 살펴보자.
"대체로 고려에서는 사람이 살면서 장사하는 가옥은 없다. 오직 한낮에 시장을 벌여 남녀노소 관리 기술자가 각기 소산물로 교역을 하며 돈을 사용하는 법은 없다. 오직 모시나 은병으로 그 가치를 재서 교역하고, 일용품 가운데 한 필이나 한 냥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쌀로 무게를 재어 서로 교환한다. 백성들은 그런 풍속에 익숙하여 편하게 여긴다. 그동안 중국이 중국화폐를 주었는데, 지금은 모두 곳집에 저장해 두고 때로 꺼네 관속들에게 보여 줄 뿐이다. <고려도경>
고려의 땅에서는 동(銅)이 생산되지만 돈을 주조하여 사용할 줄을 모른다. 숭녕(崇寧) 연간 이후에 비로소 돈을 주조하는 법을 배웠는데, 해동통보(海東通寶), 해동중보(海東重寶), 삼한통보(三韓通寶) 세 종류의 돈이 주조되었다. 그러나 세속에서는 그것을 불편하게 여긴다.
고려는 상하의 백성들이 모두 장사를 하여 이익을 남기는 것으로 일을 삼아 한낮에도 장사를 하며, 시장에서는 쌀이나 베를 가지고 교역한다. <송사(宋史)>
광화문(廣化門)의 동남쪽은 바로 주전감(鑄錢監)이 있는 곳이다. 다른 물화의 교역에 있어서는 모두 물품으로 교역을 하고, 오로지 약재(藥材)를 매매할 적에만 간혹 전화(錢貨)를 사용한다. <고려도경 인용-천지>"
대개 고려도경을 인용하고 있다. 보다 넓게 보면 송사에서 언급된 내용이나 고려도경도 곽원의 발언에 기초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곽원은 1019년(현종 10) 송으로 가서 거란의 계속되는 고려 침입을 전하고 구원을 요청하였다. 송에서 다른 말들이 여담으로 오고가는 과정에서 곽원은 "본국의 풍속은 자못 송과 비슷하나, 한낮에 시장이 열리고, 교역할 때 돈이나 비단은 쓰지 않고 베나 쌀로만 서로 교역합니다."라는 발언했고, 송사에서는 이 말을 기록했다.
고려도경은 인종 1년(1123년)에 사신으로 고려에 들어와 개경(開京)에 1개월간 머무르다가 귀국 후 지은 저술이다. 고려도경은 곽원의 발언보다 100년이나 후에 작성된 저술이다. 주전감의 설치연도보다는 단순히 주전도감이 있다는 사실만을 말하고 있다.
"고려는 날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시장이 열리며, 모든 부녀자들이 버드나무로 만든 상자 하나와 작은 승(升=되刀) 한 개를 가지고 있는데, 6홉이 1되라고 한다. 패미(稗米)를 가지고 물건 값을 정하여서 사고 파는데, 그곳에서는 모두 이것을 기준으로 하여 값의 고하를 따진다. -다음의 전화조(錢貨條)에 상세하게 나온다.- 명주가 적어서 비단[羅] 1필당 값이 은 10냥(兩)이나 되므로, 나라 사람들이 모두 삼베[麻]나 모시[紵]를 입는다. <계림유사>
계림유사도 송나라 사신 손목이 서장관으로 고려 숙종 때 개성에 왔다가 귀국 후 남긴 기록이다. 계림유사는 내용으로 보아도 숙종의 화폐제도 실시 직후에 작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곽원의 발언도 역시 화폐제도 실시 직후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은병의 한 형태>
다만 100년 후의 고려도경에서의 발언이 문제가 되는데, 돈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하면서도 모시와 은병의 사용을 말하고 있다. 한 필이나 한 냥에 미치는 못하는 소액은 쌀로 교환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은병(12냥 반)은 계림유사를 빌리자면 무려 쌀 10섬에서 50섬 가치인데, 그 은병 한 개(쌀 10섬과 50섬 사이의 가치)를 기준으로 했을 때 소액 계산시에 쌀로 계산을 치루려해도 은 1냥 가치를 10섬과 50섬의 사이인 2섬(288kg)으로 계산해도 벼의 무게 때문에 소 달구지 1대는 끌고와야 한다. 따라서 은병 아래의 화폐 유통이 필요하다.
(설령 은 1냥을 1섬과 같은 시세로 쳐도 144Kg의 무게를 아낙네가 질 수도 없고, 남정네가 힘 좋아 지게에 진다고 해도 귀가 거리로는 어려운 일이기에 결국 소 달구지가 필요하다.)
화폐를 다점, 주점, 식미점 등에서 사용토록 했는데, 찻집이 따로 존재했을 정도면 나그네들이 묵는 숙박시설들이 전국적으로 길목마다 산재해 있었을 것이다. (고려시대에는 상업용 가게를 일컫을 때, 뒤에 점을 붙혔다. 식미점, 객점, 다점, 주점 이런 식이었다. 고려도경은 개성의 상점들이 전시용이라고 하고 있지만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쌍화점'이라는 찻집 이야기에서 볼 수 있듯이 전시용이 아니라 상점들은 일상적인 상업활동을 하고 있었다고 할 것이다. )
화폐사용의 일반화는 몇 가지 다른 관점에서 접근해서 볼 수 있다. 당시 승려들은 거대한 소작 농장을 건설하고 사채놀이를 하면서도 마늘이며 파, 채소 등등 온갖 생산물을 재배하고, 술, 식초, 향료 등을 담궈서 유통시켰다. 거의 상단의 모습에 가까울 정도로 대규모였다. 이들이 거래를 위해 운반하는 상품 가운데 일부를 떼내어 주고서만 숙박했을리는 없다는 점도 봐야 한다.
절에서 판매하던 물품들은 거의 생활필수품이거나 그에 가까운 물건이기에 역시 돈이 아닌 다른 물품으로 교환한다고 했을 때 과연 교환효용성을 가진 다른 물품들은 무엇이냐 하는 점이다. 이익이 남는 상품들로 당시 고려의 토지에서 생산될 수 있는 상당수의 품목을 절에서 생산하고 있었다.
물건만 쌓아 놓는다고 부유해 지는 것도 아니고, 판매해서 다른 물건으로 들여 와야 하는 부분도 있기에 과연 절에서 생산해서 판매하는 물건을 상쇄할 제품이 무엇이냐가 남는다. 즉 구매력 확보와 증가에 관한 부분으로, 물건을 판매해서 남긴 이윤으로 필요한 다른 물건들을 살 수 있어야 것은 물론이고 나아가 이윤확대를 위한 다른 상품에 대한 더 많은 구매력을 확보해야 한다는 것이다.
실질소득으로 이어지는 영업이익을 남기기 위해서는 단순하게 같은 물품을 팔아 같은 물품의 물량 확보만 증가시키는 것만으로는 힘들다. 그렇다면 독과점을 행사 하면서도 이윤을 확대시켜 줄 수 있는 다른 상품에 대한 구매력도 키워야 한다. 그런데 당시 절은 활발하게 상단을 운영해서 떼돈을 벌었지만 독과점은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사찰의 활발한 상업활동은 결국 화폐가 매개요인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한편으로 농사에만 전념했던 농민들은 여행할 시간이 없었다. 그렇지만 발해가 멸망한 후 찾아 온 정착자나 유랑민들, 여진족 자진 투항자나 여행객 등을 고려하면 인적이동이 많은 상황에서 짊어지고 다니기 힘든 쌀이나 포 대신에 화폐의 편리성도 어느 정도 이용됐다고 볼 수 있다.
이상 주로 인용되었던 기록들은 곽원의 송나라 방문 이후에 고려 초기 개성에만 머물다 간 시각에서 바라 본 송나라의 기록이 중심이다.
당시 동북아 정세는 송과 거란, 여진, 고려의 관계가 얽히면서 복잡했고, 송의 입장에서는 거리를 자꾸만 두는 고려가 서운했을 것이라는 점은 명확하다. (이런 시기에 쓰여진, 안그래도 속국개념이 강렬했던 송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고려에 대한 관점은 차라리 고대에 저 멀리 있다고 생각하던 나라에 대해 기록하던 화족들의 시각에 비해 더 편협적일 수 밖에 없다라고 생각한다.)
더구나 화폐 사용이 저조했다고 인용한 문장에서도 활발한 상거래를 확인할 수 있다. '고려는 날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시장이 열리며'(계림유사), '고려는 상하의 백성들이 모두 장사를 하여 이익을 남기는 것으로 일을 삼아 한낮에도 장사를 하며 시장에서는 쌀이나 베를 가지고 교역한다(송사宋史)'라고 하고 있다.
물론 활기 넘치는 상거래가 있다고 해서 화폐사용도 활발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고려가 고대로부터 이뤄져 온 화폐사용을 갑자기 강제로 중단했을리는 없음으로, 화폐사용이 저조했다는 뜻은 고려건국 초기라서 아직은 고려국의 화폐가 미정착기였다는 말이었을 것이다.
과연 은은 송의 평가처럼 고려에서도 송에서 만큼의 귀한 가치를 지니고 있었을까?
모시와 함께 은병이 장터에서도 거래됐다고 하는데 여기에서 모시의 화폐가치가 얼마나 되는지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계림유사에서는 "명주가 적어서 비단 1필당 값이 은 10냥(兩)이나 되므로, 나라 사람들이 모두 삼베나 모시를 입는다"라고 하고 있다.
고려는 패미(稗米)를 가지고 물건 값을 정하여 무역한다. 그 지역에서는 모두 이것과 비교해서 값의 고하를 따진다. 만약 수효가 많을 경우에는 은병(銀瓶)을 가지고 하는데, 한 개의 중량은 1근이다. 공인(工人)이 은병을 만들 적에는 은 12냥 반에 동 2냥 반을 섞어 1근으로 만드는데, 동을 가지고 공인들의 노임을 준다. 숙종 8년(1103)에 송을 모방하여 돈을 주조해서 교역하였는데, 해동중보(海東重寶), 삼한통보(三韓通寶)라고 새겨 기록하였다. <계림유사(鷄林類事)>"
나아가 계림유사는 은병 하나는 은 12냥 반과 동 2냥 반을 섞어 주조했다면서도 동은 수공자의 몫이라고 하고 있다. 이 점은 은병에 동을 섞은 것이 아니라 순수 은병 하나 제조가격이 동 2냥 반이었다고 봐야 더 타당할 것이다. 고려의 은병제조 정책에서 가짜가 넘쳐나는 폐단을 막기 위해 노력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애초부터 은과 구리를 섞어 은병을 만드는 것을 허용했을리가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계림유사로만 본다면 비단 값이 엄청나게 비쌌음을 알 수 있다.(이런 비단에 글을 적어 당나라 이세민을 찬양했던 선덕여왕은 매국적 민중착취?) 또한 은병 하나는 쌀 10섬에서 50섬까지의 가격이며, 은병이 1101년(숙종 6)에 마포 100필 가격이었다고 하고 있다.
여기에서 의문점은 모시가 삼베보다 더 비쌌을 것이라는 것은 확실하고, 어떻게 모시를 일반 대중들도 쉽게 옷으로 지어 입을 수 있었느냐 하는 또다른 의문이 발생한다. 고려도경은 고려인들은 스스로 삼베와 모시를 심어 충족한다고 하고 있다. 모시는 포와 은병의 중간 가격대였다고 할 수 있다.
포는 고려조정에서 검게 물들여 1만필을 송에게 조공형식의 물물교환에 투입했을 정도다. 비단은 누에치기에 서툴렀으나 산동과 민절에서 수입할 정도였지만 최근에는 포로들 때문에 좋아졌다<고려도경>라고 했다. 그만큼 비단의 가격이 높았다는 소리인데, 그 시기에 고려 군대가 언제 중국 문화영향권 지역까지 쳐들어갔는지, 얼마나 포로들을 끌어 왔는지는 지금도 모른다.
모시보다 싼 포 100필을 팔아야 은병 하나와 바꿀 수 있었는데, 모시와 포의 차이가 가격차이가 있더라도 둘 다 자급자족에 가까운 형편이었기에 차이는 엄청나게 크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상가가 없는 노점상과의 거래에서도 은병과 모시가 함께 쓰였다는 것은 은병도 시중에 어느 정도 풀렸다고 할 것이다.
초창기에는 겨우 1만 5천근의 쇠가 동전으로 주조되어 풀렸듯이 은병의 갯수도 적었겠지만, 나중에 이렇게 시중에서도 풀릴 정도라면 애초에 무용론은 거짓말이거나 향후 화폐가 활성화 됐다는 것이다.
한편으로 곡물가격이 높았던 이유는 고려시대에는 오히려 강가나 바닷가에 살면서 물고기를 잡아 먹는 어부들이 더 풍족하게 살았을 정도로 상황이 좋지 않았다. 고려시대에는 산등성이 다락 논이 아주 크게 늘어난 시기였다.
인구가 늘어나서 논의 면적을 넓힌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생산량이 줄어 들어 면적을 확대한 것이다. 고려사에서는 생산 경작면적 감소에 대한 기록은 없다. 따라서 그 시대 어느 국가나 겪었던 식량난 고충이었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도 쌀의 가치가 저평가 되어 있다. 반대로 쌀이 흔해서?
조선시대에 작성된 고려사나 고려사절요를 보면 은병이 관직승진에서 뇌물로 쓰였다는 기록은 역으로 은병이 흔하게 유통되는 화폐였다고 평가해야 더 타당할 것이다.
흔히 관직 승진에 있어서 고위직 승진만을 생각하기 쉽지만, 고위직은 한정되어 있는 자리이기에 은병이 고위직 승진만을 위한 뇌물로 쓰였다면 일반화 된 현상이 아니기에 나중에 혹리나 간신 난에 특별히 기록되었을 것이라고 보는게 당시의 역사기록 관점상 더 일반적이라고 할 수 있다.
(비단이 흔했던 것처럼 알려진 당시에 비단 한 필이 은 10냥 값이었다고 한다면 비단으로만 몸을 감던 당시 귀족들의 사치가 극에 달했음을 또한 알 수 있다.)
역시 고려도경에서도 모시와 은병을 동시에 사용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고려를 아래에 두고 작성했을지라도 은병과 모시가 동시에 시전에서도 충분히 쓰였다고 할 수 있다.
더구나 당시 부자들이 쓰던 은향로 하나에 들어가는 은의 양은 30근이나 되었다. 만약 재산을 팔아 시주하던 당시 풍토에서 이런 은향로가 당시 도시에 넘쳐나게 많던 절들과 부자집에서 쓰였다면 은의 가치가 과연 온전했을까? (아니 어쩌면 은의 품귀현상이 일어났을지도 모른다. 은은 도시에 넘치지만 시중에서는 구입할 수 없는 높은 고물가였다고 해야 하나? 은도 생산이 돼야 시중에 풀릴 것 아닌가? 당시에 은광산으로 부자됐다는 왕족이나 귀족도 없었는데.)
나중에 작은 은병으로 바뀌지만 고려시대의 은병은 조선이 건국된 이후에도 쓰여 태종8년(1408)에 사용금지령이 내려졌을 정도로 우리가 생각하는 바와 다르게 은병은 일상적으로 쓰였다고 보는게 더 정확한 역사에 대한 이해라고 본다.
그 사례를 더 들어 본다면 고려 후기에 속하는 충렬왕 3년(1289)의 기록에 의하면 "여름 4월에 시중(市中)에서 은과 동을 섞어서 주조하는 것을 금지하였다"라고 하고 있다.
이 문제는 은병의 역할이 아니라 동이 삯으로 지불되어야 하는데도 은을 떼어내고 동을 대신 섞어서 이익을 추구하는 세태가 여전히 통용되고 있다는 의미로 파악해야 한다.
이 점은 은병이 널리 쓰이지 못했다는 증거로 역으로 작용하기도 하지만, 다시 역으로 생각해서 그만큼 은병이 화폐로 통용되었기에 위조화폐 유통도 많았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곧바로 몇 개월 안있어 원 나라에서 사신을 파견해 조서를 내려서 원나라 화폐인 지원보초(至元寶鈔)와 중통보초(中統寶鈔)의 통용을 요구하고 있다는 점이다.
만약 고려에서 화폐가 출현했다가 사라졌다고 한다면 고려에서의 은의 주조를 금하면서 동시에 원나라 화폐 사용을 더욱 강요할 필요가 없었다. <고려사절요 21권> 더구나 구체적으로 지원초 1관을 중통초 5관에 해당하게 하고, 큰 돈과 잔 돈으로 쓰도록 했다는 점이다.
이런 측면에서 기꺼이 우리나라의 화폐역사를 삼국시대 이전으로 확장시키면서도 결국 고려의 화폐 사용을 제한적이었다고 설명하면서 고작 중국측 사료에 의존하는 모습을 해동역사는 보여주고 있다.
그 사례들은 다시 인용하면 아래와 같다.
삼한통보는 등에 문양이 없다. 삼한(三韓)의 돈이다. 손목(孫穆)이 지은 계림유사(鷄林類事)에, “고려에서는 중국의 제도를 모방하여 전(錢)을 주조하여 이 전을 가지고 교역을 한다. 그러나 고려 사람들과 바다 상인들은 이를 편하게 여기지 않는다. 그 돈의 제도는 중국과 더불어 같으며, 모두 해동통보나 혹 해동중보, 삼한통보라고 새겨 기록하였다.” 하였으며, 서긍(徐兢)이 지은 고려도경에는 “광화문의 동남쪽은 바로 주전감이 있는 곳이다. 다른 물화의 교역에 있어서는 모두 물품으로 교역을 하고, 오로지 약재를 매매할 적에만 간혹 전화를 사용한다.” 하였다. 《천지(泉志)》
살펴보건대, 고려사를 보면, 성종 15년(996)에 비로소 철전을 사용하였으나, 중도에 폐기되어 시행되지 않았다. 숙종 2년(1097)에 이르러서 비로소 돈을 주조하였으며, 6년(1101)에 돈을 사용하는 것으로 종묘에 고하기는 하였으나, 이해에도 역시 은병으로 돈을 삼았다. 그 제도는 은 1근으로 우리나라 지형의 형상을 만들었는데, 세속에서는 이를 이름하여 활구(闊口)라 하였으며, 대개 동전과 함께 사용되었다.
이렇게 해동역사는 중화적 관점에서 어느 정도 후퇴하고 만다.
고려시대의 화폐 모양은 구체적으로 어떠했을까?
동전이야 동그랗고 가운데 구멍이 네모나 있다. 계림유사는 전자(篆字)로 새긴 것과 진행체자(眞行體字)로 새긴 두 가지가 있고, 정교하게 만들어진 동전의 지름이 9푼(分)이고, 무게가 3수(銖) 6루(絫)이다라고 했다. 한 면에만 글자가 새겨졌다고 했다.
천지에서는 동국중보 뒷면에는 문양이 없고, 지름이 1촌이고, 무게가 2수 4루이며, 테두리가 둥글고 두꺼우며, 자획이 선명하고 고려의 돈이라고 생각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은병은 1근의 무게로 고려의 지형을 따라 모양을 삼았으며, 동전과 함께 사용했는데, 일반에서는 활구라고 불렀다고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다.
이후 몽골의 강압에 의해 원나라 화폐 사용이 강요되었다. 그러다 보니 고려의 화폐는 힘을 잃어 사장되다 시피해서 오종포가 끼어 들기도 했다. 그러던 와중에 공양왕 2년(1390)에 도평의사사가 저폐(楮)를 제조하여 오종포화 함께 사용되기도 했으나 이내 중단되고 만다. 공양왕 4년(1392)에 저폐 대신으로 다시 동전이 사용되게 된다. (작은 은병 하나는 오종포 15필의 값에 해당되었다. 은병의 사용금지? 후 새로 등장해 그 동안의 물가상승을 고려해서인지 과거의 대은병보다 양은 줄어 들었으면서도 가격은 50% 정도 상승했다고도 한다.)
결론을 내리고 싶지는 않다. 조선시대에 기록된 문서들은 주로 중국의 문서를 기초로 했고, 그 과정에서 독자적인 판단을 시도하면서도 역시 고려와 조선의 차이점을 부각시키기 위해 결국 조선이 당시에 견지했던 중국의 시각을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보여진다.
직접 현물로서의 이 땅의 화폐들이 모두 발견되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고려를 철저히 무시하면서 지배국의 관점에서 기록한 내용들 속에서도 고려의 화폐 사용 빈번함과 변화를 말할 수 밖에 없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정보의 기본 개념은 공유다. 아무리 하찮은 정보라도 보다 많은 주장들이 알려져 토의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 특히나 역사는 그렇다. 역사는 그 기록을 소유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널리 밝혀 서로가 알아 과거를 배우는 것이다. 앉은 자리에서 한 번에 쓰다보니 서툴다. 그래도 아마추어라서 다행이다.
이 글을 올리는 이유는 일제의 한국사 침탈 때문이다. 예를들면 1938년 일제시대에 나온 동아전지처럼 가난해서 돈을 사용하지 못했다라는 엉터리 책들이 아직도 돌아 다니기 있기에 사실을 밝힐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학술적 주해의 깊이는 비록 주지 않지만 너무나 풍부한 컬러사진과 편안하면서 심도있는 해설을 해주면서도 또한 구체적 지식을 전달해 주는, 대원사에서 출판한 빛깔있는 책들을 권한다. 2007년 기준으로 6,400원 밖에 안한다. 부피에 비해서는 너무 비싸나?
비록 개인적으로는 해동역사를 끌어다 쓰다 보니 인용한게 첫 줄 빼고는 없지만 충분히 좋은 책이다. 개인적으로 이 대원사 시리즈 문고판을 20권 넘게 샀다. 한 번에 18권을 샀다. 더 사고 싶다.
헐렁하면서도 도식적인 교과서나 전문적인 딱딱한 역사 해설서와는 다르게 편안하지만, 슬렁슬렁 몇 마디로 떼우는 이야기형 역사책에 비해 너무나 확실한 출처 근거 제시와 풍부한 내용, 심도 있는 지식제공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