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과 희망을 주는 동기부여

인간의도리인오대덕목(五大德目)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지키자. 태극기, 애국가, 무궁화, 한글 사랑은 애국입니다

조경에 관한 다양한 자료들

카테고리 없음

고려의 황도 개성 - 성곽

대한인 2013. 12. 1. 06:34

<광여도 개성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황도 개성

 

【건치연혁】 신라시대(통일기)의 송악군(松岳郡)은 원래 고구려의 부소압(扶蘇岬)이며, 개성군(開城郡)은 원래 고구려의 동비홀(冬比忽)이었다. 고구려에서는 군현(郡縣)을 홀(忽)이라 많이 불렀다. 고려 태조 2년(919)에 철원(鐵原)에서 도읍을 송악산 남쪽에 옮기고, 두 고을 지역에 걸쳐 개주(開州)로 삼고, 궁궐을 짓고 시전(市廛)을 설치하며, 방리(坊里)를 갈라서 오부(五部)로 하였다. 광종(光宗) 11년(960)에 황도(皇都)로 고쳤으며, 성종(成宗) 14년(995)에 개성부로 고쳤다. 현종(顯宗) 원년(1009)에 거란(契丹) 군사가 와서 침노하여 궁궐과 민가가 거의 다 없어졌다. 9년에 부(府)를 파하고 현령(縣令)을 두어 정주(貞州)ㆍ덕수(德水)ㆍ강음(江陰) 세 현(縣)을 관장하며 상서도성(尙書都省)에 직속하게 하였다. 문종(文宗) 16년(1062)에는 다시 지개성부사(知開城府事)로 하고, 도성에서 관장하던 정주 등 세 현 및 장단(長湍)ㆍ송림(松林)ㆍ임진(臨津)ㆍ토산(?山)ㆍ임강(臨江)ㆍ적성(積城)ㆍ파평(坡平)ㆍ마전(麻田) 등 11현을 모두 소속시켰으며, 또 서해도(西海道)의 우봉군(牛峯郡)을 분할하여 예속시켰다. 충렬왕(忠烈王) 34년(1308)에는 부윤(府尹) 이하의 관원들을 두어 도성(都城) 안을 관장하고 또 따로 개성 현령을 두어 도성 밖을 관장하였다. 공양왕(恭讓王) 2년(1390)에는 경기(京畿)를 좌도(左道)와 우도(右道)로 나누었는데 개성현은 우도에 속하였다. 본조(本朝)의 태조는 즉위한 지 3년 만에 도읍을 한양(漢陽)으로 옮기고서 송도 개성 유후사(松都開城留後司)로 고치고, 유후(留後)ㆍ부유후(副留後)ㆍ단사관(斷事官)ㆍ경력(經歷)ㆍ도사(都事)를 각각 1명씩 두고 개성현을 없앴다. 세종 20년(1438)에 개성부 유수(留守)로 고쳤으며, 세조 12년(1466)에는 경기도에 예속됨으로써 유수ㆍ단사관ㆍ경력ㆍ도사를 파하고, 단지 윤(尹)과 판관(判官)을 각각 1명씩 두었다 예종(睿宗) 2년(1469)에 다시 유수ㆍ경력ㆍ도사 각각 1명씩을 두었다. 유수는 종2품, 경력은 종4품, 도사는 종5품이다.


【군명】 부소압ㆍ송악군ㆍ동비홀ㆍ개주ㆍ개경(開京)ㆍ황도(皇都)ㆍ촉막군(蜀莫郡) 《송사(宋史)》에, “고려 왕은 개주 촉막군에 거처하는데 개성부라 한다. 큰 산을 의지하여 궁실을 짓고 성벽을 쌓았으며 그 산을 이름하여 신숭(神嵩)이라 한다.” 하였다.

 

【성씨】 본부(本府) 고(高)ㆍ김(金)ㆍ왕(王)ㆍ강(康)ㆍ전(田), 이(李) 내성(來姓)이다. ○ 무릇 다른 주(州)에서 와서 살되, 본적을 상고할 수 없는 자는 단지 내(來)라고만 주(註)를 달았으며, 혹은 속(續), 혹은 속(屬)이라고도 하였다. 후에도 여기에 의한다. - 신증동국여지승람 개성부

 

<개성은 우백호 지세가 약해 오공산이 외백호와 내백호를 겸하고 있다.>

 

개성의 풍수리지

 

개성은 풍수지리학상 아담하지만 나무와 물이 부족하기에 한 나라의 수도로 삼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다. 바위산으로 온통 둘러 쌓여 여름 홍수기에는 물살이 거세 피해가 컸으며, 평상시에는 물이 부족해 하천가에 따로 우물을 파야 했을 정도다. 고려의 유명한 시인 이규보 조차도 물을 찾아 이사해 물을 얻자 선물할 정도였다.

 

여름철 홍수피해를 최소화 하기 위해 홍수피해가 자주 발생하는 장소에 사찰을 지어 여러가지 효과를 한꺼번에 기대하기도 했다. 절을 짓는 것은 인공적으로 축방을 쌓은 격이며, 거주하고 있는 승들은 홍수 관련한 파수꾼과 보수꾼의 역할을 자연스럽게 하게 됐다.

 

그럼에도 고려의 황도였기에 고려를 건국한 왕건을 위한 신화작업이 많이 나타난다. 예를 든다면 후기신라에서 감간(監干) 벼슬을 하던 팔원이 등장하는데, 팔원은 왕건의 5대조 선조인 강충에게  "만일 군(郡)을 산남(山南)에 옮기고 솔을 심어 암석이 드러나지 않게 하면 삼한을 통합할 자가 나오리라"하니 강충은 이에 따라 부소군을 부소산 북쪽에서 남쪽으로 옮긴 후에 송악산에 소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풍수지리 조종 도선은 왕건의 아버지 왕륭에게 "이 지맥이 왕방인 백두산 모목간으로부터 내려와 마두명당에 떨어졌으며 그대는 또 수의 명수를 지녔으니 마땅히 수의 대수를 좇아 집을 짓되 66으로하여 36구를 만들면 천지의 대수에 부응되어 명년에는 반드시 성자를 낳을지니 이름을 마땅히 왕건이라고 지으라" 하였다.

 

당나라 상인 왕창근이 상점에서 거울을 사서 우연히 햇볕에 비추니 "하늘의 상제가 아들을 진한 마한에 내려보내 먼저 닭(신라)을 잡고 오리(만주)를 칠 것이다. 뱀이 들어간 해에 두 용이 나타나는데 청목 속에 몸을 갖춘 용(왕건)이 흑금의 용(궁예)을 없앨 것이다"라는 글귀가 나타났다.

 

신라 최치원은 점을 쳐 "계림은 누런 낙엽이요, 곡령은 푸르른 소나무라"하여 고려의 건국을 예언했다.

 

왕씨 세족의 왕이 되려는 집념도 대단해서 세울 건자를 무려 삼대나 썼다는 사실이다. 왕건의 할아버지 작제건부터 해서 아버지 용건(후에 왕륭으로 개명)을 거쳐 왕건에 이르러서 결국 왕건이 고려를 세우게 된다.

 

개성 멀리 북쪽에는 천마산 국사봉 제석산이 있으며, 동북쪽에는 화장산이 있고, 동남쪽에는 진봉산이 있으며, 서북쪽에는 만수산이 있다. 개성 가까이로는 송악산에서 흘러 내려 남쪽으로 용수산으로 이어지는 작은 구릉들이 존재한다.

 

주산과 안산을 외국(外局)이라 하는데, 개성은 외국으로 주산을 송악산으로 삼고 안산을 용수산으로 삼으면서 또 작은 안산으로 주작현을 두었다. 내국으로는 우백호는 오공산으로 정하고(외백호는 정해지지 않음), 좌청룡 중에 외청룡은 부흥산과 덕암봉으로 삼으면서 내청룡은 자남산으로 세웠다. 외국과 내국이 감싸고 있는 부소산 바로 밑을 부소명당 혹은 송악명당이라 하여 궁궐을 지으니 사람들이 그 궁궐이 둥근 달을 닮았다 하여 만월대라 불렀다.

 

개성을 근거지로 삼은 왕건 친족과 세력은 개성이야 말로 중요한 근거지이자 힘의 원천이었음으로 궁예를 왕으로 섬기면서도 항상 세력확장과 이익을 꾀했다.

 

왕건의 아버지 왕융은 태봉국을 세운 궁예에게 "삼한과 만주일대의 왕이 되시려거든 먼저 송악에 성을 쌓고 나의 큰 아들을 성주로 삼으소서"라고 주청해 관철시켰다. 궁예는 개성 부소산 바로 밑의 장소를 명당이라 하여 궁으로 삼고 성을 쌓으니 바로 발어참성이다.

 

하지만 궁예는 개성 세력들에게 부담감을 느껴서인지 이내 철원으로 옮겨 태봉국의 수도로 삼았다. 즉 개성은 왕씨 성을 가진 세력의 근거지였기에 궁예로서도 아무리 왕이라고 할지라도 뭔가 압박감을 느낄 수 밖에 없었고, 아무래도 자신의 근거지는 독립적이야 편하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만월대 궁궐에서 나온 용 석조물>

 

개성은 물이 부족하다 보니 물의 상징인 용에 관한 전설들이 많은데 용녀 전설도 그 중 대표적이며, 왕건에 의해 건국된 고려 역시 용을 나라의 상징으로 자주 삼았다. 왕건의 할아버지 작제건이 용왕의 청을 받아 늙은 여우를 쏘아 죽이고서 용녀를 아내로 맞아 왕건의 아버지 용건을 낳게 된다.

 

개성의 지리적 위치는 해양국가를 표방했을 경우 한양이나 평양보다 바다에 훨씬 더 가까워 유리하다. 개성은 서쪽의 예성강과 남쪽의 임진강을 모두 활용할 수 있었다. 세금을 걷어 들여 운반하는 조운의 경우에도 더 유리했다.

 

<개성의 성곽과 대로>

 

개성의 성곽은 토성과 석성이 어우러져 있는데, 주로 토성이며 축성법은 자연지형 그대로 위에 흙을 날라서 다져가며 쌓는 방식인 판축법을 이용했다. 그래서 고려도경의 저자 서긍은 성이 허술하다고 하면서 참호도 없다고 했다.

 

<선죽교 전경>

 

궁성

 

둘레 2.7Km. 동서 길이 373m, 남북 길이 725m. 넓이 약 7만5천평(25만 m²)

 

승평문(昇平門)이 남문, 동화문(東華門)이 동문, 서화문(西華門)이 서문, 현무문(玄武門)이 북문이다.

 

황궁의 정남향 문인 승평문은 세 개의 문으로 이뤄 졌는데, 좌우 양쪽에 있는 문은 동덕문으로 매우 높고 누각이 있지만 망루가 없다. 승평문은 2층 누각을 가지고 있어 거대하고 웅장하며 문에는 구리로 만든 장식을 달았고, 승평문을 바로 지나면 양쪽에 동락정이라는 정자가 있고 길은 승평문보다 훨씬 크고 장엄한 신봉문(神鳳門)으로 이어진다. - 고려도경

 

황성

 

확실한 기록은 없지만 태봉국의 왕 궁예가 왕건에게 명하여 축조한 발어참성(896~898)을 그대로 활용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둘레 2,600칸(약 4.7Km 1문=1.818m), 동서 길이 약 1.125Km 남북 길이 약 1.150Km, 넓이 약 37만8천평(약 125만 m²)

 

황성에는 20개의 성문이 있다. 동으로는 광화문(廣化門) 통양문(通陽門) 상동문(上東門) 선인문(宣仁門) 청양문(靑陽門)이 있고, 서로는 영추문(迎秋門) 선의문 장평문 통덕문이 있다. 남으로는 주작문(朱雀門) 남훈문(南薰門) 안상문 귀인문이 있으며, 북으로는 건화문 금요문 태화문(泰和門) 현무문 북소문(北小門)이 있다.

 

이중 건화문 금요문 태화문 통덕문 장평문 선의문 영추문은 황성이 북쪽과 서쪽이 나성과 하나라서 같이 쓰였다.

 

<관로 관청배치 추측도>

 

광화문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던 문으로 선의문과 모양이 유사한데 옹성이 없지만 선의문보다 더욱 화려하고(고려도경), 3문으로 형성된 광화문은 일반인들은 좌우의 문을 이용하고 가운데 문은 황제나 중국의 사신들이 이용했으며, 광화문 바로 앞 길은 관도로 하여 황궁쪽으로는 상서성 추밀원 중서성 문하성 어사대가, 외성쪽으로는 호부 등 각 6부와 대약국 양온국 등의 중요 관청이 길 양 옆으로 늘어서 있었다.

 

 외성(나성)

 

현종 즉위년인 1009년에 축성에 대한 논의가 있었으나 1010년과 1018년의 거란침입과 1014년 반란(김훈,최질 등)에 의해 미뤄지다 1019년 2월 강감찬의 귀주대첩 대승으로 거란침입을 격퇴시킨후 강감찬의 건의에 따라 비로소 1020년 8월에야 축성에 나서 1029년(현종20년)에 완성했다.

 

현종 20년에 좌복야 이응보 어사대부 황보유의 상서좌승 황주량 등과 더불어 개경의 나성을 쌓았다. 왕가도가 높은 곳에 올라 서서 사람들로 하여금 양산을 들고 열을 지어 앞뒤로 나오게 하거나 물러서게 하면서 장소의 넓고 좁음을 고르게 하고서 성의 터를 잡았다. -고려사 열전 왕가도

 

<강화도 가는 길, 대동여지도 중에서 경기 지역>

<태조왕건의 첫번째 황후 신혜황후와 정덕황후 출신지 정주는 예종8년(1108년) 승천부로 승격됐다.>

 

 나성조성도감에 의해 연인원 30여만명(丁夫)의 노동자와 기술자(工匠)는 8450명이 동원되어 건설됐다. 거란의 침입에 피해가 막심했던 개성주민들은 외성이 완성되자 기뻐하며 금강송을 지어 불렀다(고려사 악지 금강송).

 

둘레 약 22.7km(10,660보, 1보=6척=35.510cm), 남북 길이 6Km 동서 길이 5.2Km, 넓이 747만1천평(2,747만m²), 성의 높이 9.5m, 폭 4.5m

 

외성은 25개의 성문이 있다고 하는데, 대문 4개 중문 8개 소문 13개로 구성되어 숭의문, 장패문, 회빈문, 선의문이 4대 대문이었다.

 

사자가 출입하는 선의문과 귀국하는 사자가 이용하거나 사묘하러 가는 길로 이용됐던 북창문이 가장 엄숙하게 꾸며져 다른 문들은 이에 미치지 못한다고 한다. 그 외 대부분의 외성의 성문은 두 개의 문으로 되어 있으며 신분고하를 가리지 않고 모두 이용할 수 있었다고 한다. -고려도경

 

<태조 왕건이 탁타교에서 거란의 공물을 실고 왔던 낙타를 굶겨 죽일 때에는 남대문은 없었다.>

 

숭인문은 왕이 태묘하러 갈 때 이용되었으며, 군대 사열장과 격구 놀이시설 등이 문 밖에 잘 갖춰져 있었다. 개성 시내의 하천들이 모여 빠져 나가는 장패문에는 거란과의 최초 투쟁이 되는 탁타교가 앞에 놓여 있고  그 탁타교 왼편에는 훈련원이 있다.

 

선의문은 3개의 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국왕과 사신의 행차 등 의전용으로 많이 이용됐으며, 벽란정으로 연결되는 길이다.

 

내성

 

개경의 외성이 너무 넓어 10만의 병사로도 지키기 어려우니 내성을 쌓아야 한다고 최영이 주청하여 논의 됐다. 1391년(공민왕3년)에 공사에 착수해 조선왕조가 들어선 1392년(조선태조 2년)에 완공됐다.

 

둘레는 약 7.8Km(약 20리), 동서 길이 1.3Km 남북 길이 3.7Km다. (북한 사학자 전룡철은 둘레 11Km설을 주장하고 있으며 그에 따라 넓이가 141만5천7백평(468만m²)라고 한다.)

 

내성은 진언문 동대문(내동대문) 남대문 서소문 4개의 성문을 가지고 있으며, 그 중 남대문이 지금도 존재하고 있지만 6.25 때 불탄 것을 1954년에 복원한 것이다. 따라서 내성은 고려시대 때는 존재하지 않았다.

 

<광여도에 기록된 개성>

 

<5부방리 위치 추정도>

 

5부방리(5部 房 里)

 

왕실만 있다고 나라가 존재할 수 없다. 행정구역도 역시 짜여져 있어야 한다.

 

태조 2년(919년)  정월에 송악 남쪽에 수도를 정하여 궁궐을 건축하고,  3성(省) 6상서(尙書) 9시(寺)를 설치, 시전(市廛)을 세우고, 방리를 구분하여 5부를 나누고, 6위를 두었다. 성종 6년(987년)에 '5부방리를 경정(更定)하였다'. 현종 15년(1024년)에 다시 정리하여 획정하였다. - 고려사 지리 왕경 개성부조

 

개성부를 5부 35방으로 나누고 344개의 마을을 편입시켰다.

 

중부: 남계방, 흥원방, 홍도방, 앵계방, 유암방, 변양방, 광덕방, 성화방 - 편입된 마을 수 75개

북부: 정원방, 법왕방, 흥국방, 오관방, 자운방, 왕륜방, 제상방, 사내방, 사자암방, 내천왕방 - 편입된 마을 수 47개

동부: 안정방, 봉향방, 영창방, 송령방, 양제방, 창령방, 홍인방 - 편입된 마을 수 70개

서부: 삼송방, 오정방, 건복방, 진안방, 향천방 - 편입된 마을 수 81개

남부: 덕수방, 덕풍방, 안흥방, 덕산방, 안신방 - 편입된 마을 수 71개

 

북부는 사찰명을 방의 명칭으로 많이 사용했고, 그 외에 부들은 산천지명이나 성문을 방의 이름으로도 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중부는 주로 상권 중심지의 번화가를 중심으로 하고 있고, 북부는 사찰을 중심으로 하되 광화문의 관청 밀집지구까지도 구역으로 삼고 있다.

 

부를 나누는데 있어서 명확한 기준은 없어 보인다. 성문 구역으로 나눈 것도 아니고, 대로를 따라 구분하지도 않았다. 대체로 선의문에서 숭인문으로 이어지거나 통덕문에서 영창문으로 이어지는 대로를 기준으로 상하와 좌우를 나누어 구분한 것으로 보이는데 반드시 지켜지지 않고 서로가 넘나 든 형태라고 할 수 있다.

 

황도 개성이 당시 인구에 대한 의견은 50만명선으로 보고 있다. 대표적으로 드는게 1232년(최우) 몽고의 침략으로 강화 천도시 개경 호수가 10만호였다는 것과, 이수광의 지봉유설에서 언급된 13만호설, 김육이 쓴 송경지의 10만호설을 인정하는 분위기다.

 

5부에 편입된 344개 마을을 기준해서 볼 때 1개 마을에 과연 평균적으로 몇 호나 소속되어 있느냐를 살펴보는게 더 정확할 것이다. 고려사 오행지에 나오는 화재 사건으로 보면 1개 마을은 최소 10호에서 최대 1천여호로 구성되어 있는데 300호 이상은 많지 않아 보이고, 고려 총인구가 300~500만명으로 추정되는 상황에서 70만명설을 주장하는 북한측 주장은 좀 과장으로 보이며, 1개 마을당 200~300여호로 편성되어 있다고 했을 때  50여만명 선이 될 것이다.

 

<개성 내성의 남대문>

 

<개성을 굽어보고 있는 화려한 김일성 동상, 금도금일까, 구리도금일까?>

 

<옥수수밭과 옛기와집들이 어우러진채 낙후된 개성 주택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