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과 희망을 주는 동기부여

인간의도리인오대덕목(五大德目)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지키자. 태극기, 애국가, 무궁화, 한글 사랑은 애국입니다

조경에 관한 다양한 자료들

카테고리 없음

고려의 황도 개성 - 고려의 궁궐

대한인 2013. 12. 1. 06:35

(고려 황궁에 대한 문자 기록은 많이 분포되어 있기에 간략하게 정리했으며, 대신에 시각자료 첨부를 통해 더 빠른 이해를 돕도록 했다.)

 

 

<관경변상서품도- 왕궁만다라 1312년, 일본 돈하시 서복사>

 

고려궁궐의 특징은 건물 수는 적지만 웅장하고 화려함에 있다. 궁궐이 들어 선 지형이 협소하고 평평하지 않기 때문에 시각적으로 압도하지 못하는 부분을 보완해야 했던 이유에 기인한다.

 

천정이 높은 거대한 2층 누각 형식이 많았으며, 크고 화려한 장식으로 궁궐 수의 적음과 터의 좁음에서 오는 초라함을 감추려 했다. 또한 언덕형 계단식 지형을 비록 풍수지리에 따라 그대로 살렸다고 하지만 사실상 시각적으로 압도감을 주는 장치역할로 활용했다고 할 수 있다.

 

고려의 황궁을 오감적으로 살펴 볼 수 있는 자료는 거의 없다. 다만 일본 애지현의 대은사와 돈하시 서복사에 전해지는 만다라 불화에서 그나마 일부라도 추측할 수 있다. 이들 관경변상서품도에 등장하는 궁궐의 모습들은 기록으로 남겨진 고려 황궁의 모습- 건축양식과 거의 같다.

 

고려인들은 음식을 절제하고 궁실 치장을 좋아하며, 당시 왕(인종)이 거하는 궁을 보면 대단히 아름답고, 붉은색 푸른색으로 칠해져 있어 바라보면 깊고 넓은 느낌을 준다. - 고려도경 5권, 서긍

 

<1872년 지방도 중에서 개성부, 오관산은 실제로는 상당히 정북 방향으로 훨씬 더 멀리 있는 산이다.>

 

<고려 황궁배치 추측도, 고려도경에 북문 동편 바로 옆에 있다라고만 되어 있어 금오위 감문위 천우위는 현무문 동편일 수 있다. 사진 클릭하면 확대사진>

 

고려는 일찌기 궁궐을 왕의 궁이 아니라 황제의 궁이라 불렀다. 광종이 광덕이라는 독자 연호를 쓰면서 개성을 황도라 칭했다. 이후 독자적인 연호를 포기해야 했던 상황에서도 황성이라고 불렀다.

 

회경전의 '경'은 송나라 본궁에 쓰인 '경'자와 같았다. 그러므로 도려도경에 서긍은 매우 못마땅해 하는 기록을 남겼다. "접견하는 궁전 이름(에다가), 대마루 끝 기와에는 솔개꼬리 장식을 거리낌없이 했으나, 여기서 성상의 계책이 크고 원대하여 오랑캐를 작은 일로 책망하지 않고 그들의 충성하고 순종하는 큰 의리만 아름답게 여길 줄을 알았다"라고 적었다.

 

<회경전 모형도, 계단 사이 화단은 3단형이 아니라 2단형이다.> 

 

고려의 궁궐은 4기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현종 때가 가장 화려했으며, 몽고의 침략 이후로 고려의 궁궐은 사실상 사라져 버렸다.

 

태조 때의 궁궐

 

천덕전, 상정전과 중광전, 신덕전, 위봉루로 이뤄져 있었다. 천덕전은 조회를 하는 정전, 상정전과 중광전은 정사를 보는 편전, 신덕전은 휴식과 수면을 하는 침전, 위봉루는 구정에 있던 큰 누각이다.

 

신라 경순왕이 신하의 예를 취하던 곳이 바로 천덕전이었으며, 백제에게 승리한 후 축하연을 한 곳은 위봉루였다.

광종 때 중수를 했고, 성종 때는 천덕전은 건덕전으로 바뀐다.

 

 

<회경전 계단터와 조선 순조의 회경전 계단터 방문>

 

현종 때의 궁궐

 

개성이 함락당한 거란의 침입을 물리친 후 현종2년10월에 복구를 시작해 5년1월에 마친다.

 

현종은 기존의 궁궐을 복구하는데 그치지 않고 유명한 회경전(만월대)과 다수의 궁궐을 확장한다. 현종 11년8월부터 14년8월까지 기존의 건덕전 동편에 남북방향으로 길게 새로운 궁궐들을 추가했다. 만월대의 회경전을 비롯해서 장화전 원덕전 등이 새로 들어 섰다.

 

현종 때 추가된 신궁궐들은 1126년(인종4년)에 이자겸의 난으로 소실되고 만다.

 

<개성 황궁의 기능과 변천표. 사진 클릭하면 확대사진>

 

인종 때의 궁궐

 

이자겸의 난으로 소실된 궁궐복구는 난이 평정된지 4년이나 지난 후인 인종 10년 1월에 시작되어 인종 16년 5월에야 끝났다.

 

1138년(인종 16년)에 궁궐의 명칭이 가장 많이 바뀌었다. 회경전은 선경전으로, 건덕전은 대관전으로, 중광전과 선정전(상정전)은 각각 강안전과 선인전으로, 만령전(만수전)은 영수전으로, 위봉루(신봉루)는 의봉루로, 수춘궁은(좌춘궁)은 여정궁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연영전은 집현전으로, 명경전은 금명전으로, 응건전은 건시전으로, 장령전은 봉원전으로, 함원전은 정덕전으로, 자수전은 영수전으로, 연친전은 목친전으로, 정양궁은 숙화궁으로, 건명전은 저상전으로, 신덕전은 목청전으로, 성숙전은 영헌전으로, 자화전은 집회전으로, 함경전은 항복전으로 각각 변경됐다.

 

몽고의 난 때의 궁궐

 

강화도로 천도하면서 공백이 발생한 개성은 몽고군에 의해 철저히 파괴되었다. 물론 강화에 개성과 똑같은 모양과 이름의 궁궐이 건설됐지만 개성의 궁궐은 이후에 영영 그 이름을 상실해 버렸다.

 

30년간의 몽고항쟁을 전개했음에도 끝내 강화를 맺어야 했고, 개성으로 환도하게 되지만 궁궐은 부분적 복구에 그치고 만다.

 

몽고의 압력에 의해 더 이상 황성이라고 부를 수 없게 된 가운데 본궁(정궁)은 복구하지 못하고 이궁을 본궁 대신에 사용해야만 했던 것이다. 수녕궁과 연경궁이 본궁을 대신했으며, 연경궁은 충선왕이 증축한 후에 공민왕 때까지 본격적으로 본궁을 대신했다.

 

이로인해 조선시대에 가끔씩 연경궁이 본궁으로 와전되기도 했다. 이 연경궁 마저도 홍건적의 침입으로 불타버리고 우왕 시기부터 황폐화 된채 버려지게 된다.

 

<위 태조 왕건릉과 아래 공민왕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