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쯔라 태프트 비밀각서, 일본의 아시아 침략도>
1. 가쯔라 태프트 비밀각서: 영일협정과 러일전쟁
대항해시대를 거쳐 제국주의 시대가 되면서 러시아도 항해 제국주의에 참가하고자 했으나 이를 지탱해줄 군항의 확보가 여의치 않았다. 지중해를 통해 뜻을 이루고자 했으나 지중해 연안의 열강 패권은 질서가 잡혀 있었고, 여전히 막강한 영국과 신흥강국으로 떠오른 독일 등에 비해 러시아는 소강상태를 지속해야만 했다.
러시아는 그 대안으로 동아시아에서의 군항확보를 꾀하면서 원료, 시장, 연료공급 기지 역할을 해 줄 식민지 확보에 나섰다. 이러한 러시아의 남진 정책은 동아시아에서 유럽열강, 특히 영국에게 부담을 주게 된다.
독일이 1899년을 기점으로 대양함대 건설추진과 전대륙에 걸친 해군동맹을 추진하자 영국은 대서양에 해군력을 집중하면서 인도 식민지배에 힘을 더해 줄 동양 협력세력으로 17만 육군과 더불어 강력한 해군을 구축해 가던 일본을 주목하게 된다.
일본은 청일전쟁 승리의 전리품으로 챙겼던 요동반도를 프랑스 독일 러시아의 압력으로 1895년에 반환해야만 했었기에 열강들 사이에서 고립되지 않으려고 했다. 또한 일본은 '조선을 일본제국의 독립 보장지로 삼는 것은 개국이래 불변하는 국시'(일본 참모본부 내각의견서 1903.6.22)라고 할만큼 대륙진출에 대한 강렬한 야욕을 가지고 있었다.
이렇듯 영국과 일본은 서로의 필요에 의해 1902년 1월 30일 영일협정을 체결한다. 영국과 일본은 조선과 청국의 독립을 승인한다고 했는데, 이 대목은 러시아의 남진정책을 막는다는 의미에서 삽입했기에 본질적으로는 영국은 청국에 일본은 조선에 대해 각각 특수한 이익을 갖고 있으며 그 이익이 침해될 때 필요한 조치를 취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영국과 일본 어느 나라가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제3국과 전쟁할 때 중립을 지킨다는 것이다. 조선과 청의 실제 독립보장보다는 영국과 일본의 이익을 우선시 했기 때문에 유동적인 동아시아 격변에 대비하기 위해 협정의 유효기간을 5년으로 한정했다고 볼 수 있다.
영일협정은 러시아를 긴장시켰다. 러시아는 외무장관 람스도르프의 주도아래 3월16일 제3국이 동아시아의 상황을 방해하는 위협이 가해지면 양국은 사전협약에 따라 권리를 갖는다는 러불 선언을 발표했다. 동아시아에서는 반대로 유화적 행동으로 1900년 북청사변을 통해 장악했던 봉천성 서남부, 길림성, 흑룡강성에서 러시아군이 철군한다는 내용으로 청국과 1902년 4월 8일 만주 철병 협정을 체결하면서 물러섰다.
러시아가 동아시아에서 청국을 내세우는 약화된 행동을 보인다고 생각한 일본은 조선과 만주에 대해 보다 강력한 '만주조선교환'이라는 6개항의 기초제안을 1903년 8월 12일 외무장관 람스도르프에게 제시했다. 일본은 조선을 완전히 지배하고, 러시아는 만주에서 상업적 권리만을 갖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러시아는 일본안과 반대로 청국에서의 러시아의 완전한 이익과 조선에서의 일본의 제한적 이익 허용안을 제시했다. 결국 1904년 1월 협상은 중단되고 말았다. 이 것은 물러설 수 없는 러시아와 승기를 잡은 일본간의 전쟁을 의미했다.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의 주선으로 1905년 9월5일 포츠머스 러일조약을 체결했다.
Article II "The Imperial Russian Government, acknowledging that Japan possesses in Korea paramount political, military and economical interests engages neither to obstruct nor interfere with measures for guidance, protection and control which the Imperial Government of Japan may find necessary to take in Korea....."
제2조: 러시아 제국정부는 일본이 조선에서 최고의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 권한을 소유함을 인정하여 일본 제국정부가 조선에서 취할 필요성이 있는 조선에 대한 지도, 보호, 통제 조치를 시행하는데 간섭이나 방해를 하지 않는다.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가 굳어지자 일본은 나아가 1905년 8월에 영일협정을 개정하여 확정함으로써 조선에 대한 지배를 보다 강화시킨다.
Article III: "Japan possessing paramount political, military and economic interests in Korea, Great Britain recognizes the right of Japan to take such measures of guidance, control and protection in Korea as she may deem proper and necessary to safeguard and advance those interests, provided always that such measures are not contrary to the principle of equal opportunities for the commerce and industry of all nations....."
제3조: 조선에서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인 최고의 권한들의 일본 소유에 있어서 대영제국은 그러한 권한들을 보장하고 진행하는데 적절하고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조선에 대한 일본의 최고의 지도, 통제, 보호 권리를 인정한다. 모든 국가들의 무역과 산업을 위한 기회 균등원칙에 위배되어서는 안된다.
Note C:"In case Japan finds it necessary to establish [a] protectorate over Corea in order to check [the] aggressive action of any third Power, and to prevent complications in connection with [the] foreign relations of Corea, Great Britain engages to support the action of Japan...
주 C: 제3열강의 침공을 저지하고 조선의 대외관계와 관련한 분규를 예방하기 위해 일본이 식민통치가 필요하다면 대영제국은 일본의 행동에 대해 지지할 것을 약속한다.
청일전쟁에서 차지한 요동반도를 유럽열강의 압력에 의해 일본이 포기하고, 러시아가 만주로 진출해서 장악하자 조선정부는 힘의 균형추를 따라 일본과는 거리를 두고서 러시아와 긴밀한 관계를 형성해 가다가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자 급격히 와해되고 말았다.
<가쯔라 태프트 비밀각서, 아시아에서의 유럽열강>
2. 가쯔라 태프트 비밀각서: 미서 전쟁, 영국과 미국의 밀월
독립전쟁에서 영국에게 승리한 미국은 광활한 영토, 바다로 둘러 쌓인 자연적 방어조건, 풍부한 자원 등을 바탕으로 국제분쟁이나 제국주의 전쟁에 관여할 필요가 없었다. 워싱턴이 유지한 불개입주의 원칙 외교정책은 쿠바의 독립투쟁과 루즈벨트를 위시한 정책가들이 미국의 힘을 의식하기 시작하면서, 일본의 집요한 접근으로 변화하기 시작한다.
마한(Afred T. Mahan)과 애덤스(Brooks Adams)는 세력균형론으로 루즈벨트에게 영향력을 끼쳤으며, 루즈벨트도 기존의 미국이 취해왔던 도덕적 교화 외교를 버리고 국익을 내세운 실리외교를 취했다. 가쯔라 태프트 비밀각서를 작성했던 태프트가 루즈벨트의 뒤를 이어 미국 대통령이 됨으로써 연속선상에 놓이게 된다.
미국 독립전쟁 때 멀어졌던 영국과 미국은 1880년대 접어 들면서 급격하게 가까워졌다. 미국은 영국의 외교정책을 지지했다. 즉 일본과 우호관계 설정에 성공한 영국은 얼마든지 필요에 의해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지지를 유도해 냈다는 것이다.
영국의 언론보도와 정치인들, 여론주도층에 폭넓게 형성되어 있던 조선은 독립을 유지할 힘도 없고 정부는 부패했다는 조선패망론은 자연스럽게 루즈벨트의 조선에 대한 무관심과 부정적 시각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었다. 여기에 루즈벨트는 니토베 이나조가 1900년 영문으로 발행한 사무라이 미화소설 무사도를 읽었고, 하버드대학 동창생 가네코 겐타로우와의 만남 등은 일본에 대해 개인적으로도 우호적인 입장에 섰다.
<루즈벨트와 거친 기병대(Rough Rider), 루즈벨트는 이후 막강한 미해군을 양성했다.>
"나는 일본이 조선을 손에 넣는 것을 보고 싶다. 일본은 러시아에 대한 견제가 될 것이고, 지금까지의 행동에서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 - 뉴욕 주지사 시절 친구에게 1900
"나는 일본의 승리를 더없이 기쁘게 생각한다. 일본은 우리의 싸움을 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 러일전쟁 직후 아들에게
"서양문명의 수입에 의한 동양의 발전은 일본의 사명이다. 일본의 승리는 세계의 행복이다." - 가네코 겐타로우와의 만남에서 1905
미국 바로 밑에 위치한 쿠바에서는 근 50여년 동안 항서 독립운동이 벌어져 미국내 국민여론은 쿠바를 독립시켜야 한다고 폭주하고 있었고, 뉴욕월드와 뉴욕저널 등 언론들은 전쟁을 시작해야 한다고 나섰다. 이러한 미국내 비등한 쿠바독립 여론은 스페인을 극도로 긴장시켰다.
스페인이 아메리카 대륙에 세운 뉴스페인 제국은 쿠바 아바나를 중심축으로 놓고서 4개의 수도인 산타페, 멕시코시티, 리마, 유카탄 반도를 연결하고 있었기 때문에 스페인에게 쿠바는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요충지였다.
1898년 2월 5일 쿠바 아바나 항에 정박중이던 미국 전함 메인호가 원인 모를 폭발을 일으켜 침몰함으로써 전쟁은 현실로 나타나 1898년 5월 12일 12척의 미해군 전대가 산후안을 포격함으로써 시작되어 1898년 8월 12일 워싱턴에서 미국과 스페인간에 평화 의정서(Protocol of Peace)가 체결됨으로써 종전된다.
루즈벨트도 공직에서 사임한 후 거친 기병대(Rough Rider)를 결성해서 쿠바의 산환 계곡으로 출정했고, 홍콩에 정박 중이던 아시아함대의 듀이 제독에게 미서 전쟁이 발발하면 즉시 마닐라를 점령하라고 소식을 전했다.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미국은 푸에르토 리코와 괌을 스페인에게서 양도받고, 쿠바를 독립시켰으며, 1898년 파리조약을 통해 필리핀을 2천만 달러에 양도받았다. 350년간의 스페인 식민지 시대 때 34번의 필리핀 독립투쟁은 그 대상이 미국으로 바뀌었지만 1902년에 완전 진압된다. 여기에는 부족간의 이해관계와 독립운동 세력간의 암살 등 갈등도 작용했다.
아시아에 대한 미국의 무관심은 스페인과의 전쟁 승리로 생겨난 필리핀으로 인해 일정한 관심으로 바뀌었다.
루즈벨트는 대통령이 된 이후에는 세력균형(balance of power)을 내세운 보다 확장적 국익외교를 추구했으나 군사력을 동원한 무력을 사용하지는 않았다. 여전히 먼로 독트린(Monroe Doctrine)을 따랐으며, 다만 남미외교정책에 있어서 유럽 열강의 군사적 행동 반대를 강력하게 주장하면서 말은 부드럽게 하면서 큰 방망이를 보여준다는 큰 방망이 외교(big-stick diplomacy)를 추진했지만 방망이를 휘두르지는 않았다.
루즈벨트의 외교정책은 가쯔라 태프트 비밀각서 교환을 주도했던 태프트가 루즈벨트를 이어 미국 대통령이 되면서 총탄대신 달러를 사용하는 정책으로 변하지만 약한 나라는 망하고 강한 나라는 살아남는다는 큰 틀은 유지하면서 미국의 이익을 위해 무력사용을 최소화 하면서도 적극적인 외교를 펼친다는 것이었다.
루즈벨트의 세력균형을 따른 국익우선 정책은 특히 남미외교에서 유럽열강의 남미 지배를 배격하기 위해 미국이 유지해 왔던 불간섭이나 민족자결론 등 미국의 철학이나 이상 등을 완전히 벗어나 국제적 관례와 국제법을 상당히 어겼지만 나름대로 강력하게 이어졌다.
루즈벨트의 무력을 동원하지 않는 큰 방망이 외교는 남미정책과는 다른 형태이기는 했지만 그대로 동아시아에서도 적용됐다. 동아시아에 적극적으로 무력 개입하거나 필리핀을 지키기 위해 주변 세력을 공격하는 무력 사용이 아닌 방망이를 손에 든채 부드러운 말로 대신하는 정책을 폈다. 그 결과물이 바로 가쯔라 태프트 비밀각서다. 필리핀으로 가던 태프트는 일본을 경유하는 과정에서 접근해 온 가쯔라와 만나 가쯔라 태프트 비밀각서를 급조하게 되고, 루즈벨트는 그대로 그 안을 인정했다.
그 이전에 러시아에 대한 입장은 루스벨트, 록힐, 알렌이 참여한 모임에서 조선 독립유지에 우호적이었던 미국 공사 알렌의 친러론을 배제하고 반러시아 정책을 선택하더라도 미국의 국익에 해가 되지 않는다고 결론을 내렸었다. 전 주한 미국 공사이자 극동 문제 외교 고문인 록힐(William W. Rockhill, 柔克義)은 조선은 스스로 독립을 유지할 수 없다는 현실론에 입각해서 조선이 어차피 러시아나 일본 중 어느 한 나라의 지배를 받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기에 (남진 정책을 추진하는) 러시아 보다는 일본의 지배를 받는 것이 더 낫다는 전략을 고수하고 있었다. 이러한 생각은 영국에서는 매우 폭넓게 받아 들여진 정서였다.
오히려 작은 나라인 일본이 조선을 병탄하여 힘을 길러서 러시아와 맞섬으로써 동아시아에서 세력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더 낫다는 판단을 하게 된 것이다. 더구나 필리핀이라는 미국의 식민지가 존재하는 실제 상황에서 구태여 무리하게 일본과 대립해서 전략적 가치가 떨어진다고 판단한 아시아에서 전쟁을 수행할 필요도 없었다.
3. 가쯔라 태프트 비밀각서: 조선과 미국
조선의 미약한 힘과 부패한 정부는 아무 것도 이뤄낼 수가 없었다.
청국에게 의존하다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일본에게로, 러시아 프랑스 독일의 압력으로 일본이 요동지배를 상실하고 러시아가 만주를 장악하자 러시아에게로,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다시 일본에게로 향해야만 했던 비극적인 선택을 계속할 수 밖에 없었다.
1904년 한일의정서에서 일본이 조선의 독립을 보장한다는 말을 철석같이 믿어야만 했던 상황에서 러일전쟁 승리 후 돌변한 일본의 태도는 조선에게는 절망을 가져다 주었다.
이제 조선이 그나마 도움을 청할 수 있는 나라는 미국 외에는 없었다. 하지만 미국에게 조선은 그 존재 의미가 없을 뿐더러 아무런 관심과 고려의 대상도 아니었다. 그저 상호방위 조약이나 동맹조약도 아닌 조미수호통상조약이라는 상업조약만 서로를 그나마 약하게 연결해 주고 있었을 뿐이다.
조선은 조미수호통상조약 제1조에 근거하여 미국에게 조선의 독립유지를 보호해 줄 것을 요청하게 된다. Article I. There shall be perpetual peace and friendship between the President of the United States and the King of Chosen and the citizens and subjects of their respective Governments. If other Powers deal unjustly or oppressively with either Government, the other will exert their good offices, on being informed of the case, to bring about an amicable arrangement, thus showing their friendly feelings. 제1조 사후로 대한조선군주와 대아미리가(大亞美理駕)합중국 프레시덴트 및 그 인민은 각각 영원히 화평우호를 지키되 만약 타국이 불공경모(不公輕侮)하는 일이 있게 되면 일차 조지(照知)를 거친 뒤에 필수상조(相助)하여 잘 조처함으로써 그 우의를 표시한다.
다급해진 조선은 공화정 운동을 하다 5년간 투옥되어 있다 석방된 이승만을 미국에 파견한다. 1904년 11월 4일 조선을 출발한 이승만은 1904년 12월 31일 워싱턴 디씨에 도착해서 주미공사관 서기관 김윤정을 만나 협조를 구한다.
1905년 2월 20일 딘스모어 의원과 함께 국무장관 헤이를 만나 미국이 한국에 대한 조약상의 의무를 다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는 약속을 받아 내지만 7월 1일 헤이가 사망으로써 미국 정부내 친한파를 잃고 만다.
하와이 교민들을 통해 청원서를 작성했던 윤병구 목사는 와드맨 감리사를 통해 태프트로부터 루즈벨트에게 갈 수 있는 소개장을 받아 내고, 이승만은 서재필과 함께 청원서를 가다듬었다. 오이스터 베이 소재의 여름 백악관에서 1905년 8월 4일 오후3시에 루즈벨트를 접견해서 주미공사관을 통해 정식 청원서를 제출하면 중국의 청원서와 함께 포츠머스 강화회담에 제출하겠다는 답변을 듣는다.
민영환에게 연락을 취해 조선정부에서 서기관 김윤정을 대리공사로 승진시키도록 조치를 취했는데도 친일매국노 김윤정은 약속을 어기고 본국 정부의 훈령이 없기에 정식 청원서를 작성해서 제출할 수 없다고 거절하여 정식 청원서를 미국 정부에 제출하지 못하고 만다. 이로 인해 실의에 빠진 민영환은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1905년 11월 30일 자결하고 만다.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당한 을사조약(11월 16일) 이후 조선정부는 다시 헐버트를 미국에 파견하지만 이미 외교권을 박탈당해 신임장을 제출할 수 없었던 조선정부의 신임장이 없다는 이유로 국무장관과 대통령과의 접견을 거절당했다.
1905년 12월 조선정부는 다시 민영찬을 미국에 파견하지만 조선이 일본과 맺은 을사조약으로 인해 조미수호통상조약 제1조를 논할 접견에 실패한다.
조선은 세계 여행에 나섰던 루즈벨트의 딸이 1905년 조선도 방문하자 고종 알현까지 주선하고 환대하며 친미외교에 나섰으나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했다. 루즈벨트의 젊은 딸은 단순한 관광객이었다.
<1905년 조선을 여행하고 있는 엘리스 루즈벨트, 프랑스 르 프티 파리지앙 1905년 10월 8일자>
(http://blog.naver.com/qnwkkr/120056462276) 미국은 이미 1905년 7월에 가쯔라 태프트 비밀각서를 교환했기 때문에 조선의 때늦은 친미외교로의 전환과 조선의 독립유지 노력은 실패하게 되어 있었다. 애초에 민간차원에서의 선교를 빼고는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조선에 대해 관심이 적었던 미국이 아무런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 조선을 구제해야할 의무도 의미도 없었다.
조미수호통상조약이라는 것도 미국이 조선을 군사동맹 조약에 근거해 군사력으로 방어해준다는 것이 아니라 타국이 불공경모(不公輕侮, unjustly or oppressively) 했을 때 미국과 친하다는 그 우의 표시(showing their friendly feelings)을 보여 준다는 의미만 있는 말 그대로 무역에 관한 협정이었을 뿐이다.
한편 조선은 영국이 일본과 손잡은 것을 알면서도 "In this bilingual plea, the King of Korea asks Britain for their assistance and sympathy quoting; the signature of our cabinet were obtained by intimidation.....and never authorized the cabinet to sign treaty which was illegal. 본 2개국어 청원서에서 조선국왕은 조선의 내각서명이 일본의 협박으로 이루어진 것이지... 결코 내각이 불법적인 조약에 서명한 것을 공인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용하면서 동정과 지원을 대영제국에 간청한다"라고 도움을 요청할 정도로 긴급했다.
다만 미국에게 서운한 것은 남미정책에서 보여 줬던 미국의 외교정책을 조선에도 조금만 더 적용해서 조선의 독립을 보장한 1904년 2월에 체결된 한일의정서에 관심을 보여줬으면 어떠했을까 하는 점이다. 욕심 부릴만한 것이 없는 빈약하고 작은 나라가 운이 좋게 탐욕의 국제질서에서 먹이로 선택되지 않음으로써 살아남기도 하지만 그 보다 너무나 많은 경우에는 쉽게 정복당하고 멸망했다. 조선보다 더 작은 영토에서 생존해 가는 대한민국이지만 보다 강한 군사력과 경제력으로 인해 지금은 서로가 친구가 되고 동맹이 되려고 하고 있다.
조선의 입장에서 또한 현재 시점에서도 조선에 대해 미국이 취했던 입장에 대해서는 매우 서운할 수 밖에 없다. 결국 그 나라와 민족을 지키는 것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보듯이 때론 정복당하고 억압당하고 학살당할지라도 그 민족 혹은 국민 스스로가 자존의식과 독립을 유지하려는 불굴의 애족애국 정신과 더불어 실제적인 실천을 구체화 하는 이상에는 언젠가는 항구적인 생존과 번영을 향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