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비로 추정된다는 또 하나의 사진. 엽서사진, 대구>
("민비께서는 황공하오나 그야말로 조선여성으로의 모든 미를 구비하신 미인이셨습니다. 크도 작도 않으신 키, 가느다란 허리, 희고 갸름하신 얼굴, 총명과 자애의 상징인 흑진주 같으신 눈, 옻칠같이 검으시고 구름 같으신 머리, 이 모든 영자英姿가 아직도 내 눈에서 사라지지 않은듯 싶습니다. 그리고 취미에 부유하심은 우리 미국여성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옷(御着衣) 화장(御化粧) 음악감상(御娛樂) 등 가지가지로 취미가 다양했습니다. 더욱 음악에는 많은 흥미를 가지신 줄 알았습니다. 여가만 계시면 가무음곡을 어전에 진秦케하고 근연劤然히 구경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 민비와 西醫, Annie Eellers Bunker 1926 신민사.)
조선에 서양문물에 대해서는 이미 박연(얀 얀스 벨떠프레이)을 훈련도감에 배치해서 대포 등을 개량해 오던 시기부터, 이후로는 병자호란과 셔먼호 사건 등을 거치면서 서구의 많은 물건들이 소개됐다. 그 외에도 개인의 여행과 정세파악을 목적으로 저술된 견문록 등도 역시 크게 소개되었다. 따라서 관료들과 지식인층에서는 적지 않게 서양의 기술을 받아 들여야 할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었다.
서양기술을 받아들는데 장애물이 있었으니 조선의 고민은 기독교였다. 500년간 조선의 통치윤리이자 사회윤리였던 유교적 생활방식과 정면으로 충돌했기 때문이다. 유교적 생활방식의 붕괴는 필연적으로 국가 사상의 대대적인 변화를 의미했기에 타성에 젖은 다수의 양반들에 의해 수용될 수 없었다. 실제로 일본에 굴욕 당하여 맺었던 강화도 조약체결 같은 상황에서도 조선에 대한 기독교 포교금지가 다뤄질 정도였다.
" ~지금까지 일본 사람이 예수교耶蘇敎를 믿는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조선 정부에서는 일본 인민이 혹시라도 조선 인민들에게 예수교를 전파하려는 것을 금지하려는 사항에 대하여 일본 정부로서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 이상의 각 문건은 신 대관(신헌申櫶)의 질문을 받았기에 저의 의견을 이렇게 진술하는 것입니다." 외무대승 궁본소일(미야모토 쇼이치宮本小一)" - 고종실록 고종13년(1876년) 2월 3일.
흥선대원군이 비록 척화비를 내세워 강력한 자주정책을 추구했지만, 이것은 단순히 어느 나라나 개화과정에서 취하게 되는 첫번째 단계인 방어적 대응인 강경책이다. 즉 각 나라들은 낯선 타국의 접근에 대해서 처음에는 거부감과 위협감을 느끼면서 방어적 태도를 취하고 내부적으로는 우선 결집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결국에는 내부가 결집되는 동안 상황을 분석하고 예측하면서 준비과정을 통해 마지막 단계인 수교의 형태로 발전하게 된다. 조선이나 중국이나 일본이나 모두 똑같은 단계를 거쳤다. 조선은 척화비로, 일본은 사무라이로, 중국은 중화사상으로 서양 국가들에 맞섰다. 다만 일본이 가장 빨리 갈등관계를 정리하고 수교로 나아가 서양기술을 자국화 하는데 성공함으로써 당시 세계 흐름이었던 해양제국주의에 따라 아시아 패권을 선점할 수 있었다.
조선도 최종적으로 수교로 나가게 되지만 그 과정에서 주어진 한정된 시간 안에서 얼마나 효과적으로 준비를 마치느냐가 관건이 된다. 이런 면에서는 흥선대원군도 비판 받아야 하지만 대원군은 적어도 내부결속에는 성공했으며 남은 것은 점진적 개화를 위한 행정혁신과 이를 위한 바른 인재의 등용, 부국강병의 방책 수립이었다.
따라서 근원적으로는 매국녀 민비와 고종이 동시에 상당히 비판 받아야 한다. 급박하게 주어진 한정된 시간을 탐욕으로 낭비해 버렸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비는 단순히 일본군의 손에 죽임을 당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매국적 행위가 감춰진채 끝없이 애국녀로 추앙받고 있는 현실이다. 오래 전부터 국민들의 항일의식 때문에 민비시해가 수 많은 이야기로 다뤄졌다. 어느 순간부터 민비시해에 대한 동정이 민비를 애국적 성녀로 둔갑시키고 말았다. 즉 우리의 잘못마저 미화시키는 지경에 처해 있다.
<조선 상품 수출과 중계무역 수출>
1. 매천야록 요약으로 본 민비의 실정, 부정부패와 망국의 시작
민비의 문제점은 어느 나라나 선택하는 외부세력에 대한 대응에서 초기 상황에 전개되는 내부정비 과정에서 커다란 잘못을 했다는 것이다. 매국녀라고 비판해도 무방할 정도로 조선을 망쳐 놓았다.
1) 민비의 부정부패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권력쟁투에서 흥선대원군이 최익현의 배척 상소문 사건을 계기로 대원군의 10년 섭정에 불만을 가졌던 고종과 지지세력들에 의해 밀려나자 부인인 민비는 시아버지가 누리던 권력을 차지하고서는 우유부단한 고종을 구슬려서 각종 만행을 저지르기 시작한다.
"□□□□□□ 고종이 내전을 들어가다가 순간 후문으로 나가는 사람을 보았다. 고종은 그가 누구냐고 물었으나 민후는, “내 눈에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데 전하께서는 무엇이 보인다고 하십니까?”라고 하였다. 고종은 이상하게 생각하여 좌우 시녀에게 물었으나 모두 보지 못했다고 했다. 이때 민후가 천천히 말하기를, “전각이 깊어 혹 요귀가 들끓은 것이니 굿(祈禳)을 해야겠습니다”라고 한 후 더욱 기도하는 곳을 늘렸다. 고종은 끝까지 깨닫지 못하였지만 민후가 고종을 이와 같이 우롱한 것이다."
우유부단한 고종을 앞세워 시아버지의 권력을 대신 꿰차자 우선 보여준 행동은 역시 자신의 권력 기반 강화를 위해 그릇된 방식으로 부정한 패거리를 모으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민영위, 임영규, 민영상 등을 비롯해서 지방의 방백, 군의 수령까지도 민씨들을 임명했다. 그럼에도 민씨 성은 부족했다. 민씨 혈통은 민정중과 민유중의 핏줄인 민영익 부자와 민영위 뿐이었다. 양자들을 들여서라도 늘린 민씨의 숫자와 민씨 성이면 혈연관계의 실제를 따지지도 않고 촌수로 인정해서 관직에 임명하다 보니 심지어는 단순하게 민씨 성만 가지고 있어도 의기양양하여 마을에서 기세를 부릴 정도였다.
이를 바탕으로 해서 민비는 차기 권력마저 담보할 수 있는 왕세자 구축 작업에 돌입한다. 민비는 조선 천하 명산의 절들을 두루 다니며 왕세자가 탈이 없도록 축원을 빌었다. 심지어는 금강산 1만2천봉 순례에 나서 비록 노제에 쓰는 가짜 돈이라고 할지라도 뿌려댄 지전의 구입가격은 1만냥이나 됐다. 조금이라도 명망이 있다고 알려진 절에는 원당(소원을 비는 집)이라 하여 건물을 세우고는 그곳의 중들에게 함부로 대하면 집안이 파산할 정도로 엄하게 조치했다.
소원기도에 심취한 민비는 나중에 임오군사봉기 때 도피처에서 사이비 무녀에게 빠져 환궁하면서 데려와 진령군眞靈君에 봉할 정도였다. " ~중전이 그녀에게 내린 금은보화가 무수하였다. 그녀의 말 한마디에 화복이 걸려 있어 종종 수령과 변장들이 그녀의 손에서 나오기도 하였다. 이에 염치없는 경재들은 그녀에게 아부하여, 간혹 자매를 맺기도 하고 혹은 의자義子를 맺자고도 하였다. 그중 趙秉式, 尹榮信, 鄭泰好 등이 더욱 심하게 보채었다. 그 무녀의 아들 金昌烈은 엄연히 대관들의 서열에서 행세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그 무녀가 제천과 청풍 사이에 사는 사람이라고 하였다."
(민비의 지독한 아들에 대한 집착은 1871년 4월에 태어나자 곧 죽은 첫째 아들로 인한 불안감, 고종이 17세 때 궁녀 이씨에게서 아들을 얻고는 기뻐서 완화군에 책봉하고는 원자로 삼으려고 했던 과거 때문에 생겼다고 할 수 있다. 완화군은 13세 때에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민비가 죽였다고 이야기 퍼졌다.
민비의 첫째 아들이 (항문이 막힌채) 태어나면서부터 건강하지 못했다. 대원군이 산삼을 하사해서 먹였는데 얼마 후 죽었다. 이 때부터 민비는 대원군을 평생 증오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고종이 궁녀 이씨의 아들 완화군을 원자로 삼으려 할 때 반대한 이가 바로 대원군이었을 정도로 대원군은 민비의 첫째 아들 사망 원인과 상관이 없었다.
또한 '민비는 질투심으로 고종이 관계한 여자들을 많이 죽였다.' -조선왕국의 운명: 독립인가, 러시아 또는 일본인가. 빌타르 드 라퀴에리 1898)
이러한 민비의 요사스러운 행각과 더불어 고종마저 함부로 상장을 남발하다 보니 대원군이 10년 집권동안 외침에 대비해서 비축해 놓은 국고의 쌀이 바닥나고 말았다. 내수사의 재정은 오래 전에 소진됐고 이제는 호조와 선혜청의 공금마저 유용하다 보니 조선의 국고는 텅 비어 버렸다. (이 때로부터 조선은 청나라에게서 막대한 차관을 들여 옴으로써 원세개가 조선의 재정과 시중의 상권을 맘대로 주무르며 청나라 상인들에게는 온갖 특혜를 주게 된다.)
이도 부족해서 고종은 과거시험 합격증을 매매하고 민비는 매관매직하는 부정을 저지르게 된다.
"민비는 비용이 부족한 것을 염려하여 수령 자리를 팔기로 마음먹고 민규호에게 그 정가를 적어 올리도록 하였다. 민규호는 백성을 직접 상대하는 관직을 팔 수는 없다고 판단하고 응모자가 없도록 하기 위해 그 가격이 1만꾸러미라면 2만꾸러미로 정하였다 . 그러나 응모자들은 더욱 경쟁을 심하게 했고, 그들이 관직을 받으면 백성들에게 착취를 강요하여 백성들은 더욱 궁핍하게 되었으므로 민규호는 후회하였다."
민비는 매관매직 뿐만 아니라 관직제수를 남용하기조차 했다. 임오군사봉기가 발생하자 충주로 피신할 때 자신의 교자를 맸던 □聖澤을 전라병사에 임명하고, 역시 교자꾼이었던 □億吉은 낙안군수에 임명했다. 자신의 대하증 증세를 완화시켜 준 최석두를 고산군수에 이어 남원부사에 임명했다. (이후 최석두는 민비의 대하증이 도로 심해지자 한양으로 끌려와 사약형에 처해졌다.) 자신의 감기를 치료해 준 鄭淳?을 영평군수에 임명했다.
좌의정에 오른 김병시가 눈물을 흘리며 진언할 정도로 조선의 행정체계는 무너져 버렸다. 1만냥을 내고 관직을 얻어 임지에 도착했지만 바로 다른 사람이 그 돈에 몇 천냥을 더 내자 즉시 교체되었다. 영남의 어느 읍은 1년에 4번이나 수령이 바뀔 정도였다. 관직을 사기 위해 바친 돈을 회수하기 위해서 앞다투어 지방 관직을 선호했으며 왕의 면전이라 주민들을 수탈할 수 없었던 한양의 문관직文職은 제일 인기가 없었다.
점차 매관매직에만 그친 것이 아니고 지방 관리들에게 매년 상납할 뇌물의 할당량을 강제로 정해주고는 공식문서(關文)로도 재촉하자 심지어는 지방관리들은 자기 재산마저 보태서 상납할 정도였다.
이런 이유로 점차 벼슬을 사려는 사람들이 줄어들었다. 그러다 보니 가문 내부의 암투에서 상대방을 곤경에 빠뜨리려고 돈을 바쳐 상대방을 일부러 관직에 앉혀서 욕을 보이기도 했다. 관직에 임명되면 재산을 탕진한다 하여 벼락감투(벽력감투霹靂龕套)는 별악감투(別惡龕套)라고 불렸다. 이런 상황에서 관리들은 살아 남으려고 더욱 더 지방민들을 수탈해야만 했다.
민비가 매관매직에 힘썼다면 고종은 과거시험의 합격증을 남발하면서 합격증을 팔았다. 심지어 대과大科는 10만여냥에 거래될 정도였다. 과거시험도 너무나 많이 실시하다 보니 과거시험일만 되면 물지게와 똥지게를 지던 사람들 마저도 하던 일을 멈추고 갑자기 갓을 쓰고 붓을 꺼내 들었다. 이 모습을 본 청나라 외교관들이 조선에는 인재가 넘친다고 오해할 정도였다.
2)민비의 실정
대원군이 강화도에서의 양인들의 소란을 응징하기 위해 강화도에 1866년 진무영鎭撫營을 설치하여 포수 3천명을 배치했으나 민비는 이를 폐지해 버렸다. ("이 영營이 국가에 무슨 해를 끼쳐서 그 장성長城을 파괴하는가?"라고 대원군은 탄식했다.)
대원군은 이시원이 주관하게 하여 비록 문장이 뛰어나 장원급제가 됐을지라도 합법적인 시험응시 절차를 거치지 않았으면 무효로 할만큼 엄격하고 공정하게 과거시험을 실시했다. 민비는 매관매직으로 관리를 채용하고, 고종은 불법적으로 고위직과 하위직을 막론하고 과거시험 합격증을 팔았다.
대원군은 도둑질한 장물에 관계되면 아무리 친한 사람이라도 엄벌했기에 탐관오리가 줄어 들었다. 반면에 포도대장 신명순申命淳이 스님을 사칭하여 강간을 일삼고 강도들과 손잡은 북한산 기슭의 산적들을 체포했지만 민비는 교지를 내려 석방시켜 버렸다. 또한 강도 13명을 체포했지만 고종도 교지를 내려 석방시켜 버리자 포도대장 신명순은 아에 강도들의 소굴을 헐어 버리고는 왕의 교지를 따르지 못한 불충한 신하라고 하면서 포도대장직을 그만둬 버렸다.
대원군은 군역을 뜯어 고쳐서 양반과 상민을 가리지 않고 동일하게 장정 한 사람마다 동포전을 바치도록 했지만(1864년), 민비는 군량마저도 6개월 동안 군인들에게 지급하지 않았다. 심지어 쌀의 양마저 속이니 임오군사봉기가 일어나자 쫓겨나기까지 했다.
대원군이 동포洞布와 와환臥還으로 환곡제를 개혁해서 농민들의 부담이 줄어 들고, 또한 사창社倉을 설치하여 농민들에게 영농자금을 빌려 줬다. 민비는 매관매직도 부족해서 관리들에게 아에 뇌물상납량을 할당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농민을 수탈하게 만들었다.
대원군은 국방태세를 엄히 해서 칼과 활, 포와 총을 예리하게 갈고 닦았지만, 민비는 총칼을 녹슬게 하여 동학농민혁명봉기가 일어 났을 때 주현州縣의 무기고에 보관된 총칼이 녹슬어 쓸 수가 없었다.
대원군은 국민들이 원망하며 두려워 할 정도로 엄정하게 법을 집행했으나, 민비는 강도들과 내통한 관리들의 말에 현혹되어 범죄자들을 석방하라는 교지를 내릴 정도였다.
(그럼에도 매천야록을 지은 황현은 대원군을 꾸짖는다. 비록 대원군 10년 집권기간 동안 국가에 변고가 없었으나 인재를 양성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집권초기의 문제점들을 들면서 천년 후에 통탄할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까지 했다.
한편 매천 황현은 조선의 4대 무가武家를 소개했다. 니탕개尼湯介를 격퇴한 신립申砬 장군가, 인조반정에 참여한 구인후具仁厚 장군가, 이괄의 난을 평정한 장만張晩 장군가다. 다들 성쇠를 거듭했지만 지금 유일하게 변하지 않는 무가는 이충무공 자손 뿐이라고 했다. 나라를 지킬 군인 가문은 몰락할 정도로 방치되고 이충문공가도 평범한 문반을 대우하는 수준만큼도 대접 받지 못하는 것을 한탄했다. "아, 심하다. 국속國俗의 협소함이여!")
<민비가 만든 왜별기대 병사 모습>
<대한제국시대 고종이 창군한 신식군대. 행진과 포병부대 사열 장면>
3) 신식군대라던 별기대의 실체, 임오군사봉기와 민비의 도망
궁궐에서 불법으로 국가의 돈을 맘대로 쓰다 보니 1874년 이후 내수사의 창고는 이미 텅텅 비었고 호조와 선혜청의 창고마저 바닥나 한양 중앙 관리들의 봉급마저 제대로 지급하지 못했다. 하물며 문관보다 못하게 천대 당하던 군대는 굶다 못해 5영을 2영으로 줄여도 배고픔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따라서 우선적으로 군복무 장기근속자들과 신체등급이 떨어지는 병사들을 해고하여 숨통을 틔우려고 했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군인들의 봉급을 무려 6개월 넘게 지급하지 않았다. 군대를 늘려도 부족한 판국에 군감축 계획에 따라 군인들의 숫자가 줄어 들었는데도 군인들에 대한 처우가 전혀 개선되지 않음으로 인한 군부의 불만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황급히 전라도에서 세금으로 거둔 쌀이 선혜청에 도착하자 밀린 군인들의 봉급을 먼저 지급하도록 했다. (조선시대에는 전라도가 조선 전체 세금의 70%를 담당했을 정도로 부담이 컸다. 여기에 민비의 가혹한 착취마저 더해졌으니 동학농민혁명봉기가 일어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부패할대로 부패한 조선정부에서 선혜청의 업무마저 횡령이 횡행했다. 선혜청 당산관 민겸호閔謙鎬는 쌀을 빼낸 양만큼 쌀겨로 채워 넣고서는 치부했다. 이에 6개월이나 굶고 있었던 군인들은 분노하여 민겸호를 두들겨 팼다. 겨우 빠져나온 민겸호는 모조리 잡아 죽이겠다고 설쳤다. 군인들은 "굶어 죽으나 법에 따라 죽으나 마찬가지이니 차라리 죽여야 할 사람을 죽이고서 원한이라도 갚겠다"고 봉기했다.
분노한 군인들은 민겸호가 도망간 후 그의 집을 아에 가루로 부셔 버렸다. 집안에서 나온 귀한 것들을 손에 쥐고 있으면 정당한 봉기가 아닌 도적떼로 몰린다 하여 민겸호가 집안에 쌓아 두었던 인삼, 녹용, 사향 등을 불태우니 몇 리 밖까지 냄새가 풍겼다.
임오군사봉기군은 왜별기대(별기군)를 습격하여 천연정에 머물고 있던 왜인 교관을 비롯해서 왜인 병사까지 7명을 사살했다.
" ~ 이들은 남산 밑에다가 교련장을 마련하여 그곳에서 총을 메고 교련을 하였으므로 먼지가 허공을 가리어, 이 광경을 처음 본 한양(장안) 사람들은 놀라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개화가 된 이후, 그들은 이해를 막론하고 일본인의 이야기만 하면 이를 갈며 그들을 죽이려고 하였다." 당연히 임진왜란의 영향으로 인해 조선민중은 민비가 만든 사병조직인 별기대가 왜놈들로 구성됐다 하여 왜별기대라고 불렀다.
(왜별기대는 조선 최초의 자주적 신식군대가 아니다. 단순히 소총을 들었다고 신식군대라고 한다면 하다못해 효종 때 이미 조선에는 소총부대가 있었기에 자주적 신식군대를 유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마치 왜별기대 이전에는 조선에 소총부대가 없었는데 민비가 소총부대를 만들었기에 신식군대라고 칭하는 것은 정말 잘못됐다.
물론 과거의 조총과 조말의 소총의 성능차이는 있지만 개량할 수 있는 기술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다만 의지가 없었을 뿐이다. 조선에 부족했던 것은 소총이 아니라 전략무기였다. 즉 철로 만든 증기 함선과 신형 대포에서 열세에 놓임으로써 해양제국시대에 뒤쳐질 수 밖에 없었다.)
왜별기대를 장악하고 있던 굴본예조(호리모토 레이조 堀本禮助)는 교련장에서 도망가다 조선민중의 돌팔매에 맞아 죽었고, 나중에 조선총독부 초대 공사가 되는 화방의질(하나부사 요시타다 花房義質)은 경기관찰사 김보현에게 뇌물을 주고 미리 만들어 놓았던 통행증을 내밀어 부산 동래 일본인 거류지로 황급히 달아났다.
이후에 대원군이 청나라에 강제 납치 당한 후 민비가 환궁하자 화방의질(하나부사 요시타다)은 2개 중대를 이끌고 한양으로 와서 임오군사봉기 때 죽은 왜별기대 일본인장병들의 보상을 요구했다.
민비는 자신이 왜별기대를 만들었기에 사망보상금으로 5만원, 기물파손보상금으로 10만원을 지급했다. 이 때부터 일본군들은 한양에 대규모로 주둔하게 됐다. 화방의질(하나부사 요시타다)은 나아가 일본군 주둔지를 요구해서 주동注洞에서 상남촌上南村까지 40~50리의 땅을 탈취했다.
임오군사봉기군은 흥인군 이최응(대원군 형), 경기관찰사 김보현, 민씨일족 민겸호, 민창식 등을 죽이는 등 탐관오리의 처형을 진행했다. 민비는 4인교를 타고 빠져 나가다가 걸려서 봉기군에게 머리채를 잡힌 채 땅에 내동댕이쳐졌으나 무감武監 홍재희洪在曦가 나서서 여동생이라고 속여서 겨우 도망갈 수 있었다.
궁궐에서 겨우 도망쳐 나온 민비는 사어司禦 벼슬을 했던 윤태준의 화개동 집에 숨었다. 익찬翊贊 민응식과 진사 민긍식이 한양은 위험하다고 말하자 민비는 시골로 도망가기로 했다. 먼저 판서를 지냈던 민영위의 집으로 간 다음 민응식이 오래 전에 충주 장원촌에 사두었던 빈 집으로 이동했다. 검문검색이 엄중한 한강을 건널 때는 민비가 금반지를 빼서 노 젓는 사공에게 뇌물로 주어야 했으며, 노자 돈이 없어서 승지를 역임한 조충희가 말 한 마리를 팔아서 돈을 보태 주었다.
(이후 환궁한 민비는 충북 제천에 피신처로 월악궁 건설에 착수했다. 민비는 심지어 임오군사봉기군을 피해 달아 난 충주 노은면에 머물 때도 그곳에 궁궐을 지으려고 시도했을 정도였다. 그 정도로 민비는 철이 없었다.)
고종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망연자실해 있었다. 김병시가 살아 남기를 포기한채 떨고 있는 고종을 업고 별궁으로 자리를 옮겼다. 또한 훈련대장으로 근무했던 조영하가 평소에 부대원들에게 잘해 주었기에 그의 신망 덕분에 수색에 나선 봉기군으로부터 고종은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임오군사봉기군의 강력한 지지로 고종으로부터 군국사무를 처리하라는 명이 내려지면서 대원군이 다시 권력을 장악했다. 대원군의 봉기군 해산 명령에도 불구하고 봉기군 일부는 여기저기서 소란을 피우고 있었다. 그런 때에 민영단閔泳端이 강원도와 경기도의 보부상 천명을 이끌고 동대문으로 몰려 오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한양 주민들이 앞다투어 이마에 띠를 두르고 깃대를 세워 골목을 메우면서까지 적을 방어하겠다고 나설 정도로 민심은 절대적으로 대원군을 지지하고 있었다.
민중의 확고한 지지를 받던 대원군은 돌연히 청나라 군대에게 납치당해 끌려 갔다. 대원군이 민비의 부활을 막기 위해 봉기군에 죽임을 당했다고 하면서 가짜 장례를 치룬 것이 시발점이 됐다. 청나라 천진에서 머물고 있던 어윤중魚允中이 6월에 김윤식金允植과 함께 청나라 이홍장李鴻章을 찾아가 징계해달라고 매달렸다.
이홍장은 청나라가 오랫동안 전쟁을 하지 않지 않았음으로 번국藩國을 진압할 필요성을 느끼고 마건충馬建忠과 정여창丁汝昌에게 주사舟師 수천 명을 동원해 조선을 치도록 명령했다. 7월13일 숭례문에 도착해서 극구 사양하는 대원군을 끝내 초청하여 연회를 극진히 베풀어 주어 안심시켰다. 두 번째로 청나라 군영으로 초청해 대원군을 수행하던 시종들을 1문과 2문에서 점차 제지하고는 마건충이 갑자기 대원군을 묶고서 입을 틀어 막아 교자에 실고는 후문으로 달아났다. 청나라 병사들은 동진銅津을 건너 마산포馬山浦에서 청나라로 함선을 타고 떠나 버렸다.
이에 민비가 창덕궁으로 환궁했다. 이후 수 명의 사신들이 대원군을 환국시켜 달라는 명분으로 북경을 방문했지만 정작 북경에서는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김윤식과 어윤중에게 문장의 내용을 바꾸라는 내지를 내렸음에도 이건창李建昌이 그 지시를 따르지 않고 감동적으로 환국시켜 달라고 문장을 작성했으나 찢어 버릴 정도였다.
(민비의 대원군에 대한 증오는 엄청났다. 소경 정씨를 시켜서 나무허수아비를 만들어 저주하다가 대원군에게 발각되어 정씨는 처형당했다. 1892년에는 자객을 운현궁에 잠입시켰으나 실패하자 침실에 화약을 숨겨놓고 폭파시켜 죽이려고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지속적으로 대원군을 해치려고 했지만 원세개가 대원군을 흠모하여 개인적으로 친하게 지내자 중단했다.
그 이전에 임오군사봉기가 일어나 민비의 처형이 논의되었을 때 대원군이 '20년간이나 민씨 집안의 공과 죄에 관여하지 않았는데 하물며 지금에야 말해서 뭐하느냐'고 하자 민비는 '대원군이 후한 덕을 지녔고 이렇게 자신의 집안을 관대하게 용서할 줄은 몰랐다'고 했다. 그래놓고는 민비는 끝까지 대원군 암살시도를 포기하지 않았다.)
<조선민중에 의해 불타게 되는 조선주재 일본공관>
4)갑신정변과 민비
10월 17일 밤, 박영효 김옥균 일당은 청나라의 개입을 방지하기 위해 일본인들에게 뇌물을 주어 병사들을 동원해 청나라 병사들의 궁궐진입을 막도록 했다. 궁궐에 불을 지르고 함성으로 서로 기세를 돋으면서 고종을 일본공관으로 보내려고 했으나, 민비가 만류함으로 경우궁景祐宮으로 행차하도록 했다. 그런다음 간청하여 고종으로 하여금 일본군이 경호하라는 어서를 쓰게 했다. 일본공사 죽첨진일랑은 즉시 병사를 동원해 궁궐을 에워쌓다.
박영효 김옥균 일당은 고종을 일본으로 보낸 후 조선에 서양식 민주주의를 실시하려는 것과 청나라와 단절하고서 대신 일본과 우호를 맺으면서 고종을 대황제로 옹립하여 조선의 개화를 추진하느냐는 등 어느 쪽으로도 명확하게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어떤 결론이 내려질지라도 청나라와 단절은 바로 일본과의 우호관계 설정을 의미했다.
박영효 김옥균 일당은 우찬성 민태호, 지사 조영하, 해방총관海防摠管 민영목, 좌영사 이조연, 우영사 윤태준, 한규직, 환관 유재현 등을 칼로 베어 죽였다.
" 그리고 중관 유재현이 어선御膳을 바치자 김옥균은 그 수라상을 차면서, “이때가 어느 때인데 수라상으로 한가하게 지낼 수 있느냐?”라고 하자 유재현은 그들을 크게 꾸짖어, “너희들은 모두 교목귀경喬木貴卿으로서 무엇이 부족하여 이렇게 천고에도 없는 역적질을 하느냐?”라고 하므로 김옥균은 칼을 빼어 그를 내려치자 그는 뜨락 밑으로 굴러 떨어졌다. 이를 본 고종은 벌벌 떨었다.
이때 김옥균은 그 옥새와 옥노玉鷺를 빼앗아 박영효에게 주면서 “당신이 즉위하시오”라고 하였다. 제적諸賊들이 시역弑逆의 음모를 할 때 심상훈이 말하기를, “대가는 무능하고 안락공安樂公은 배부르게 먹고만 있으니 공들이 무엇을 꺼려하여 천하에 악명을 얻으려 합니까?”라고 하자 역적들은 음모를 중지하고 말았다."
원세개가 청나라 병사 2천명을 이끌고 대궐 문을 부수고 들어와 일본군과 교전했다. 박영효 김옥균 서광범 서재필 등은 일본군이 패배함에 따라 함께 도주했다.
개화당의 박영효, 김옥균 등은 조선의 개화는 청나라에 대한 사대주의를 청산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기에 청나라에 대한 사대주의로 일관하고 있던 민비는 타도 대상이었다.
모순되게도 처음에 친일파 개화당에 힘을 실어 줬던 이는 다름아닌 민비였다. 민비는 대원군을 견제하기 위해 민씨 친족 외에도 개화파들을 끌어 들여서 권력을 분배해 주었다. 개화파들은 대부분이 친일성향이었기에 민비 역시 초기에는 일본에 대해 매우 우호적이었다. 일본군을 끌어 들여 왜별기대를 조직할 정도였다. 그러다 임오군사봉기로 인해 쫓겨 났다가 청나라 덕분에 권력을 다시 장악할 수 있게 되고 조선민중이 옳고 그름을 떠나 일본을 증오한다는 민심을 알게되어 청나라 사대주의를 선택하게 된다.
임진왜란 이후 마음에 항상 무조건 일본을 거부하는 민심을 알지 못한 개화당이 일본과 우호적 관계를 통해 청나라에 대한 사대주의를 단절하겠다는 의도는 실현될 수 없었다. 일본에 대한 반감을 깊게 간직하고 있던 조선인들은 일본 병사들이 궁궐에 들어 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분노하여 일본인이 눈에 띄면 죽이고 일본공관에 불을 질렀다.
"그리고 그들의 공관에는 큰 궤짝이 하나 있었다. 그 궤짝에는 태평관太平館이라고 씌어 있었다. 그것은 도적들이 고종을 그 속에 가두어 일본으로 가져 가려고 한 것이다. 처음에 도적들은 일본인과 약속하기를, 우리나라에 군함이 와서 도와주도록 하였다. 그 군함은 바다 중간에서 화통이 두 번이나 벌어져 누차 벌어진 곳을 고치느라 도착 시기가 지연되었다. 이때 도적들은 그들을 의심하여 곧 거사를 하려고 하였으나, 그 음모가 실패로 돌아가자 군함은 물러갔다. 아, 이것이 어찌 하늘의 도리가 아니겠는가? 기림진삼(이소바야시 신조 磯林眞三: 일본군 대위)은 일본공관이 소각될 때 죽었다."
일본은 공관 사상자에 보상금 10만원과 공관화재 보상금 2만원을 요구했고, 관리들은 강화를 선호하여 전권대신에 예조참판 서상우를 임명하고 외무협판 묄렌도르프를 부관으로 해서 사신단을 일본에 파견했다.
<강화도 성을 경비하고 있는 조선군>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고 있는 현장>
5)동학농민혁명봉기와 민비, 청일전쟁의 발생
"청나라로 원병을 청하였다. 이때 동비東匪의 기세가 날로 치성하여, 성과 읍이 비록 함락되더라도 백성들은 희색이 만면하였다. 그들은 혹 동비가 패했다는 말을 듣더라도 그 말을 믿지 않고 그럴리가 없다고 하면서 관군이 패했다고 말하고, 서울의 대관들도 시골 사람에게 동비의 소식을 들으면 모두 탄식하면서 “어찌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고종과 민비는 민영준을 불러서 청나라 군대를 불러 들이는 문제를 논의했다.
"민영준은 “지난 해 천진조약을 체결할 때 청일 양국이 조선으로 파병을 할 때는 서로 알려야 한다고 하였는데, 청나라는 우리에게 별다른 악의는 없지만 일본은 오랫동안 우리를 엿보고 있는 처지이므로, 그들이 만일 조약을 빙자하여 속히 오지 않으면 형세가 매우 위급하게 될 것이니 그렇게 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때 중궁이 동비東匪가 보낸 글을 내놓으면서 꾸짖기를, “이 못난 놈아, 내가 어찌 일본놈의 포로가 될 수 있겠느냐? 다시는 임오년과 같은 일은 당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패하면 너희들도 멸종될 것이니 여러 말 말라”라고 하였다.
"지난번 조선정부에서 우리나라로 보낸 서한의 내용은 이러했다. 전라도 관할인 태인, 고부 등지의 백성들이 흉하고 사나워서 본래부터 다스리기 어려웠습니다. 그들은 요즈음 동학교비東學敎匪에 붙어 1만여 명의 무리를 이루어 10여 군데의 성읍을 빼았고 이제 또 전주성全州省을 함락시켰으므로, 군대를 보내 그들을 다스리기 전에 미리 선무를 하였습니다만 그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항전하여 우리 군대를 격파하고 많은 병기를 빼앗았습니다.
이와 같이 흉측한 자들이 오랫동안 소란을 피우는 것은 매우 우려되는 일입니다. 하물며 그곳은 서울과의 거리가 4백 몇 십리밖에 되지 않는데, 만일 그들이 다시 북상하도록 놓아둔다면 왕성 주위가 소란하게 되어 그 피해가 적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새로 만든 군대들은 도회지만 지키고 있고 또한 전투을 해보지 않은 병사들이므로 그들을 섬멸하기 어려운 실정에 놓여 있습니다.
만일 흉구凶寇들이 오랫동안 지속된다면 중국 정부에 우려를 끼치는 일이 더욱 많아질 것입니다. 지난 임오년과 갑신년 두 차례의 내란 때도 모두 중국의 병사들에 의지해서 진정시킬 수 있었습니다. 이번 원군문제도 귀 총리에게 간청하오니, 속히 북양대신北洋大臣께 전문를 보내어 몇 개의 부대를 보내도록 해주십시요. 이들이 속히 와서 저희 군대 대신 동비를 초멸하였으면 합니다. 아울러 우리 군대에 군무를 따라 배우게 하여 방어의 계책을 미리 세울 수 있게 하였으면 합니다. 한번 크게 도적들을 막아 쓸어 없애버리게 되면 감히 계속 주둔해서 막아줄 것을 바라지 않고 즉시 철군을 청하여 대병大兵을 오랫동안 밖에서 수고롭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울러 귀 총리께서는 속히 도움을 주시어 이와 같은 급박한 처지를 구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 중동전기본말中東戰紀本末, 채이강蔡爾康 上海 廣學會, 1897
<민비가 불러 들인 청나라 군대로 인해 일본군에게 총살 당하는 조선의병들. 러일전쟁 시기>
<동학농민혁명봉기군 재판기록, 청일전쟁 때 양 진영을 염탐했다는 내용>
이렇듯 민비는 오직 자신의 안일만을 신경 썼다. 조선 정부가 공식적으로 외세의 개입을 허용했을 때 외교관계에서 어떤 파장을 몰고 올 것인지는 전혀 생각하지도 않았다.
일본의 의도를 알면서도 자신은 일본군의 포로가 되지 않을 자신이 있다면서 그저 임오군사봉기 때처럼 동학농민군에게 권력을 잃고 쫓겨 나는 것만을 염려하여 외세를 조선 땅에 불러 들이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 이유마저도 참담할 정도로 동학농민혁명봉기가 자칫 중국에 누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내세웠다. 민비가 외세를 불러 들여 자기 백성인 조선의 민중을 죽이고 만 것이다.
민비가 아무 생각없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정부의 공식문서로 외세를 불러들인 것은 본격적으로 조선이 멸망의 길로 들어서게 했다. 자국의 문제조차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는 나약한 조선이라고 공식적으로 선언한 것이었다.
청나라 주일공사 왕봉조(왕펑짜오汪鳳藻)는 중동조약中東條約(1885년)에 따라 조선에 군대를 파병하는 나라는 상대국에 통보를 해야 한다는 내용을 지키기 위해 일본외무성에 문서를 보냈다. 일본 외무성경外務省卿 육오종광(무쓰 무네미쓰 陸奧宗光)은 청나라의 군대파견은 조선을 속국으로 보는 것이고 조선은 그렇지 않으니 옳지 않다고 답신했다. 그러면서 청나라가 군대를 파견했음으로 일본도 역시 조선의 내란 진압을 위해 부득이 하게 파병하겠다고 청나라 총리아문에게 통보했다.
호기를 잡은 일본은 이 기회를 절대 놓칠 수 없었다. 청나라 총리아문이 청나라 군대의 파견은 조선이 자청한 것이므로 문제가 되지 않으며 곧 철병할 것이라고 일본공사 소촌수태랑(고무라 주타로 小村壽太郞)에게 서신을 보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청 일본 러시아 영국 프랑스 독일 등은 북아시아를 두고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서로의 세력을 상호견제로 인해 균형이 잡혀 있는 상태였기에 반대로 어느 누구도 먼저 행동에 나서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북아시아에서의 균형이 유지되고 있었다.
청나라와 일본은 향후 조선을 지배하려는 야욕이 있었기에 서로가 먼저 행동하지 못하도록 상호간에 조약을 맺으면서도 조선이 독립국이라는 조항을 넣었던 것이다. 이로인해 조선은 힘을 기를 시간을 벌 수 있었다. 그만 민비가 돌을 던짐으로써 커다란 파문이 일고 소용돌이가 발생해서 조선은 빨려 들어가고 만 것이다.
동학농민 학살이 끝나자 청나라와 일본은 조선 땅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청일전쟁을 시작했다. 청나라군 지휘관 섭지초가 군사 6천명을 이끌고 아산 부근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여 패하고 충주로 후퇴했다. 직전에 일본군은 아산만에 정박 중인 청나라 함대를 기습하여 해전에서도 승리한 바가 있었다.
일본군은 기세를 몰아 압록강을 건너 요동을 공격해서 구연성, 봉황성, 대동구, 여순, 금주, 대운만, 수엄주, 문등, 위해, 영성 등을 점령했다. 이로써 청나라는 요동지방을 일본에게 빼앗겼다. 일본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1895년 북경을 공격했다. 청나라는 항복하고 일본과 마관조약馬關條約(시모노세키조약1895.4.7)을 체결한다.
1. 조선이 자주독립국임을 확인한다.
2. 대만의 모든 섬과 성경盛京 남부의 요동 일대 지방을 할양한다.
3. 병비兵費는 고평은庫平銀 2만냥을 배상한다.
4. 통상조약을 개정한다.
조선이 그토록 믿었던 청나라가 아무런 힘도 없는 허깨비였다는 사실은 충격적이었고, 일본에 대한 두려움은 더 커져 갔으며 공포심으로 일본의 강압에 끌려다니게 된다. 오직 조선의 민중만 일본제국주의를 두려워 하지 않았다.
(국사편찬위원회의 국역목록 1호(1975)가 매천야록이다. 그만큼 고종실록이나 그 밖의 조선정부 기록이 보여주지 못하는 내용을 객관적으로 잘 기록했다. 특히나 매천 황현은 한일병탄이 되자 울분을 참지 못하여 한탄하며 자결할 정도로 우국지사였다는 측면에서도 신뢰를 얻었다. 황현에게는 1962년 건국훈장이 추서됐다.
조선 현대전사에서 고종시기의 조선 내부에 관한 이야기들은 대부분이 매천야록에 기초하고 있을 정도다. 마치 일제에 의해 주관된 고종실록에 주석을 달듯 감춰진 실상들을 밝혀 놓은 듯 하다. 매천야록이라는 제명 보다는 매천은실록이라고 해야 맞을 정도다.
매천야록 뿐만 아니라 정환덕의 남가몽에도 민비의 부정부패로 인해 국고가 탕진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알렌의 제물포 별장. 조선주재 열강국가들의 외교관 사교모임인 '외교단회의(Meeting of Foreign Representatives)'를 열기도 했다.>
2. 민비의 개화정책 허구성
민비의 외교정책에는 뚜렷한 내용도 없을 뿐더러 밝혀진 것도 거의 없다. 있다면 러시아를 끌어 들여 일본을 견제하려고 했다는 것인데 이게 미화되어져 개화를 추진했다고 알려졌다. 일부에서는 민비가 이이제이를 시도했다면서 인아거일이라는 명칭을 쓰기도 하나 그 실체가 없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일 뿐이다.
폭넓게 보면 조선 최후기의 외교란 거창한 것이 아니라 단순했다. 초기 일본이 강성해 보이자 전통적 친청 사대주의를 기반으로 하면서 일본과 우호적이 되려고 했다. 이에 청나라가 반발하자 친청으로 더 기울었다가 청일전쟁을 통해 일본의 힘이 증명되자 다시 친일로, 러시아의 삼국간섭으로 일본이 청에서 밀려나자 이 번에는 러시아로, 러일전쟁을 통해서 일본이 승리하자 친일차원이 아니라 일본에게 운명을 맡긴채 만국이 조선을 구해주기만을 바라는 비극적 상황으로 내몰리고 만다.
마지막으로 기대려고 했던 나라가 미국이었으나 조선의 미적거림으로 인해 이미 미국은 대세론에 편승해서 조선을 포기한 상태였으며, 그 틈에 친일파들은 우호의 차원이 아닌 매국에 나서서 조선을 일본에 팔아 버린다.
(13살 어린 나이의 윤씨가 황후에 오르니 마지막 조선의 왕비로 순정효황후다. 순정효황후가 17세가 되던 해에 일제가 어전에 쳐들어와 순종을 위협하여 한일병탄 문서에 국새를 찍도록 강요하니, 어전 병풍 뒤에서 이를 듣던 순정효황후는 즉시 달려가 국새를 치마폭에 감추고 내놓지 않고 버티었다.
역사에는 가정이 없으니 슬프다. 그래도 차라리 조선의 마지막 국모 순정효황후가 민비를 대신했더라면 조선의 역사는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너무나 남는다.)
조선은 민비의 횡포가 자행되어 20년의 세월을 헛되게 보내고 말았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통해서 조선은 각성하고 강력한 대비태세를 취해 왔으나 종국에는 안동 김씨 60년 패악과 민비의 20년 패악으로 인해 부패해져 멸망을 피할 수 없었다.
조선의 대러시아 외교에서 민비가 러시아를 이용한 것이 아니고 실상은 민비가 러시아에게 이용당했다고 할 수 있다.
<한반도와 주변해역의 서구열강들이 선택한 중요 해상로>
1) 러시아의 외교 상황과 삼국동맹간의 이해관계
세계의 패권이 해양제국주의 중심으로 변화하자 러시아도 역시 해양대국이 되기 위해 얼지 않는 항구를 확보하려고 남진정책을 추진했다.
유럽의 지중해는 영국을 중심으로 틀이 확고하게 오래 전에 짜여져 있었다. 영국의 해양패권에 독일이 대항해서 막대한 투자를 통해 막강한 함대를 구축하는데 성공하고 있었다. 영국은 인도양에 있던 함대를 급히 지중해로 이동시켜야 했을 정도였다. 여기에 러시아가 끼어들 자리는 없었다. 인도양에서도 영국의 강력한 견제에 실패했었다.
따라서 러시아는 남진정책을 위한 새로운 전략을 구상해야 했고, 그것이 바로 모스크바에서 블라디보스톡으로 이어지는 시베리아 횡단철도였다. 기술의 발전은 신전략을 과거 불가능에서 현재의 실현으로 바꾸어 놓았다.
여기에다가 영국의 독주에 맞선 유럽국가들과 연대를 성사시킴으로써 쉽게 신전략을 추진할 수 있었다.
독일은 영국의 해군력에 가장 강력하게 대항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다. 이에 영국은 이러한 독일을 견제하기 위해 인도양에서 함대를 지중해로 대거 이동시켰다. 독일은 여기에 맞서 지중해의 영국 함대를 분산시키기 위해 러시아가 아시아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도록 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독일은 프랑스를 고립시키려고 했기 때문에 프랑스와 러시아가 가까워 지는 것을 싫어 했음에도 영국과의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기꺼이 러시아와 손을 잡았다.
이런 이유로 이후 러시아는 독일인 묄렌도르프를 통해서 함경남도 영흥만을 조차하기 위한 밀약을 조선과 맺으려고 했다. 영국은 그 의도를 알아차리고 거문도를 점령해서 조건부로 러시아가 향후 조선의 어느 지역도 점령하지 않는다는 보장을 받아냈다. 러시아는 북경주재 러시아공사 라디겐스키를 내세워 1886년10월 이-라디겐스키 협정을 맺으며 조선을 차지할 의사가 없다라고 보장했다.
프랑스는 유럽에서 해양제국주의 경쟁에서 고립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동맹세력이 필요해 졌다. 이를 위해 프랑스는 러시아가 추진하고 있던 시베리아 횡단철도 건설비를 차관으로 제공하면서 러시아와 러불 동맹을 맺었다. 이로써 러시아는 시베리아 횡단철도 예산을 쉽게 확보할 수 있었다.
일본이 청일전쟁을 통해 승리의 전리품으로 요동지방을 지배한지 1주일 만에 러시아는 독일 프랑스와 맺은 동맹을 활용해서 즉각적으로 일본을 압박했다. 당연히 러시아의 남진정책에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현실적인 걸림돌로 대두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일본은 영국의 미온적 태도로 인해 도움을 받지 못하고 물러서야만 했다.
독일은 또한 러시아 프랑스와 동맹을 유지하고 있기는 하지만 프랑스를 고립시키려는 목적을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러불동맹을 파괴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러불동맹이 영국, 일본과 극한 대립으로 치닫도록 이들보다 오히려 더 강하게 일본을 압박했다.
(영국은 가장 강력하게 러시아의 남진정책을 저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독일이 지중해 해양패권에서 급부상하자 인도양의 전력을 이동시켜 왔다. 따라서 인도양과 동북아시아에서의 해양패권 유지가 약화되는 것을 우려해서 일본을 러시아 견제용으로 활용하기 위해 동맹을 맺는다. 하지만 이 동맹은 유럽에서 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 깨진다.)
<부산 초량진 왜관 전경>
2) 러시아의 조선에 대한 외교와 민비 이용
시베리아 철도는 러시아에게는 매우 매혹적인 선물이었다. 러시아가 유럽에서 함선을 타고 블라디보스톡까지 오려면 6주 이상이 소요됐다. 부분 철도와 나룻배로 러시아 내륙을 관통한다고 해도 모스크바에서 블라디보스톡까지 3주 이상이 걸렸다. 하지만 시베리아 횡단철도 철도를 이용하면 모스크바에서 블라디보스톡까지 10일도 채 걸리지 않을 것으로 예측됐다.
(블라디보스특 신문기사 요약 보고. 1890년 러시아는 총 3,126Km에 이르는 신설구간을 3구간으로 나누어 동시에 착공했다. 첫번째 구간은 시베리아 중앙선으로 톰스크에서 이르쿠츠크까지(1,671Km), 두번째 구간은 바이칼 횡단선으로 미요소프스키에서 스트레텐스키(마타칸 마을)까지(1,067Km), 세번째 구간은 우수리선으로 그라프스키항에서 블라디보스톡까지(388Km) 였다. - 프랑스 정치국 극동과 108호, 콜랭 드 폴랑시. 한양 1890.1.20. 국사편찬위원회 2005.)
러시아 입장에서는 시베리아 철도가 건설완료되고, 시베리아 이주정책과 경제발전이 성공하는 등 동서횡단 전략이 안정적인 상태가 될 때까지는 동아시아가 현상유지 되기를 원했다. 조선에 대해서도 역시 조선이 어느 누구의 지배하에 미리 들어가기를 바라지 않았다.
1887년 현장 조사를 마친 후 1891년 5월에 철도 공사에 착공했다. 1897년에 부분 개통이 되고 1905년 블라디보스톡까지 연결하는데 성공했다. 이 때문에 일본은 시베리아 철도가 완공되기 직전에 러일전쟁을 벌였다.
한편 러시아는 부패한 관리들의 착취를 피해 러시아로 들어 온 탈조선인들이 무려 6만여호(3인가족으로 계산해도 18만명)라는 사실에도 고무됐을 것이다.
"블라디보스톡(海蔘威)에 유입한 서북민의 수는 6만여 호나 되므로, 정부로 공문을 보내 관청을 설치하여 유민을 보호하도록 요청하였다." - 매천야록.
'러시아 영토에 많은 조선인들이 존재하며 마을을 형성해서 부모와 친구들을 불러 들였다. 이들은 스스로 조선백성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탐관오리들이 지배하는 고향으로 돌아갈 마음이 없다. 원산의 관리가 방문하여 실태를 살피고 기부금을 걷으려 했으나 혼쭐이 날 뻔하고는 계급(조선관리)이나 양반도 존경하지 않는 야만인들이라고 보고했다. 조선 조정은 함경도 주민들에 대해서 관이 탄압을 덜 했더라면 떠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안위를 걱정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고을에서 떠나면 관에서는 착취할 수 있는 대상이 줄어 들어 수익이 감소해서 왕에게 바쳐야 하는 돈을 맞출 수 없기 때문이다.' - 프랑스 정치국 북부과 겸 극동과 171호, 콜랭 드 폴랑시. 1890.9.11.
따라서 러시아는 조선에 대해 초기에는 우호적으로 접근을 시도했다. 그 이유중 또다른 하나는 중국 축(여순항)에서 러시아 축(블라디보스톡항)을 연결하는 과정에서 일본이 중간 축인 조선에 항구를 확보하게 되면 흐름이 끊기게 된다는 사정이 있었다. (일본은 러일전쟁을 일으키면서 먼저 여순항을 불시에 기습했다.)
이에 러시아는 조선의 현상유지를 위해서는 조선의 독립이 아직은 유지되기를 원했다. (이것은 비단 러시아만 아니고 청일전쟁으로 서로간의 우열이 드러나기 이전의 청나라나 일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국제정세에서 삼국동맹의 위세를 주도했던 러시아의 웨베르(Karl I. Waever 베베르)가 주동이 되어 민비에게 접근해서 민비를 구워 삶았다고 할 수 있다.
민비는 조선의 안정적 독립유지를 위한 조선의 국력신장을 위해 노력하지 않았다. 당장 권력의 유지를 위해서 외세를 여기저기서 끌어 들여 상호교차 형식으로 신변보호를 약속받는데 그치고 말았다. 러시아로서는 이렇게 단순한 민비가 다루기 쉬웠을 것이다.
민비의 권력욕과 러시아의 전술이 맞아 떨어졌다. 웨베르는 삼국동맹을 기반으로 해서 반일 외교노선에 이들을 끌어 들였다. 조선에게는 조선을 대신해서 일본에 대항하고 있는 서양 국가들에게 그에 맞는 댓가를 지불해야 한다면서 민비를 설득했을 것이다. '웨베르는 미국의 알렌과 프랑스 공사를 끌여 들여 반일의 입장에서 서게 했다. 알렌의 경우에는 운산 금광에 대한 이권이 결정적이었다고 유길준은 밝혔다'(윤치호일기 4권).
전후 상황상 외국인들에 대한 관직 수여가 많아 진 것과, 운산 금광을 비롯해서 두만강과 압록강 근역의 벌채 등 조선의 천연자원과 함께 수 많은 경제적 이권을 반일 유럽국가들에게 넘겨 준 시기가 대개 이 무렵에 이뤄졌다. 계기야 어쨌든 서구 열강들은 웨베르 덕분에 그토록 바라던 조선의 자원과 조선에서의 경제적 이익을 얻었기에 웨베르에게 협조적이었을 것이다. 한편 이들 삼국동맹에 반발하는 영국을 비롯한 다른 국가들도 조선 조정에 더욱 깊숙하게 개입할 수 밖에 없게 된다.
"이때를 전후하여 우리 나라에서 관직생활을 한 외국인이 많아, 청국인 玉錫?은 군국아문의 참의, 馬建常은 찬의, 미국인 알렌(H.N. Allen, 1858~1932)과 헤론(J.W. Heron)은 이품계, 그레이트 하우스(C. R. Greathouse)와 리젠드르(C. W. Legendre) 및 데니(0. N. Denny) 등은 내무협판, 프랑스인 메릴(H. F. Merrll)과 영국인 헌트(H. Hont)는 호조참판, 독일인 쉬니케(J. F. Schoenicke), 프랑스인 피리(T. Piry), 영국인 크리그(E.F. Creagh) 모두 통정대부, 핼리팩스(T. E. Hallifax)는 통정대부가 되었지만 그중 묄렌도르프가 가장 저명하였다." - 매천야록.
미국 국무장관 블레인Blain이 거문도를 석탄(연료) 저장 창고로 활용하는 대신에 조선에 진정한 후원을 제공하겠다는 것과(이후 논란이 되자 블레인은 그 어떤 영토 욕심도 없고 타국을 병탄할 의사가 없다고 밝혔다) 슈펠트(Shufeldt) 제독의 개인적인 생각이기는 하지만 만일 조선이 당당하게 행동하면 강력한 지원을 할 것이지만 계속해서 청나라의 속국으로 남는다면 조선에 대해 가혹하게 대할 것이다라는 내용이 (친조선파이자 친러파로 알려진) 알렌의 친필 문서로 공개되어 논란이 발생했다. - 프랑스 정치국, 북부과 겸 극동과 178호, 1890.10.24
(하지만 의외로 서구열강들에게는 조선은 크게 매력적인 나라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조선은 적극적인 외교적 도움을 받을 수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외국인의 조선 체류 현황이 그것을 암시한다.
1897년 1월의 외국인 조선 체류 현황 - 제물포: 일본인 3,904, 청국인 404, 영국인 15, 독일인 12, 미국인 7, 프랑스인 7, 노르웨이인 3, 그리스인 3, 이탈리안 1, 포르투갈인 1. 부산: 일본인 5,508, 청국인 34, 영국인 10, 미국인 7, 독일인 2, 덴마크인 1, 프랑스인 1, 이탈리안 1 - Korea and Her Neighbours, Isabella Bird Bishop 1897. Fleming H. Revell Company)
또한 한양의 열강 외교관들이 사교모임인 '외교단회의(Meeting of Foreign Representatives)'에서 서로간에 자주 접촉을 갖고 있었다. 이 외교관 사교모임(비공식 외교회의)은 1892년 6월에 결성되어 미국 영국 러시아 일본 등이 참여하고 있었다. 여기에서 조선에 대한 협상 협력 상호견제가 결정되어 조선의 상황에 개입했다. - 을미사변, 그 기억의 오류. 동북아역사재단 2009
민비를 적극적으로 이용했던 웨베르는 민비가 시해된 이후에도 여전히 조선의 내정에 간섭을 강화하고 있었다. 민비 시해 이전에는 조선의 현상유지를 바라던 러시아는 적극적으로 일본을 견제하고 나섰다. 러불독 삼국동맹을 기반으로 해서 요동에서 일본을 물러나게 한 기세를 몰아 당시의 조선에 대한 주도권을 러일전쟁에서 패하기 전까지는 강력하게 행사하고 있었다.
'러시아 입장에서는 조선이든 일본이든 누구를 이웃으로 삼아도 상관이 없으나, 일본의 조선 지배는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기반으로 하는 경제를 위협하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 조선왕국의 운명:독립인가, 러시아 또는 일본인가, 빌타르 드 라퀴에리 1898
따라서 러시아외교정책은 소극적에서 적극적으로 대조선 외교에 나선다. 민비 시해 이후에도 웨베르는 "일본공사가 일본군대를 통해서 군부대신의 지휘 하에 있는 장교와 병력을 제거해야 한다"거나 "내가 직접 50명의 병력을 가지고 군부대신을 비롯하여 훈련대를 해산시킬 수 있다"라고도 발언하면서 적극적으로 조선 내정에 개입했다. - 을미사변, 그 기억의 오류. 동북아역사재단 2009
아관파천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당시 정세에서 러시아가 삼국동맹을 내세워 조선의 정국을 주도하고 있었다. 러시아는 고종의 희망을 내세워 고종을 러시아 공관으로 옮긴 후 역설적으로 자신들은 전혀 나서지 않고도 조선의 내부 권력투쟁을 기회로 삼았다. 조선의 친러파인 이범진 이완용 등을 이용했다. 이범진 이완용 등은 친일파였던 김홍집 유길준 정병하 조희연 장박을 역적으로 규정하여 제거하는데 성공함으로써 러시아 입장에서는 조선인의 손을 빌어 조선인 친일세력을 수월하게 처리하여 일본을 견제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조선의 국력이 바탕이 되지 않은 불특정 외세 의존 정책은 실패로 끝나게 되어 있었다. 외세들이 자기들의 속사정에 의해 균형을 유지하면서 형식적으로나마 조선의 독립을 인정하고 있었을 때 조선은 내부적으로 단결하고 개혁을 통해 조선의 변화를 추구해서 성공했어야 했다. 민비는 전혀 그러지 않았다. 개화파를 비록 끌어 안기는 했지만 그저 세를 불리는데에만 이용하다가 친일 개화파의 갑신정변 때는 목숨을 맡겨 놓은채 벌벌 떨기만 하기도 했다.
조선내부가 바르고 강력한 법의 시행과 효율적인 행정과 민심의 지지를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권력유지에만 급급하다 보니 수 많은 불평등 조약을 맺을 수 밖에 없었다. 원인은 조선의 행정체계를 붕괴시킨 민비의 부정부패와 매관매직에서 출발했다. 이로 인해 뜻 있는 지사는 벼슬길에 나서지 않고 숨어 버려 오직 간신배들만 들락거리며 아첨하고, 조선의 미래를 바꿔 보겠다고 나선 이들은 모두 죽임을 당하니 조선은 이미 기운을 다했던 것이다.
산현유붕(야마가타 아리토모 山縣有朋) 의견서가 대표적이듯이 조선을 일본의 이익을 위해 필요한 지역으로 목표화 하고 시베리아 철도가 완성되면 조선을 놓고 러시아와 일본간의 각축전이 전개될 것으로 예상한 일본에 비해 조선은 부패로만 치닫고 있었다.
" 각오랑(가쿠고우로 覺五郞)은 얼굴이 추하게 생겼지만 문학에 재주가 있고 우리말도 잘하여 시속배와 왕래를 하였다. 그가 하루는 눈이 오는 밤에 외무아문에서 곡연曲宴 곡수曲水에 잔을 띄워 마시는 잔치를 베풀었다. 모든 주사主事들도 모여 운을 떼고 시를 지었다. 술기운이 점차 달아오르자 각오랑은 웃으면서, “오늘 밤은 매우 즐거우니 아무 거리낌없이 이야기나 나누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라고 하므로 좌중의 사람들은 “그럽시다”라고 하였다. ~ “공들이 평일에 큰소리를 치면서 사대부로 자처하며 우리에게 왜놈, 왜놈 하였습니다. 우리가 왜놈은 왜놈입니다. 그러나 이 왜놈을 굴복시킨 다음에야 왜놈임을 스스로 인정하겠습니다. 오늘 공들이 어찌 입으로만 사대부를 외치면서 이 왜놈을 물리칠 수 있겠습니까? 사대부들께서는 이 왜놈을 좀 보아주십시오”라고 한 후, 옆에 있는 초꽂이에 담뱃대를 대고 손으로 받쳐들어 소반처럼 돌렸다. 초꽂이는 붉은 바퀴처럼 빙빙 돌면서 지붕 위로 오를 듯 하였고 불빛은 늠름하였지만 각오랑은 보이지 않았다. 좌중에 있던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잠시 후 그 담뱃대가 쨍그랑 하고 소리가 나더니 각오랑이 촛대 오른쪽 중앙에 서서 웃으며, “제공들은 우리나라를 미워하지 마십시오. 서양나라들에 개국하던 초기에 우리 국민들 대개는 그들에 굴복하지 않고, 나와 같이 한사람이라도 더 죽일 수 있도록 칼쓰기를 배워서 외국인들을 칼로 무찌르려고 했습니다. 조금 전에 내가 검술을 보인 것은 곧 그때 익힌 기술입니다.” ~ “그러므로 여러분들과 같이 입으로만 사대부라고 말하고 검술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곧바로 왜놈이라고 한다면, 우리 왜놈들이 굴복하겠습니까?”라고 하였으나, 좌중에 있는 사람들은 아무 대꾸도 하지 못하고 서로 돌아보면서 “칼솜씨가 좋군”이라고 하였다." - 매천야록.
(각오랑은 이노우에 가쿠고우로(井上角五郞)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조선 사대부의 생각과 안목이 일개 왜놈보다 짧았으니 슬픈 일이다.)
<고종에게 보낸 러일전쟁상황 첩보 보고서>
3. 부정부패와 실정은 끝내 자신마저 해치다.
나는 조선의 국모다라고 민비가 말했다고 진짜로 믿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민비는 조선이 아닌 자신만을 위해 처음에는 친일파였고, 다음에는 청국 사대주의자였고, 마지막에는 친러파였을 뿐이다. 왜놈의 칼에 시해당한 것은 분노스럽고 수치스럽지만 그 사실 하나만으로 민비의 온갖 허물이 덮어 질 수는 없다.
여기저기서 조선의 변화를 바라는 세력들에게 쫓겼던 민비는 불행하게도 최초로 친일을 선택해서 왜별기대까지 만들어 줄 정도였지만 최후에는 자신이 불러들인 일제에게 배신당해서 시해당하고 말았다.
"궁중에는 횃불이 훤하게 밝아 개미도 다 볼 수 있었다. 그는 이경직을 만나 민후가 있는 곳을 물었으나 이경직은 모른다고 말한 후 소매를 들어 그들의 시선을 차단하므로, 그들은 그의 왼쪽 팔과 오른쪽 팔을 잘라 죽였다.
이때 민후는 벽에 걸려 있는 옷 뒤로 숨어 있었으나 그들은 민후의 머리를 잡아 끌어내었다. 小村室의 딸은 민후를 보고 확인하였다. 민후는 연달아 목숨만 살려 달라고 빌었으나 일병들은 민후를 칼로 내리쳐 그 시신을 검은 두루마기에 싸가지고 녹산鹿山 밑 수목 사이로 가서, 석유를 뿌리고 불을 질러 태운 후 그 타다 남은 유해 몇 조각을 주워 땅에 불을 지르고 매장했다. 민후는 20년 동안 정치를 간섭하면서 나라를 망치게 하여 천고에 없는 변을 당한 것이다. " - 매천야록
("조선 정부의 일은 대원군이 일체 책임을 지기로 했다. 대원군과 평소 교류가 있는 일본인이 대원군의 요청에 응해서 수행한 것으로 한다. 만약 부득이 하면 그 중 몇 명을 중형에 처하고 나머지 20명 정도를 추방한다. 본 사건에 관여한 장사 중 일부가 어떠한 중형에 처해지더라도 이의 없다." - 주조선공사 삼포오루(미우라 고로 三浦梧樓)가 주조선 영사 내전정추(우치다 사다츠치 內田定槌)에게 보낸 사후 대책 지시서 1895.10
이 대목에서만 본다면 조선내 사후처리를 대원군에서 요청하면서, 이를 가지고 마치 대원군의 지시에 의해 일본군이 민비를 시해한 것처럼 덮어 씌우려고 획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을 살릴 수 있도록 흥선대원군에게 허락된 시간이 10년이었다면 민비에게 주어진 시간은 20년이었다. 20년의 세월은 충분히 조선이 힘을 기를 수 있는 여유를 의미했다. 중국은 나라가 커서 변화가 느리다지만 조선은 바른 행정, 뚜렷한 목표만 있으면 일치단결이 쉬워 많은 성과를 낼 수 있었다.
하지만 민비는 오로지 민씨 일족의 부귀영화와 자신의 권력안일만을 위해 살다 갔을 뿐이다. 프랑스의 잔다르크는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쳤지만 민비는 그렇지 않았다. '나태한 국민들과 무능하고 가난한 정부, 조선은 자신의 자유를 지키려고 노력도 하지 못하는 국가이며, 암묵적으로 일본에게 지배 받을 것으로 예측된다.' - 조선왕국의 운명: 독립인가, 러시아 또는 일본인가. 빌타르 드 라퀴에리 1898
(조선민중은 처음부터 나태하지 않았다. 조선과 이웃나라들이라는 책을 펴낸 영국의 신문사 기자 이사벨라가 지적하고 있듯이, 조선민중은 관리들에게 착취당하지 않으려고 꾀를 내다 못해 마지막으로 아에 부자가 되기를 포기했던 것이다. 부자가 되려고 하지 않으니 일할 필요가 없어서 게을러진 것 뿐이었다. 반면에 조선관리들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았던 블라디보스톡에서의 조선인 마을은 깨끗했고, 그곳의 조선인들이 너무나 부지런했기에 영국인 여기자 이사벨라는 러시아 한인촌을 보기 이전에 가졌던 조선인에 대한 편견이 잘못됐다고 고백할 정도였다.)
뒤늦게 고종은 또한 러시아의 속박으로부터도 벗어나라는 조선 내부와 열강들의 압력에 의해 러시아 공관을 빠져 나와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자주독립국임을 만방에 알렸으나 이미 때를 놓쳐 버렸다. 뺏으려는 자가 가장 나쁘다. 그럼에도 자신의 것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 부국강병을 실천하지 않은 부패함도 나쁘기는 매한가지다. 실패한 역사는 돌이킬 수 없으니 통탄스럽다.
<붕어 하루 전 날의 고종 최후의 모습, 독살 됐다는 풍문이 돌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