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 장갑차 단순과실치사 교통사고를 반미투쟁으로 선동하는 2003년 북한 노동신문,
조선일보 기사 사진 인용>
미제가 남조선인민들에게 저지른 전대미문의 대범죄를 결산한다
올해는 미제침략군의 남조선강점을 영구화한 매국적인 남조선미국 《호상방위조약》이 조작된지 반세기가 되며 2005년에 가면 미제가 남조선에 강점의 첫발을 들여놓은지 60년이 된다.
인류력사에는 침략과 략탈에 대한 기록들이 많지만 미제의 남조선강점처럼 점령지역을 철저히 식민지화하고 인민들의 생명과 재산에 막대한 피해를 끼친 그러한 례를 아직 알지 못한다.
미제가 1945년 9월 8일 남조선을 강점한 날로부터 오늘에 이르는 2만 1,200여일동안 그 어느 하루도 남조선에서는 미제야수들에 의해 인간살륙만행의 피가 흐르지 않은 날이 없었으며 파괴와 략탈의 재난이 그친 날이 없었다.
남조선에서 미제가 저지른 범죄는 그 규모와 지속성, 포악성과 악랄성에 있어서 실로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고 력사가 일찌기 알지 못하는 전대미문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제는 《해방자》, 《원조자》로 자처하면서 오늘도 남조선인민들의 머리우에 군림하여 온갖 전횡과 횡포를 일삼고있으며 우리 민족에게 핵전쟁의 참화까지 들씌우려 하고있다.
조국평화통일위원회와 조국통일연구원은 공동으로 미제가 남조선에서 저지른 전대미문의 대범죄를 결산하기 위해 그들이 남조선인민들에게 끼친 인적, 물적피해를 전면적으로 조사하고 피해액을 총체적으로 종합계산하여 이 비망록을 발표한다. - 노동신문, 2003년 11월 28일 평양
2. 물질경제적 피해 (노동신문 요약)
- 미군정기
량곡수탈로 인한 피해액 52억 192만US$(리자적용기간 54년)
광물략탈로 인한 피해액 131억 1,677만US$(리자적용기간 40년)
= 총 4조 2,816억 6,588만US$(광물약탈은 60년대 초까지 계산)
- 원조기
= 총 2조 3,414억 6,990만US$(리자적용기간 41년)
- 무역과 시장개방기
대미무역피해 7,559억 200만US$
시장개방으로 인한 기업파산 3,950억 8,839만US$
잉여농산물강매로 인한 농가피해 2,629억 1,337US$
= 계 1조 4,139억 376만US$
- 자본침투
차관 등 융자성자금에 의한 피해 3조 4,100억 1,821만US$
기업리윤송금을 통한 피해 8,232억 5,195만US$
= 계 4조 2,332억 7,016만US$
== 총계 17조 4,157억 804만US$ (6.25 남침 시기까지 포함)
<워싱턴DC 한국전쟁 기념관 추모비, '자유는 그냥 주어지지 않는다'라는 뜻>
해방공간에서 민중들은 처절한 삶의 환경에 내버려 졌다. 이에 미국은 국제관례상 패전국의 식민지를 관리한다는 입장으로 당시 세계적으로 독립국으로 아직 인정받지 못하던 조선에 들어와 관리지역 구호원조를 실시하게 된다.
당시 조선은 제조업 비율이 10%에 불과할 정도로 공업이 후진적 형태를 지니고 있었으며 더우기 일반 민중들은 일제의 태평양 전쟁 수탈로 인해 철저하게 피폐해져 있었다. 여기에다가 끊임없는 공산세력들의 난동으로 더욱 민중들은 힘든 시기를 보냈다.
(사실 사회주의 혁명은 잘 사는 자본주의 국가에서 발생한다는 주장과 다르게 모두 가난한 나라에서만 발생했다. 특히나 가난한 농민 슬라브 민족을 이용해 공산화에 성공한 레닌이 '민족주의도 공산주의 혁명의 훌륭한 수단이다'고 발언한 점은 조선 공산주의자들에게는 무지하게 가난한 조선민족도 공산화 할 수 있다는 크나 큰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이 때 미국은 군정 3년 동안 순수하게 구호원조로만 4억 1천만 달러를 한국에 지원하였다. 또한 GARIOA(관리지역 행정구호 원조)로 식량난 해결에 나섰다.
(1948년 화폐발행액은 4,000만원으로 3,000만원이 은행 예금으로 맡겨졌다. 1953년 GDP는 13억달러였고, 60년 외환보유고는 1억5,700만달러였다.)
(일제가 생산비도 안되는 가격으로 식량공출을 계속하자 농민들이 농사를 거절하면서 1938년 이후 40여만 정보의 논이 사라져 버렸다. 이 것은 해방이후에도 여전히 식량난으로 나타났다.
공출제 폐지를 목표로 했던 미군정도 식량난 해결을 위해 공출제를 통한 식량통제 정책을 쓸 수 밖에 없었다.
우선 3.1제 소작제와 신한공사 설립으로 농토 확보, 공출제를 내세우게 된다.
3.1제는 논 주인과 소작인이 3:1로 수확한 쌀을 나눠 갖는 것이다.
신한공사는 일본인으로부터 접수한 귀속농지를 관리하는 기구였다.
공출제란 소작료를 논 주인이 아닌 기관에 내면 기관은 농지주인에게 공정가격으로 대금을 지급하면서 2만원이 넘어가면 일부를 강제예치시켜 국가자금을 확보하면서 식량을 배급하는 식이다.
45년도산 쌀 공출은 목표량의 12.4% 밖에 달성되지 못했으며 생산량의 5.3%였다. 46년도산 쌀 공출은 목표량의 83%를 달성하게 되는데 생산량의 30%였다. 47년도산 쌀 공출은 목표량의 97% 달성으로 생산량의 37%였다.
그렇지만 식량난을 전혀 해결하지 못하고 오히려 미국에서 무상원조를 들여올 정도였다. 일부에서는 공출후에 자신이 먹을 쌀마저도 부족한 현상이 나타났고, 더구나 호남을 중심으로 일본으로 쌀을 몰래 밀반출하는 사태가 나중에 제헌의회에서 다뤄질 정도로 지주들의 도덕적 해이가 극에 달해 식량난을 더욱 키웠다.
문제는 전국 농민조직 결성에 성공한 친북좌파 전국농민조합총연맹(전농)의 도전이었다.
전농은 초기에는 3.7제(논 주인3:소작인7)를 주장하다가, 남북으로 확실하게 분단되어 북한에서 3.7제를 도입하다 토지 국유화를 진행하자, 이 번에는 무상몰수 무상분배를 들고 나왔다. 나중에 10월 대구농민폭동이 발생하게 된다.
미군정은 대한민국이 건국될 시점에 접어 들어 모든 귀속재산을 넘길 준비를 하면서 지주계급을 해체하고 공업자본가 양산을 위해서 지주를 포함한 토지개혁을 시도했으나 지주들의 반대로 성과가 없자 신한공사 토지를 농민들에게 매각했다.)
대한민국 건국 후에는 특히 48년 여순반란 사건과 49년 북한의 3.8선에서의 난동 사건들로 인해 인플레이션이 더욱 극심해져 경제적 혼란이 가중되는 시점에서 민생안정과 경제 안정을 위해 소비재와 원자재 중심의 원조도 하게 된다. 1950년 1월에 발표된 정부의 재정안정계획을 통해 인플레이션이 어느 정도 통제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노력은 6.25 남침으로 물거품이 되고 만다.)
또한 50년 5월 미국에서 한국에 대한 ECA(장기적으로 경제건설을 목적으로 한 한미경제원조협정)가 통과되어 6천만 달러가 지원되면서 안정을 찾아가던 경제가 북한의 6.25 남침으로 인해 한국은 유엔군에 대한 한국화폐로의 지원액이 부담으로 작용하면서 도로 통화량이 폭발적으로 팽창하여 경제가 악화되게 된다.
한편 미국은 6.25 전쟁 중에도 유엔 사령부 중심으로 CRIK(한국민간구호계획)에 따라 1950년부터 1956년까지 총액 4억 5천 7백만 달러에 달하는 구호원조를 통해 민중의 삶에 도움을 주었다. 한편 유엔으로부터 역시 UNKRA(유엔한국재건단 원조)로 1954년에서 1960년까지 9천만달러가 한국으로 유입됐다.
이러한 전쟁 속에서도 52년 이승만은 통화개혁을 통해 경제회복의 기초를 마련했는데 이는 평가절상을 통해 미국 달러를 더 많이 확보하고자 하는 조치였다.
6.25 남침시기에 북한 공산주의를 피해 빈 손으로 자유를 찾아 월남한 61만8,721명(사회부)과 북한 공산군의 강제징용과 착취, 공산당이라는 의심을 피해 도시로 피난한 농촌지역의 인구 유입으로 전쟁 기간 동안 도시화율이 급속하게 진행되면서 이로인해 3차 산업의 증가로 이어져 해외 원조가 더 절실해지게 된다.
50년대 한국의 제조업이 미약하지만 서서히 증가하였는데 이는 바로 미국의 원조와 특혜가 없었다면 제조업의 성장은 더욱 미진하게 진행되거나 방치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당시 미국은 자본주에 속해 있던 한국이 경제개발을 통해 공산주의 체제보다 확고한 우위를 점하기를 원했고 이를 통해 자본주의 세력에 속해 있던 경제적 후진국들에게 신뢰와 용기를 주어야 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은 미국의 지원을 받아 들일 수 있었다.
미국은 6.25 남침 격퇴 후 PL480(미공법 480호)에 의해 1956년부터 1961년까지 2억 3백만 달러에 달하는 농산물 원조를 통해 황폐화된 농업생산을 메꿀 식량 원조를 실시했다.
미국은 FOA-ICA원조로 1953년 부터 1961년 까지 약 17억4천3백만 달러를 한국에 지원하였는데 해방이후 61년까지 대한 원조 총액의 55.6%를 차지하는 것이다. 미국은 한국의 경제개발이 시작되기 직전까지 31억 달러 정도의 경제적 지원을 한국에게 하였다.
이는 한국의 61년 수출액이 1억 달러였으며 71년 수출 목표가 당초 5억 5천만 달러였고 100억달러 수출을 달성한 해가 77년이었다고 한다면 미국의 대한 경제 원조가 얼마나 한국에게 큰 힘이 되었는지는 쉽게 알 수 있다.
(미국은 6.25 남침 격퇴 후 이승만에게 수정자본주의를 권하며 5개년경제개발계획 실시를 권했고, 실제 경제부서는 인도가 성공한 방식을 모방하여 계획서를 작성했지만 자유무역주의자 이승만은 스탈린 방식이라는 이유로 거절했다.
이후 4.19시민혁명정권이 수립되어 미국이 교수들을 보내 자문하면서까지 제안한 불균형성장(수출중심)방식을 받아 들이고, 케네디는 3억달러 지원을 약속했지만, 5.16군사혁명이 발발하고 미국은 정권승인 조건으로 5개년경제개발을 요구해 서로의 입장이 맞아 진행되게 된다.)
당시 한국은 북한의 끊임없는 국지전 도발로 인해 '일하면서 싸우고 싸우면서 건설하자'라는 구호를 내세울 정도로 북한의 군사적 위협은 현실적으로 수 많은 무장공비와 간첩 남파로 나타나 한국 경제 발전을 위협하는 가장 중대한 장애물이 되었다.
1945년부터 미국은 군사 부분과 경제 부분에서 전체적으로 130억달러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원조를 한국에게 지원했다. 예로 1950년 부터 1975년까지의 한국에 대한 군사원조는 남미대륙과 아프리카 대륙이 미국으로부터 받은 원조 총액 32억 달러의 두 배나 되는 엄청난 지원액이었다. 경제원조와 차관만으로도 60억달러였는데 구소련이 북한을 포함한 제3세계 국가들에게 했던 경제원조 총액이 76억달러에 불과 했다는 것과 비교해서 미국의 대한 원조는 큰 지원이다.
한국이 월남파병을 결정하고 참전한 이후 한국의 경제 성장률은 기존의 5% 정도에서 평균 10%대로 급상승하게 된다. 제조업 생산의 증가도 무려 10% 이상의 성장을 기록하게 된다. 1965년에서 1972년 사이에 10억2,200만달러에 달하는 당시에는 막대한 경제적 이익을 얻어 냈다. 베트남은 미국, 일본 다음의 수출시장 역할을 해서 참전 기간 동안 해외 전체 수출 시장의 8.5%를 차지했다. 베트남 전쟁에 참여하면서 무역 수출 구조가 바뀌게 되어 일본에서 수입(일본이 자유중국에 주던 하청가공업 주문을 한국으로 돌려서)하여 가공해서 미국에 수출하는 형식으로 바뀌게 된다. 그 동안 미국의 원조에 의해 수혜자였던 한국은 월남전 참전을 계기로 외교에서 미국에게 독자적인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된 배경이 되기 시작한다.
(한국이 월남전에 참전하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주월한국군사령관이었던 채명신의 주장에 의하면 월남의 고딘 디엠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 했을 때 이승만에게 월남파병을 요청했고 이에 이승만이 수락했다고 한다.)
<베트남에서의 신도시 건설, 항만 물류 현대화 등도 있으며 중공업의 핵심인 철강산업 지원에 포스코가 나섰다>
월남전이 끝난 후 한국은 본격적으로 중동 특수에 뛰어 들어 또 다른 경제성장을 하게 되는데 당시 중동의 정세 변화에 따라 중동에서 새로운 변화가 모색되고 있었는데 미국의 배려가 없었다면 현대를 중심으로 한 한국 기업들의 참여하기가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현재에도 향후 이라크 재건에 필요한 시장 규모가 1,300억 달러라고 한다면 이라크에 평화유지 재건 부대로 참여한 한국의 이익이 또 다시 미국의 배려와 한국의 역할론에 의해 발생할 것이다. 이미 한국은 이라크 파병 봉사활동으로 인해 쿠르드자치정부로부터 5개 이상의 유전개발권을 보장 받았다.
2004년 미국의 대한 무역수지 적자는 198억 달러로 경쟁국 최대치에 달할 만큼 대한 수입 부분에 있어서 적자를 보여 주었다. 때론 한국이 한강의 기적이라는 경제적 발전을 이루면서 대미 무역적자 현상이 나타나기도 했지만 시기별로 그리고 전체적으로 봤을 때는 미국이 한국 경제에 주는 도움이 크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지금 중국이 최대의 시장이 되어 버렸지만, 1970년부터 1982년까지 대체로 균형을 유지하다가 1983년 이후 흑자로 돌아서서 1987년에는 대폭적인 흑자를 기록하였다. 1994년 이후에는 대미무역수지가 다시 적자로 바뀐 후 점차 적자폭이 확대되기도 했지만 아이엠에프를 기점으로 다시 흑자로 전환되었다.
2001년과 2002년에는 대미 무역수지 흑자가 한국 전체 무역수지 흑자의 95%를 차지했으며 2003년에는 한국이 남긴 전체 무역수지 흑자 149억 달러의 63%를 차지하고 있다. 2004년도에도 낮은 경제 성장율에도 불구하고 경제성장을 이끈데에는 미국으로부터 얻은 198억 달러의 무역 흑자가 크게 작용했음을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다.
미국이 한국에 판매한 무기체계 수입액수와 미국이 무기체계를 무상지원하거나 최첨단 무기체계로 무장한 주한미군을 공짜로 수십년간 배치함으로써 한국이 국방비를 절약할 수 있었다는 면에서 비교해 보아도 역시 미국과의 관계에서 이익이었다는 점은 확실하다.
(이제 미국은 한국의 국력에 걸맞게 주한미군 주둔 분담금을 요청했고, 91년도부터 부담하고 있다. 그 돈의 대부분은 주한미군부대에서 근무하는 한국인 노동자들 임금으로 지급되고, 그 외 한국 납품업체 물품결제대금, 정보수집지휘통제장비 대여 비용으로 나가고 있다.)
<중공과 소련의 지원, 선군정치 아래에서 굶주리며 희생당하는 북한 어린이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