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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정자엔 적막한 공기만 흐르고

대한인 2013. 12. 1. 21:35

 

 

 

 

▲예찬, <용슬재도>, 원, 1372년, 종이에 수묵, 74.7×35.5cm, 대북고궁박물관

 

元末四大家(황공망, 오진, 예찬, 왕몽)의 한 사람인 예찬(1301~1374)은 남종문인화를 얘기할 때면 등장하는 매우 상징적인 인물이다. 부유한 가정에서 출생한 그는 중년까지는 큰 어려움없이 안락하게 학문과 예술에 정진할 수 있었다. 시·서·화와 골동품 수집에 취미가 있었던 그는 淸?閣이라는 서재를 지어놓고 전국에 있는 수많은 학자와 시인들을 초빙했다. 그 속에서 예찬의 예술이 무르익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런 그의 인생에 균열이 생긴 건 그의 나이 30세 때부터였다. 홍수와 가뭄으로 재정이 가난해진 조정에서 부유층에 강제로 세금을 부과하게 됐고 예찬은 자기 재산을 친척과 친구들에게 나눠줬다고 한다. 그 후 계속되는 농민반란과 홍건적의 난을 피해 집을 떠나 20여년간 방랑생활을 했으며 가끔씩 신세진 사람들에게 그림으로 보답했다. 그렇게 세상을 떠돌다가 결국엔 처자식까지 떠나보낸 후 홀로 방황하다 귀향해 병을 얻어 친척집에서 죽었다.



방랑시절, 거듭되는 정치참여를 거절했던 예찬의 삶은 속세를 떠나 고고하게 살았던 화가로 추앙받으며 남종화를 그리는 사람들에게 선비의 전형으로 인정받았다. 초연함을 즐기고 상당히 오만했던 그는 결벽증이 심해 손을 자주 씻었다고 전해지며 취미가 고상한 사람들과 사귀면서 살았다. 이런 예찬의 고사는 후대의 많은 화가들의 그림의 주제가 됐다. 



‘무릎을 구부리고 앉아야할 만큼 좁은 서재’라는 뜻의 ‘容膝齋’. 그 서재의 주인 仁仲에게 주기 위해 그렸다는 ‘容膝齋圖’는 현존하는 그의 작품중에서 최고 걸작으로 평가된다. 전경의 토파 위에 서있는 몇 그루의 앙상한 나무들과 빈 정자, 중경의 넓은 수면과 원경에 배치된 갈필의 산과 바위 등이 쓸쓸하기 그지없다. 사람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 그의 그림은 그의 결벽증처럼 ‘순수한 고결함’이 느껴지는 듯하다. 逸筆草草(한두 번의 붓질로 대략 그림)하게 그리는 생략적인 그림을 말할 때 모델로 제시할 수 있는 게 바로 예찬의 ‘용슬재도’이다.

 

▲심주, <책장도>, 명, 종이에 수묵, 159.1×72.2cm, 대북고궁박물관

 

예찬보다 126년 뒤에 소주에서 태어난 심주(1427~1509)는 예찬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화가에 속할 것이다. 예찬과 마찬가지로 훌륭한 학자집안에서 태어나 교육받았지만 그의 공부는 여느 사람들처럼 벼슬을 목표로 하지 않았다. 지역 관원들이 그를 여러 차례 관직에 천거했지만 정중히 사양했는데, 그의 명성은 수도에까지 알려지게 됐다. 그러나 그는 평생 벼슬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세속적인 일에 연연하지 않았고 여행과 시서화로 삶을 보냈다.



그가 그린 ‘策杖圖’는 첫눈에 보아도 예찬의 ‘용슬재도’를 모방해 그린 것임을 알 수 있다. 전체적으로 갈필을 사용해 칼칼한 느낌이 드는 ‘책장도’는 전경의 토파 위에 심어져 있는 앙상한 몇 그루 나무와 중경의 강물, 원경의 산의 배치 등에서 그가 예찬에 얼마나 깊이 심취해 있었음을 말해 준다.



그러나 ‘책장도’는 심주만의 개성이 돋보이는 작품이기도 하다. 예찬의 ‘용슬재도’에 있던 빈 정자 대신 지팡이를 짚은 인물이 들어가 있고, 전경의 나무가 더 많아졌으며 원경의 산이 훨씬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용슬재도’에서 보이는 예찬의 필획이 가로로 그어져 있어 매우 정적이고 적막한데 반해, 심주의 ‘책장도’에 보이는 원경의 산에는 사선이 여러 차례 사용됨으로써 운동감과 괴량감이 느껴진다. 사람의 흔적이 묻어 있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던 예찬의 작품이 그의 남다른 결벽증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심주의 ‘책장도’는 단지 선배에게서 필법과 형식만을 빌려온 후 그림 속에자신의 개성으로 채워 넣었다.



이런 예찬과 심주의 작품에서 느껴지는 차이는 그들이 처했던 시대성과도 무관치 않다. 이민족이었던 원의 지배하에서 유민처럼 방랑할 수 밖에 없었던 예찬과, 정치적인 안정위에서 자신의 예술세계를 추구해나갈 수 있었던 심주는 정서적으로도 많은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예찬의 그림 속에서 보이는 쓸쓸함과 적막함이 그가 겪어야 했던 신산스런 삶의 반영이라면 심주의 작품이 좀 더 윤기가 흐르는 건 당연한 것이다. 그림은 그 사람의 인생만큼 그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동기창,<추경산수도>, 명, 족자, 비단에 수묵담채,143.1×59.4cm, 샌프란시스코 동양미술관

 

그런가하면 심주보다 1백여년 뒤에 활동한 동기창(1555~1636)의 ‘秋景山水圖’는 예찬과 심주의 그림을 바탕으로 했으면서도 완전히 다른 느낌이 드는 작품이다. 전경의 토파와 나무, 중경의 물, 원경의 산과 나무라는 구도는 선배들에게서 차용한 것이다. 그러나 마치 볏단을 쌓아놓듯 곱게 단장된 산의 모습은 동기창의 그림을 완전히 다른 형식으로 바꿔 놓았다. 게다가 전경에 서 있는 우거진 나뭇잎의 표현은 윤택했던 동기창의 생활을 말해주는 듯하다. 실제로 동기창은 진사시에 합격한 후 최고 문관직에 올라 예부 상서를 지냈다. 지나치게 탐욕스럽고 인색한 탓에 소작인들에게 인심을 잃고 공격을 받았던 동기창은 반대로 문인들 사이에서는 최고의 예우를 받는 모범적인 문인화가였다. ‘추경산수도’에서 느껴지는 매끈매끈함은 동기창의 그런 이중적인 생활방식이 배어있는 듯하다.



동기창이 禪宗의 南北論을 회화에 도입해 창시한 南北宗論은 회화형식을 출신배경과 연관시켜(남종화가들은 문인사대부가 많았고 북종화가들은 주로 화원화가나 직업화가가 많았다) 수많은 폐단을 야기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이후 3백년동안 중국 화단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동기창 자신은 당연히 남종화가의 계열에 포함시켜 뒀다.  

▲최북, <공산무인도>, 조선 후기, 종이에 담채, 31?36.1cm 개인소장

 

그렇다면 예찬-심주-동기창으로 이어지는 남종화의 전통이 조선에 오면 어떤 형식으로 변할까. 중국과 조선의 활발한 교류 때문에 거의 시간차를 느끼지 못하고 공유할 수 있었던 두 나라간의 문화적 차이와 동질성을 최북의 ‘공산무인도’에서 확인해보자.



‘빈 산에 사람은 없다’라는 뜻의 ‘空山無人圖’는 직업화가였던 최북의 최고의 작품으로 손꼽을 수 있다. 중국의 작가들의 위아래로 길쭉한 족자 형태를 취했다면 최북은 가로 화면을 선택했다.



메마른 나무에 성근 잎사귀, 빈 정자에 적막한 공기, 모두 예찬에게서 영감을 얻었다. 그러나 최북의 작품은 중국의 작가들이 즐겼던 전경, 중경, 원경의 삼단구도가 없다. 자잘한 설명대신 물 속에 먹이 섞이듯 텅 빈 외로움을 사람 마음속에 섞어 놓았다. 게다가 ‘빈 산에 사람은 없는데 물은 흐르고 꽃은 핀다’라는 초서체의 제시는 거친 필치의 나무만큼이나 독창적이다. 조선후기 최초의 여항출신 직업화가였던 최북의 자존의식과 독창성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무서우리만치 적막한 빈 산의 울림이 안개처럼 젖어있는 작품이다. 어느 양반이 그림을 요구하자 한쪽 눈을 찔러 버림으로써 거절했던 중인화가의 단단한 자의식이 어느 구석에 숨어 있는 지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감정이 절제된 작품이다.



각각 다른 시대, 다른 나라 사람이 동일한 형식의 그림을 그리더라도 작가가 처한 상황과 개성에 따라 그림은 달리 표현된다. 그것이야말로 그림을 보는 즐거움이고 그림이 가진 매력일 것이다.



조정육 / 미술평론가


동양미술사를 전공하는 필자는 '그림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가을 풀잎에서 메뚜기가 떨고 있구나' 등 다수의 미술관련 저서를 집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