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순 사건의 어느 ' 교장 '
2010/07/29 7시 41분 |
국내 모 일간지에 연재하는 백 선엽 장군님의 6.25 전쟁
회상록에서 14 연대 반란 사건 부분이 나온다 .
여순 반란 사건은 태생적으로 사병들 사상에 문제가 많았던
국군 14 연대가 여수와 순천에서 일으킨 사건을 말한다 .
14 는 제주도 토벌 작전을 명받고 여수항에서 승선 대기 중에 연대
정보과 선임 하사 지창수 주동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
출동한 반란 진압군 - 반란군과의 식별을 위해 머리에
흰띠를 둘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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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지휘권은 다음날 김지회 중위에게 넘어가고
순천에서는 홍순석의 중대가 이에 호응했다 .
사실 여수와 순천의 주민들은이 날벼락 같은 공산 분자들의
난동과 그 뒤의 토벌 작전에서 엄청난 피해를 입은
대 피해자 들일 뿐이고 공산도 배나 반란 등의 불순한
단어와 거리가 많다 .
주모자 지창수나 후에 반란 부대를 지휘했던 김 지회 ,
홍 순석 따위는 모두 여수나 순천과 거리가 먼 타지 인간들이다 .
그러나 내가 여순 사건을 만나면 반드시 생각나는
현지의 인간이 한 명있다 .
이 자의 음흉한 흉계가 수많은 어린 학생들의 생명을 앗아 갔다 .
여수 는 여러분을 여자 중학교 교장 송 욱 [宋 郁] 이라는 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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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대한 나의 기억을 되뇌어 본다 .
나의 군 생활 시절 한 나이든 부 사관들로부터 여순 사건에
대해서 이야기를들은 바 있었다 .
그는 그의 사병 시절 여순 반란을 평정하는 토벌 작전에
참여했던 사람이 자기 부대 인사계 여서 그로부터
여순 지구 진압 작전 이야기를 자주 들었었다 .
그는 이렇게 말했었다 .
" 진압군이 여수 시내를 탈환하고 들어가니까 가시 내들이
골목마다에서 진압군을 꼬이더란 말이야 .
홀딱 빠져서 따라 들어가면이 년들이
총신을 짧게 자른 칼빈 총을 붕대로
허벅지에 감아 가지고있다가 한방 갈겨 버리는거야 !
속절없이 죽는 거지 ! "
아직 순진했던 나는 물었다 .
" 아니 어떻게해서 여수의 술집 강아지들이 단체로
빨갱이가 되었나 ? "
그는 한심하다는 듯이 나를 보면서 말했다 .
" 작부가 아니 었소 ! 모두 여고생 들이었다 고요 !
" 뭐요? 여고생 ? "
그는 대답했다 .
" 빨갱이 선생 놈이있어 가지고 애들을 녹여서
몽땅 빨갱이로 만들어 버렸대요 !
나중에 알아챈 진압군들이이 아그 [ 애기 ] 들을
사정 보지 않고 막 쏴 죽였다고 하더군 ! "
듣기에도 끔찍한 이야기였다 .
충격을받은 나는 칼빈 소총을 분해해서 총신을 짧게 자르면
몸에 은익 할 수가있는지를 알아 보았다 .
살펴보니 개머리를 분해한 칼빈 총신을 짧게 자르면 꼭
모젤 권총 만해서 능히 숨길 수있다는 판단을했다 .
나는 관심을 가졌던이 사건의 배후에 송 욱이라는
붉은 교장이있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
말이 길어 지므로이 자와 그의 붉은 일당이 여수에
끼친 해악을 먼저 알아보자 .
여순 반란 사건의 시작에 군 (军) 의 지 창수가 있었다면
민 (民) 에 송 욱이 있었다 .
주검 앞에 통곡하는 가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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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놈 다 혁명 이니 뭐니하는 고상한 말을 입에 올렸지만
이런 것과는 거리가 먼 엄청난 살인을 두명이 저질렀다 .
단지 지 창수가 직접 살인을했다면 송 욱은 간접 살인을
했다는 차이 뿐이다 .
송욱은 지 창수가 1949 년 10 월 19 일 밤 반란을 주도해서
14 연대를 장악한 다음날 20 일 일찌감치 얼굴을 내밀었다 .
여수 중학교 교장이던 송욱은 잠복 해 있던 23 명의 공산 분자들을
이끌고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14 연대 본부에 나타나서
반란군과 합류했다 .
두 인간들 사이에 반란 전 어떤 형태 로건간에
사전에 소통이 있었다는 이야 기다 .
송욱은 즉각 붉은 졸도들로 여수 인민위원회를
구성하고 자신이 위원장이되었다 .
집단 총살당한 우익 인사들 - 벽에 총탄 자국이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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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조직은 인민 재판을 주도하여 수많은 양민을 살해했다 .
잔인함은 극을 달하여 군과 갈등이 있던 경찰은 모두 죽임을
당했고 평소 좌익 분자에게 미움을 받던 인사들은
꼬투리를 잡혀 죽임을 당했다 .
거리에 흩어진 또 하나의 주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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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여자 경찰들은 온몸이 난자 당하고 토막 나는
처참한 죽임을 당했다 .
이 여경들의 주검이 거리에 효시가 되었 다니 이들 집단들의
잔인성을 짐작할 수가있다 .
붉은 살인귀들이 열흘 남짓 여수와 순천을 점령하고
있는 사이 학살당한 무고한 민간인 숫자는 1200 명이 넘었다 .
정부는 천인공노할 범죄를 거침없이 저지르는 14 연대 반란을
국가 보위를 위협하는 중대 변란으로 판단하고
즉각 진압에 나섰다 .
징발된 농민들이 진압군의 실탄과 군수품을 운반하고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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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일부터 병력을 동원한 군은 토벌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
토벌 작전이 본격화하면서 송 욱과 그와 동조자였던
붉은 교사들은 어린 학생들을 동원해서 방어 군을 조직했다 .
아직 피지도 못한 어린 학생을 죽음으로 내몰 비인간적인
생각이 어떻게 교육자의 머리에서 나왔는지는 상상이되지 않는다 .
Y 여중은 물론 실업 고인 Y 수산 고 학생 들까지도
세포 요원인 골수 좌익 학생들의 곧 남한이 적화된다는
감언 이설의 선동과 말을 안 들으면 죽이겠다는 살해의 위협에
삽시간에 다수의 어린 학생들이 자의만 타의만
붉은 학생 병이되어 반란군의 보조 저항 군력으로 조직되었다 .
[ 믿기 힘들지만 반란 진압 후 조사 한바에 의하면 Y 수산 고는
100 % 있는 Y 여중은 40 % 나 좌익에 포섭되었다고한다 .]
여학생을 포함한 어린 학생들을 비인간적인 방어 병력화하는
작업은 역시 반란군이 장악한 순천의 좌익 교육자들이
주도하여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
자신이 교장으로있는 Y 여중은 물론 타교인 Y 수산 고는
물론 멀리 떨어진 순천의 학교 선생 들까지도 포섭하여
좌익화 한 것을 보면 송 욱이라는 인간이 제자들의 앞날을
열어주는 참교육을 팽개치고이 지역의 지하 활동에 얼마나
전념 했는지를 알 수가있다 .
즉결 처분당한 가족들 - 돈이있다는 것이 학살의 이유가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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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이 먼저 토벌한 것은 홍 순석이 반란을 일으킨
순천에서부터이었다 .
20 일 반란이 일어난 순천을 22 일 군이 공격했을 때 벌써
일반 좌익 폭도들과 학생들이 총을 들고 저항하기 시작했다 .
홍 순석의 반란군은 이미 시내를 빠져나간 뒤였다 .
이들은 총기뿐만 아니라 죽창을 들고 반항했다 .
그들은 날뛰면서 저항했지만 장갑차까지 앞세운
토벌 군의 상대는되지 못했다 .
순천은 당일 오전 중으로 수복되었다 .
그러나 이틀에 걸친 전투에서 어린 학생들을 활용하는
좌익 활동의 뿌리 깊음과 치밀함을 아래 일화에서 볼 수있다 .
6.25 수많은 대소 전투를 치르고 상이 제대 했었던 전쟁중
이 윤 선생이 쓴 수기에서 회상한 내용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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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월 22 일 새벽 6 시경 은 교복을 입은 한 처녀가 우리가있는
도립 병원으로 다가왔다 .
도립 병원은 반란군이 지휘소로 쓰던 곳이 었는데
그 전날 저녁 국군에게 탈환되었다 .
새벽에 교복 차림의 처녀가 적 지휘소로 접근한 것은
수상한 것이었다 .
그 학생은 근처에 와서 손짓으로 암호를하는 듯하나 우리는
알지를 못하고 그저 가까이 오라고 했더니 그 학생은
머뭇거리다가 도망치기 시작했다 .
- 이 반란군 병사들 사이에 상대를 확인하는 암호 동작이 있었다 .
그 학생은 도립 병원이 아직도 반란군의 지휘소 인줄 잘못하고
접근했다 .-
나는 쫓아가 그 학생을 붙잡고는
" 왜 도망 가지 ? 하여간 넌 수상한 계집애다 ! " 하고 몸수색을
시작하니 그 학생은 퍽 당황하면서
" 왜들 이래요 ? 아무 죄없는 사람이어요 ! "
하면서 허둥지둥했다 .
몸을 수색했으나 아무런 단서를 잡지 못했다 .
그러나 왼쪽 팔의 학년 표시 [ 숄더 패치 ] 가 약간 뜯어져
있는 것을보고 그 것을 뜯어 보았다 .
그 곳에서 담배 꽁초만한 종이 쪽지가 땅에 떨어지면서
그 학생은 갑자기 정신병자 모양 몸 둘 바를 몰라했다 .
종이 쪽지는 그야말로 중대한 전달 문서였다 .
" 순천 B 조 , 발전소 동방 2km 로 이동 명령 대기 중
5 시" 라는 쪽지였다 .
즉시 나는 여학생과 쪽지를 전투 사령부로 압송 하였다 .
이 윤 선생이 그린 여학생 연락원 .
어깨 학년 표시에 쪽지가 들어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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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전투 경찰대와 군 병력은 계집애를 앞세우고
놈들이 숨어있는 부락으로 접근하여 3 면으로 포위하고
공격해서 섬멸했다 .
약 300 명의 적이 섬멸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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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 탈환 후 여수 진입 작전은 26 일 개시되었다 .
그러나 여수를 사수 하리라 생각했던 잔류 반란군 1 개 대대는
24 일 밤 여수시 방어를 송 욱이 지휘하는 폭도들과 학생들에게 일
맡기고 빠져 나간 뒤였다 .
2 군수 참모 함 병선 소령 [ 중장 예편 ] 이 지휘하던 진압군 여단
2 여단 예비 2 대대 는 는 부두 가까이까지 전진하자 적의 사격이
극심했다 .
자세히 살펴보니 총을 쏘고있는 것은 여학생 들이었다 .
아직 15,6 세를 넘지 못한 중학생 들이었다 .
노련한 함 병선 소령은 이들 머리 위로 일제히 기관총 사격을
가하고 찝차로 돌입하며 "은 버리고 투항하라 가 총을 ! " 하는
위압감있는 호령을하자 여학생들은 총을 버리고 투항했다 .
그 숫자가 무려 백여 명이 넘었다 .
사진 작가이 경모 선생이 촬영한 반란 가담 여학생 .
유명한 사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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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도들과 학생들의 저항은 진압군이 시내 깊숙이 진입한 27 일부터
노골화되었고 여학생들이 총을 들고 나타나서 저항하기 시작했다 .
진압군은 시체가 여기저기에 널부러진 거리를 전진해 가면서
그간 숨어 있었던 군경들을 구출하기 시작했다 .
일주 일간 하수도에 숨어 있었던 반란 14 연대
부연 대장이 희권 소령도이 때 구출되었다 .
주먹밥으로 요기를하고있는 진압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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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심하다가 여학생의 유혹에 피해를 입은 것은 27 일 시내로
진입한 송 석하 소령의 제 3 연대 1 대대 병력이었다 .
폭도 혐의자를 구타하며 연행하는 경찰 .
동료들이 참혹하게 학살당한 현장을보고
분격한 일부 경찰들은 반도들에게 혹독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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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내가 군 생활 시절 부사관에게서 들었 던바 있었던
여학생들의 유혹과 암살은 이날부터 시작되었다 .
공식 기록을 살펴보니 여학생들이 권총으로 살해했다고했는데
권총이 그렇게 많았을리 없었고 칼빈 소총을 짧게 자른 소총이
사용되었다는 설이 더 유력 할 듯하다 .
성적 (性 的) 으로만 유인한 것만은 아니었다 .
어느 병사들은 상냥한 소녀가 나타나서
" 아휴 수고 하시네요 . 저기 그늘에서 쉬세요 . 물을 떠 올테니까 "
하고 부대를 유인하고 데려간 다음 " 쏘세요 ! " 라고 외치고
숨어 버렸다 .
잠복한 적들은 사격을해서 유인당한 병력에 큰 피해를 주었다 .
수없는여 제자를 죽음으로 내 몬 붉은 교장 송 욱은
이날 함 병선 소령의 부대가 여수 여자 중학교를
수색했을 때 체포되었다 .
그는 후에 그의 졸개 교육자들과 함께 총살되었다 ..
여수를 평정한 진압군은 각자 구역내 주민을 집결하고 좌익 분자
색출에 나섰다 .- 여기 모인 주민 중에 80 여명이
좌익으로 판정 받아 당일로 총살되었다 . 옥석 가리지 않은
증오의 응징 분위기가 강해서 억울하게 희생당한
사람들도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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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도 죽고 제자들도 죽임으로 내몬 송 욱과 그 동조
선생들은 뭐라 변명해도 천벌을받을 짓을 하였다 .
좌익으로 지목된 사람이 필사적으로 변명하는 동안
경찰이 그의 소지품을 뒤적이고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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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란의 참담한 실패로 끝났고 지리산쪽으로 도주했던
반란군의 지도자 김지 회와 홍순석은 다음해 봄에
지리산에서 사살되었다 .
김지 회의 처 , 20 살의 제주도 비바리 조 경순은
그를 따라 입산 했다가 역시 체포되어서
처형되었다 .
지 창수의 최후는 알려지지 않았다 .
반란군과 가담 좌익들이 처형당한 현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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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송 욱의 간계에 빠져 반란에 가담했던
어린 여학생들 중 얼마나 많은 학생들이 목숨을 잃었 는지는
잘 알리고 있지 않다 .
여순 사건 뒤에도 산으로 가서 공비가 된 여학생들이 있었다 .
공비 간호병 김 봉숙의 군사 재판 - 군경 부상 포로들에게
잘 대해 준 사실이 확인되어 사면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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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진압 작전 중에 좌익들이 저지른 끔찍한 만행을
보고 흥분했던 진압군과 경찰의 응징이 철저했던 점으로
보아 적지 않은 학생들이 희생되었을 가능성이있다 .
요새 가끔 생각한다 .
내 군 생활 시절 부사관이 이야기했던
송 욱에 대한 대목 ' 여학생들을 녹였다 . ' 이다.
다시 판단해보면 스승이 할 ' 참교육 ' 이라는 것을
내 팽개친 ' 인기 전술 ' 로 어린 학생들의 환심을 사고
그 환심 속에 붉은 독주 사를 놓았을 것이다 .
요즈음도 보니 자기들 입지를 넓히려 학생들의 장래가
어찌 되건 학생들 편하게 해주는 인기 정책만 주장하는
교육계의 일부 극단적인 세력들을 보면 어쩔 수없이 송 욱의
생각을하지 않을 수가 없다 .
그들 일당의 이데 오르기 장난에 호된 희생을 치뤘던
Y는 여중은 지금은 호남의 명문 여성 교육 기관으로 발돋음했고
요즈음은 대학으로 발전한 Y 수산 고등학교는
오랜 기간 한국 수산 업계의 수많은 인재를 길러내
국가 경제에 크게 이바지했다 .
이데 오르기 놀음의 끝 . 1,950 수색 처형장에서 반란 가담자와 년
숙군에서 색출한 좌익 장병들의 총살형이 진행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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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두 학교의 자랑스런 위상 (位相) 은 어린 학생들에게
주입할 독약을 조제 하느라 증오와 파괴를 선동하는 공산주의
책자나 들여다 보던 붉은 교장 송 욱과 그 졸개들이
관심조차 두지 않았던 목표 였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