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화는 연말연초라는 한정된 시기에 ‘벽사진경’이라는 목적에 의해 사용된 기능적인 그림이다. 세시의 벽사진경에 사용되는 그림은 ‘문배門排’와 ‘세화歲畵’ 두 용어로 불리어져 왔는데 일반적으로 별다른 구분 없이 경우에 따라 사용되어 왔으며, 문배에서 길상 등의 기능이 확대되면서 세화로 이어졌다는 의견도 있다. 설날에는 대문에 갑옷을 입고 한 손에 도끼를 들고 서 있는 장군상將軍像을 그려 붙이며 이를 문배門排 라 불렀다. 일반적으로 문배는 한 해 동안의 액운을 물리친다는 의미를 가지는 반면, 세화는 신년을 축하하는 의미로 서로 간에 선물로 주고받거나 집안을 장식한 그림을 의미한다.
민화의 근본이 된 세화의 유래
세화가 언제부터 전해져 오는 것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조선 초기 새해를 축복하기 위한 의미로 궁궐에서 만들어 왕가 친인척과 신하들에게 나눠주던 그림에서 시작되었다고 보고 있다. 당시 세화는 지금의 민화개념인 민중들이 소박한 심성으로 자유롭게 그려 붙였던 것과는 달리 궁중의 전문화가들이 그려 임금에게 바치면 이를 하사품으로 전해 받았다는 것이다. <육전조례六典條例>에 따르면 조선왕조의 도화서 화원은 약30명, 또 촉탁격인 차비대령 화원이 약 30명과 사무직 등 약 70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들 화원들 중 차비대령은 1년에 세화를 30장씩, 그리고 화원은 각각 20장씩 12월 20일까지 그려 바쳐야 했다. 그리고 또 화원들은 궁궐의 문과 문간에 재앙을 쫓는 벽사용 그림을 그리도록 되어 있었다. 이들이 그린 세화의 내용을 살펴보면 연결병풍으로 된 오봉산일월도五峰山日月圖와 십장생도十長生圖_ 시도유형문화재 제137호, 그리고 바다에 학이 날며 신선이 먹고 불로장수한다는 천도복숭아가 있는 해학반도海鶴蟠桃를 비롯 미인도, 수렵도 등을 들 수 있다. 조선 영조 때의 실학자 유득공柳得恭의 저서 <경도잡기京都雜記>에 의하면, 세화에는 수성, 선녀, 직일신장直日神將이 그려졌다는 기록이 있으며, 김매순金邁淳의 저서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에는 세화로 금·갑신장金·甲神將을 그려 바쳤다는 기록이 나온다. 자료부족으로 신장 그림의 내용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문배門排라 하여 무장의 형태를 그려 궁궐의 문이나 여염집 대문에 붙여 악귀를 쫓는 주술적인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문배에 대해서는 조선 순조 당시 학자였던 홍석모의 저서 <동국세시기>에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풀이할 수 있다. 수성은 하늘의 별 중 장수長壽를 맡은 노인성老人星을 형상화한 것이며, 직일신장은 그 날을 담당한 신을 가리킨다. 금金·갑甲의 두 장군은 그림의 길이가 한 길이 넘으며, 한 장군은 도끼를 들고 한 장군은 절월節鉞을 들고 있는 것으로 모두 대궐의 문 양쪽에 붙이고 이를 문배라 불렀다고 한다. 또한 붉은 도포와 까맣고 네모난 모자를 쓴 인물상을 그려 궁전의 겹대문에 붙였으며, 중국에서 역귀 또는 마귀를 쫓는 신으로 당·송 때 성행했다고 알려진 종규상을 그려 붙이기도 했다.
한 해의 다복다산, 무병장수를 비는 세화
이렇듯 궁궐이나 사대부 집안의 대문에는 악귀를 물리치는 세화(문배)로 장군상을 사용한데 비해 여염집에서는 닭과 호랑이의 그림을 붙여 액이 물러나기를 빌었다. 닭은 귀신이 도망간다는 새벽을 알리는 영물로 신성시 되었으며, 호랑이는 맹수의 왕이자 산신령의 수호자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이렇듯 세화는 벽사 위주의 의미가 무병장수를 소망하는 의미의 십장생도나 수성노인 등 길상吉祥의 뜻이 깃든 형체로 발전하면서 현재의 민화와 같은 새로운 장르로 변해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즉, 새해가 되면 나쁜 악귀나 액을 쫓고 다복다산을 소망,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의미로 호랑이, 용, 학, 해태, 봉황, 사슴, 물고기 등 십장생도에 나오는 상서로운 동물들과 봄, 즉 소생을 의미하는 매화, 수선화, 동백 등의 화초와 괴석, 수석, 책가도 그리고 장수와 행복을 상징하는 선녀, 수성노인 등을 그려 서로 주고받거나 집에 걸어두면서 그 의미를 생각하며 기원하기도 했다.
풍자와 해학이 담긴 민화의 근간이 되다
이 같은 세화가 오랜 세월 그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새해라는 시간의 기점과 이것을 걸어두거나 장식할 수 있는 공간이 우리 생활 속에 상시 제공되었기 때문이다. 세화는 민중들의 메시지를 담아 자연스럽게 표출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 좋은 예가 현재 최고가를 호가하는 호작도虎鵲圖일 것이다. 호작도에 그려진 호랑이의 머리는 표범의 문양과 호랑이 문양인 줄무늬가 섞여 있다. 이러한 호랑이는 <호질전>에서 얘기하는 양반, 그 중에서도 무반을 상징하는데 그림에서는 호랑이를 바보스럽게 또는 못생긴 사람처럼 묘사하고 있다. 이러한 호랑이가 소나무 아래 앉아 있으면, 까치가 호랑이를 향해 지저귀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민중을 상징하는 까치가 산중 왕이라는 호랑이를 약 올리는 의미가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만약 이처럼 양반을 능멸하는 의미의 그림을 시도 때도 없이 아무데나 붙여 놓았다면 아마 그 화가는 무사하지 못했을 테지만, 세화라는 명분으로 자연스럽게 걸어둘 수 있었기 때문에 그 같은 풍자가 가능했었다는 것도 재밌는 사실이다. 세화가 단순히 무병장수만을 기원했다면 그 생명력은 무당 그림처럼 평가절하 되어 풍속화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이처럼 조선중기에 이르기까지 활발하게 그려지던 세화는 후기로 가면서 세시풍속의 만연과 도시경제의 발달로 점차 민간에 확산되고, 장식용 그림과 함께 조선 후기 이후 민중 의식이 내포된 민화의 근간이 되었다.
▶글 : 김호년 미술평론가, 고미술저널 발행인 ▶사진제공 : 우리민화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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