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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書院)

대한인 2013. 12. 7. 05:12

서원(書院,) 유가의 선비들과 만나다

서원 뜰을 걷는다. 잎 지고 인적도 없는데 고가의 목향이 바람과 어우러져 여행자의 적적함을 달래준다. 소수서원 직방재. 문지방이 번질번질한 것을 보니, 꽤나 많은 선비들의 걸음이 오갔을 법하다. 일신재 툇마루에 오후의 늦은 볕이 걸렸다.
걸터앉아 볕을 쪼이고 있으려니, 어디선가 젊은 선비의 낭랑한 글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유가의 선비들이 입신양명을 꿈꾸며 학습에 정진하던 곳.
인재의 샘, 조선의 사립학교, 서원을 둘러본다.


교육을 통해 이상을 실현한다

공자는 나이 쉬흔 여섯이 되어 길을 떠났다. 13년 동안의 혹독한 여정이었다. 그 결과 공자는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현실적 정치에 접목시킬 수 없음을 알게 된다. 공자는 비로소 깨달았다. 정치적 이상을 통해 국가를 바로잡으려는 노력보다 학문적 사상을 개발하여 자아를 완성하는 것이 훨씬 값어치가 있다는 사실을. 그리하여 고향으로 돌아온 공자는 73세로 숨을 거둘 때까지 오로지 학문에 정진한다. 또한 그의 학문적 이상인 전승傳承을 위한 교육에 전념하였고 교육을 통하여 전인全人으로서의 그의 인생이 완성될 수 있었다.
 서원의 기능 중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바로 교육이다. 서원이 참교육의 장으로 각광받게 된 데에는 16세기의 사화가 큰 계기가 되었다. 향촌에서 공부하던 선비들이 중앙 정계에 진출해 정치 참여를 시도하였으나,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훈구세력들과 충돌하게 되었고 결국 사화 속에서 죽거나 쫓겨나게 되었다. 이후 선비들은 정치 참여를 포기하고 낙향하여 뜻을 같이하는 동료들과 강학회를 가지면서 학문에 몰입하게 된다. 이런 움직임을 이끌어 간 대표적인 인물들이 이황, 조식, 김인후, 기대승, 성혼, 이이 같은 당대의 명망 높던 선비들이다. 서원은 선비들 스스로 학문을 익히기 위한 곳이기도 하였지만, 향촌의 유생들이 배움을 청하게 되면서 체계적인 교육 시설로 자리잡혀 갔다. 서원 교육의 주된 내용은 성리학을 바탕으로 자신을 도덕적으로 완성시키고자 하는 ‘법성현’을 제일로 삼았다. 원생들은 이를 위해 ‘소학’부터 시작하여 ‘대학’ ‘논어’ ‘맹자’ ‘중용’ ‘시경’ ‘서경’ ‘주역’ ‘예기’ ‘춘추’ 등의 순서로 배웠다. 한편, 서원은 정계에 진출하기 위해 그 관문인 과거 교육도 소홀하지 않았다. 퇴계 이황은 “국가에서 현인을 얻는 것은 서원에서”라고 말하기도 했다. 따라서 관리의 양성도 서원의 중요한 교육 목표 중 하나였다.


서원의 태두, 백운동 서원과 소수서원

우리나라에 들어선 최초의 서원은 중종 37년(1542), 당시 풍기군수였던 주세붕이 영주 순흥 땅에 세운 백운동 서원이다. 중국 송나라 때 세워진 백록동 서원을 좇아 백운동 서원이라 이름 붙였다. 백록동 서원은 성리학을 체계화한 주자朱子를 봉향한 서원이다. 주자는 공자에 버금가는 대성현이었는데 주자가 세운 성리학을 주자학이라고도 불렀다. 백운동 서원은 중국의 성리학을 최초로 들여온 안향安珦을 모신 서원이다. 안향은 사림의 태두로도 기록된다. 안향의 학맥은 정몽주와 이색을 거쳐 김종직 등 사림파로 이어졌으며,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에 이르러 완성을 이룬다. 사림파의 목표는 성리학의 발전과 사회적 실현이었다.
우리나라의 교육기관은 고구려의 태학으로부터 시작된다. 고려 중기 이후에는 국가의 주관으로 중앙에는 성균관을, 지방에는 향교를 세워 교육을 담당했다. 그러나 15세기 말부터 향교의 교육적 기능은 쇠퇴하기 시작했다. 원래 향교는 양반 상민을 가리지 않고 공평한 교육 기회를 부여했다. 그러나 조선으로 넘어오면서 양반과 상민의 구분은 뚜렷해졌고 격차도 심화되었다. 양반 자제들은 대중교육의 성격이 짙은 관학을 외면하였고, 유명한 스승을 찾아 사숙하는 사교육이 일반 관행으로 자리잡았다. 서원이 출현하기 시작한 이후 정부의 교육정책은 관학 진흥에서 서원 장려책으로 바뀌게 된다. 서원에 대한 정부 지원은 이른바 ‘사액서원’의 형태로 나타났다. 주세붕에 이어 풍기군수로 부임한 이황은 백운동 서원에 대해 국가가 후원해 줄 것을 요청하였는데, 명종 5년(1550) 나라에서는 ‘소수서원’이라는 현판을 하사하였고 이로서 최초의 국가 공인 서원이 되었다. 소수서원은 사적 제55호로 지정되었으며, 회헌 영정은 국보 제111호, 주세붕 영정은 보물 제717호, 안향의 위패를 모신 사당인 문성공묘는 보물 제1402호, 유생들이 강의를 듣던 강학당은 보물 제1403호로 각각 지정되어 있다. 



영남학파의 산실, 도산서원

경상북도 안동지역에는 유난히 많은 서원들이 자리하고 있다. 이들 서원은 대개 안동의 명문가에 의해 설립되었고 운영되어 왔는데 이는 혈연적 세력을 공고히 하는 한편, 학연에 의해 서로의 결속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어왔다. 이중환의 ‘택리지’에서는 안동 일대를 서술하면서 “안동에는 퇴계, 서애, 학봉 등의 문인 자손이 많고 그들의 영향을 받은 사대부가 산재하여 그 기세가 한양에 비길 만하다.”라고까지 적고 있다. 안동의 여러 서원 가운데서도 그 중심은 단연 도산서원(사적 제170호)이다. 도산서원은 명종16년(1561), 낙향한 퇴계 이황(1501∼1570)이 후학들을 가르치기 위해 개설한 도산서당으로부터 시작된다. 그가 이곳에 터전을 마련한 것은 산수가 수려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청량산 자락을 지나온 낙동강 물줄기가 안동으로 흘러들며 너르게 퍼져나가는 도산면 토계리. 퇴계는 이곳에 도산서당과 농운정사를 지어 한쪽은 스스로 공부하는 곳으로 삼고, 다른 한쪽은 제자들을 가르치는 강의실로 삼았다. 그 뒤 퇴계가 별세하자 그의 제자들과 흠모하던 고을의 선비들이 서당 뒤쪽에 사당을 짓고 위패를 모시면서 서원으로 발전했다. 제자들은 기존건물 외에 상덕사(보물 제211호), 진도문, 동재, 서재, 광명실, 전사청, 장판각 등을 보완 증축하여 서원의 면모를 갖춘 뒤 이듬해 나라에 요청하여 도산서원이란 편액을 하사받았다. 생전에 서원의 보급과 교육에 열정을 받쳤던 퇴계는 사후에도 서원 교육에 이바지하였다. 도산서원의 교육 내용이나 서원의 운영 세칙 등을 다른 서원에서도 모범으로 삼아 따랐기 때문이다. 도산서원은 우리나라 성리학의 요람이었을 뿐 아니라 서원의 종주였다. 퇴계는 무엇보다도 겸허함을 배움의 기본 자세로 삼았다. 전국에서 많은 제자들이 찾아들어 가르침을 청하였는데, 친구와 같이 대했고 아무리 젊었어도 하대하는 법이 없었다. 사람을 대하거나 사물을 대할 때 항상 공경하는 태도로 일관했다고 전해진다. 퇴계는 조선 성리학의 근본을 완성한 대학자였을 뿐 아니라, 360여 명의 이름난 문인들을 키워낸 대교육자였다. 인물의 크기에 비례하듯, 도산서원은 최대의 서원이며 최고의 품격을 지닌 서원이다. 도산서원은 사적 제170호로 지정되었으며, 강당인 전교당이 보물 제210호, 사당인 상덕사 및 정문이 보물 제211호로 지정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