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는 조선의 제 22대 황제로서 재위는 1776~1800년까지 25년간 이었습니다
휘(諱)는 "산" 이고 추존황제인 장조(1735~1762)의 차남으로 어머니는 헌경황후 (1735~1815) 홍씨 입니다 형인 의소태자가 있었지만 생후 수개월만에 사망 하였습니다
정조는 태손시절부터 숱한 암살의 위험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정조와 정적관계인 노론벽파가 끊임없이 정조의 목숨을 노렸기 때문 입니다
이러한 환경탓인지는 몰라도 정조는 무예에도 뛰어났고 의술에도 밝았습니다
정조의 궁술은 태조 이성계에 버금간다 할 정도로 대단했다고 합니다
학식에도 뛰어나 신하를 가르칠 만큼 정조의 학문또한 대단했습니다
그야말로 문무를 겸비한 황제였던 것이죠
그러나 정조의 이러한 파란만장한 삶의 연속인지는 몰라도 정조의 죽음에도 사실 여러 의혹이 있습니다
이른바 독살의 의혹이 바로 그것 입니다 그동안 학계에서도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켰고 당시에도 독살논쟁은 상당했다고 합니다
대표적 실학자인 정약용(1762~1836)의 저서인 "여유당 전서"에서도 독살의 의혹을 제기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안따깝게도 구체적인 물증은 없습니다 다만 "독살의 개연성이 있다, 혹은 심증이 간다" 하는 그런 정도의 수준 입니다
굳이 더 정확하게 표현한다면 독살이라는 증거도 또 아니라는 증거도 없다는게 저의 솔직한 견해 입니다
실록에 나타난 기록으로는 정조의 사인은 "등창" 입니다
등창이란 바로 등에 난 종기를 말합니다 정조는 이 등창의 치료중 과로사 한것으로 보여 집니다
그러나 사실 치료과정중에서는 여러가지 석연치 않은 점이 발견 됩니다 예컨대 그냥 짜도 될 고름을 굳이 수은중독의 위험이 있는 연훈방을 했다는 것과 주치의가 노론벽파의 영수인 심환지의 일가친척인 심인 이었습니다
그리고 정조는 붕어 직전부터 줄곧 신하들을 모아놓고 앞으로의 일대개혁을 단행할 것임을 여러차례 시사했다고 합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오회연교" 입니다
오회연교란 5월말에 황제가 신료에게 전교를 내렸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내용이 이른바 노론벽파에 대한 숙청과 남인의 중용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위기의식을 느낀 노론벽파가 모종의 음모를 꾸몄다는 얘기입니다
말하자면 오늘날의 정변(쿠데타)를 기도했다는 얘기 입니다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추론 입니다 그리고 정조의 붕어 직전 마지막을 함께 한 사람은 바로정조의 할머니가 되는 정순황후(1745~1805) 김씨 입니다
정순황후는 정조와는조손지간이 되지만 정치적으로는 대립관계였습니다
또한 황제의 침실에 태황비가 드는것도 이례적인 일입니다 정조실록을 보면 이때에 사관과 승지는 배석하지 않았습니다
그야말로 의아한 부분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