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6혁명 공약 5개항
「①반공을 국시의 제1의로 삼고 지금까지 형식과 구호에만 그쳤던 반공의 태세를 재정비 강화함으로써 외침의 위기에 대비하고,
②국련(UN) 헌장을 충실히 준수하고 국제협약을 이행하며
미국을 위시한 자유 우방과의 유대를 강화함으로써 국제적인 고립에서 벗어나야 하고,
③구정권 하에 있었던 모든 사회적 부패와 정치적인 구약을 일소하고
청신한 기풍의 진작과 퇴폐한 국민도의와 민족정기를 바로 잡음으로써 민족. 민주정신을 함양하며,
④국가 자립경제 재건에 총력을 경주하여 기아선상에 방황하는 민생고를 해결함으로써 국민의 희망을 제고시키고,
⑤북한 공산세력을 뒤엎을 수 있는 국가의 실력을 배양함으로써 민족적 숙원인 국토통일을 이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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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항의 반공 태세의 정비와 강화, 제2항의 외교강화와 국제고립의 탈피는
대부분 또는 상당 부분 달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제3항의 부패와 구악의 일소는 신악과 새로운 부패로 엇갈렸다.
민족정기와 청신한 기풍은 문화재의 발굴과 충효사상의 고양,
「하면 된다」는 민족 패 기의 고취로 민족정신에 확연한 선을 그었다.
그러나 퇴폐한 국민도의, 민주정신의 함양은 급격한 산업화에 따른
극단적 배금사조와 인권억제에 따른 반체제와의 혹심한 갈등으로 일그 러진 게 사실이다.
제4항의 자립경제 재건과 민생고의 해결은 박정희 치적의 백미이자 5.16 혁명세대의 트레이드 마크이며
이 나라 역사의 새로운 구획선이었다.
제5항은 1974년을 분계선으로 남북간 비교가 남한 우세로 반전되기 시작했으며 그분의 서거 시점에서는 남한 우세 가 분명해졌다.
그러나 국토통일은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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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국민을 굶기지 않겠다”
1961.6.1~6.7
혁명 군부가 맞딱뜨린 것은 지독한 가난이었다.
국고는 텅 빈데다 수치상의 1961년 국가 예산 가운데 미국이 주는 잉여농산물로 충당되는 대충자금이 52%나 되었다.
외국 원조와 간섭의 영향력이 절반이나 되어서는 국가 주권을 말할 형편도 아니었다.
박정희 소장은 암담한 국가 실상에 몸을 떨었다.
군정 하의 60년대초 서울 거리. 군 지프가 서민 동네를 지나고 있다.
“춘궁기에는 2백만명 이상이 굶주렸다.
‘기아 퇴치’, 또는 ‘절량농가 근절’이라는 국정지표를 써붙인 현수막이 관공서 건물마다 걸려 있었고,
박정희 소장은 기자회견에서 ‘나는 국민을 굶기지는 않겠다’며 울먹였다.” (작가 김훈)
5.16군사혁명 기념사진전. 혁명의 의미를 살피고 있는 시민들. 1961-06-01 (정부기록사진집5)
“제가 보기에는 상당수 지식인들이 (5.16을) 지지했어요.
올 것이 왔구나 싶어서 나도 그렇게 생각했으니까. 그럴 만도 했죠.
민주당 정부는 도무지 나라를 끌어갈 수 없는 정부였어요. 한마디로 완전히 카오스였습니다.” (목사 강원용)
“4.19혁명이 입헌정치와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민주주의 혁명이었다면,
5.16혁명은 부패와 무능과 무질서와 공산주의의 책동을 타파하고 국가의 진로를 바로잡으려는 민족주의적 군사혁명이다.
따라서 5.16혁명은 우리들이 육성하고 개화(開花)시켜야 할 민주주의의 이념에 비추어 볼 때는 불행한 일이요,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으나, 위급한 민족적 현실에서 볼 때는 불가피한 일이다.” (<사상계> 1961년 6월호)
전몰 군경 유가족들. 1961-06-06. (KTV-국가기록영상관)
현충일 행사에 참석한 40대의 박정희 소장. 1961-06-06. (KTV-국가기록영상관)
국가를 보위하고 희생한 것은 시민사회였다.
5.16은 일부 상류 지배계층의 전횡으로부터 국가체제의 정통 기반을
시민사회로 이양시키는 새로운 기원을 열었다.
“5.16 주체세력은 30~40대 청년 장교들이었습니다. 대부분이 농촌 출신의 가난한 이들이었습니다. 이들이 밀어낸 구정치인들은 대부분 양반 가문의 50, 60대 지주 및 일제 관료 출신들이었습니다. (5.16혁명에는) 세대 교체의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조갑제)
혁명정부는 6월6일 국가재건비상조치법에 이어 9일 국가재건최고회의법을 제정 공포함으로써
혁명과업을 원활하게 추진하기 위한 법률적 근거를 마련했다.
국가재건비상조치법을 낭독하는 이석재 법무부 분과위원. 1961-06-06. (KTV-국가기록영상관)
배재중고교 제76회 개교기념 체육대회에 참석한 박정희 소장과 최고위원들. 1961-06-07. (정부기록사진집5)
일반 시민과 학생, 지식인들이 5.16혁명 군부에 기대와 희망을 보였던 것은 가난과 혼란 때문이었다.
“당시 <사상계>에 근무했던 한 언론계 원로의 증언에 의하면
"1961년 5월16일 아침, <사상계> 편집실은 ‘아, 우리나라도 이제 이렇게 해서 근대화 혁명이 시작되는구나’하는 느낌에 휩싸였다고 한다.”
그러나 혁명정부는 각계각층의 혁명지지 시위행진이 연일 벌어지자 오히려 이를 자제시키고 엄격한 질서를 유지했다.
자본도 기술도 없는 후진농업국의 현실에서 혁명정부의 선택의 여지는 극히 제한되어 있었다.
혁명정부는 정체된 시민사회에 활력을 불어넣는 국민운동에 의한 정신혁명으로 가닥을 잡아 나갔다.
이때부터 박정희 소장은 민생의 현장으로 가서 국민과의 접촉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