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미 생가로 가는 택시에서
필자가 최근에 박 대통령의 구미 생가를 찾은 것이 지난 6월 29일이다. 생가 앞에 새로 지은 보릿고개 체험장 내의 기념품 판매점에 필자의 대통령 관련 서적을 전시 판매하도록 다리를 놓아준 그 지역 인사들이 있었다. 한번 다녀가는 게 어떻겠느냐고 제의를 하길래, 그렇지 않아도 구미 생가 일대가 테마공원으로 조성되는 모습이 궁금하던 터여서 서울역에서 무궁화호를 탔다.
구미역에서 택시를 타고 박 대통령 생가를 가자고 하니 운전기사는 가면서 “저기는 논밭이었는데 저렇게 변하고 여기 길이 생겼다”고 관광 가이드처럼 설명을 해주었다. 그러면서 박 대통령을 지칭하는 대목에서 ‘박’을 생략하고 그냥 ‘대통령’이라고 줄곧 말하는 것이었다. 대통령 박정희는 과거완료형이 아닌 현재진행형이라는 그 나름의 믿음이거나 고집이거나가 강하게 느껴졌다.
운전기사들이 TV 드라마에서 박정희 역을 맡았던 배우(이진수)에게 택시요금을 받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배역뿐 아니라 얼굴까지 닮았다고 해서 화제가 되었던 배우였다. 드라마에서 대통령 역을 맡았고 또 얼굴이 닮았다는 이유만으로 택시요금을 안받고 “그냥 내리시라”고 예우하는 것이 정녕 예삿일은 아니다.
역사 속 박정희의 ‘침묵’과 맞장을 뜨려는 듯 ‘살아 있는 입’들이 어지간히도 그를 씹어대던 노무현 집권 시절에, 한 택시기사는 부산에서 열린 국제행사를 취재하러 온 외국기자를 태우고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40년 전에 이 고속도로를 건설한 사람이 박정희 대통령”이라고 서툰 영어로 열심히 말하면서 노무현과 전직 대통령들을 싸잡아 비난하더라는 이야기도 전해진 바 있다.
대체 박정희는 누구인가. 간단히 정의하고 싶어 생각을 하노라면 윤곽이 잡히지 않아 막연해진다. 그럴 때 힌트를 주는 것이 택시기사로 대변할 수 있는 민심의 생생한 목소리다.
택시는 ‘달리는 민심’이다. 박 대통령 서거 30주년이 되는 오늘, 그는 여전히 거리를 ‘달리고’ 있다. 그는 갔지만 우리는 그를 보내지 않았다는 현재진형형의 민심 속에 그는 침묵으로 ‘군림’하고 있다.
“우리를 먹고 살게 해준 대통령”
박 대통령 생가 앞에 이르니, 전화로 면담 약속이 돼 있던 생가보존회 전병억 회장이 보릿고개 체험장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보릿고개 체험장은 생가 앞 상모동 186번지 등 2필지에 아담하게 조성되어 7월 초 개장을 앞두고 한창 준비에 바빴다.
“식사하셨습니까?”
그가 먼저 묻는 말이다.
밥때가 되면 으레 밥을 먹었는지를 묻는 인삿말에 우리네 목숨붙이의 삶이 투영되어 있다.
전 회장은 이날 오전 대구에 출장 갔다가 자기도 점심을 못먹고 서둘러 돌아온 길이라 했다. 훤히 벗겨진 머리에 시원한 남방셔츠 차림, 소탈한 실무형의 분주한 행보가 칠순 초반의 연세보다 훨씬 젊어 보인다.
식당에서 먹을거리를 내왔다. 감자, 보리개떡, 보리감주, 막걸리와 두부 등 보릿고개 체험장의 음식이다.
박 대통령이 어떤 분이냐고 물으니 주저없이 간명한 대답이 나왔다.
“우리를 먹고 살게 해주셨죠.”
오늘 우리가 밥술이나 먹고 사는 게 박 대통령 덕이라는 것.
예나 지금이나 먹고 사는 일만큼 중요한 가치는 없다. 그냥 사는 것이 아니라 “먹고 산다”고 말한다. 밥을 먹고 밥심으로 사는 삶이다. 밥벌이를 해서 밥값을 해야 밥을 먹고 살고, 그렇게 살다가 세상을 하직할 때 밥숟갈을 놓는다.
“비만을 고민하는 청소년들이 민생고(民生苦)란 말을 어찌 알겠습니까. 처녀가 태어나서부터 쌀 한말을 먹어보지 못하고 시집을 간다는 말을 어찌 믿겠습니까.”
배고픔의 고통과 설움으로 점철된 보릿고개 시절의 모질었던 삶을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고 전 회장은 말한다.
대학생들이 보릿고개 퀴즈를 알아맞히지 못하는 장면이 TV에 비친 적이 있다. ‘보릿고개’라는 말이 사어(死語)가 되었다는 증거다. “가난 구제는 나랏님도 못한다”는 말을 사어로 만든 역사 인물 박정희.
“과거를 망각하는 국민에게 미래는 없습니다.”
전 회장은 보릿고개 체험장이 보릿고개 시절을 살았던 중장년, 노년층의 향수를 불러오는 것만으로는 의미가 없고, 젊은층에게 ‘가난 체험’의 역사교육을 제공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고 강조했다.
구미시가 가정집을 매입해 개조한 보릿고개 체험장 건물은 20여평의 작은 기와집이다.
“이 건물이 고 김재학 회장님의 집터입니다.”
불의의 사고로 작고한 생가보존회 김재학 전임 회장은 초등학교 교장을 지낸 분으로 전병억 회장의 스승이다. 구미 생가가 있는 상모동과 이웃한 임은동에서 태어난 전병억 회장은 1980년 초부터 생가보존회의 창립 요원으로 활동해 오다가 스승의 유지를 받들어 보존회장 직을 이어받았다.
▲사랑채(좌)와 박 전대통령이 소년시절을 보냈던 토방 내부(우). 방에 전시된 사진은 박 대통령이 대구사범 시절 귀향해서 어머니 백남의 여사와 찍은 것이다. ⓒ 좋아하는 사람들
“아이고, 이렇게 작은 토방에서 어찌 사셨을까!” 눈물짓는 방문객들
보릿고개 체험장은 박 대통령 생가 아래로 세번째 집이 있던 자리에 세워졌다. 첫번째, 두번째 집이 있던 자리에는 홍보관 건립을 위한 터파기 공사가 한창이었다.
구미의 진산인 금오산 효자봉 기슭의 박 대통령 생가는 푸른 숲으로 둘러싸여 있다.
전병억 회장 부임 전후로 생가는 관리상의 변화가 많았다.
전에는 생가 관리인이 보존회장과 청소하는 아주머니뿐이었다. 그러던 것이 보존회장을 보좌하는 사무국장 자리가 신설되고, 2008년 5월부터 구미시의 문화예술 담당 부서 직원 2명이 파견 근무를 하게 되면서 공익근무요원 2명도 배치되었다.
뒤늦게나마 사무실에 컴퓨터와 사무기기가 비치된 것도 전에 없던 일이다. 그리고 금년 5월부터는 여성 문화유산해설사 2명이 배치돼 방문객들에게 생가 소개와 박 대통령의 업적을 설명하는 등 이해를 돕고 있다.
필자가 생가에 들어서니 입구의 안내실에서 두 여성이 반가운 미소로 맞이한다. 문화유산해설사 김민선 씨(29)와 윤현경 씨(26)는 관광학을 전공한 전문직 여성들이다.
김민선 씨는 방문객들이 생가의 구조 변경에 대해 가장 많이 묻는다고 말한다.
생가는 초가 사랑채와 안채, 분향소(추모관)로 구성되어 있다. 기와 건물인 안채는 관리실(사무실)로 쓰이고 있어 박 대통령이 선산에 성묘하고 내려와 마루에서 막걸리를 마시던 옛모습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크게 변했고, 경내에 세워져 있던 사진틀은 고정적인 사진전시장으로 바뀌었으며, 입구의 안내실도 전에 없던 것이다.
유일하게 옛 모습과 구조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것이 초가 사랑채다. 박 대통령은 이 사랑채의 큰방에서 태어나 작은 방에서 소년시절을 보냈다. 구미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대구사범에 다닐 때는 기숙사 생활을 했으므로 소년 박정희가 먹고 자고 공부하던 작은 토방에는 소년시절의 체취가 묻은 앉은뱅이 책상, 책꽂이, 호롱불, 시렁이 있다.
어른 한 사람이 겨우 누워 뒹굴어볼 자리도 없는 아주 작은 토방은 그 자체가 충격적이다.
필자는 몇차례 생가를 방문하면서 이 작은 토방 앞에서 눈물짓는 사람들을 여럿 보았다.
“아이고, 이런 방에서 어찌 사셨을까!”
“작은 방에 갇혀 살아 키가 작으셨나봐.”
방바닥을 손으로 쓸어보며 주름진 얼굴에 눈물을 흘리는 할머니도 있었다.
윤현경 씨는 생가에 근무한지 두달밖에 안됐지만 방문객 중에서 40대 초반의 깡마른 남자 손님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그 분은 오실 때마다 주저앉아 펑펑 우시는 거예요.”
그러면서 ‘보이지 않는 눈물’이 강물처럼 흐르는 곳이라고 윤현경씨는 말한다.
안내실이 더워 필자가 땀을 닦는 것을 보고 그제서야 김민선씨가 벽걸이 에어켠을 켠다.
▲문화유산해설사 김민선씨(좌)와 윤현경씨(우). ⓒ 좋아하는 사람들
“검소하신 분이고 절약을 하신 분이라서…….”
박 대통령이 그런 분이라서 전기를 함부로 쓸 수 없다며 겸연쩍게 웃는 김민선씨는 구미초등학교 출신으로 박 대통령의 모교 후배이기도 하다.
극동의 한반도 남쪽 경북 선산군 상모리 금오산 효자봉 기슭, 전형적인 빈농의 산골마을에서 박 대통령이 태어난 1917년. 일제의 질곡을 뚫고 망국의 한을 깨치고 나와 그때 대한민국 현대사는 역사 인물 박정희의 공간 창조와 더불어 신기원의 문을 열었다.
그의 부친 박성빈은 칠곡으로부터 황소 한마리에 세간살이를 싣고와 효자봉 아래 대나무와 탱자나무숲으로 둘러싸인 터에 황토를 이겨 두채의 초가를 지었었다.
박 대통령이 쓴 글 ‘나의 소년시절’에 보면 “이 집은 6.25 동란 당시까지도 옛 모습 그대로였으나 6.25때 파괴된 것을 사랑채만 옛 모습으로 복구하고 안채는 초가로 가건물을 백형(伯兄)이 지었다가 5.16 후 지금 있는 안채를 다시 건립하였다”고 되어 있다.
생가를 둘러싼 대나무와 탱자나무숲은 오랜 세월에도 의구(依舊)한데 인걸은 간데없다.
인걸의 자취를 찾아 매년 50만명, 하루 평균 1천3백명 가량이 생가를 방문하고 있다.
방문객들로 붐비는 생가 경내는 대체로 자유스럽되 정숙한 분위기다.
그러나 관광버스로 오는 방문객 중에는 술 취한 사람, 담배를 물고 들어오는 사람, 박 대통령에 대해 반감을 가진 사람들도 더러 있다.
술에 취해 “독재자”라고 소리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필요한 독재”라고 응수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김민선 씨는 수고한다고 격려해 주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 사소한 소동쯤은 얼마든지 참을 수 있다고 말한다.
김민선 씨와 윤현경 씨는 같이 사진을 찍자는 방문객들의 요청에 모델 역할도 마다하지 않는다.
두 여성은 방문객이 몰리는 주말과 휴일에 더 바쁘기 때문에 평일에 교대로 네번을 쉰다고 했다.
생가 일대를 ‘근대화기념공원’으로 완성하는 그날까지
전병억 회장과의 면담은 사무실에서 계속됐다.
“지금까지는 10월 26일 서거일의 추모제 중심으로 행사를 치렀지만 이제부터는 11월 14일 박 대통령의 탄신일 중심으로 미래지향적인 기념사업을 펼치기로 했습니다.”
올해가 탄신 92주년이니 100주년까지 8년이 남았다며 전 회장은 어깨가 무겁다고 말한다.
기념사업의 핵심은 박 대통령 기념관이다.
그는 인구 6만에 재정자립도 15퍼센트에 불과한 옥천이 37억5천만원의 예산으로 육영수 여사 생가 복원 사업을 하고 있더라며 박 대통령 서거 30주년이 됐는데도 기념관 하나 없어 부끄럽고 죄송하다고 했다.
박 대통령 기념관 건립은 그가 구미 지역사회에 내걸었던 공약이다.
그는 영남대 약대를 졸업하고 구미시 약사회 초대회장, 제2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구미로타리클럽 초대회장, 구미시발전협의회 초대회장 등을 역임했다. 그리고 1995년 구미시장으로 출마할 때 공약 1호가 박 대통령 기념관 건립이었다.
▲구미시가 추진하고 있는 박대통령 기념사업 계획도. ⓒ 좋아하는 사람들
당시 김영삼 정부의 여권에 줄을 대지 않고 무소속으로 출마했다가 근소한 표차로 낙선했지만, 그로부터 2년 후 이른바 ‘박정희 신드롬’이 불기 시작하던 무렵인 1997년 7월 구미시는 박 대통령 기념관 건립사업을 추진하기로 결정했다.
구미시는 박 대통령 생가 일대를 관광 차원의 테마공원으로 조성한다는 계획하에 생가 옆 구릉과 야산 2만3천평을 부지로 확정하고 42억원을 들여 1만7천평을 매입했다. 그곳에 기념관을 중심으로 추모관, 생가 원형 복원, 연대별(1920∼70년) 시대촌, 육영수 여사의 공원 등을 조성한다는 계획이다.
현재까지 구미시는 생가 들머리에 정자와 화장실, 주차장(새마을광장), 보릿고개 체험장을 짓고, 홍보관 건립공사가 진행중이다. 하지만 200억원을 상회하는 총사업비를 마련하는 것이 쉽지 않아 테마공원 완성 시기를 2008년까지 잡았다가 2010년으로, 다시 2020년으로 연장하고 있는 실정이다.
언론에서는 테마공원 조성사업을 ‘성역화’라고 기술하고 있는데, 필자가 생각하기에 그건 박 대통령의 서민 이미지에 맞지 않는 상투적인 언어일 뿐이다. 구미시에서도 박 대통령 기념사업으로 추진하는 테마공원에 대해 아직 뚜렷한 명칭을 정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생가를 중심으로 한 그 일대의 테마공원은 ‘근대화기념공원’이라 함이 가장 적절하지 않을까 싶다. 이 ‘근대화기념공원’은 적어도 박 대통령 탄신 100주년이 되는 2017년에는 완성된 모습을 볼 수 있도록 추진하는 것이 또한 시의적절할 것이다.
“기념관은 서울에서도 추진해 왔지만, 구미 기념관은 대통령의 고향이라는 의미가 따로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면서 전 회장은 기념관 건립사업이 착공되면 범시민 운동을 전개하겠다며 의욕을 보였다.
생가보존회장의 또다른 지칭은 ‘근대화기념공원’ 조성사업의 일선 사령탑이다.
“나로서는 엄청난 행운이고 일생 일대의 영광이지요.”
자기가 하고 싶은 일에 전념할 수 있는 것만큼 행복한 일은 없을 것이다.
어리석은 질문인 줄 알면서도 박 대통령을 존경하는 이유를 물었다.
“우리 한민족 5천년 시련의 역사 속에 절대로 변치 않을 것처럼 굳어 있던 ‘체념의 운명관’을 씻어버리고 “하면 된다”는 정신 유전자를 남겨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면 된다!” “하면 된다!”를 힘주어 말하는 그의 눈빛이 유난히 반짝이고 있었다.
“두고 보세요. 이 일대는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박 대통령을 숭모하는 명소로 바뀔 것입니다.”
‘근대화기념공원’을 후세에 길이 남을 살아 있는 역사 현장으로 기어이 완성시키고 말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서려 있었다. ◎
[좋아하는 사람들 편집국]